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38화-
성벽 밖에선 후작과 백작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뿌연 먼지와 모래가 군마와 인간들에 의해 뿌옇게 피어오르고, 이곳까지 함성과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후작과 백작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 싸움의 원인 정도야 알고 있다. 자세한 사정은 관심이 없어 모르지만, 후작과 백작은 영지 사이에 있는 작은 평야의 소유권을 두고 싸우고 있다 한다.
서로의 이익이 걸린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저 병사들은 이 싸움에서 이겨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있을까.
저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의 명령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니?"
누군가의 손이 턱- 하고 내 머리에 얹힌다. 위를 올려다보자 베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것이 보인다.
"베델…"
아, 이참에 그에게 물어봐야 겠군.
"응?"
"칼리아넬이 절 좋아한대요."
"어? 아, 서로 화해했구나! 잘되었어!"
그는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이 인간은 별일도 아닌것 가지고 굉장히 기뻐하는 군… 하지만 왠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래서 저도 좋아한다고 대답했죠."
"응, 그래서?"
왠지 기분이 묘하군.
내 말을 듣고 있는 그의 표정은 꼭… 뭐랄까, 나를 대견하다는 듯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왠지 대화가 굉장히 유치해진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무시하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칼리아넬이 제가 좋아한다고 말한것과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한것이 서로 다른 의미라고 하더라구요. 저는 도저히 어떤 뜻인지 모르겠는데, 베델은 알것 같나요?"
"…"
그의 표정이 왠지 미묘하다. 이해가 가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 아, 내가 벌써 이렇게 표정을 능숙하게 읽을수 있게 된건가?
"그, 글쎄다."
"모르겠나요?"
실망스럽군. 그라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역시 그에 대한 해답은 내 스스로 찾아야만 하나…
나는 베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성벽 바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전과 다르게 굉장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것 같다. 어쩌면… 오늘안에 결착이 날지도.
#
"백작이 승리하고, 후작은 패배해서 급히 자신의 영지로 후퇴했다는군."
침대에 엎드려서 '빨대'라는 요상한 물건으로 컵속에 달콤한 액체를 마시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베델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말하는걸 들어보니, 원래 후작측의 전력이 백작측보다 월등했나보죠?"
"응, 백작이 도저히 이기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는데… 사실 왕실쪽에서 보자면 백작보다 후작이 승리하는게 더 낫거든. 그런 식으로 아나킨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아직 후작은 왕에대한 충성심이 남아있는것 같았으니 말이야."
"백작은 그렇지 않단 말인가요?"
이 '빨대'라는게 신기한지 나를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던 칼리아넬이 베델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칼리아넬은 '충성심'이란 개념을 이해하고 있을까?
요정에겐 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백작은, 글쎄… 어떨려나."
베델은 대답하길 주저하고 있다.
백작의 왕실에 대한 충성심은 형편 없는 모양이다. 아나킨에서 쫓겨나 앙심을 품고 있을 후작이 승리하는게 더 낫다고 평가할 정도니 말이다.
어쨌건, 지금이 기회인것 같군.
나로선 후작측이던 백작측이던 왕실측이던 어디가 이득을 보든간에 관계 없다. 내겐 에카테야르를 구하면 그뿐인 것이다.
베델에겐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일단은 좀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것 같아."
#
난 좀더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그것이 지루해질 즈음에 밖으로 나와 성벽위로 올라갔다. 성벽 바깥의 평원엔 베델의 말대로 백작의 진영밖에 보이질 않았다.
이제부터가 문제로군, 백작이 왕실을 적대하느냐, 하지 않느냐. 사실 어느쪽이든 마릴렌 공주로서는 탐탁치 않겠지만 말이다.
"아, 오랜만이오. 칼리체 양."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난 고개를 돌렸다. 성벽의 계단으로 강인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 당신은."
"이런, 벌써 내 이름을 잊은 것이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안녕하세요, 기사 베르딧. 당신의 이름을 잊을리가 있겠나요. 그때 베델과 싸우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으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망각이 없는 내가 그의 이름을 잊을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것 아니었소."
그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곤,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소?"
"백작의 진영을 보고 있었죠. 저들이 곧 이곳을 도모할 지도 모르니까요."
"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에 참 거침이 없구료. 그런데 아가씨가 그런것엔 왜 신경을 쓰는것이오? 아가씨는…"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나를 의아한듯 바라본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마법사로서 공주를 돕겠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나보다.
"베델과 같이 저도 공주님을 돕기로 했거든요."
"흠, 마술사가 분명 큰 전력인것은 맞지만…"
그는 탐탁치 않은 표정이다. 아마도 어린 소녀로 보이는 내가 전장에 참여한다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내가 마법사라는 말을 하면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분명 바뀔테지만, 굳이 시선을 바꾸고자 그러말을 할 필요가 없기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다시 성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음, 어쨌건 전투가 시작되면 아가씨는 뒤로 빠지시오. 아무리 마술사라 해도…"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 아니오. 그것보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는게 좋겠소. 그렇게 바람에 휘날리게 되면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오."
그의 말에 나는 내 긴 백색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분명,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있다가 칼리아넬에게 묶어달라고 부탁해볼까… 라고 생각하는 찰나, 백작의 군대가 이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게 보인다.
성벽 위에 병사들은 모두 동요한채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베르딧은 심각한 얼굴로 급히 성벽을 내려갔다.
"어쨌든 조심하시오, 아가씨."
"당신도 다치지 마세요!"
내 외침에 그는 뒤를 힐끗 돌아보고 씩- 웃더니 다시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에서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겠군.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제야 인간들 사이에 섞여, 그들의 갈등에 '참여' 하는 것이다. 기대… 까지는 아니지만,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 될것 같다.
* 흫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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