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외전 : 드래곤 슬레이어(22)-
#4 - Dragon Slayer(22)
다행히 대화 주제는 금방 본래의 궤도로 돌아올것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가벼운 웃음과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던 밀레유는 표정을 진지하게 굳혔으니까
단순히 친교차 이 마을을 방문한 것은 아닌것 같고… 무언가 목적이 있겠지. 벨로그렌스는 이미 그녀의 목적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곧 표정과 마찬가지로, 진지한 음색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녀의 다홍빛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헬케튼 씨, 요즘 마물의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단순한 질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헬케튼은 그 질문에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생각할 것도 없네. 당장 최근에만 해도 우리는 마물의 습격에 의해 적지 않은 마을 사람들의 희생을 겪어야만 했네."
헬케튼의 대답에 그녀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였어요. 만약 벨로그렌스 님이 도움을 주러 와주시지 않았다면 희생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테지요."
그렇게 말을 마친 뒤, 밀레유는 의자 옆에 세워둔 작은 가죽 가방 속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것은 하얀 종이였다. 윗 마을은 종이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과 시설을 가지고 있는 걸까? … 그렇다고 보긴 어렵겠지.
아무리 윗 마을이 이 마을에 비해 규모가 거대하다고 해도 요르간드 너머에서 한창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들의 도시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할 것이다.
펼쳐진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지도였다.
"언제 이런것을…."
헬케튼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지도를- "
순간, 밀레유의 표정이 약간 흐려졌지만 그것은 실로 잠깐이었다. 곧 그녀는 본래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만들기 위해 자그마치 열 명이나 되는 인원의 희생이 있었어요. 제게는 가장 귀중한 물건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보물중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죠."
종이 위에 그려진 이 지역 근방의 지도라… 확실히 놀랍긴 하지만 열 명이나 되는 인원의 희생을 감수해가며 손에 넣을 만큼의 가치가 저 지도에 있을까.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리고 그런 내 내면의 의견을 부정이라도 하듯, 밀레유는 확신의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도를 이용해 이 주변 일대를 개척하기 시작 할겁니다."
"개척, 이라고…."
헬케튼은 숨을 삼키며 말했다.
물론 이 마을 사람들도 이 지역을 개척해 부족하나마 삶의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밀레유가 말하는 개척은 그것과는 다른 의미의 개척일 것이다. 아마도 밀레유가 말하는 개척은 '확장' 의 의미겠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마물의 습격에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이 상황에서 개척이라…. 당찬 인간이군.
"이곳을 봐주세요."
밀레유는 헬케튼의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지도의 한 부근을 손으로 짚었다. 위치상으로는 대강 윗 마을과 이 마을의 중간 정도 되는 부분이었다.
"최근, 마물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어요. 시간이 갈수록 마물의 습격이 빈번하고 거세어지는 것은 이것 때문이죠."
"그럴수가. 이건 너무 가깝지 않은가?"
헬케튼의 얼굴이 위기감으로 물들었다. 밀레유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잠깐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띄웠다. 아마 그녀가 의도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듯 싶었다.
"맞아요, 너무 가깝죠. 그리고 이곳은 강이 흐르고 주변에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이 풍부한 곳이에요. 이대로 두면 마물은 점점 더 세를 불리고 이번 습격보다도 더 끔찍한 공격을 우리에게 가하겠죠. 이번보다도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거에요. 어쩌면 마을 자체가 궤멸될 수도 있겠죠."
밀레유의 말에 헬케튼은 침중한 얼굴이 되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전에 했던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건가…."
전에 했던 제안?
내 의문은 금방 풀어졌다. 밀레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에 관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맞아요. 양 마을을 합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생존의 문제죠. 이대로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면 우리는 모두 결국엔 마물의 먹잇감이 되고 말거에요."
그 말을 들은 헬케튼은 명백히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밀레유 양이 보기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일수도 있네. 하지만 양 마을을 합병하자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 미안합니다, 헬케튼 씨. 말이 지나쳤어요."
밀레유는 헬케튼의 부정적인 반응에 전혀 당황하지 않은채 깔끔히 사과했다. 나는 그 태도를 주목했다. 밀레유라는 이 인간 여성의 화법은 내가 지금껏 보아온 보통의 인간들의 화법과는 다소 달랐다.
언어를 통한 의견의 전달, 그 반응, 상대의 반응을 본 자신의 반응, 그리고 언어. 이 선형의 도식에서, 그녀는 상대의 반응을 본 자신의 반응이 지나치게 짧다. 다시 말하면, 그녀가 내비치는 감정은 정교하게 가공되어 있는것 같다. 뿐만 아니라, 대화 중 상대를 자신의 의도대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대단할 것 까지는 아닌 기교지만, 지금까지는 목격해보지 못한 태도라 꽤 신선하다. 귀족이라는 그녀의 특별한 출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니 우리는 애초에 요르간드 너머에서 쫓겨온 사람들일세. 각자의 이유는 모두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지배 계층의 부당한 권력 남용 때문이네. 허리가 휠 정도로 무거운 세금, 노역, 억울한 누명 등 이 그 대표적인 사례지. 흔한 일이야."
"…."
"이런 사람들이니 만큼, 가장 경계하는 것이 뭔지 아는가? 바로 위계, 계급이라네. 때문에 사실 나는 이 척박하고 작은 마을이 발전하는 것을 원치 않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는 서로를 돕지 않으면 안되니까. 작물을 기르는 것이다 동물을 사냥하는 것, 건물을 짓고 보수하는 것. 이런 생존을 위한 노동은 또다른 생존을 위한 노동과 교환되어 결국 모두의 생존으로 귀결된다네. 이런 상황에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에 설 수 없지."
"하지만- "
밀레유는 반론하려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헬케튼의 목소리에 말이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것, 누군가가 누군가의 아래가 될 수 밖에 없는것. 이러한 '계급' 을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풍요로움이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계급을 만드는 것은 풍요로움이다.'
재밌는 아이러니로군.
"하지만…."
헬케튼은 누그러진, 혹은 체념과 같은 기색으로 말했다.
"밀레유 양의 말이 맞네. 우리는 생사의 기로에 서있지. 이런 상황에서 아집일지도 모르는 내 생각에 모든 것을 걸 용기는 없네. 그러니 내일 마을 사람들을 모아 모두에게 의견을 묻도록 하겠네."
"기다리겠습니다, 헬케튼 씨."
밀레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밀레유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를 붙잡았다.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벨로그렌스지만.
"벨로그렌스 님, 실은 당신에게도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요."
"제게 말입니까?"
이것은 전혀 언질이 없었던 얘기일까, 벨로그렌스는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밀레유는 그를 마주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녀의 대부분의 행동들이 그렇듯 정교하게 조형되어 있었고 그 속에선 벨로그렌스를 향한 다소 노골적인 호감이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벨로그렌스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두 마을이 하나가 되면 마을을 지킴과 동시에 마물을 퇴치할 자경단을 조직할 생각입니다. 벨로그렌스 님께서 그 자경단을 이끌어 주셨으면 해요."
"미안합니다만…."
벨로그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쩔 수 없이 검을 잡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더 이상 검을 잡지 않을 생각입니다."
"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인지 밀레유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물 수십 마리를 단시간에 도륙할만한 엄청난 힘을 가지고서도 말인가요? 저는 요르간드를 넘어가기 전에도 당신과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은 본적이 없어요!"
그렇게… 의외였던 걸까? 밀레유는 완전히 평정을 잃고 있었다. 사실 벨로그렌스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보다도 더 이상 검을 잡지 않겠다는 말에 더욱 충격을 받은것 같았다. 벨로그렌스의 검술 실력이 상식 외 인만큼, 저 충격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긴 한다.
"미안합니다."
그는 정말로 미안하다는듯 멋쩍게 웃으며 재차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째서죠!"
밀레유의 거친 반응에 벨로그렌스는 다소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가며 돌아보았다. 밀레유는 그런 벨로그렌스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의 시선에 나에게로 와 닿았다.
"그건- "
결국 곤란함을 안고 벨로그렌스가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밀레유도 스스로가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즉시 사과해왔다.
"미, 미안해요. 제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더 이상 검을 잡지 않겠다는 것은 벨로그렌스 님의 개인적인 선택이니 그 이유를 제게 말씀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당혹스러움을 보이면서도 밀레유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게도 사과했다.
"리체 양에게도 초면에 못난 모습을 보여 미안해요."
못난 모습을 보인게 미안하다니, 이상한 사과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겉으론 별다른 의문을 보이지 않고 태연히 그 사과를 받았다.
"아뇨, 괜찮아요."
"힘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밀레유 양. 하지만 당신이라면 저 같은 녀석의 조력 없이도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 아뇨. 당치 않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벨로그렌스 님, 리체 양."
벨로그렌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도망치듯 우리에게서 벗어나고 말았다.
#
"대단한 사람이었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작은 숲을 지나는 도중, 나는 벨로그렌스에게 그렇게 물었다. 수풀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작은 동물이 고개를 빼꼼히 비추고,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등 뒤로 지나갈 때까지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끼며 옆을 돌아보니, 벨로그렌스가 나를 멍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되서야 비로소 대답이 돌아왔다.
"아, 미안. 리체가 누군가를 그렇게 평가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어."
엄밀히 말하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로군. 내가 누군가를 평가한다는게 그렇게 놀랄만한 일인걸까.
"왜요?"
"글쎄, 뭐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평가하는 평범한 잣대를, 리체가 가지고 있을거란 상상이 안든달까."
평가의 잣대? 여전히 알쏭달쏭한 이야기다. 나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내 옆을 지나가는 노란색 나비를 바라보며 언제나 처럼 그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무슨 얘기에요?"
아.
날아가던 나비가 거미줄에 걸렸다. 굶주렸던 모양인지 거미가 득달같이 나비에게로 달려 들었다. 나비에겐 죽음, 거미에겐 오늘의 양식. 대비되는 삶과 죽음이었다. 순간, 나비에게는 마을 사람들이, 그리고 거미에게는 마물이 겹쳐보였다.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니까 말이지.
"어, 음… 리체가 요정이라서 그런건지 모르겠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아! 예를 들면 네 눈앞에 산만한 황금 더미가 있다고 상상해봐. 어떤 기분일것 같아?"
어려운 질문이었다. 답을 찾기 힘든 까닭이다.
"으응, 꼭 무슨 기분이 들어야 하나요?"
"바로 그거야!"
다소 우습지만, 벨로그렌스가 원하던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기꺼워 하는 모습을 보였다. 벨로그렌스는 이어서 말했다.
"만약 산더미 만한 황금이 눈 앞에 나타난다면, 보통 사람은 아마 기절할거야."
"미심쩍군요. 금에서 사람을 기절 시키는 무언가라도 방출된다는 얘기인가요? 금은 그저 황색의 광택이 도는 금속일 뿐인데요? 물론 금이 인간들의 사회에서 귀한 화폐로 통용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말이죠."
"아, 그러니까 기절 한다는건 기절할 만큼 기뻐할거라는 표현이야. 네가 방금 말한대로 금은 귀한 물건이니까."
음 그러니까….
나는 지금의 얘기와 벨로그렌스가 말한 타인을 평가하기 위한 잣대를, 내가 가지고 있을거란 상상을 못했다는 이야기를 연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것이 맞았는지 벨로그렌스를 통해 확인해 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 감수성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르니까, 그녀를 두고 대단하다고 한 통상적인 평가가 되려 놀랍다는 이야기로군요?"
"맞아, 바로 그거야!"
벨로그렌스는 내게 자신의 의견을 이해시킨게 기쁜 모양인지, 빛이 무색하도록 환하게 웃었다. 다소 과장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미소가 환한 나머지 나는 픽, 웃고 말았다.
으음, 내가 자연스럽게 웃었다?
꽤 오랫동안 인간들과 생활하다 보니, 이 신체엔 어느샌가 습관이라는게 자리잡은 모양이다. 학습된 조건 반사라고 해야할까. 나는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든 예시가 그다지 좋지는 않네요."
"리체! 방금 웃었지!"
방금 벨로그렌스가 든 예시에 대한 내 박한 평가는 무참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것보다 웃었다는게 그렇게 놀랄만한 일일까, 벨로그렌스는 옮기던 발걸음도 멈춘채 내 어깨를 붙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 이상했나요?"
"이상하기는! 리체는 잘 웃지 않으니까 웃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래. 다시 한 번 웃어볼래?"
다시 한 번?
두번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별난 요청을 하는 벨로그렌스에게 다시 한 번 웃어보였고 그는 방금 전 보다도 훨씬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자신의 품에 꼭 껴안았다.
- 작가의말
*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 이 커플은 점점 닭살 커플이 되가는 듯(...)
Commen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