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85화-
"역시- 마경은 굉장히 불쾌한 곳이에요."
마경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숲은 우거지고, 빛이 들지 않아 어두워 졌다.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희미하게 퍼져 있었는데, 아마도… 피냄새 같았다.
하지만 이런 감각도 모두, 마경이란 비틀린 공간이 만들어낸 환상이겠지.
"그렇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백색의 좌의 말에 수긍해주고는 레테닌시에스케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긴 옷자락을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린 채로 스스로 떠있는 양탄자 위에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 속옷이 훤히 보이는군.
"저 녀석은 항상 저러고 다니니?"
"아, 렌 님은…."
백색의 좌, 리체르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다가 대답했다.
"뭐- 그렇지요. 움직이는걸 무척이나 귀찮아 하시니까요. 평소에는 하루 종일 욕실에서 늘어져 주무시는 적도 있으시니 까요."
목욕을 좋아하나?
확실히…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 있으면 온몸이 늘어져 기분이 좋게 되지. 하지만 하루종일 그러고 있기는, 힘들것 같군.
그런데, 평소에는… 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은룡과 함께 생활하고 있니?"
"네, 매일 제 집에서 저러고 지내세요…."
리체르아는 예의 바르게 답했다.
내 표정이 미묘해 지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게으른 분은 아니에요."
"…."
모순이로군.
"내가 아무리 움직이는걸 싫어한다 해도 너에 비할까, 백룡."
자고 있던게 아니었나.
레테닌시에스케는 양탄자 위에서 몸을 일으켜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뭐라 할 순 없겠군.
나는 수천년 동안 내 보금자리에 박혀 나온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 시간은 바람이 흘러가듯, 알게 모르게 지나갔다.
레테닌시에스케의 존재감 때문에 우리들을 중심으로 반경 수 킬로 이내의 마물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고, 인간들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보이는 풍경은 항상 나무, 나무, 그리고 또 나무다.
마경은 뭐랄까… 정말 나무가 많군.
"레테닌시에스케, 너의 목적은 백색의 좌의 보호 뿐인가?"
심드렁한 시선이 나를 향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내 목적은 그것뿐이다. 마경에서 마왕이라 불리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하건, 백색의 좌가 말하는 세계의 균형이 깨지던 나와는 관계 없는일이다. 하지만 루루렌칼리체- 너를 만날걸 알았다면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리체르아가 약간 섭섭하다는 눈으로 레테닌시에스케를 바라보았다.
… 도무지 태도를 종잡을 수 없군.
어떨때는 호의적이다가도 이럴 때는 나에게 미약한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과거의 나는 은룡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나 보군.
별 상관은 없는 이야기지만.
"루루렌칼리체 님, 그런데… 당신이 원래 같이 다니던 일행 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관심없다. 어쨌건 그들과는 결국 목적지에서 만나게 될테니까-"
"흐음- 냉정하시군요."
리체르아는 의외라는 눈빛을 내게 보내며 말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대충 알것 같군….
"하지만 그 분들이 부유성 앞에 도달하기는 무척 힘들거에요. 많은 수의 마물도 마물이지만… 이 대지를 지나가는 이상, 13영주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부유성이라….
신화 시대에 존재했던 유적을 말하는 모양이군. 중력의 영향을 벗어난 신비로운 돌로 만들어진 성… 그것이 마경에 있었다니.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굉장히 거대한 신비다.
인간들의 금전 감각으로 따지자면 부유성의 조각 하나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훨씬 가치가 크겠지.
의미는 없는 이야기지만….
"그들이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운명이겠지."
운명,
나는 스스로의 말을 비웃었다. 사실 운명같은건 없다. 이건 그저 저급의 언어로 인해 만들어진 흥미로운 단어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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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어온 걸까… 마경내에서 태양이 보이는 곳은 베른헬체이스의 성이 유일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침, 저녁같은 시간흐름 정도는 알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모르겠군.
하늘은 짙은 검붉은 빛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그 빛깔이 이제 막 굳기 시작하는 피의 색 같았다.
"이제 슬슬 마경의 중심부가 보이겠군."
그런 레테닌시에스케의 말이 있은 후 얼마 안있어,
나무만이 반복되던 풍경이 끝났다.
거대한 분지가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그 분지 위로 거짓말 같이 거대한 대지가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아니, 저것은 대지가 아니다. 성… 이로군.
리체르아가 말했던, 부유성- 인가.
부유성은 이렇게 먼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길고 두꺼운 쇠사슬에 의해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부유성을 고정시키는 그 쇠사슬 들은… 분지 곳곳에 박혀 있는 거대한 말뚝에 묶여져 있었다.
"아-"
리체르아가 미약한 신음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부유성 아래에 마물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제각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
[────────]
[────────]
손에 닿지 않는 부유성을 향해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한 마물이 다른 마물을 밟고 오른다. 또다른 마물이 그 마물을 밟고, 밟고, 또 밟고….
그 밑에 깔린 마물은 붉거나 푸른 채액을 내뱉으며 죽어간다.
수천, 수만의 수를 셀수도 없는 마물들이.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 지는, 아니 정확하게 그들이 품고 있는 인간의 공포의 사념체는 뭉그러지고 일그러져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들 각자가 내는 소리는 거대한 저주가 되어 이 공간을 휩쓸고 있었다.
"이, 이건…."
리체르아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려온다.
백색의 좌라는, 인간의 모든 신비를 짊어진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거대한 저주를 극복할 순 없는것인가.
"시끄러운 녀석들이다."
레테닌시에스케는 눈살을 찌푸리며 허공에 손으로 선을 그었다.
거대한 파동처럼 퍼져나가는 마력과 신력. 그것은 그녀의 손 동작을 따라 마물들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거대한 마력의 행사로 대기가 흔들리며 내 백발이 위로 솟구쳤다가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물들은… 침묵했다.
"렌 님-"
리체르아는 입을 가리며 괴로운 목소리로 은룡을 질책하듯 불렀다. 이 먼곳에서도… 진득한 피냄새가 올라오는것 같군.
침묵하는 마물.
그것은 단 하나밖에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죽음이지.
레테닌시에스케의 손동작 하나로 부유성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갈망하던 마물들은 모두 온몸이 터져 육편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던 마물들이 저런 모양새가 되어있으니, 모양새는 아까보다 더 끔찍하다.
… 마물들에게 유감이군.
"저들은 음차원의 마력으로 생겨난 찌꺼기 들이니 그리 마음쓸것 없다."
"그래도 저처럼 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모습은, 상대가 아무리 끔찍한 마물이라도 너무 섬뜩하네요."
백색의 좌는 금방 심경을 정리한 모양인지,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와 레테닌시에스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눈 앞에서 수만의 마물이 한번에 죽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금방 침착을 되찾는군. 인간의 초월자라…. 나는 문득, 그녀에게 흥미가 생겼다.
'인간은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인간들의 사회에 있게 했던 현자의 질문에, 그녀는 뭐라고 답할까. 물론 정말로 그녀에게 그것을 질문할 생각은 없다.
아직까지 그 질문은 온전한 내것이니까.
"너는 거대한 신비를 가지고 있지만… 마법사 처럼 중력 반전의 마법 따위는 사용할 수 없으니 특별히 내 옆에 타는 것을 허락하겠다, 리체르아."
"흐응- 영광인데요."
백색의 좌는 빙그레 웃으며 레테닌시에스케의 양탄자에 몸을 실었다.
부유성 까지 날아갈 생각인가 보군.
사방에서 부유성으로 연결된 저 거대한 쇠사슬을 통해 가도 되지만… 확실히 그편이 편하겠지.
"너는 알아서 따라와라, 루루렌칼리체."
… 매몰차군.
* 한편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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