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외전 : 드래곤 슬레이어(20)-
#4 - Dragon Slayer(20)
집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는 한쪽 벽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벽난로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 구석에 잘 마른 땔감들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만삭이었던 에밀렌이 직접 해온것은 아닐테고…. 물물 교환으로 얻어왔다고 하기에도 다소 많은 양이다.
아마 다른 마을 사람들의 호의가 아닐까 싶었다.
그 밖에도 나는 많은 호의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얄팍한 식탁위에 올려져 있는 싱싱한 과일, 마른 육포. 그리고 바구니에 담겨져 있는, 먹을 수 있는 줄기 식물, 투박한 옷감 등. 희미한 촛불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것들이었다. 이 호의들은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의 것일까, 아니면 남편을 잃어버린 에밀렌에 대한 동정일까. 둘 다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머, 다시 들어오셨군요. 거기다 리체까지…."
완전히 기진맥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나와 헬케튼을 반겨주었다.
그녀는 허리까지 담요를 덮은채 양 팔로 부드러워 보이는 천 더미를 안고 있었다. 정확히는 천 더미로 감싸여져 있는 아기겠지만 여기선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쉬어야 할 시간을 방해해서 정말 미안하네. 하지만 리체에게 꼭 그 아이를 보여주고 싶어서 말일세."
헬케튼은 탁자 위 과일 바구니 옆에 때가 탄 모자를 벗어놓으며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에밀렌은 그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살풋 웃어 보이기만 했다.
만약 이유를 물었다 하더라도, 나는… 진실된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을것 같다.
확신없이 추측조로 내 사고가 마무리 되는 까닭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의 섬세한 감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나는 저 아이의 탄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 가정이라는 작은 집단의 경제 전부를 담당하던 남편 지렌의 죽음. 그것은 이제부터 에밀렌이 적극적으로 경제적 생산 활동에 대해 참여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는 다르게 꽤 긴 시간동안 그들의 자녀를 돌볼것을 요구받는다. 즉, 에밀렌은 경제 활동에 할애해야 할 노동력과 시간 대부분을 아기에게 투자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
그러나 자신의 아기를 바라보는, 에밀렌의 한 없이 부드러운 표정 앞에서 내 우려를 언급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행복해 보인다. 굳이 지금 당장 칼날같이 차가운 현실을 이야기하며 저 실낯같은 행복을 찢어버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뇨. 오히려 고마운걸요. 축하하러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리체."
내가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러 이곳에 왔다는게 기정 사실화 되어있군. 나는 여기서 어렵지 않게 보편성을 찾을 수 있었다.
탄생은 축복 받는다. 축하 받는다.
헬케튼을 슬쩍 쳐다보자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부정?
목적어가 존재하지 않는 비 언어적 표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내 무엇을 부정하려는지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일단 그것을 쓸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기도 했지만.
"축하해요, 에밀렌."
"고마워요."
이럴땐 어떤 수사를 써야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그저 축하한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표현의 부족은 대화와 대화 간의 간극을 짧게 한다. 그러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겠지.
"혹시 아기를 직접 볼 수 있을까요?"
내 요청을 들은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떤 기대가 충족 된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귀 뒤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그 표정의 이유를 생각했다. 이건 혹시 무례한 요청이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긴 힘들다. 만약 그랬다면 헬케튼이 나를 이곳에 데려오진 않았을테니까. 혹, 내가 인간이 아닌 요정이라는 사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기를 직접 봐도 되겠냐는 청원과 종족의 다름이 무슨 상관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 해석에 어려움을 느낀다.
놀란 표정이었던 그녀는 곧 그 표정을 환한 웃음으로 바꾸었다. 그 웃음엔 희미한 물기마저 어려있었다. 나로서는 꽤 당혹스런 상황이었다.
"이 아이를… 축복해 주시려는군요! 동화속에서만 보던 일이 정말로 내게 일어날 줄이야. 정말,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
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내가 직접 아기를 봐도 괜찮겠냐는 요청이 어째서 내가 아이를 축복해주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그 상관관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조금 우물쭈물 하다가 뒷쪽에 있는 헬케튼을 힐끗 돌아보았다. 이 상황이 온전히 나의 무지(無知)탓 만은 아니었는지, 그 역시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내게 멋쩍은 웃음을 보내는 것을 보면 에밀렌의 행동을 어느정도 이해는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직접 안아보세요."
아무튼 에밀렌으로부터 아이를 넘겨 받았다. 가장 먼저 내 감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양 팔 안으로 쏙 들어오는 가벼운 무게감이었다. 나는 그 무게감으로부터 미래에 완성될, 한 명의 성장한 인간을 상상했다. 하지만 상상은 불모했고, 품 안의 무게는 너무나도 가벼웠다.
아이를 안은채 조금 뒤로 물러나 탁자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런 내 모습을 에밀렌은 따스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
천을 조심스럽게 들추어보자 그 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갓난 아기가 보였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붉은 피부. 최대한 인간들의 미적 관점에서 보려 노력해도, 새끼에게 보통 적용되는 귀엽다는 표현을 이야기하기엔 어려운 모습이었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며 아기의 자는 모습을 세세히 관찰했다.
탄생과 죽음.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현상이다. 인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속한 생명이라면 어디에서든 태어나고 또 어디에서든 죽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갓 태어난 이 작은 생명에게 새삼스레 묘한 감흥을 느끼는 것은 내가 세계에 '참여' 하고 있기 때문일까.
용의 무딘 감각과는 달리 아이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연약한 근력과 아이의 숨을 느낄 수 있는 민감한 피부, 아이를 가까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체구, 아이를 감싸고 있는 보드라운 천에서 느껴지는 아스라한 향을 느낄 수 있는 후각.
나는 새 생명이란 것을 기민한 감각으로 완전하게 느끼고 있었다.
"리체 양, 구전 전승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네. 어슴푸레한 달빛이 내려앉은 고요한 밤에 아름다운 요정이 창문틈으로 슬쩍 찾아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축복을 내리고 사라진다는… 그런 옛 이야기 말일세."
어느새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 헬케튼이 에밀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내게 그렇게 속삭여 주었다. 그건 방금 에밀렌이 보여주었던 아리송한 기쁨에 대한 설명이었다. 내 현 모습이 요정이라는 종(種)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이 신비감을 갖는다는 것과 같은 위상을 가진 이야기인 모양이지.
음, 그 말대로 달빛이 내려앉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고요한 밤에 요정인 내가 찾아오긴 했다. 하지만-
"으응, 하지만 저는 창문틈으로 찾아오지는 않았는걸요."
마찬가지로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말을 들은 헬케튼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듯 끅끅 거리며 손가락으로 창문 쪽을 가리켰다. 과연, 벽난로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도 어디서 찬바람 한줄기가 들어오나 했더니…. 그 이야기대로 창문이 아주 살짝 열려있는 채였다.
어찌되었든 요정은 찾아왔다 이건가. 참 편리한 구색 맞추다.
"…."
아무튼 헬케튼은 내가 그 묘한 이야기에 응할것을 원하는 듯 싶었다. 거짓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에밀렌이 조금의 위로라도 받길 원하는 걸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겠냐만은….
나는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에밀렌을 힐끗 바라보았다.
하긴, 본래부터 의미있는 것이란 없다. 의미는 전부 나와는 다른, 타자가 부여한 가치일 뿐이지. 축복을 내린다는게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밀렌이 내 행위에 작은 위안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이 유의미일 것이다.
내 얼굴을 아기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 아기의 이마위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민감한 입술로 아기의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피부가 느껴졌다. 아기의 입장에선 내 입술이 조금 찼는지 조금 뒤척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곧이어 입술을 떼자, 내 입술이 닿았던 아기의 피부에 희미한 빛무리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아…."
그들에겐 기이한 현상일테지. 그리고 '알 수 없음' 이란, '신비' 란, 필연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동원케한다. 그 상상력은 내가 보여준 현상에 수 없이 덧대여져 그들이 말하는 축복이라는 형태로 완성될 것이다. 사실, 실제로 축복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입맞춤으로 이 아기가 미래에 질병에 걸릴 확률을 제로로 만들어 버렸다. 불운한 사고 같은 것만 당하지 않는다면 이 아기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나 긴 생애를 누린뒤, 다른 모든 생명처럼 덧없이 스러질 것이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자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헬케튼과 기쁨에 차 어쩔줄 모르는 에밀렌의 모습이 보였다.
요정이 찾아와 갓난 아기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간다는 이야기는 그저 인간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구전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이 별달리 대단한 것도 아니니, 저들의 상상에만 있던 이야기를 잠깐 동안만 현실로 끌어 내려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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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지렌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기뻐했을지…."
에밀렌은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잘 자고 있던 그녀의 아기 역시 잠에서 깨어나 앙앙 울고 말았다.
… 에밀렌은 자신에게 험난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거란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험난함을 극복할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이유가 그 아기 때문이란걸 나는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아기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었구나.
"요정이 찾아와 축복을 내린다는 이야기가 그저 전설만은 아니었군. 정말 놀랐다네, 리체 양."
집을 나오며 헬케튼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답없이 차가운 밤바람에 하늘하늘 흩날리는 백색 머리카락을 끌어 안았다.
"자, 한잔 들게."
에밀렌의 집에서 얻어온 것인지, 헬케튼이 내게 잔을 하나 내밀었다. 향긋한 향이 감도는 따뜻한 차였다. 나는 그것을 양 손으로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곧 옆에서 후루룩, 하고 헬케튼이 차를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헬케튼이나 에밀렌 모두, 내가 아기에게 내려준 축복에 대하여 말을 아꼈다. 여기서 말을 아꼈다는 표현은 그 축복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인간의 마법사가 근원을 대하는 태도와 유사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알려고 하면 할 수록, 신비는 깎여나가고 결국 그것은 신비로운게 아니게 된다. 마법이었던 현상은 더 이상 마법이 아니게 된다. 축복이었던 것이, 축복이 아니게 된다.
"…."
나와 헬케튼은 에밀렌의 집 앞에 아무말 없이 우두커니 서서 차를 마시며 잠시 밤바람을 맞았다.
"잘 모르겠네. 갑자기 아기를 직접 보여주고 싶어 보여주긴 했지만, 리체 양이 저 새로운 탄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이네. 나는 물론 기쁜일이라고 말하긴 했었네만… 솔직히 이건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네. 리체양이 말하는 냉정한 현실에 주책없이 반발감이 들고 만게지."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을 나오기 전, 에밀렌이 터트린 울음을 생각하고 있는듯 싶었다.
미간을 살짝 좁히며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는걸요."
나는 판단을 보류했다.
사냥꾼인 지렌의 죽음. 즉, 경제력이 부재된 상태에서의 새로운 탄생은 궁핍을 의미한다. 나는 그 궁핍 위에서는 행복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는 에밀렌의 얼굴에 걸린 그 부드러운 웃음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알지 못한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내 몸에 깃드는 방대하고 강력한 근원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모른다.
"그래서 알아야 겠어요."
"흠, 어떻게 말인가?"
헬케튼은 다시금 컵을 입가에 갖다대며 그렇게 질문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아랫배 부근을 살살 문질러 보았다. 마침 내가 현재 취하고 있는 몸은 여성. 그리고 이곳은 생명이 잉태되는 곳.
"벨로그렌스와 아이를 만들어야 겠어요."
"푸우웃- !"
헬케튼이 입가에 머금고 있던 차를 요란스레 뿜었다. 당황… 한건가? 하지만 내 발언을 되돌이켜봐도 딱히 헬케튼이 당황할만한 언사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그렇구만. 하지만 요정과 인간 사이에 아기가 생길 수 있는건가?"
나는 가볍게 답했다.
"열심히 해야겠죠."
그는 할 말을 잃은듯 한참동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내 의아한 얼굴을 인식했는지 표정을 수습하고는 근거를 알 수 없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로그렌스가 좋아하겠군 그래."
"좋아할까요? 아, 물론 평소에도 좋아하긴 하지만… 수 없는 반복은 흥미를 떨어트리기 마련이잖아요."
"큼, 그런 이야긴 제발 둘이서만 하게나. 그리고 걱정하지 말게, 리체 양. 벨로그렌스는 무척 좋아할걸세. 내가 장담하지."
헬케튼은 매우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흐뭇하다는 웃음을 살짝 지었던것 같긴 했다.
- 작가의말
* 와... 외전을 연재하지 않은지 벌써 4 개월이나 됐었다니ㅠㅠ 엄청 반성중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듯. 잊어버린거 아닙니다ㅋㅋ 이것도 확실히 마무리 짓습니다.
* 현재 외전 내용은 한 1/2 이나 3/4 쯤 진행된듯 합니다. 엔딩은 확실히 정해져 있지만 쓰다보면 내용이 예기치 않게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도 해서.
*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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