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33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05.30 18:41
조회
698
추천
15
글자
19쪽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DUMMY

전투에서의 부상.

벤은 이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 비록 마법사에 지휘관이라는, 줄곧 최전선과는 거리가 동떨어진 그였긴 하지만, 그 또한 크고 작은 부상들을 겪어본 적이 있으며 언제나 죽음에 가까운 상처로 신음하는 병사들을 보는 일엔 익숙했으니까.


“.......”


그러나 벤은, 이번만큼은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본 순간 등골이 싸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명조차 목에 걸릴 정도의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잘려나간 살점과 근육, 그리고 뭉개진 뼈와 너덜거리는 피부조각들. 그 짧은 순간, 벤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든 시간이 이 화살 한 대로 뒤바뀌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허어, 젠장.”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같은 목소리는 렌의 것이다. 자신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화살이 정수리에 박히는 것을 피하게 해준 이도 분명 그일 것이다. 그러나 최고지휘관이자 ‘형제’의 목숨을 구했음에도 그의 입술이 욕을 품은 이유는 분명했다. 렌 또한 벤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발로 비틀비틀 벤을 향해 다가서는 고도. 그녀는 오직 얇은 피부조각만이 완벽히 분리되는 것을 막아주고 있는 벤의 무릎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린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꿀렁꿀렁 피가 새어 나오는 벤의 무릎 옆에 앉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고도, 됐어. 너 마력도 별로 안 남았으면서.”


“개소리하지 마, 지금이라면-”


“출혈 정도는 내가 멈출 수 있어. 넌 빨리 후방으로 가.”


‘출혈 정도는.’

그 말 속에서 숨겨진 체념을 읽어낼 수 있는 건 고도뿐만이 아니리라.

벤은 떨리는 고도의 바닷빛 눈망울을 애써 외면하며 얼굴을 등 뒤로 돌린다.


“렌, 괴물들이 원거리 무기를 쓰고 있다는 건 지휘계통에 뭔가 개량이 되었다는 뜻이야. 혈마력에 도발당한 것까지 눈속임인 거 같지는 않지만, 만약 대대적인 개량이 이루어졌다면 화염에 대한 내성도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지휘관들에게 전달해서 마법사들에게 보호막 전개하라고 하고, 공격하기 전에 화염내성의 유무부터 확인하라고 해줘.”


“부탁 들어주면 뭐해줄 건데~?”


“.......”


“알았어, 알았어. 거 좀 다쳤다고 인상 쓰기는. 어이, 의무병! 의무병!”


분지 전체를 뒤흔들 기세의 목소리로 마법사를 부르고 난 뒤에야 렌은 벤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난다. 그 사이, 이미 벤은 자신의 부상 부위에 최대한 마력을 집중시켜 출혈을 멈추고 고통을 희석시키려 하고 있었다.

의무병 서너 명이 붙는다면 이 처참하게 뭉개진 다리를 수습하고 원래 상태에 가깝게 복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잘려나간 신경과 박살 난 관절이 의미하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벤은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고 있는 고도의 손을 잡아 그녀의 이성과 시선을 되돌린다.


“고도, 쉬고 싶은 건 알겠는데 하나만 해줘. 본대의 토우칸에게 내 이탈 사실과 총지휘 좀 맡아 달라 전해주고, 그다음 오캄푸스와 카니아의 현장보고를 토대로 이대로 오스타이나를 점령할지 판단해달라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그만하라니? 뭘-”

고도의 외침을 이해하지 못한 벤이 그제야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한 손으로는 상처에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다른 한 손으로는 전방에서 솟구치는 불의 벽을 제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미안.”


어째서 사과하는 것일까.

다급하게 다가선 의무병이 벤의 시야를 가리자,

그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밀려오는 통증에 정신을 놓는다.


“.......”


고도는 들것에 실려 후방으로 사라지는 벤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본다. 아직 그녀의 손엔 식지 않은 벤의 피가 축축하게 손톱 아래를 적시고 있었다. 너무도 거대하고 깊게 박혀있는 탓에 의무병들이 뽑을 엄두도 못한 거대한 화살만이 덩그러니 붉은 흔적을 주변에 머금고 있었다. 그녀 또한 벤과 마찬가지로 전장을 오가며 수많은 죽음과 부상을 보고 느껴왔다. 하지만 고도는 그들의 신음과 비명을 동정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물이며, 또는 그 선택에 항거하지 못한 대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도에게 있어서 병사와 기사들은 국가라는 체제의 유지를 위해 소모되는 멍청한 영혼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겠나?]

어느새 다가온 악마의 목소리는, 역시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파고들어 온다.

[니 새끼가 우둔하고 줏대 없는 새끼들이라 욕했던 모든 새끼들이 모두 저런 모습이었다. 아니, 더 심했으면 심했지. 그 새끼들은 지금처럼 이름도 없는 전투이거나 잊혀지는 역사임을 알면서도 ‘소모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

비록 역사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누군가는 바로 그 새끼들의 죽음으로부터 눈물을 흘리고 기억해주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어때, 아직도 이게 구역질 나는 망상이라고 느껴지나? 이 땅에 만연한 죽음과 절망이, 정말로 니 새끼들, 인간들의 타의적 의지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생각되나?]


“.......”


마력의 고갈로 인했던 떨림이 서서히 멈추고, 동요로 흐려지던 시선이 검게 굳기 시작한다.


[니 새끼들은 절망과 분노, 눈물의 방향을 잘못 잡고 있다. 한 영혼의 소멸이, 정말로 그 새끼의 심장을 관통한 화살에 책임이 있는 걸까? 그 새끼를 전장으로 내몬 다른 새끼나 국가에게 책임이 있는 걸까? 아이의 잘못은 아이에게 있는 걸까?]


“닥쳐, 닥치고.......”

이 검은 형체가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고도는 같은 행동을 취했을 테니까.

“마력이나 내놔.”


형체조차 확실하지 않은 검은 그림자의 멱살을 잡아당겨 입을 포개는 고도.

악마는 갑작스러운 계약자의 행동에 다소 놀란 듯했지만,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품은 채, 고도의 허리를 끌어당긴다.








“검성이?”

렌이라는 존재에 한 번 당황한 오캄푸스의 공허한 빛이 그가 가져온 소식에 다시 한 번 더 당황한다. 그러나 그는 잠시 푸른빛을 숨기고 골똘히 고민하더니, 곧바로 렌을 향해 턱뼈를 움직인다.

“아직 화염은 효과가 있습니다. 검성님과 제가 만든 불의 벽을 피해 벌레들이 중앙으로 운집하고 있으니까요. 기존 대형과 전술을 유지하되, 보호막만 분담하여 전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다가오는 괴물의 무리를 보며 몸이 근질근질한지, 렌이 단창을 한 바퀴 크게 돌리며 망자를 향해 되물었다.


“제 반대편에서 대규모 마력을 전개하여 불의 벽을 유지 시켜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검성께서는 마력은 크지 않으셨어도 놈들의 움직임을 읽을 줄 아셨기에 가능했지만, 지금 남아있는 마법사 중에 이런 호흡이 가능한 자가 있을지....... 여기서 놈들을 한곳에 모으지 못하면 본대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겁니다.”


“불의 벽? 저거 말하는 거야?”


퉁명스러운 렌의 목소리에 오캄푸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든다. 그리고 눈동자를 대신하고 있는 그의 공허한 빛 속에 놀라움이 번지기 시작한다. 벌레들을 끼고 있는 분지의 반대편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검붉은 불꽃이 솟아오른 것이다.


“.......저건.......”

처음엔 의문이, 그 다음엔 의심이, 마지막으론 납득이 오캄푸스의 턱뼈를 스친다. 저것은 단순히 화염내성에 특화된 마법사가 만들어낸 마력이 아니다. 검붉은 불길과 유난히 시커먼 연기. 그리고 그 연기와 열기 속에서 느껴지는 고약함과 불길함.

“.......좋지 않군요.”


물론 나지막한 그의 판단을, 도약할 준비를 마친 렌이 이해할 리 없었다.





================




“알았어, 알았다고. 니들이 맞았고, 내가 틀렸어. 됐지?”

존재라곤 느껴지지 않는 무의 공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을 깨닫고 벤이 선수를 친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만용을 부렸고 방심했어. 그리고 요 꼴이지. 만족해? 비웃으려면 마음껏 비웃으라고.”


[너는 만용을 부릴 것이다.]


“.......하아.”

기계처럼 전신을 때리는 육중한 목소리에 벤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뒤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 불쾌한 목소리를 향해 따지려고 들었지만,

“.......”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한쪽 다리 때문에 그는 순간 멈칫하고 아래를 내려다봐야 했다.

그리고 그는 숨을 삼킨다.

보이지 않는 공간을 지탱하고 서있어야 할 그의 왼쪽 다리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정확히는, 그의 왼쪽 무릎 아래로 마치 이 공간에 잠식당한 듯한 어둠만이 존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네가 씹어 삼킬 만용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경종이 되어줄 것이다. 네 걸음이 비틀거릴 때마다, 고통이 신경을 타고 올라올 때마다 너는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네 절망을, 그리고 그 원인을.]


“아아, 그러니까, 결국 너는 날 놀리려고 온 거네? 어휴 고맙기도 해라. 근데 문병 올 사람이 많으니까 저 뒤에 가서 줄 서주지 않을래?”


마치 일어설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벤은 실실 웃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높낮이의 차이는커녕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의 공간이었지만, 어째선지 벤은 그것만으로도 들려오는 목소리의 위압감이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를 위한 고통이 아니다. 너 혼자만의 운명이 아니다. 너의 만용은, 네 모든 조각들의 악몽이 되어 뒤틀린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때엔 어떠한 미소도 네 악몽 속에서 안식을 주지 못할 것이다. 조금밖에 남지 않은 너의 비루한 시간들이 고통과 후회로 얼룩질 것이다.]


“것이다, 것이다, 것이다. 그놈의 것이다. 확실시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너는 겁만 주고 있을 뿐이지. 내가 받은 이름이 뭔 줄 알아? ‘변수’야. 그리고 나는 그 이름대로 너의 그런 예상들을 깨부수는데 흥미가 있거든.”


[너의 이름은 변수다. 하지만 너는 변수가 아니다.]


“.......”


입을 벌렸지만

반박의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네가 품고 있는 건 하찮은 하나의 조각. 그 조각 하나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너는 만용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네 이름에 피를 담고 싶다면, 만용을 거두고 받아들여라.]


“받아들이라니, 뭘 말인데?”


어느새 여유가 사라지고 공격적인 날카로움이 서있는 벤의 목소리.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공허 속으로 흩뿌려지더니 너무도 하찮게 흐려지고 만다.


[받아들여라, 너의-]








“아, 일어났네. 꼬라지하고는.”


눈을 뜨자마자 맞이하는 것이 칙칙한 천장이 아닌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라니. 벤은 마른 입술로 욕을 씹으며 렌의 얼굴을 시야 밖으로 치워낸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얼굴을 치우고 보니, 너무도 환한 조명이 악몽에서 기어 나온 눈동자를 너무 자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천막의 천장이 아닌, 아주 깨끗한 하얀 천장.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벤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 오스타이나 성인가?”


“그래, 깔끔하게 점령했지.”


뒤이어 렌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불의 벽을 통해 벌레들을 몰아넣고 요리한 것과,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토우칸의 본대가 성과 벌레들의 후방을 동시에 공략했다는 점. 본래 성주인 할라시드 로쿠베의 지휘에 따라 분지를 포함한 주변 산맥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등이었지만,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몸을 일으킨 벤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


하체를 완벽하게 뒤덮고 있는 하얀 천. 이불이라기엔 너무 얇고 깨끗한 그것을, 벤은 조용히 옆으로 치워낸다.


“아, 그거? 역시 카나반 마법사들이 솜씨가 좋은 거 같아. 슬쩍 봤는데 감쪽같더라고. 흉터는 좀 남겠지만 겉보기엔 멀쩡하던데.”


“겉보기엔 말이지.”


두꺼운 붕대와 의료용 석고로 둘둘 감싸져 있는 왼쪽 다리. 문제는 모든 감각, 고통을 포함하여 살짝 조여 오는 붕대의 압박감까지,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랬는데 창문으로 몰래 들어온 거거든. 의사 선생 불러줄까?”


“뭐라디?”


“응?”


마주치는 두 시선. 똑같은 두 눈동자.


“군의관이 뭐라고 했는지 들었을 거 아냐?”


“잘해야 절름발이라던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하며 크핫- 웃어 보이는 렌. 그러나 어째선지 벤은 그 얼굴에 화가 나기보다는 시원하다 느끼고 있었다.


“잘해야-라는 건 재활치료를 해야 한다는 소리겠지?”


“글쎄에, 내가 볼 땐 소용없어. 원래 의사들이란 게 환자더러 자살하지 말라고 헛소리나 주입시키는 놈들이잖아. 나 같으면 걍 다리 자르고 의족이라도 붙이겠다.”


“미안하지만 난 무식한 기사가 아니라서.”


조심스럽게 렌이 앉아있는 방향으로 다리를 돌려 침대 아래 두 발을 내딛어보는 벤. 하지만 그는 곧 주춤하고 만다. 마치 왼쪽 무릎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중심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낀 것이다.


“헛지랄하지 말고 자르라니깐. 어차피 나처럼 방방 뛰어다닐 것도 아니면서, 별로 쓸 데도 없잖아. 아, 좆방망이 박아댈 땐 좀 필요하려나. 아니다, 어차피 여자보고 위로 올라가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뭐.”


벤의 인상이 구겨지는 것은 렌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더러운 말이나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이 ‘상처’를 곧이곧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벤에게 있어선 또 다른 패배나 다름없는 일. 그리고 그 생각의 기저는, 바로 끝이 불명확했던 악몽의 목소리였다.


“아아, 원래 지금쯤 반반한 여자 하나 데려다가 목이나 조르면서 귀여워 해주고 있어야 하는데, 이런 병아리 형제의 간병이나 하고 있다니. 나도 많이 죽었다 죽었어.”


“.......네 간병 따윈 필요 없지만 우리 군에서 그런 짓하고 돌아다니는 건 더더욱 용납 못 해. 시도라도 하기만 해봐. 군법으로 목을 쳐버릴 거니까.”


“어휴, 무셔라. 알았으니까 인상 쓰지 마, 형제. 귀여운 얼굴에 주름 생길라.”


의도적으로 렌의 목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벤은 다시 두 다리를 침대 위로 힘들게 올려놓는다. 차라리 고통이라도 느껴졌으면 좋으련만, 무릎의 침묵은 그에게 너무 어색한 경험이었기에 벤은 줄곧 인상을 구기고 있어야 했다.

같은 얼굴.

다른 표정.

그리고 다른 결과.

벤은 문득 렌의 먹색 눈동자를 바라본다.


“.......렌.”


“응?”


“너도 악몽을 꿨다고 했지.”


“응.”


“.......그, 악몽 속에서,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최근엔 제발 날 죽이지 말라고, 죽게 냅두지 말라고 간청하던데.”


렌의 가벼운 대답에, 한숨을 내뱉으며 한층 더 구겨지는 벤의 미간. 그는 피곤한 듯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쓰다듬는다.


“.......농담하지 말고. 진짜 뭐라고 했는데?”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냐?”


벤이 다시 고개를 들어 렌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순간, 벤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 남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날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어. 내가 좆까라는데도 계속 매달려서 그러던데. 어찌나 씨발 잘 때마다 쳐 기어 나와서 지랄을 해대는지. 결국 내가 욕먹을 거 알면서도 온 거 보면 모르겠냐?”


“.......”


만용을 부릴 것이다.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기 전에,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을?’



안개처럼 희미한 기억을 되짚어봐도 그 마지막 대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답은, 그리고 그 현실은,

너무도 빠르고 확실하게 벤의 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





“오스타이나 성을?”


“그래, 수복했다고 한다. 그 녀석 성격상, 거길 거점으로 삼아 곧바로 북을 향해 진출하겠지.”


모두가 잠든 시각. 시커먼 창밖의 풍경을 안주 삼아 맥주잔을 나누던 드렌턴이 내놓은 소식에 로빈의 표정이 복잡미묘하게 굳어진다.


“.......으음.......”


“왜 그래? 너랑 한바탕 싸우고 나간 놈이 잘되니까 배알 꼴리냐?”


가시처럼 돋아난 수염 위쪽으로 맥주 거품을 쓸어내며 껄껄 웃는 드렌턴. 그러나 그의 짓궂은 농담에도 로빈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는다.


“아니, 그거 때문이 아니라, 벤 새끼 이번엔 뭔가 좀 이상했거든.”


“이상해?”


“응, 좀 서두른다는 느낌? 단순히 나랑 의견이 갈려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좀....... 아무튼, 그거 외에 소식은 없었어?”


“없다. 녀석이 원래 좀 단순하게 전문을 보내잖냐. 아직 너한테 삐진 걸 수도 있고. 크핫.”


“.......차라리 그런 거면 다행인데.”


맥주로 입술만 적신 채 고민에 빠지는 왕을 보며 드렌턴은 술맛이 떨어진다며 억지로 술잔을 부딪쳐온다.


“뭐, 어쨌든 동맹국으로서의 지위도 세울 수 있으니, 우린 우리 대로 빠르게 움직여줘야지.”


“아, 응. 아마 다음 회의에서 이스누시아 침공이 승인될 거야. 점령 이후에 대해 논의할 문제가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뭐어, 그거야 의회에서 잘 조율하겠지. 오로메 경한테 이번 건에서는 아델의 시민당을 지지하라고 했으니까.”


“그럼 다 잘 풀리는 거 아니냐? 왜 죽을상이야?”


“으음......., 개인적으론 좀 미루고 싶었는데.”


“지나 때문에?”


역시나 이 아저씨는 술만 들어가면 날카로워진다. 로빈은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크게 들이켰다.


“어.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혹시 모르잖아. 그렇게 작은 수술도 아니었고.”


“엘라론은 벌써 술 마시면서 뛰댕기던데?”


“그건 그 인간이 비정상인 거고.......”


엘라와 크라트의 희생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도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로빈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큰 희생으로 얻은 어려운 기회다. 혹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네 걱정이 지나친 거야. 그 녀석은 더 이상 제 몸 가눌 줄 모르는 햇병아리가 아니야. 그리고 누구보다도 네 걱정을 이해하고 있겠지. 그런 녀석이 괜찮다고 하면, 너는 그런 줄 알고 그냥 믿기만 하면 돼. 알았냐?”


“.......누가 들으면 부부생활 전문가인 줄 알겠네.”


“당연하지, 임마! 내가 연애분야에 있어서는 공화국 기사 중에 최강의-”


“그래서, 리반나랑은 어떻게 할 건데?”


“술! 술이 모자르네!”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킥킥 웃어 보이는 로빈. 그러나 맥주향으로 이어질 안식은 너무나 빠르게 그의 입술에서 미소를 거두고 현실로 되돌려놓는다.

드렌턴의 말대로, 상황은 이 이상 좋기 힘들 정도로 흘러가고 있다. 오스타이나의 수복을 통해 브린타이나와 3군단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을 만들어 놓았고, 북쪽을 믿고 남겨둘 수 있다면 이쪽은 이스누시아에 모든 것을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쥬넨의 등장. 2군단의 예정된 소멸. 지나의 수술과,

짤막한 벤의 전문까지.


“.......”


밤하늘만을 안주로 삼기엔, 맥주의 뒷맛은 너무도 씁쓸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8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7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80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6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5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1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31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1 12 16쪽
»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9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6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9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3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51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1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8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6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2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10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6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1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4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7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