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126화-
아, 오늘은 주말이다. 그렇다고 해봐야 지금은 요정 여왕의 방문을 환영하는 성대한 축제가 열린 상태라서 평일에도 아카데미 수업은 없지만 말이다. 뭐, 그렇다고 주말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건 아니다. 주말에는 불편한 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을 수 있으니까.
"…."
그런데 어째서 내가 인간들의 주말이란것에 이런 의미나 부여하고 있는걸까. 음… 나도 이제 꽤나 이 생활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교정에 있는 자그마한 벤츠에 혼자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카리에르제는 어딘가에서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아침 일찍 기숙사를 빠져나갔고, 로나벨아크하임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지 오늘 하루종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요즘은 축제 때문에 아예 아카데미 내부의 인원이 절반으로 줄은듯한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교정의 중앙 너머를 바라보는 동안, 약간 센 듯한 바람이 불어와 내 긴 백색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리고 지나갔다.
막 양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려는 찰나,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머리끈에 생각이 미쳐 그것을 꺼내었다.
하얀 손 위에 올려진 머리끈은 단정한 검은색이었다. 내 머리카락이 백색이니 이걸로 머리를 묶으면 끈이 상당히 도드라져 보이겠군.
대강의 감상을 끝낸뒤, 나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쥐고 뒤쪽으로 한번에 묶어 버렸다.
매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를 머리끈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고정시켜버리니,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확실히, 바람에 흩날려다니는 머리를 정리할 필요가 없으니 한결 편해진 느낌이 든다.
"리블란셰…?"
"응?"
뒤에서 들려온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긴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쥬에브… 로군.
"머리… 참 잘 어울리는구나. 귀여워."
"응, 고마워."
"아니, 너 말고 머리끈이 귀엽다고."
… 음.
그녀는 흥, 하고 작게 콧소리를 내고는 치맛자락을 정리하고서 내 옆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와 동시에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어지럽혔다.
"내게 따로 용건이라도…?"
"주말에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나 싶어서 말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축제 기간이잖아?"
레쥬에브는 앞으로 고개를 약간 숙인 바람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내게 물었다.
"그냥… 바람쐬고 있는 거야. 축제에도 별로 관심은 없고 말이야."
"그러니?"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난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요란한 축제와는 별개로 한적한 교정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레쥬에브, 난 너에게 협력을 약속했었어."
은룡에게 대항하려는 유일한 인간….
갑작스레 카리에르제가 생각났다. 스스로의 종족의 정체(停滯)를 깨닫고, 거대한 변혁을 꿈꾸는 인간. 그는 내 눈앞에 있는 이 인간과 닮은꼴이다.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내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니?"
내 의문은 타당하다. 난 레쥬에브에게 레케트리셴 문 여제, 즉 은룡의 실각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제안도 그녀가 먼저 했었지. 그런데 아직까지 레쥬에브는 내게 그에대한 간단한 언질조차도 없었다.
흑색의 좌라곤 하지만 일개 인간에 불과한 그녀가 어떻게 제국의 여제로 자리해 있는 은룡을 몰아낼지, 미약한 호기심이 드는 것이다.
그녀는 레케트리셴 문 여제가 인간이 아니란건 알지만, 실제 그 정체가 드래곤이라는것 까지는 모른다. … 하지만 난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하-?"
그녀는 어이없다는듯, 헛웃음을 흘렸다.
"바보냐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있겠다고 너에게 일을 시키겠어?"
"…."
"잘 들어 리블란셰.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이 제국의 최고 권력자를 자리에서 몰아내려는 일이야. 그것도 거대한 세력을 등에 업은 것도 아닌, 나 개인이 말이야."
레쥬에브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다는 듯한 기색이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내게 숙인채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단 기간에 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해도… 난 그녀에게서 체념의 빛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레쥬에브는 내 쪽으로 숙인 몸을 다시 일으키며,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일개 아카데미 학생인 네게 바라는건 없어. 물론,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네게 어떤 일을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건 네가 근 미래에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요직에 올라가는거야. 내 일을 도울 수 있을 만큼."
… 긴 시간을 상정하고 일을 꾸민다는 건가. 아주 생각이 없진 않군. 그게 가장 타당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주요 직위에 올라가고서도 널 계속 도울 마음이 남아있을까?"
그녀가 곤란하게 여길만한 말을 한번 던져본다. 레쥬에브는 잠시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약간 한심스럽다는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출세 할 생각도 없는 녀석이 무슨…."
그래… 난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그러니까 다른 생각 말고, 너는 출세할 생각이나 해. 카리에르제 따위하고 어울리지나 말고! 내가 봤을때 너는 그런 점이 너무 미숙해. 처세술 이라곤 아예 모르는 사람같단 말이지…!"
엄청나게 쏘아 붙이는군….
그녀는 깊은 자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풀나풀한 그녀의 치마가 살짝 위로 떴다가 하얀 무릎 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뭔가 멍한 기분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고 있자니, 어느새 그녀는 몸을 돌려 저쪽 건물 뒷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 레쥬에브도 자신이 하려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알긴 아는 모양이로군.
"후으…."
그런데도 그녀는 전혀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인간의 제국은 인간이 통치해야 한다.', '인간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오직 인간이 결정해야해.'
레쥬에브는… 오직 그 생각만으로 레케트리셴 문 여제를 몰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불가능에 가까운걸 알면서도….
기특한 인간이란 말이지.
* 오랜만에 본편입니다.
* 집중을 해야되는데 역시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다보니 뭘 쓰고 있었던건지 생각이 나질 않네요. 그래도 아직 중요한 내용은 없으니 상관 없습니다.
나중에 제대하고 지금까지 쓴걸 다시 읽어봐야겠지요ㅡㅡ
* 2부는
백룡 - 카리에르제 - 레쥬에브(흑 좌)
vs
은룡 - 리체르아(백 좌)
대강 요런 구도입니다. 이것만 생각해도 흘러갈 스토리가 둥실둥실 떠오르는군요.
*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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