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28화-
과연, 기사 베르딧의 말대로 그 이후로 며칠 지나지 않아 왕궁의 입구로 화려한 마차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마차들은 모두 하나같이 크고 화려했지만 그 마차를 끄는 말들의 수는 두마리에서 여덟마리까지 제각기 달랐다. 아마 신분에 따라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의 수가 다른 모양이군. 재미있는 일이다.
"칼리체님은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몇시간 동안 내내 창밖만 바라보시는 거에요?"
칼리아넬은 침대 위에 걸터 앉아 다리를 흔들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창밖의 광경이 꽤 흥미로웠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돌아서서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순간, 내가 내려다 보고 있던 창문 아래서 꽤 거대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공간이 찢어지며 시공간의 끈 몇가닥이 허공으로 흩날린다. 찢어진 공간 사이로 나타난 것은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남성과 어린 소녀였다.
"이런, 사소한 실수로 엉뚱한 곳에 와버렸구나. 하지만 왕궁안은 맞는것 같으니 다행이군."
내가 지금껏 들어본 인간의 목소리중 그보다 냉정한 목소리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에서는 상당히 강대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아마 인간들 사이에서 마법사라고 불리울 것이다.
"네, 아버지."
뒤이어 들린 소녀의 목소리는 차라리 남자의 목소리가 더 낫다고 느껴질만큼 지독히도 감정이 결여된 목소리였다.
소녀는 예쁜 금발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거의 나만큼이나 표정이 없어, 지금 내가 있는 방안 찬장에 들어있는 인형이란 물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음, 그렇다면 나도 다른 인간에게 저 소녀처럼 인형같이 보이지는 않을까.
시덥잖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금발의 소녀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의 눈동자는 차가운 느낌이 감도는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지독히도 공허해 살아있는 인간의 눈동자라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소녀는 텅빈 눈동자로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남자를 따라 어딘가로 가버렸다.
"칼리체 님…?"
"응."
"왜 그러세요? 갑자기 저에게 대답하려다 말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시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난 기대어 있던 창문가에서 벗어나 방안의 풍경을 시선안에 두었다. 이제는 이 풍경이 무척이나 익숙해졌다.
인간들의 사회에 들어와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이 왕궁안이라니, 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그나저나 베델은 괜찮을까요? 벌써 일주일이 넘은것 같은데."
"글쎄."
그의 안전을 걱정하는것은 그다지 무의미한 일인것 같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인간들 보다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비록 기사 베르딧 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무기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런것 뿐이었다.
난 베델이 기사 베르딧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별로 의미는 없는 이야기지만.
똑똑.
갑작스레 문쪽에서 목재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노크라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문을 두드려 봄으로써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들어가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는 행동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칼리아넬은 노크라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색한 목소리로 문에다 대고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것은 인간의 현자, 베르센크였다.
"칼리체 님의 목소리가 아니라서 놀랐는데, 다행히 계셨군요. 그런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베르센크는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 보이고는 칼리아넬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차갑다.
칼리아넬은 그런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주늑이든 모양이다.
"그녀는 숲의 요정이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굳어져 있던 그의 표정은 따뜻하게 풀리고, 차갑게 빛나던 눈동자도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카, 칼리아넬 이에요."
"예, 칼리아넬 양. 저는 베르센크 라고 합니다. 사실 뒤에 더 붙는 쓸데없는 말들이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아닌 당신에게는 무의미한 이야기겠지요."
칼리아넬은 갑작스레 변한 그의 분위기에 당황한 모양이다.
"실례지만, 칼리아넬 양의 겉모습은 인간과 다른점을 전혀 찾아볼수가 없군요."
"그것은 내 마력에 의한 것이다."
내가 허공으로 손을 내젔자, 그녀의 인간처럼 뭉툭한 귀가 뾰족하게 변하고 그녀의 존재감이 사뭇 달라졌다.
겉모습도 겉모습이지만, 무엇보다 요정과 인간의 가장큰 차이점은 존재감에 있다. 내 마력에 의해 숨겨졌던 그녀의 요정으로서의 존재감이 이 방안을 가득 매웠다.
굳이 묘사하자면 내게 요정의 존재감은 막 일어났을 때의 기분좋은 나른함과 같았다.
"과연… 인식 장애 '마법'이군요."
내가 다시 허공으로 손을 내젓자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 인간과 전혀 다를것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칼리아넬은 내 신속한 마력 유동에 놀란 모양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날 찾아온거지?"
"며칠 뒤에 국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베르센크는 국왕에게 전혀 존칭의 예를 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전혀 거침이 없었고, 오히려 나는 그가 약간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들어서 알고 있다."
"칼리체 님도 그곳에 참석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반가운 제안이다.
대다수의 인간들을 통치하는 인간 위정자 들의 모습은 어떠한지 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내 인간으로서의 신분은 평민이기 때문에 귀족들만이 모이는 무도회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현자라 불리며 떠받듬을 받는 베르센크의 도움을 받는다면 지금의 내 신분으로도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겠지.
"좋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는거지?"
"물론, 칼리체 님에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좀더 자세히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지요. 저는 당신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과연, 그렇군.
"칼리아넬, 너도 나를 따라 인간들의 무도회에 참여해 보지 않겠니?"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어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죄, 죄송해요. 아무래도 저는 그런 자리에는…"
어째서 내게 죄송한지 모르겠군.
나는 그저 제안을 했을 뿐이고, 그녀가 제안을 거절함으로서 내게 온 피해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전보다 나를 편하게 대하긴 해도 아직까지 나를 어려워 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모양이군.
"그럼 있다가 칼리체 님의 체형에 맞는 드레스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거절하겠다."
"네? 하지만 무도회는…"
"인간 여성이 드레스라는 옷을 입은 모습을 보았는데, 무척이나 불편해 보이더군. 설마, 그 옷을 입어야만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는건 아닐테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의 현자라는 신분으로 그 정도야 해결할 수 있을테지."
게다가 드레스를 입자면 내가 현 상태에서 벗어나 완벽한 인간의 여성으로 변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마력의 양이 너무 많아 현재의 상태로서는 피곤한 일이다.
아직 어떤 성별로 할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옷 따위로 성별을 정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 알겠습니다."
왠지 그는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며칠뒤 무도회가 시작될때 다시 뵙지요. 하지만 칼리체님, 무도회때는 그래도 어느정도 격식에 맞는 옷은 입어주셔야 합니다. 드레스가 아니더라도요. 그곳은, 그런 자리거든요."
그런 자리- 라는게 무슨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말대로 어느정도 격식은 갖추어 주는게 현명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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