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외전 : 드래곤 슬레이어(4)-
#4 - Dragon Slayer(4)
나는 목적지도 알지 못한채 무작정 벨로그렌스를 따라 나섰다. 그는 길도 없는 울창한 수풀 사이를 걸으며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 보곤 했는데, 아마도 태양의 위치를 보고 방향을 가늠해 보는듯 했다.
거의 무릎에 닿을 정도로 자란 수풀과 이리저리 뻗어있는 나뭇가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음은 무척 빨랐다.
요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나는 요정 특유의 가벼운 몸무게와 빠른 다리 덕분에 벨로그렌스의 빠른 걸음에 맞추어 이동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별다른 말 없이 길이 아닌곳을 길인양 걸었다.
"흐음…."
또다시 방향을 가늠해 보는듯, 벨로그렌스는 손으로 눈부신 태양빛을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그의 등 뒤에 멈추어 서서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태양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방향으로 져 가며, 원래는 푸르렀을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적당히 공터를 찾아 쉬기로 할까?"
그는 내게 동의를 구하는듯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 후, 그는 태양이 완전히 질때까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말한대로, 그는 평평한 공터를 찾은 뒤 적당히 나뭇가지를 모아와 불을 피웠다.
처음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라, 그것을 맡은 나는 요란스레 기침을 하고 말았다. 벨로그렌스는 그런 나를 보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곧 매캐한 연기는 사그라들었고 나뭇가지는 타닥- 거리는 소리를 내가며 따뜻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의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고, 은은한 빛을 뿌리는 달이 떠올랐다.
"자, 마셔. 몸이 따뜻해 질거야."
벨로그렌스가 내민 작은 컵에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컵을 만져보다 품으로 끌어안았다.
연약한 필멸자의 몸은 용의 신체에 비해 거의 모든것이 불편한 것 투성이지만… 이 따뜻하다는 느낌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온통 눈으로 덮여 있는 내 보금자리 주변의 짐승들이 어째서 서로의 체온을 갈구하는지 알 것 같다.
"… 리체?"
"네."
"대뜸 나를 따라와 달라는 말을 한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것도 좀 우습지만… 이렇게 별다른 준비도 없이 덜컥 나를 따라나서도 괜찮겠어?"
준비…?
그가 말한 준비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모르겠다.
답을 찾지 못한 내가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자, 벨로그렌스는 머뭇거리는 손동작으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왠진 모르겠지만… 그는 내게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을 굉장히 어색해 하는것 같았다.
"아…."
아무튼, 그제서야 나는 그가 말하는 준비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벨로그렌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이곳 요르간드를 떠나려는 것도 그 자신의 입장과 크게는 다를게 없겠군.
내가 벨로그렌스를 따라 나서는 것도 그가 보기엔 많은 것을 포기하려는 행동이겠지. '요정 리체' 가 지금껏 이곳에서 살아오며 이룩한 것들….
그렇군.
만약 내가 진짜 요정이었다면, 벨로그렌스를 따라 나서는 일 같은건 없겠지.
거기까지 사고를 진행시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요정에겐 가족이란 개념이 없어요. 정(精)이 깃든 나무에서 태어나 자라고 죽음에 도달할 때까지, 요정은 혼자에요."
"그렇구나…."
벨로그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 안에 든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나도 품에 안고 있던 컵을 입술에 갖다대고 그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마셔보았다.
… 정말, 그의 말대로 몸이 따뜻해 지는 느낌이다.
"피로 묶인 가족이란게 없다니… 인간인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걸."
"하지만 당신도 가족이 없지 않나요?"
"뭐… 그렇지."
그는 내 질문에 긍정한 뒤, 한동안 말이 없었다.
… 벨로그렌스에게 가족이 없다는건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온 동료들은 주로 가족을 언급하며, 모든걸 포기하고 도망치길 주저했지만… 벨로그렌스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가족이란 개념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당시 다른 인간들에게 가족이란건 강한 속박이었으며, 벨로그렌스에겐 그 속박이 없었던것 뿐이었다.
"벨로그렌스,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세계에서 이룩한 모든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건가요?"
내 질문에, 그는 입술에 대고 있던 컵을 때며 상당히 의외라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드래곤이 지닌 강건함과 거대함은 나로 하여금 그 대상을 나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닌 존재로 인식할 수 없게 만들었어."
또다시 타닥- 거리는 소리가 나며 모닥불에선 자그마한 불똥이 튀어올랐다. 벨로그렌스는 미리 가져온 여분의 나뭇가지를 모닥불안으로 던져 넣으며 말을 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 같은, 인간의 조악한 인식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위대한 자연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할까.…"
"…."
"그 앞에 정면으로 섰었던 나는 내가 지금껏 필사적으로 연연해 왔던 모든 것들이 별다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맥이 탁 풀려버린거지. 꿈을 꾸는것 같기도 하고…."
벨로그렌스의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어갔다.
나를 밤하늘에 빗대어 말한 그의 이야기는,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인간이 되어 볼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결과와 그 원인을 들은것에 불과할뿐.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침묵을 지키며, 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은 용병이라고 했었죠?"
"응, 그렇지."
그는 긍정하며 컵에 들어있는 액체를 모두 마셔버렸다.
아직 충분히 식지 않아 여전히 뜨거운데… 목구멍이 상당히 튼튼한가 보군.
따뜻한 액체가 들어있는 컵을 흔들어 보며, 나는 계속 이야기했다.
"재화를 댓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죠?"
"응."
계속되는 내 질문이 어딘가 이상한지, 벨로그렌스는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질문을 계속했다.
"당신들에게 있어, 돈이라는 재화는 목숨보다 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물건인가요?"
"아냐."
그는 담백하게 그 질문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드래곤인 내게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던 이유는 결국 그 재화라는 물건 때문이 아닌가.
계속되는 '알지 못함' 에 나는 그에게 당혹스런 기색을 내비췄던 것일까… 벨로그렌스는 내 얼굴을 보고는 부드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궁금한게 굉장히 많은가 보구나."
모닥불 속으로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가 더 던져넣어졌다. 그것은 불 속에서 잠깐동안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곧 불이 붙었고 다른 가지들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타들어 가며 열과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지만… 지금 나와 그에게 있어 별빛보단 이 모닥불에서 나오는 열과 빛이 훨씬 더 소중하다.
… 묘한 기분이군.
"정말로 나와 함께 우리 인간들의 사회로 나갈 생각이라면 잘 들어둬, 리체. 돈이란건 인간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거야.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크던 작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어."
불의 세기가 마음에 차지 않았던 탓일까, 벨로그렌스는 튼튼해 보이는 굵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모닥불을 한 차례 헤집어 놓았다.
"돈이란건 그 사회 안에서 생활에 필요한 다른 물건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가치가 있어. 왜 그런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냥 그렇게 약속했거든."
어째선진 모르겠지만… 벨로그렌스는 내게 돈에 대하 설명을 하며 굉장히 끙끙거리는 기색이었다.
저 곤란함에 대해선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군.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타인에게 전해주는건, 불완전한 언어를 갖고 있는 인간으로선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닐테지.
"네가 돈과 목숨의 가치에 대해 물어본 것은 내가 목숨을 걸고 돈을 벌려고 하는 용병이기 때문이겠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모든 인간들이 나처럼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돈을 벌려곤 하진 않아. 아니, 그런 자들이 대부분이지. 용병일을 하는 나같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왜 용병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목숨을 걸어도 될 만큼의 보상이 보장되어 있거든."
그러니까 그의 말은…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같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군.
"물론, 목숨을 잃는건 싫어. 때문에 우리는 항상 목숨과 돈이라는 보상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야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대해서 보상이 얼마나 후한지, 위험이 너무나 커서 그저 개죽음일 뿐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이번일은 완전히 실패로군요. 정말로 그런 개죽음을 당할뻔 했으니까요."
내 말을 듣고, 벨로그렌스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지. 완전히 실패야 실패."
천천히 그의 웃음이 잦아들어갔다.
"하지만… 개죽음을 당할걸 알면서도 일을 강행해야만 할때도 있거든."
웃음이 잦아드고, 그는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까진 질문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에게 들은 이야기의 인과 관계조차도 모두 이해할 수 없으니….
"앞으로도 계속 용병일을 할 건가요?"
"아니, 이젠 그만둘거야. 배운게 싸움박질 하는것 밖엔 없지만… 튼튼한 몸이 있으니 다른 일로도 어떻게든 먹고 살수는 있겠지."
"그렇군요."
밤이 점점 깊어왔다.
하늘로 길게 뻗은 나무 기둥 사이로 산짐승의 울음소리와 밤 벌레 들이 요란하게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로그렌스는 그 소리를 주의깊게 듣는듯 하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내게 따뜻한 담요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리체, 내가 나와 함께 가자고 한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겠어…?"
이상하게도, 그는 굉장히 조심스런 어조로 그렇게 물어왔다.
진짜 의미…. 역시, 그것은 단순히 그와 함께 가자는 것이 아닌, 구애의 의미가 더 강했던 걸까.
뭐, 어느쪽이든 나에게 있어선 깊이 고려해야할 문제는 아니다.
"어떤 의미죠?"
왠지 그는 대답을 굉장히 어려워 하는 기색이었다.
"음, 그러니까… 요정들에겐 어떤 개념인지 잘 모르겠는데 말야. 남성과 여성이- "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말들이 길고 어지럽게 이어진다. 나는 푹신한 담요를 덮은채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 처음엔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말이 계속 이어지자 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역시, 결론은 결국 구애가 아닌가.
어째서 말을 이렇게 길고 복잡하게 하는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
한참동안 말을 하던 벨로그렌스는 갑자기 말을 멈추곤 얼굴을 가린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리체. 이런건 익숙치 않아서. 아, 익숙해야 한다는 이야긴 아니지만 그 뭐냐…."
그는 결국 체념과 비슷한 기색을 얼굴에 띄며 말을 마쳤다.
"남성과 여성으로서 같이 살자는거야. 내 아내가 되어 달란 이야기지."
"…."
"미안해. 진작에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벨로그렌스는 내 대답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를 따라나서기로 한 시점부터 그 제안을 수락한 것과 다를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며, 그의 걱정이 무용하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 작가의말
* 농담이 아니라 칼리체의 신혼생활이 이어집니다. 본편도 다 끝났고 가볍게 써보자는 것이어서 필요하다면 지금까지의 설정을 약간 파괴해버릴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 완전 재미로 막장 전개도 생각해 보았지만... 영 자신이 없는 터라 음... 진짜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네요. 글을 쓸땐 항상 시작과 끝을 정해두고 쓰는데 이건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습니다. 혹시, 전개에 대한 재밌는 의견 있으시다면... ㅋㅋ
음, 아닙니다. 글은 제가 재미있게 쓰고 읽히도록 해야겠지요 ㅠㅠ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Comment '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