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129화-
정령은 한참동안 별다른 대꾸 없이, 멍하니 비가오는 도시 저편 너머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정말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봐."
- 그런가….
정령은 계속해서 인간들이 밝혀놓은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발을 길게 기른 늘씬한 인간 여성의 모습…. 본래 내 육신이건만, 가느다란 팔 다리가, 비로 인해 몸에 옷이 착 달라붙어 드러내고 있는 몸의 부드러운 곡선이, 모두 원래 내것이 아닌 정령의 것이었던것 같이 느껴졌다.
정령은 탁한 호박색 눈동자를 크게 치뜨고, 여전히 인간들의 도시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엔 내 시선과는 다르게 평가라는게 없다. 좋다, 싫다를 떠나, 자연 그 자체에 가까운 정령은 어둠이란 자연을 거슬러 밤에 붉을 밝히는 인간들에 대해서 순수하게 놀라워 하고 있었다.
정령이 하고 있는 모습이 원래 내 모습이라는건 아무 상관없이, 그냥 그 모습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 과거의 루루렌칼리체가, 어쩌면 정말로… 이 정령에게 반한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허무한 자조와 함께 덧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과거의 내가 정말…?
답은 공허하다.
"사실… 정말로 이렇게 데리고 나와줄지는 몰랐어. 무리한 부탁이란건 알았거든. 육신이란게 없는 정령에게 육신을 달라니…."
- ….
"설마… 네 몸을 빌려줄 줄이야."
정령은 히히- 하고, 인간의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리고 정령은 스스로의 몸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사랑하던… 루루렌칼리체의 모습이야. 백룡 루루렌칼리체도 아니고,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루렌칼리체도 아니고… 그냥, 나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편히 쉬던… 여자애의 모습을 한 루루렌칼리체의 모습이야."
- 너….
"알고있어, 내가 사랑하던 루루와 지금의 루루가 거의 완전히 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다르다는걸…."
내 육신을 입고 있는 정령의 얼굴이 하늘에 잔뜩 낀 검은 먹구름처럼 흐려졌다. 그리고 곧 구름이 낀 하늘에서 비가오듯, 정령의 얼굴에서도 비가 내리는듯 했다.
투명한 액체가 눈가에 맺혀, 볼을 타고내렸다.
… 우는, 건가?
모르겠다. 울고 있는 건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바람에 날려 얼굴로 떨어지는건지.
"사랑해, 루루."
정령은 스스로의 몸을 감싸안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던 루루렌칼리체에게 향하는 것인가?
난 정령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대답을 바란 말이 아니었던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라… 사랑이란게 정말 뭔지…. 팔백년 전 쯤, 베델이란 인간이 내게 말했었던 것도 사랑이었지.
인간이 내게 사랑을 말했었고,
정령도 내게 사랑을 말했다.
하지만 영원을 살아가는 드래곤인 나는 정말로 사랑이라는게 뭔지 모르겠다.
사실, 사랑이라는건… 유한한 존재들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니까. 영원성… 불멸, 끝이라는게 없는 나에겐, 사랑이라는 감정은 절대로 허락될 수 없는 영역이다.
아무리 정령이 사랑을 내게 속삭여도, 나의 굳건한 정신은 그에 응하지 못하고, 그 불응으로 인하여 일방통행일 뿐인 그 가여운 감정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은 연민으로 환원된다. 왜… 어째서 이 정령은 나같은 존재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과거의 나는… 이 가련한 정령을 정말로 단지, 메신저로서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와 그렇게 다르단 말인가…? 고작 기억의 쌓음이 나를 구성하는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 ….
과거의 루루렌칼리체에 대해, 망각을 할 수 없는 존재인 내가 망각의 벽을 느낀다. 그 망각의 벽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나는 전에 인간의 현자에게 답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용이라는 존재가 결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이 정령을,
진정으로… 사랑했었음을.
- 응, 나도 사랑해(-ㅆ었다).
#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내 육신을 되찾았고, 정령은 다시 나무로 화했다. … 나무에서 발하는 빛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 예상하고 있었지. 정령은 거의 육 천년 동안이나 존재해왔다. 그 존재가 이제 시간에 흩어져 버릴때가 된 것이다.
- 루루… 네게 말은 못했지만, 눈치채고 있었겠지? 정령의 수명은 거의 반 만년… 나 정도면 굉장히 오래 산거지.
후드드득- 하고, 나뭇가지가 마치 손짓처럼 흔들렸다.
"응…."
아무리 오래 살아가는 존재라도…, 결국은 죽음이 찾아온다.
- 내 의식은 곧 흩어질거야. 난 자연에서 태어났으니 다시 완전한 어머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지. 하지만 난 이걸 죽음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어, 루루.
"그래…."
나는 나무껍질에 부드럽게 손바닥을 올렸다. 투둑, 하고 껍질 조각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무에게서 나오는 빛은 거의 사그라들어 있었다.
- 마지막 부탁이 있어.
"…."
- 내 의식이 흩어지고 나면, 이 나무에 열매가 맺힐거야. 네가 그 과실을 취하고, 씨앗을 땅에 심어줘. 루루… 네가 원하는 곳에.
"그럴게…."
나는 정령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연의 일부, 그 자체인 정령에겐 이름이란건 없다. 정령의 본체인 나무의 이름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정령의 이름이 될 순 없겠지.
이 정령이 남기는 씨앗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자아를 획득한 강력한 정령이 머문 나무의 씨앗이니까. 그 씨앗에서 자라난 나무 역시 자연의 정(精)에서 자아를 획득하여 정령이 될 것이다.
미래에, 나는 그 정령에게 이름을 지어 줄 것이다.
- 그래도… 의식이 흩어지기 전에, 루루를 봐서 좋았어.
정령은 히히- 하고 웃었다.
- 세계는 유한하다.
"응?"
- 반 만년 전에 루루가 나와 헤어지기 전에 남긴 말이었어. 루루와 다시 만나게 되면, 꼭 그 말을 다시 해달라고 했었지.
세계는 유한하다…? 이게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남긴 메세지인가?
"… 고마워."
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제 내 앞에 있는건 그저 평범한 나무일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뒤로 돌아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별빛이 아스라하다. 구름에 가려, 달은 보이지 않는다.
"…."
… 풀벌레 한 마리 울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툭, 투둑-
… 어느새 이 공간에도 비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무에 기댄채 비를 맞으며, 계속해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빛이 선명하게 보이던 하늘이, 이제는 완연한 먹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비가, 머리카락을 적시고, 뺨을 때렸다. 비가 뺨을 타고, 턱을 타고, 목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태양이 떠오를때 까지, 계속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 그리고 구름이 걷히고, 하얀 태양광이 내게 내리쬐었다. 눈을 깜빡이며, 떠오르는 태양을 계속 바라보는데, 하늘에서 빨갛고 동그란 물건이 내 허벅지로 떨어져 내렸다.
하얀 허벅지에 벌건 자국을 남기고 내 옆으로 굴러가는 그 물체는… 나무의 열매였다.
오른손으로 열매를 집었다.
열매의 표면은 매끈하고, 딱딱했다.
아삭, 하고 열매를 한입 베어먹었다. 열매는 달콤하고, 즙이 많았다.
- 작가의말
* 역시 글쓰는게 재미있네요
* 성원해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 외전은… 뒤에 원래 어떻게 할려고 했더라? 기억이 안나서… 빨리 써야겠죠 ㅋㅋ
* 차기작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인지 속도가 영 안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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