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72화-
"마경에 간다고 하시었소?"
잔뜩 때가 껴 바깥이 노랗게 보이는 창문.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는 검은색의 얼룩이 묻어있는 탁자… 하여간, 더러움을 상징하는 온갖 모든 것들이 이 여관안에 잔뜩 널려 있었다.
마경 근처가 아니었다면, 바닥에는 벌레들이 들끓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네, 그렇습니다만."
베델은 아침으로 나온 오트밀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떠먹으며 대답했다.
"흠, 이곳에 온걸 보면 사정은 알겠지만… 요새 마경은 평소때 보다 더욱 끔찍한 곳이라네. 최근 여러 마을에서 아이들이 실종된 건, 마경이 집어 삼켜버렸기 때문이란 소문도 있고… 마물들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오는 모양이니 말일세."
"아이들이… 실종되었습니까?"
"아아-"
여관 주인은 담배를 태우며 성의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인간 아이들의 실종이라… 나도 아직은 마경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지 못했으니, 딱히 떠오르는건 없다.
베른헬체이스가 쓸데 없이 인간의 어린아이를 데려갈 이유도 없고 말이다.
베델은 여관 주인의 말을 듣더니 심각한 표정이다.
"신경 쓰이나요?"
"으응, 조금."
… 조금이 아닐테지.
분명, 이 인간은 속으로 끙끙대며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아이들을 구하려 노력할 것이다. 마경 때문에 실종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도, 마경으로 끌려간 것이라면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군.
여관 주인의 말 때문인지 칼리아넬은 내게 불안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에카테야르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듯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다.
여관 주인이 아무리 위험하다 겁을 준다 할지라도 나는 칼리아넬이나 에카테야르 때문에 마경으로 들어가는걸 미룰 생각이 없다.
마경이라는- 내가 모르는 공간이라는 것에 대한 흥미도 흥미이지만… 베른헬체이스,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으니까.
말하는 걸로 봐선, 베른헬체이스는 기억을 리셋하기 전의 나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일부러 리셋한 기억이라면, 굳이 다시 떠올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끼익-
듣기 싫은 마찰음이 여관 안을 울리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로브를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어오는 두명의… 요정?
"아…?"
칼리아넬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순간, 경악어린 빛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경 근처에서… 요정이라고?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다.
"드디어 찾았군요, 칼리아넬."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
분명, 내 기억에 기록되어 있는 목소리다. 오늘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의 개수조차 모두 기억하는 나니까.
그 목소리의 주인은…
"레피린체!"
그래, 그런 이름이었군.
로브의 후드를 젖힌 여자는 푸른 머리카락에 깊게 가라앉은 눈빛을 지닌, 성숙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요정이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 난다.
그녀는 내가 칼리아넬의 요청을 받고 루그란 숲으로 갔을때, 그류벨과 대치하고 있던 요정이었지.
아마도 이곳까지 따라온 목적은 아마도, 칼리아넬인 모양이군.
"설마 마경 근처까지 왔을줄이야…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세계수를 져버릴 생각이었나요, 칼리아넬."
마치 잔잔한 노래를 하는것 같이 들리는 요정어(語)였다.
세계수라…
그랬군, 칼리아넬은 세계수의 정(精)에서 태어난 요정이었던 것이다.
"돌아가야 합니다. 칼리아넬. 세계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성장을 마치고 싶은 생각은 아니겠지요?"
옆에 있던 또다른 요정이 레피린체의 말을 거들었다.
단 둘만이 온건가…
난 단 음료가 들어있는 유리컵을 입가에 대고 마시며, 유리 사이로 보이는 두 요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요정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신비로 인해 유리로 인한 빛의 굴절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똑바로 보였다.
칼리아넬과 같은 미숙한 요정과는 확실히, 격이 다르군.
"자, 잠깐만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굽니까? 도대체 알아들을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고는, 그리고…!"
베델은 양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다 완전히 얼어버렸다.
요정과 인간이 외모에서 유일하게 확연히 다른 특징, 뾰족한 귀를 보아버린 모양이다. 크기는 인간과 그리 다를것 없어서 머리카락 사이에 잘 보이지 않도록 가려져 있었을 텐데, 베델도 눈썰미가 꽤 좋군.
"설마, 요정?"
와장창- 하고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여관주인이 접시라도 놓친걸까?
나는 유리컵 주변에 약간 흘려버린 음료를 할짝이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지금껏 칼리아넬을 데리고 다니던 '인간'인가요?"
매끄러운 인간의 언어.
그류벨과 대화할때도 알았지만, 레피린체라는 저 요정은 칼리아넬이랑은 다르게 왠지 빈틈이 없어 보인다.
"그, 그렇습니다."
베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신없이 대답했다.
인간에게는 신비의 종족으로만 알려진 요정이 대뜸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거니, 그럴 수 밖에.
"어떤 경로로 당신이 칼리아넬과 동행하고 있는건지 저는 알 수 없겠습니다만…"
레피린체는 말끝을 흐리며 내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 눈빛으로 봐선 이미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듯 했다.
"칼리아넬은 우리 루그란 숲의 세계수에서 태어난 요정이며, 앞으로 모든 요정들을 이끌 여왕이 될 소녀입니다."
"에…?"
침묵이 흐른다.
칼리아넬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에카테야르와 베델은 경악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여왕. 사실, 그 말은 요정들 사이에선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레피린체는 칼리아넬이 여왕이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인간이 말하는 여왕과 요정이 말하는 여왕의 의미는 아무래도… 전혀 다르 겠지.
"하지만 칼리아넬은…"
베델은 칼리아넬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린다. 난 저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다. 칼리아넬의 주변에 흐르는 요정 특유의 신비와 뾰족한 귀가 인식 장애 마술로 가려져 있으니, 겉보기로는 진짜 인간과 다를게 없다.
…이제 정체를 숨기는 일은 그만해도 되겠지.
난 칼리아넬의 정체를 숨겨주던 나의 신비를 거두어 들였다.
종이에 물이 젖듯, 요정의 존재감이 주변에 스며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아-!"
"칼리아넬… 정말, 요정이었구나."
"미, 미안해요. 지금껏 줄곧 숨기고 있어서…. 언젠간, 언젠간 제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아무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런걸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채, 어색한 분위기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자- 이만 돌아갑시다, 칼리아넬. 숲의 자매들이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하, 하지만!"
칼리아넬은 다급한 표정이 되어 주변을 돌아본다.
아직도 놀란 표정이 가시지 못한 베델,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있는 에카테야르… 그리고, 나에게 와서 그녀의 시선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의 입이 열릴듯 말듯, 벙긋 거린다.
칼리체… 님-
눈에는 눈물이라도 흐를듯 잔뜩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곳에 남는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찾아온 요정을 따라 루그란 숲에 돌아가는 것인가.
내가 그녀의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는 일방적으로 나를 따라왔고, 나는 나를 따르는 그녀를 보호해 주었을 뿐이다.
최종 결정은, 그녀가 내리는 것이다.
"칼리아넬! 설마,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는건 아니겠지요?"
"…"
그녀는 분명, 이곳에… 정확히 말하자면 내 곁에 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루그란 숲에 있는 그녀의 자매들을 완전히 져버릴수도 없는 것이겠지.
칼리아넬에게 있어, 나의 무게는 루그란 숲에 있는 그녀의 자매들과도 동일한 걸까.
"칼리아넬, 아무래도 너는 돌아가는게 좋겠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네 자매들이 기다리고 있다잖아. 그들의 기대를 져버리는건 아무래도…"
베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굉장히 놀랐을 텐데도… 그의 말엔 여전히 칼리아넬을 향한 배려와 친절이 들어있다. 하지만 칼리아넬은 여전히 눈물을 글썽 거리며 어쩔줄 모르는 모습이다.
"칼리아넬."
"칼리아넬, 돌아가야 해요."
흔들리던 그녀의 시선이 결국 나에게 고정된다.
… 그녀의 눈빛은 나에게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내가 자신에게 가지 말라고, 붙잡기를 원하고 있는 건가.
만약, 그런 의도라면 애석하게도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
… 어리석은 요정.
결국 자신의 일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는군.
"칼리아넬, 네가 나를 따라오든, 루그란 숲으로 다시 돌아가든 그것은 온전히 네 자신이 결정할 일이다. 그것에 엉뚱히 내 의지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야 하겠지."
"카, 칼리체 님…"
나를 바라보는 슬픈 눈빛.
-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은 매번 울고, 웃고를 반복하는 군요, 칼리체 님. 당신의 자아는 너무 단단해서 제가 뚫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칼리체 님은 정말로… 그 누구도 필요치 않는, 홀로 완벽한 드래곤이군요.
저는 항상 그것이 두렵고, 안타깝답니다.
당신이…
전 당신이 필요해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좀더 성장해야겠지요… 저의 연약한 자아는 당신의 차가운 단단함에 깨어져 버릴테니 말이에요.
언젠간,
언젠가는, 당신이 저를… 두려워 하길 원하고 있어요.
머리속을 관통하는 칼리아넬의 말들… 이것은 마치, 만능의 언어 같군.
여전히 나를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린 요정의 소녀- 재미있군, 내가 자신을 두려워 하길 원하고 있다고…?
- 기대하겠다.
칼리아넬은 슬프게 미소지었다.
이별은 갑작스레 덮쳐오는 파도와 같아, 한꺼번에 모든것을 쓸어가고 허무밖에 남겨 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허무 밑에는 재회가 숨겨져 있어 그 허무를 결코 영원한 허무로 만들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적은 요정으로서는 더욱 그렇겠지.
그러니, 나는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 홀로 완벽한, 따라서 주인공은 중요한 의사 결정에 있어 타인의 의지가 관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뜻, 냉정하게도 비치지요. 딱히 냉정하지 않은것도 아니지만.
* 이제 진짜 마경으로.
* 칼리아넬이 요정들 사이에서 중요한 존재라는건 극초반에 정말 잠깐 언급 되었었습니다. 음...?
* 100연참... 지금 연재한게 72회 인데 100연참이라뇨 ㅋㅋ 저 죽습니다.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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