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1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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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케트리셴 문 여제와 요정여왕이 이곳을 방문한다는 소식 덕분에, 아카데미는 대단히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나는 그 소란스런 분위기 안에서 침묵을 지키다가, 장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장서관 내부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란스러움 때문일까… 안에는 평소보다 자리한 인간들의 수가 적었다.
"아, 칼리체. 아카데미가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넌 언제나 성실하구나."
장서관의 입구쪽에서 패링이 보고있던 책을 덮으며 나를 반겼다.
그렇게 말하는 이 인간이야 말로… 정말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군.
시선을 힐끗 돌려 그가 보고 있던 책 표지를 보니 『 여왕폐하를 위하여! 』라고 적혀 있었다. 여왕폐하… 라는건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말하는 걸까. 상당히 최근에 출판된 책인가보군.
"여왕폐하를 위하여…?"
"아, 이 책은- "
패링이 책 표지를 들어보이며 내게 멋쩍은듯 웃었다.
"여황폐하께서 아카데미를 방문하신다니, 어쩐지… 흥분이 되서 말이야."
흐음….
나는 패링이 흥분된다고 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겠다. 단순히 높은 계급의 사람이 온다는 것에 대해 흥분이 된다고 하는 걸까, 아니면….
"패링 선배님은 여황폐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르는 것은, 언어를 사용해 물어볼 수 밖에 없다.
"아, 글쎄…."
평소, 만능의 언어를 통하지 않은 소통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나지만… 이번엔 왠지- 답답함을 느꼈다.
"위대하신 분이지. 여황폐하는."
확답하듯 말하는 그 대답에, 나는 단단한 벽을 느꼈다.
위대하신 분이라….
"네거스텐 제국 개국이래, 이정도로 국가의 수준을 끌어올린 통치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것도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나서, 패링은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또다시 멋쩍게 웃으며 불경죄가 될지도 모르니까, 라고 작게 속삭였다.
"단지 그 뿐인가요?"
"단지 그 뿐이라니…? 아니, 그것 말고도 여황폐하는 정치적인 면이나 군사적인 면이나 모든 면에서 경이적인 능력을 발휘했지. 중앙에서 통제하기 힘들었던 지방의 강력한 귀족들을 모두 꺾어 발 아래에 두고, 골칫거리였던 주변의 다른 강국들도 모두 평정해버린지 벌써 십년이나 다되가는걸."
패링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는 내가 약간 열성적이다, 라고 느낄정도로 열렬히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 대해 '찬양' 했다.
"난 여황폐하가 완벽한 군주라고 생각해. 여러 귀족들이 난립할 수 없도록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흐트러짐이 없거든. 왜, 예전 역사서에 보면 지나친 권력이 위대했던 통치자들을 망친 경우가 적지않게 있잖아? 여황폐하는 그야 말로 철인이야!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며, 백성들에겐 자애롭고, 적에게는 가차없지."
"…."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건… 우리같은 평민들에게도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해. 당장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 평민이 입학하는것만 해도 사실, 십년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 여기서 배우는 수준의 고등교육은 평민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지."
패링의 말이 이어진다.
"여황폐하는… 한명의 '완벽한' 인간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면 모두가 얼마나 찬란한 영화를 누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표본이라고 생각해."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숨을 골랐다. 심지어 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인간은… 레케트리셴 문 여제, 를 그렇게 생각하는군.
흑색의 좌, 레쥬에브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나가야해' … 라고 했었지. 내 눈앞에 있는 이 패링이라는 인간은,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실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통치가 훌륭하다면, 역시 상관없다는 쪽일까…?
"크흠, 흥분해서 너무 떠들긴 했는데… 어디가서 내가 이런말을 했다는 얘길 떠들어 대면 안되, 칼리체."
"아, 왜죠?"
패링은 크게 당황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야- 나같은 평민이 감히 여황폐하에 대해 평가했다는 말이 높으신분들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겠어? 이건 불경죄라구 불경죄…."
아, 그래.
나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책장쪽으로 다가가 아무책이나 손에 집히는 걸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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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카데미에 있는 자라면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전 인원들이 나와 입구에서 부터 길게 줄을 이루어 서있어야 했다.
역시 인간이 많다 보니, 시끌시끌한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군중속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거리를 두며, 고개를 돌려 모여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열기를 띈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
레쥬에브, 이런데도 너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 은룡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여황의 인기는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도 더 거대한듯 하다.
"어머, 칼리체. 이런데서 뭐하니? 여황폐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번 말고는 일생동안 없을텐데?"
내 뒤에서 누군가 내 등을 툭, 하고 치며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같은 클래스인 네리셰라는 인간과 그녀와 친한 몇명의 인간이 서 있었다.
'일생동안' 이라…. 보통의 평민에게는 역시 그렇겠지. 그런 보통의 평민을 연기하고 있는 나도 역시, 여제를 보기 위해 저 군중속으로 파고 드는 연기를 해줘야 하는걸까.
하지만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군.
"난 괜찮아. 저런데 껴서 파고들 자신도 없고…."
"어머? 남자애가 패기 없이 그게 뭐니?"
그녀의 뒤에 있는 인간 한명이 '칼리체는 그런 편이 더 사랑스럽지.' 따위의 얘기를 하자, 그들 사이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말없이, 그러한 광경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 저기, 기분 상했니?"
웃음을 터트리다, 네리셰가 뒤돌아 나를 보며 양손을 모았다. 사과… 의 의미인가. 별로 기분은 상하지 않았다만.
"아니, 그런건- "
"미안하다는 뜻에서, 여황폐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내가 데려가줄게!"
괜찮다,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셰는 내 손을 잡아 끌고 군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귀족의 권위와 힘을 이용해 길을 열리라고 예상했던 나는 의외로 그녀가 앞에서 인간들의 틈새를 요리조리 파고 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가며, 나는 나 자신이 정말로 인간의 사고방식에 많이 물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들이 형성해 놓은 관념에 의해 예상이긴 하지만, 섣부른 판단을 내리다니…. 하지만 나는 곧 그러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인간의 사고방식 같은 관념의 찌꺼기는, 마음먹기만 하면 아무렇지 않게 털어낼 수 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인간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있을때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취하는게 이치에 맞겠지.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네리셰의 손에 이끌려 대로가 훤히 보이는 가장 앞줄에 도달하고 말았다.
별로, 은룡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여황폐하와 요르간드에서 온 요정여왕께서 들어오십니다."
아, 요르간드…? 인간들은 아직도 그 지명을 쓰고 있나보군.
커다란 나팔 소리와 함께, 입구쪽에서 여러명의 인간과 요정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 들어오는건 역시… 은룡과 칼리아넬 이로군.
그들은 마차도 아닌, 말을 타고 내부로 들어오고 있었다. 은룡의 긴 은발과 황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화려한 차림새… 저 의복으로 말을 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군.
칼리아넬은 요정이니, 어떤 복장을 하고 있어도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은룡 앞에서 말을 몰고 있는 저 남자는….
"음…."
그녀의 또다른 자식인가보군. 인간들의 신분으로 따지자면, 저자가 황자겠지. 그는 약간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은룡과 똑같은 은발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아카데미 내부로 진입했다. 그들이… 정확히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지나갈때마다, 그 근방에 위치한 인간들은 모두 허리를 숙였다. 인간들이 워낙 많어서인지, 나는 그 광경이 왠지 파도가 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와…! 저 여자가 요정들의 여왕님인가? 요정들은 정말 예쁘구나! 여황폐하에 비해서도 별로 손색이 없어보여!"
네리셰는 칼리아넬의 미모에 집중하고 있나보군….
나는 은룡과 칼리아넬에게 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네리셰의 뒤쪽에 숨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환호성 따위를 지르는 인간은 없었다. 인간들은 모두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으로, 은룡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칼리아넬은… 이런 분위기에 어쩐지 조금 주늑이 든 모습이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군중속에 섞여서 은룡쪽을 바라보고 있는 펠테넨시아 황녀와 흑색의 좌, 레쥬에브를 발견했다.
군중속에 섞인 그들의 표정은 상반되었다.
펠테넨시아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은룡을 쳐다보고 있었다.
은룡과 눈이 마주쳤는지, 펠테넨시아가 환하게 웃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확인하자 마자, 나는 은룡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은룡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행렬이 조금 앞으로 진행되자, 은룡과 칼리아넬 뒤로, 약간의 거리를 띄우고 간단한 무장을 한 기사들과 요정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들의 선두에 서있는건… 백색의 좌, 리체르아.
그녀는 갑옷도 입지 않은 간단한 차림새에 검 하나만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저 검은… 백색의 좌의 '광휘' 겠지.
… 은룡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모두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존재감을 지웠다. 아무리 은룡이라해도 이 속에 섞여있는 나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은룡이 지나가고, 나는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들어올렸다. 허리를 들어올리자 마자 보이는건, 레쥬에브였다.
"아…."
그녀의 주변 모든 인간들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녀 혼자만이 허리를 숙이지 않고, 투명한 자색 눈동자로 은룡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군중의 시선은 은룡에게로 집중되어 있었기에, 레쥬에브가 허리를 숙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인간은 몇 되질 않는다. 하지만… 은룡을 수행하고 있는 무장을한 인간들은 모두 그녀의 '불복종'을 알아보지 않겠는가.
은룡은… 레쥬에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에서 은룡의 얼굴을 확인할 순 없지만… 살짝 보이는 은룡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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