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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337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12.2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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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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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글자
18쪽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DUMMY

“-!”


영력을 담아낸 의수로 마력을 상쇄시키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 파편까지는 완벽하게 찍어 누르지 못한다. 신경이 곤두서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늑대의 딸’ 올리는 급하게 머리를 돌렸고, 눈을 대신하여 귓불과 머리카락이 그슬리는 것으로 피해낼 수 있었다.

제국의 전투마법사는 혼신의 마력을 다한 자신의 마력이 허무하게 바스러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녀는 올리라는 기사에게 그 잠깐의 틈을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다음 눈을 깜빡이는 순간 곡도가 자신의 어깻죽지로 파고드는 참상을 허용하고 만다. 비명의 틈조차 없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토막 난 그녀는 숲의 양분으로서 생을 마칠 준비를 끝내고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저항이 거센데.”


혼잣말에 가까운 올리의 투정이었지만, 놀랍게도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답하는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놈들 입장에서도 숲의 경계는 놓칠 수 없는 거점이다. 단순히 전초기지를 제압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전력으로 밀어내.”


곡도의 묻은 피를 털어내고, 이미 전열이 무너졌음에도 퇴각하지 않는 적의 군세를 바라보며 올리는 늑대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버지. 왕비님의 생각에 진짜로 동의하고 있는 거야?”


“물론이다. 로즈는 납치한 것에 대해 아무런 요구사항도 없는 지금이야말로 강경하게 나가서 협상에 우위를 점해야 한다.”


“.......지금 더 나아갔다간 정말로 ‘침공’이 된다는 거, 알고 있어?”


“그래. 베르달의 기사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 되겠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늑대의 딸.


“아버지. 나는 지금 당신이 로즈라는 나무 때문에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 거야.”


크라트는 걸음을 멈추고 그런 딸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그의 얼굴엔, 큰딸의 앞에선 좀처럼 내보이지 않았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네가 내 결정에 의심을 품다니, 별일이군.”


“나도 물론 로즈가 걱정돼. 화도 나고, 당장이라도 군단장인지 뭔지 그 돼지새끼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야. 하지만 상대는 제국2군단이라고? 수십, 수백 년 동안 베르달의 병사와 기사, 시민들을 죽이고 겁탈하고 약탈했던 그놈들이야. 그런 놈들과의 결전이라고 하기엔,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냐?”


“너는 네 아비는 믿고 있으면서, 그 아비가 신뢰하고 따르는 자들은 믿지 못하는구나.”


“엉? 그게 뭔 소-”


“왕비와 왕실참모진의 베르달 파견. 그리고 왕의 시찰. 너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나?”


“.......?”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올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벙찐 표정으로 자신의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는 딸을 향해, 크라트는 낮은 목소리로 푸른 숲의 하늘을 향해 입술을 움직인다.


“나도 엘라도, 로즈에 대해선 분을 참을 수가 없다. 왕은 그런 우리의 분노를 순수한 계기로 삼아 역전의 나팔을 울리겠다는 거다. 그리고 그 중심엔 왕의 대리기사로서 새롭게 각성한 왕비가 기다리고 있지. 올리, 너는 그녀가 아직도 ‘흐름의 잔재’로서 남아있다고 생각하나?”


“........”


“전장을 보고 읽는 눈. 눈앞의 상대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먼 곳의 적까지 압도할 수 있는 힘. 그녀가 물려받은 흑도 ‘오미누스움브라’의 무게를 견뎌낼 그릇....... 왕은 이번 전쟁을 사상 초유의 ‘마즈다힐 침공’이라는 객관적인 업적 말고도 왕비에 대한 시험대로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녀가 가고자 했지만 가지 못했던 길. 자신을 위해 포기했던 그 결정을 향한 보상이자 기대. 우리는 우리의 분노로서 그에 어울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이빨을 숨기고 움직이는 늑대.

억눌린 분노 사이로 흘러넘치는 살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리고 날카롭게 숲의 흙 위로 발자국을 새긴다.


전초기지를 방어하던 제국군의 목책이 마침내 굉음과 함께 박살 나버린다. 침략의 상징이었던 저곳은 머지않아 숲의 땅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행진은 불타버린 숲을 넘어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올리는 환희에 젖지 않는다.

어느새 목소리가 닿지 않을 거리까지 앞서간 아버지의 등 뒤를 향해,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당신은....... 로즈가 아닌 내가 납치되었더라도 이렇게까지 움직여줬을까.......?”








“마제스티-!”


최전방에서 검을 휘두르는 지휘관. 그런 지휘관을 모시는 부관의 입장은 언제나 초조할 수밖에 없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커다란 고함을 내지르며 군을 통솔하는 기사가 눈앞에 있으면 최우선적인 표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카논은, 처음으로 그런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경고를 위한 그녀의 목소리가 닿기도 전에, 지나는 자신의 오른쪽 측면에서 기습을 시도한 제국기사의 도끼를 손등으로 쳐낸다. 영력이 실린 묵직한 쇠붙이를 손등만으로 쳐냈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스러운데,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중심까지 흔들렸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듯, 제국기사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숲속에 떠오른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린다. 물론, 그 무표정한 태양의 얼굴이야말로 흑도가 그의 목을 베어내기 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카논!”


“예, 옛!”


에페의 형상으로 얇아진 흑도. 그 본질 자체가 악의와 피로 얼룩져있었기 때문에 지나는 피를 털어낼 필요도 없었다. 그 일렁이는 검은 불꽃과 잔뜩 위엄이 깃든 그녀의 목소리에, 카논은 ‘편하게 말을 놓아도 된다’라는 지나의 요구조차 잊고 어느새 ‘부관’으로서의 태도가 되어있었다.


“적의 우측면이 헐거워지기 시작할 거야. 레이쇼에게 예비기병대를 주고 크게 돌아서 틈을 찌르라고 해.”


“예? 하지만 레이쇼는 현재 베르달군 야간타격대에 지원을 나가있는-”


“보병으로는 안 돼. 아군도 예상하기 힘든 무법성으로 그 ‘틈’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레이쇼가 제격이야. 삼백이면 충분할 거야.”


“아, 알겠습니다!”


제대로 훈련받은 통신장교가 숨을 헐떡일 정도의 진격속도다. 카논이 간신히 자신의 뒤를 쫓아온 그에게 전달사항을 전해주는 것 자체가 미안해할 정도였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3교대로 운용되는 참모단직할통신마법사들이었지만, 이들이 전사나 부상도 아닌 탈진으로 전선을 이탈할 만큼 지나의 지휘량은 어마어마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장이 잘 보이는 곳에서 느긋하게 내려다보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그녀의 흑도가 품은 피의 주인만 해도 수십 명이다. 게다가 그중 3할이 넘는 숫자가 기사. 그럼에도 지나에게선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카논은 정말로 그녀가 지난 오랜 기간 동안 근위대로서 묶여있었던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우측 3중대 상황은?”


마침내 지나의 진격이 멈춘다. 그녀가 직접 활로를 뚫어준 덕분에, 베르달의 중앙은 손쉽게 적의 저항을 짓누르며 전장을 장악해갈 수 있었다.


“전투력이 8할까지 떨어졌습니다. 중대장본인은 더 버틸 수 있다고 보고해왔습니다만.”


미리 준비해둔 보고서를 꺼내드는 카논. 지나의 고민은 짧았다.


“아냐, 1중대랑 교대시켜. 그 이상 손실을 입었다가는 이후 전투까지 회복할 수 없을 거야. 오늘은 추격섬멸전이 될 거 같으니, 기동전에 능숙한 데지나 대위가 더 적합해. 나무 위 상황은 어때?”


“왕녀, 아니, 엘리자베스 중위가 이끄는 특무저격대로부터는 별다른 피해 보고가 없습니다. 베르달의 기사들보다도 더욱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거 잘됐네.”


한숨에 가까운 심호흡을 내뱉으며 크게 주변을 둘러보는 왕비. 다행을 읊는 분홍빛 입술과는 달리 그녀의 태양처럼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는 끊임없이 상황을 파악하고, 비명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모든 전선에 걸쳐 베르달군이 몰아붙이고 있다. 그녀가 서있는 중앙에서 시작된 전열의 붕괴는 역병처럼 제국군의 우측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는 나무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과 탄환은 그런 분열을 재촉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레이쇼가 이끄는 기병대가 무너지는 틈을 찌르며 제국군의 의지에 마지막 일격을 가할 것이다.



베르달 숲에서의 마지막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카논.”


“옛.”


끊이지 않은 도약과 전투의 흔적인지, 아니면 아직도 식지 않은 전장의 열기 때문인지, 돌아보는 지나의 이마와 목은 기분 좋게 젖어있다. 그리고 그 위로 떠오른 새빨간 혀끝과 미소는, 카논이 지나의 열세 살 생일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서 보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저 앞이, 베르달 숲의 경계지?”


“네, 붉은 장미의 검성이 불태운 탓에 좁아지긴 했지만, 분명한 숲의 경계입니다.”


“.......흐응, 그래........”


일렁이던 검은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지나 싶더니, 곧바로 적의 목을 베어낼 때보다도 맹렬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나무 사이로 시선을 돌린 지나의 눈동자는 더욱 멀리, 카논의 사고보다도 더욱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논, 로빈에게......., 폐하에게 전문.”


“옛.”


카논과 함께 덩달아 긴장하는 통신장교.

그런 그들을 향해,


지나는 가장 시원한 미소로 자신의 새빨간 혀끝을 깨물어 보인다.





“아실레마 침공준비 완료. 라고.”





==========================





흙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두꺼운 나무줄기가 거대한 지네의 허리를 휘감아 비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단단한 껍질은 좀처럼 벤의 의도대로 갈라지질 않았고, 줄기가 내뿜는 독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벤의 입가로 짜증의 신음이 새어나오는 순간이었다.


“-!”


괴물을 묶어둔 것에 만족하고 성문을 향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성문 바로 앞의 바닥이 요동친다. 불안한 예감대로, 그 뒤틀린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찬가지로 중무장한 거대지네였다. 이미 한 마리를 구속 중인 마력을 풀자니 바로 앞의 병사들이 학살당할 것 같고, 그렇다고 정면에서 돌진해오는 괴물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망자가 흩뿌린 뜨거운 불꽃이었다.


오캄푸스의 손짓을 따라 불의 벽이 템피드의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고, 그 열기에 압도당한 괴물은 그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지금입니다. 머리나 가슴을 노리세요.”

턱뼈 사이로 울려 퍼지는 망자의 목소리.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활과 총을 들어 괴물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마력으로도 부술 수 없었던 지네의 껍질이 허무하게 박살나는 것을 보며, 벤은 깨달음의 탄식을 내뱉는다.

“템피드의 약점은 열입니다. 그들은 몸에 열을 가하면 체액을 껍질 밖으로 내보냅니다. 자연스럽게 물렁해질 수밖에 없지요. 아무리 군용으로 개조를 했다고는 하지만, 종족으로서의 특징까지 번질 시킬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오캄푸스는 말을 마치며 벤이 줄기로 붙들고 있던 템피드에게까지 불의 장벽을 선사해주었고, 머지않아 나무의 줄기가 괴물의 몸을 뒤틀어버릴 수 있었다.


소름끼치는 추격과 방해를 뚫고 되돌아온 오스타이나성. 그러나 성문사이로 들어서는 순간, 벤의 미간이 빠르게 구겨진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곳곳에서 연기와 비명이 솟아오르고, 포식의 흔적이 길거리에 즐비해있다. 무혈입성에 방심하고 있던 병사와 기사, 마법사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에 대처할 능력도, 지휘관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부하들의 시체나 끊임없이 도시를 물들이는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워낙 피와 내장으로 뒤덮인 도로였기에 그 실체를 파악하기엔 어려웠지만, 벤은 그 묘한 위화감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것은 카나반의 남색 제복을 입고 있는 어느 병사의 시체. 하지만 그 시체에는 파먹히거나 도살당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병사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은 탄환의 흔적.


“템피드에게 당한 게 아니군요. 인간의 짓입니다.”


벤의 뒤로 다가온 오캄푸스가 빠르게 벤의 의혹에 확신을 심어준다.


“.......아무래도 몇몇 브린타이나군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장난질을 치고 있나 보네요.”


그들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 진형까지 새로 짜야했던 벤이다.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바로 떠오른 사실은 오직 하나.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



“.......마스터. 통신주파수 알고 있죠?”


“예, 하지만 지금 마력을 보냈다가는 템피드들에게 위치가 발각될 텐데요.”


“상관없어요. 오히려 지금 한꺼번에 템피드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로쿠베 경이 이 괴물들을 조종하고 있는 놈을 찾기에 더 수월할 겁니다.”


“.......뭐어, 그러시다면야. 내용은?”


천천히 시체로부터 일어나, 술렁이는 도심을 향해 먹색 눈동자를 빛내는 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우선 위치가 발각될 수 있으니 통신에 응답하진 말라고 전해주세요. 전달할 사항은, 모든 병력은 남문으로 집결한다. 그리고-”

짧지만, 비장한 한숨.

“지금부터 브린타이나 병사와 장교들을 절대로 믿지 마라.”







“알고 있다고-!”


머릿속으로 울려 퍼진 마스터의 목소리에 대해 고도는 마음껏 짜증을 내뿜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녀는 한 브린타이나 기사를 향해 악의가 가득한 마력창을 흩뿌려대는 중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기사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뭐야, 왜이리 까칠하게 굴어? 목숨을 살려줬으니 한 번쯤은 대줘도 괜찮잖아?”


“너랑 그 짓거릴 하느니 괴물한테 씹어 먹히는 게 나아.”


“하하, 튕기기는.”


“진짜로 저세상을 향해 튕겨줄까?”


푸르렀던 고도의 눈동자가 다시금 암흑으로 물들고,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마력은 이내 창의 형상이 되어 빠르게 대상을 향해 날아간다. 그러나 렌은 불길한 마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창을 걷어내며 골목으로 도망치는 고도의 그림자를 밟는다. 간신히 그의 손에 잡히지는 않고 있었지만, 고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즐겁게’ 몰아넣고 있을 뿐이란 걸.


‘.......’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절망하지도 않는다. 욕을 중얼거리며, 방금 전 머릿속으로 들어왔던 오캄푸스의 목소리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녀의 느낌대로, 답은 그곳에 있었다.


“으응?”


도주를 멈추고 골목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고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렌은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그녀의 전신에서 붉은 마력의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노골적인 공격으로 자신을 맞추지 못할 거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을 터. 렌은 친절히 그녀의 의도를 묻기 위해 한걸음 골목으로 발을 올려놓았고, 곧바로 불길한 진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바닥과 양쪽 건물의 벽을 모두 무너트리며, 템피드 한 마리가 게걸스럽게 체액을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괴물은 곧바로 자신이 감지했던 마력을 향해 몸을 돌렸지만, 이미 그곳에 있던 마법사는 경량화 마법을 통해 옥상 위로 도망친 뒤였다. 결국, 괴물은 미세하게 느껴지는 영력으로 사냥감을 대신하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하하, 귀엽게 구네.”


렌이 웃었고, 옥상에서 골목을 내려다보는 고도도 웃는다. 저 괴물이 저 괴물을 씹어 먹는 광경을 보고, 자신은 유유히 남문을 향해 움직이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엑.......”


그러나 고도는 경악한다.

눈 깜빡하는 사이, 템피드가 자신의 갈라진 머리를 붙잡은 채 굉음을 내며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으로, 가볍게 자신의 단창을 꼬나드는 렌의 미소가 있었다.

분명 아까 전엔 자신의 화염마법 덕분에 간신히 꿰뚫지 않았었나?

너무도 쉽게 괴물을 제압했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옥상으로 도약해 올라왔다.


“좋은 시도였어. 역시 넌 맛이 좋을 거 같아.”


그의 미소가 괴물의 체약보다 더러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학다식한 머리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욕지거릴 내뱉으면서도 고도는 본능적으로 손끝에 마력을 집중시킨다.


“어이쿠, 그러지 마시죠.”

내성으로 여과시키지 않은 마력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신속하게 내뿜어질 터인데. 렌의 먹색 눈동자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명치를 향해 깊숙이 파고든 상태였다.

연약한 소녀의 사고를 빼앗고 행동을 봉인시키는 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에 고도는 신음을 내뱉으며 무너졌고, 렌의 손가락에 의해 턱이 붙잡히고 만다.

“좀 더 나를 경멸해봐. 지금부터 너한테 할 짓을 알고 있잖아? 응? 어차피 그 녀석과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같은 눈이잖아? 그냥 그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즐기시지그래? 이야, 그래. 그 표정 좋아. 좀 더 노력해 봐.”


경멸을 넘어선 분노로 얼룩지는 고도의 눈동자.

턱을 붙들고 있던 렌의 손가락이 서서히 그녀의 목과 로브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지만,

‘그’의 것과 똑같으면서도 너무도 다른 혀가 품속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필사적으로 뒤틀린 호흡을 정돈한다.


비명도, 욕지거리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베...엔.”



“응.”



건물 전체를 휘감으며 솟구치는 수많은 나무의 줄기들. 렌이 번개 같은 반사신경으로 창을 휘둘렀지만, 사방에서 몰려드는 모든 줄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고도에게서 손을 거두고, 반대편 옥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딱 재미 좀 보려는 순간이었는데. 꼭 이럴 때 훼방을 놔요.”


“어디서 더러운 냄새가 났거든.”


자신의 얼굴을 향해 비웃음을 짓는 렌.

자신의 얼굴을 향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 벤.


아직 고통에서 회복되지 못한 얼굴로, 고도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주는 이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올려다본다.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얼굴이다.



그것으로


고도는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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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6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2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10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6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1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4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7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4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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