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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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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6.06.1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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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21쪽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DUMMY

“파괴된 초소만 세 개에, 장교 둘과 소대급 병력이 몰살당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초소 근방에서 녹화작업을 돕고 있던 수인 드루이드 일곱 명도 살해되었죠.”


무거운 목소리로 보고서를 내려놓는 로빈. 굳이 그의 얼굴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회의실에 모여 있는 지휘관들과 의원들은 왕의 비통함이 섞인 근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2군단의 잔존 세력은 모두 정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된 겁니까?”


평소와는 달리 란다의 혀엔 공격성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궁금한 것이다. 만약 마즈다힐 지역의 정리가 마무리되지 않은 거라면, 그만큼 이스누시아 침공은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보고서의 내용은, 란다는 물론이고 그걸 읽는 로빈의 예상마저 처참하게 짓뭉개고 있었다.


“아뇨, 어젯밤 습격해온 자들은 2군단 소속이 아닙니다. 이스누시아 방위군 소속이죠.”


“.......예?”


술렁이는 회의실. 의원들은 저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곁에 앉은 지휘관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지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군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씀은, 아군보다 전력이 못하다고 판단했던 이스누시아군이 오히려 선제공격을 해왔다는 뜻입니까?”


회의실의 모든 혼란을 대신하여 입술을 연 자는 다름 아닌 시민당의 대표 아델. 가장 멀찍이 앉아있으면서도 청아하게 귀에 꽂히는 그 목소리를 향해 로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예상치 못한 습격임에는 분명하지만 선제공격을 위한 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찰과 도발을 목적으로 한 소규모 군사행동이라 판단됩니다.”


“소규모 군사행동이라기엔 아군의 피해가 크지 않나요? 특히 드루이드들이 공격받은 점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칸시온 델 보스케의 엘더 드루이드들이 철수를 지시했다는 소식도 들리던데요.”


“드루이드의 철수에 대해선 아직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듀라 경이 그쪽과 협의 중이니, 조만간 결과가 나올 거라 봅니다.”


로빈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답을 아델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하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손끝으로 탁자를 두어 번 두드리며 다시금 입을 연다.


“드루이드들과 처음 거래를 이끌어 내신 건 검성님이 아닌가요? 엘론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개 장교에 불과한 듀라 경에게 모든 수습을 떠넘기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검성 본인이 오셔서 해결을 보셔야 할 듯싶은데, 정작 검성께서는 폐하와의 의견 차이 때문에 먼저 북으로 가셨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검성과 제가 언제나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검성님은 제 부하가 아닙니다. 그도 그 나름대로 생각과 목적이 있기에 그에 따라 움직이는 거죠.”


“지금 중요한 문제는 드루이드들의 이탈이 아니다.”

슬슬 고조되어가던 언쟁을 순식간에 내리누르며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늑대’ 크라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특유의 차가운 눈빛과 존재감으로 로빈과 아델을 번갈아 바라본다.

“어째서 이스누시아가 굳이 이런 시기에 우리에게 도발해왔는지를 생각해봐야겠지. 놈들도 이쪽의 다음 목표가 자신들이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을 터, 동시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의 차이 또한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발을 감행한 그 저의를 빠르게 간파해야 한다.”


“구석에 몰린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고 하악질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란다가 팔짱을 낀 채 대답한다.

“비루한 전력을 숨기려고 허세를 부리는 겁니다. 잔뜩 웅크리고 겁을 먹어야 할 상대가 도리어 도발을 해왔으니, 그걸 통해 우리가 주저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죠. 즉, 이는 아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라는 반증입니다.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됩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란다 경과 같은 입장입니다. 도발 자체가 우리의 공격을 늦추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해요.”


역시나 의원들에겐 서로 동조하는 로빈과 란다의 모습이 영 익숙하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본래 왕을 견제해야 할 귀족당대표가 뜻을 함께하고 있으니, ‘이스누시아 침공’이라는 건은 그 어떤 사항보다 신속하게 진행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마찬가지로 그들이 아직 제3의 당이라는 존재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곧바로 움직이기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변수들이 많습니다. 마즈다성을 공격할 당시 개입했다는 블라고슬로바 군대에 대해서도 아직 명확한 해명을 받지 못했잖아요? 그들이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더군다나 선봉을 서실 예정인 왕비님께서도 아직 움직이실 수가 없고요.”


아델의 반박에 몇몇 시민당 의원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지를 표한다. 로빈 또한 아델의 말에 곧바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델은 언제나 이렇다. 일부 의원들의 이득을 위한 고집도 아니고, 반대를 위한 반대도 아니다. 때문에 로빈은 납득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 적어도 ‘내부요소’는 해결됐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익숙하지만 예상치 못한 목소리.

회의실 안쪽으로 집중되어있던 모두의 시선과 사고가 발랄한 목소리를 따라 입구로 향한다.

어느새 그곳엔,

남색제복차림의 지나가 새빨간 혀끝을 머금은 미소를 지은 채로 문제 기대어 서있었다.


“와, 왕비님!” “나이트 마제스티!”


의원들은 의원 나름대로, 군인들은 군인 나름대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왕비를 향해 예와 존경을 표한다. 아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놀란 얼굴을 거두고, 안도의 미소와 함께 왕비에게 고개를 숙인다.


“괜찮아? 움직여도 돼?”


로빈도 지나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이들 중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는 박차듯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둘뿐이라는 어투로 걱정스럽게 왕비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부상뿐이라던 왕비를 향해 어째서 그가 이토록 무겁게 반응을 하는지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뿐.


“괜찮습니다, 폐하, 그리고 여러분.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몸 상태는 아주 좋아요.”


마지막에 말을 덧붙이기에 앞서, 지나는 자신이 발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빛으로 웃어 보인다.

그로써,

그 마지막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을 모두의 머릿속에 새겨 넣기 위해.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요.”





======================





“삼촌, 손님 오셨어요.”


삭발의 여조카가 집무실로 들어서며 던컨을 찾는다. 그에 던컨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조카의 표정을 먼저 살펴보았고, 그를 통해 그녀의 뒤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할 태도를 정할 수 있었다.


“.......안으로 모셔.”


평소에 정리정돈이라곤 하지 않는 성격인 던컨이었기에 그의 집무실 상황은 심각했다. 그나마 널브러진 것들이 결재해야 할 서류나 보고서였다면 ‘바쁜 시장’이라는 뻔히 보이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집무실을 어지럽히고 있는 주범은 온갖 즉석식품과 과자봉지들. 이래놓고 남이 건드리는 건 싫다며 청소부조차 부르지 않는 삼촌을, 비서이자 조카인 그레이는 일찍부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너저분한 집무실의 상태는 ‘손님’의 미간 또한 구기는 데 성공한다. 회색 로브에서부터 이어진 후드를 조심스럽게 벗으며 집무실로 들어선 남성은 던컨이 앉아있는 사무용책상(쓰레기통에 가까웠지만)까지 걸음을 옮기는데 몇 번이나 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어서 오세요, 시장인 와르헨 던컨입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누군지, 왜 왔는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만, 던컨 시장.”


핏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새하얀 피부와 비쩍 마른 뺨. 덕분에 도드라진 광대뼈 위로 푹 파인 먹색 눈동자에선 한기마저 느껴진다. 그레이와 마찬가지로 짧게 민 머리였지만, 던컨은 조카와는 달리 이 남자에게서 그 어떤 건강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음, 잘 모르겠는데요? 저번 주에 술집에서 뵀었나?”


“농담을 하기엔 시기가 적절하지 않군.”


“아아~ ‘침묵’에서 오셨구나. 당신들은 그 이름과는 다르게 항상 말이 많아서 맨날 까먹는다니까.”


해맑게 웃는 던컨. 그러나 그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미간은 잔뜩 뒤틀린다.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그 이름’을, 던컨이 너무도 가벼이 입에 담은 탓이었다.


“혀를 조심하라. 그리고 조금 더 나를 두려워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오늘 나는 당신의 불충을 문책하러 온 것이니.”


“부울추웅?”

던컨의 입가로 비웃음이 번진다.

“아니, 무슨 불충이요? 시키는 대로 다 했구만.”


“우리가 블라고슬로바 주정부를 통해 너에게 내린 명령은 카나반이 마즈다힐을 점령하는 걸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5천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했어. 하지만 너는 ‘오직’ 그 5천의 병사만 이끌고 출격하고서 무의미하게 들이박았다.”


“아하! 5천을 합쳐서 나가라는 의미였어? 난 또 그것만으로 싸우라는 줄 알았지. 어쩐지 빡세더라. 실수했네요, 실수. 하하하. 다음부턴 안 그럴게.”


기다란 과자를 아그작 씹으며 덩치만큼이나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는 던컨. 덕분에 옥수수가루가 사방팔방으로 튀었지만, 회색 로브의 사내는 무표정으로 싸늘하게 던컨을 바라본다.


“.......실수?”


“아, 예. 실수였어요.”


“내가 그 변명에 납득하고 물러날 것 같은가?”

남자의 손끝으로 불길한 마력이 모이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전투마법사만 봐왔던 던컨에게 그 마력은 난생처음 접하는 불길함이었다.

“난 전령이 아니다. 널 심판하러 온 사자지. 당장 네 조카딸년을 포함해서 시청 안에 있는 모두를 몰살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 한마디만으로 네 하찮은 도시는 절멸할 것이다.”


살벌한 혀만큼이나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에서 느껴지는 적의는 명백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휴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두 팔을 위로 벌린 채 웃어 보이는 던컨.

“침묵의 기사단은 모두 댁들처럼 말로 떠드는 인간들만 모였나요? 애초에 기사단도 아니고, 게다가 침묵도 아니네, 뭐.”


회색 로브 안에서 인내가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에일로피아의 품에서 회개하라, 거짓된 주인의 자손이여.”





“인간은 회개하지 않는다, 미련한 침묵의 종아.”


응축되어 폭발하려던 마력이 순식간에 흩어져버린다.

갑자기 들려온 나긋한 목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도 있었지만, 마치 빨려 들어가듯 손끝에서 사라지는 마력은 남자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쓰레기에 파묻혀 그 존재조차 깨달을 수 없었던 접대용 소파에 인간의 그림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


언제부터-라고는 묻지 않는다. 회색 로브의 남자는 그 그림자가 자신이 집무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흐렸을 뿐.


작은 체구의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수염, 심지어 눈썹까지도 없었다. 그러나 깊은 주름 사이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옥색의 눈동자만큼은, 한 번 접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경고장이나 다름없었다. 남자는 숨을 삼키며 노인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블린저.......!”


블라고슬로바 도시연합 대표기사 쟝 자크 블린저.

직함만 다를 뿐, 그 무게감은 다른 국가의 검성이나 다름없는 존재.

‘침묵’의 종은 블린저의 빛바랜 도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본다.


“아, 소개가 늦었네. 우리 스승님이십니다. 구면이신가?”


“.......스승?”


히죽 웃으며 내뱉은 던컨의 말에, 남자는 곧바로 몸의 방향을 던컨에서 블린저가 앉아있는 소파를 향해 돌려놓는다.


“누구 맘대로 스승이라 칭하느냐, 아둔한 놈.”


“에이, 파문당했어도 제자는 제자지요. 섭섭하게.”


던컨의 가벼운 입을 질책하듯 눈을 흘기는 블린저. 그에 ‘제자’는 입을 잠그는 시늉을 하며 돌아앉는다. 마치 스승에게 나머지를 맡기겠다는 건방진 태도였으나 블린저는 그 이상 던컨을 나무라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회색 로브의 남자는 경계심을 되살려 다시 마력을 모으려 했지만, 결집 되어야 할 마력은 다시금 그대로 손가락을 통해 허공으로 빠져나간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남자가 식은땀을 훔칠 무렵, 이미 블린저의 옥색 눈동자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너희가 중앙정부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를 것 같았는가? 돈과 협박으로 모든 지방도시를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단순히 너희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기 위한 침묵이었을 뿐. 넌 내 질문에 대해 많은 걸 대답해줘야 할 것이다.”


“.......”


“자폭이라. 그 결단과 용기는 칭찬해주겠다만 소용없다.”


어째서 ‘기사’일터인 그가 자신의 모든 의도를 읽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그 의도가 모두 통하지 않는 것인지.

‘침묵’의 남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블린저의 마른 손가락이 그의 미간을 살짝 튕겼고, 회색 로브의 남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뒤돌아있던 던컨이 다시 스승을 향해 미소를 지은 건 그 직후였다.


“일단 놈들이 쓰는 것도 마법이긴 하네요. 스승님한테 봉쇄되는 걸 보니. 근데 처음 보는 마력이던데? 혈마법인가?”


“이제부터 알아내면 된다.”

짧은 대답과 함께, 블린저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그레이를 향해 남자를 처리하라는 손짓을 한다.

“너는 마즈다힐의 카나반왕에게 전문을 보내라.”


“카나반? 뭐라고요?”


이건 예상하지 못한 듯, 되묻는 던컨의 얼굴엔 흥분과 의문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러나 역시,

옛 제자를 향한 옛 스승의 시선은 아무런 온기가 없었다.


“상의할 게 있으니, 조만간 찾아간다고.”





===============





대화라는 것은 일방적인 목소리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렌은 경이로운 정도의 혼잣말을 지껄이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쳐발린 거지. 난 그 전엔 창이라는 무기가 있는 줄도 몰랐어. 그냥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수는 게 싸움의 전부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 의미에서 노인네는 나한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거나 다름없지. 눈앞의 상대를 죽이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세상을 말이야. 난 그게 ‘양자’를 뜻하는 것인지는 나중에 가서야 알았지만.”


“.......”


“처음 여자를 맛본 것도 그 양반 저택에 들어간 뒤였지. 내 담당 하녀라고 하더라고. 열네 살? 아니면 다섯쯤? 아무튼 나랑 비슷한 나이였어.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 아, 이름을 듣기 전에 죽여 버렸던가? 크히히히.”


“.......”


결국 고도의 걸음이 멈춘다. 동시에, 그녀와 렌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이리스의 걸음 또한 멈춘다. 사방이 나무와 나뭇잎의 그림자로 틀어 막힌 숲의 한복판. 서늘한 숲바람이 땀을 식혀주지만, 구겨진 고도의 미간은 더위나 땀,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오, 이제 흥미가 생겨? 그럼 끝까지 들려줄게. 트리스탄테 저택에 들어간 첫날밤이었는데, 그 하녀가 자는 곳에 몰래 들어가서-”


“다시 말할게. 한 일곱 번쯤 말한 거 같지만 다시 말해줄게. 관 심 없 어. 관심 없다고. 알았지?”


“왜?”


여태까지는 렌의 이 반문에 무시하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었다. 하지만 결국, 고도는 이 무의미한 순환을 끝내기 위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왜 너한테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야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히죽 웃으며 다가서는 렌. 그러나 이리스가 굳은 얼굴로 그의 앞을 막아선다. 영력도,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존재였지만, 렌은 한걸음이라도 더 고도에게 다가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너 같은 개변태또라이새끼한테 관심을 받다니 과분한 영광이지만, 안타깝게도 난 네가 나한테 관심이 있든 말든 너한텐 좆도 관심 없으니 걍 닥치고 좀 가면 안 될까.”


“왜 나한테 관심이 없지? 나는 그와 똑같은 존재인데?”


“전혀 똑같지 않거든.”


렌이 말하는 ‘그’ 누구인지는 뻔하다. 뻔하기에 고도는 단언할 수 있었다.


“뭐가 똑같지 않다는 거야?”


“음, 어디보자.”

다정하게 웃으며 렌을 스윽 훑어보는 고도.

“아, 그래. 알겠어. ‘생긴 거 빼고 다.’ 병신아.”


미련 없이 뒤돌아 걸음을 이어나가려는 고도였지만, 렌의 비웃음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그 녀석을 잘못 알고 있는 건데.”


“.......개소리하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혈마법이라는 거, 영혼의 의식을 조종할 수 있는 거잖아.”


뜻밖의 인물에게서 뜻밖의 주제가 나오자, 고도는 결국 다시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


“너, 그 녀석이 주기적으로 악몽을 꾼다는 거 알고 있어?”


“.......악몽?”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 악몽. 그리고 그 악몽은 나도 공유하고 있지. 어릴 적부터 말이야. 덕분에 실제로 만나기 전부터 우린 서로의 존재를 알고, 느낄 수 있었어. 비록 그 감정이 좋진 못했지만. 기회가 있다면 녀석의 의식에 들어가서 훔쳐봐봐.”


“좆까. 너같이 불쾌한 놈이 꿈에 나온다니, 기분 좋을 리가 없지.”


잔뜩 가시가 돋친 고도의 혀에도 렌은 만족스럽게 웃는다.


“맞는 말이야. 근데, 그건 나도, 그년도 마찬가지일걸.”


최대한 무시하려고 했지만, 고도의 호기심은 그의 목소리 앞에 굴복하고 만다.


“그년?”


“아하, 모르는구나. 나하고 그 녀석 말고도 하나 더 있어.”


“하나 더 있다니......., 얼굴이 똑같은.......?”


“그래. ‘년’이지만.”


지금 렌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건지 고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악몽이니, 제3의 인물이니, 모두가 처음 들으면서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그러나 고도는 이 모든 렌의 말을 단순히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다시 말하지만, 네가 그 녀석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야.”


“관심이라니, 나는 별로-”


“그건 ‘우리’에게 있어선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뭐?

라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질 않는다.

렌은 웃고 있다. 평소의 그처럼, 모두가 그에게 갖고 있는 관념처럼,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벼우면서도 불쾌한 웃음이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무겁게 내리깔리는 웃음소리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롭게 고도의 가슴에 박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고도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가슴의 아찔함이 어색하지 않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녀석은 그래서는 안 돼. 아니, 그럴 수 없어.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너한테 관심을 주고, 관심을 받고 있어. 그래서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너에게 관심을 주려 해봤지. 그게 너한테 있어서 과격하게 느껴졌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그래야 하거든.”


사과라니,

그 렌이,

그 렌이?

사과라니?


고도가 느끼는 충격은 자신이 연구직 심사에서 떨어졌을 때보다도 거대한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 너무 많아요, 형제님.”


고도의 목 뒤와 등이 싸늘하게 굳는다.

이리스조차도 곧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돌린다.



그것은

생물체라고 하기엔

너무도 거대했다.


수정보다도 새파랗게 번뜩이는 눈동자.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솟아오른 아랫송곳니. 완벽하게 주변 환경과 동화된 털과 가죽으로도 숨길 수 없는 단단한 근육이 걸음마다 흉폭하게 꿈틀거린다. 그럼에도 발소리하나 들리지 않는, 실로 믿을 수 없는 민첩함.

고도는 언제부터인가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있음을 깨닫는다. 목소리가 있든 없든, 이 ‘제왕’의 존재감을 버틸 수 있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새들은 절명하여 바닥을 나뒹굴었고, 땅의 짐승들은 오줌을 지리며 사방으로 간신히 도망친 뒤였다.


“.......뭐야, 이건....... 사전에서도 본적 없는-”


고도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배려 덕분이었다. ‘제왕’이 평소 버릇대로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이 소녀는 곧바로 정신을 잃어버렸을 테니까.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았는데,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특색이 없는 소녀의 목소리. 그제야 고도는 거대한 짐승의 목 위에 올라타고 있던 그림자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확인하고, 고도는 숨을 삼켜야 했다.

“안녕, 형제님. 초면이면서도 구면이네. 내 이름은 진. 형제님은?”


소녀의 시선은 고도도, 이리스도 아닌, 렌의 미소를 향해 있었다.


“.......렌.”


“렌. 알겠어.”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진. 그녀는 크게 주변을 둘러보고 말을 잇는다.

“.......나머지 한 명은?”


“남쪽에 있어. 나중에 올 거야.”


“아아, 그래에? 아쉽네.”


소녀의 무표정에선 그 어떤 아쉬움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탄식에서,

고도는 그녀의 ‘아쉬움’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꺼번에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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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80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6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5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1 16 16쪽
»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30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1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6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8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3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50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1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8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5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2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10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6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1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3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7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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