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1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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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 일찍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대편을 보니 로나벨아크하임은 여전히 잠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그에게 다가가 코에 손을 갖다대어 보았다. 손에는 느릿하고 규칙적인 숨결이 전해져 왔다. 그는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군….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이 정도로 정교하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수면에 빠지는건 당연하겠지만… 이 녀석이 진지하게 인간을 연기하는건 왠지 납득하기 힘들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다시 수업이 시작되는데…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의 침대에 걸터앉아 잠깐 동안 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욕실에 들어가 가볍게 씻고, 기숙사를 나섰다.
아직 고요한 교정을 걸어, 강의실로 들어왔다.
드륵-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큰 강의실 내에 메아리가 퍼지듯 잠깐 동안 울렸다. 큰 창문으로 맑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맨 뒤쪽 자리로 걸어가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은 뒤,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책상위에 펼쳤다.
종이라는 하얀 매체위에 검은색 잉크로 쓰여진 인간들의 문자가 보였다.
펜을 꺼내어, 잉크가 쓰여지지 않은 공간에 낙서를 해보았다. 이 '낙서'라는건 최근에 배운건데,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지루함을 느끼는 인간들이 그 지루함을 잠깐동안이나마 잊어버리고자 만든 간단한 유희거리였다.
전에 클래스의 어떤 인간의 책을 잠깐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인간의 책은 온통 낙서 투성이로 되어있었지만, 간단한 유희거리로 한 낙서라고 하기엔 상당한 수준이어서 잠깐 놀란 적이 있었다.
'지식의 전승' 이라는걸 배우는 인간도, 가르치는 인간도 모두 긍정하고 있긴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도 몇몇 있었던것 같다.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창가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를 발견했다.
짹- 소리가 들리더니, 새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새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펜으로 책에다가 그 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새의 모습은 한번 본 것으로 족했으므로, 나는 다른곳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얀색 종이에만 신경을 쏟으며 새를 그렸다.
"…."
'그림'이라는 것에 익숙하진 않지만, 이 정도면 꽤 잘그린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펜을 놓았다.
문득, 인간들이 왜 그렇게 타인을 갈구 하는지 진정으로 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내가 그린 그림으로 인한 것이지만… 인간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 평가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좋은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겠지.
… 쓸데 없는 생각들이었다.
나는 펜으로 꽤 잘그린듯한 새의 그림을 찍찍 그어 지어버리고는 의자를 조금 뒤로 젖혀 편한 자세로 강의실 안을 바라보았다. 너무 일찍 나온 탓일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 강의실 안으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나는 살짝 잠이들었고 정신이 들었을땐 꽤 많은 인간들이 강의실로 들어온 후였다.
"잠이 부족했어?"
부드러운 와인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 카리에르제…."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꽤 오랫동안 인간의 몸을 하고 있으면서 깨달은건데, 나는 햇빛을 받고 있으면 몸의 피로와는 상관없이 그냥 잠에 빠져드는것 같다.
내가 용의 몸을 하고 있을때, 오랫동안 태양이 지고, 뜨는것을 계속해서 바라만 본것과 관련이 있을까…?
"평소와 다르게 꽤나 시끄럽네."
카리에르제는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그의 말대로 주변은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시끄러웠다. 여러 인간의 말 소리가 섞여, 내게는 그냥 웅웅- 거리는 소리들로만 들려왔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들이 모두 하나 같이 요정여왕과 레케트리셴 문 여제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카리에르제가 가방에서 여러개의 종이 뭉치들을 꺼내는 것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요정 여왕에 대해 관심 없니?"
"글쎄… 먼 발치서 바라만 봐서 잘은 모르겠는데, 그들이 확실히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겠더라고. 평범한 인간과는, 뭐랄까- 존재감이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
음….
"관심있나보네?"
"멍청이."
카리에르제는 냉정하게 말하며, 들고 있던 종이뭉치로 내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건 말그대로 그냥 종이뭉치일 뿐이라서 하나도 아프진 않았다.
"이제 조금이야…. 조금만 더 하면 내가 그렇게 꿈꾸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는걸 볼 수 있는데 내가 다른것에 정신이 팔릴수 있겠어?"
그는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가볍게 흔들며 싱긋 웃어보였다. 그 어느때 보다도 밝아 보이는 미소였다.
나는 턱을 괴고, 그가 구겨진 종이뭉치들을 조심스럽게 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걸… 조금만 더 하면 현실로 다가오게 할 수 있다고…?
나는 현재, 나 자신이 조금 동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리에르제가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비공정' 이라는 물건이다. 그는 지금 그것의 완성을 거의 목전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 채 완전히 성장하지도 않은 인간 소년 단 한명이 그것의 이룩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건가…? 나는 솔직히 이 작은 인간 한 명이 그것을 이 시대에 이루어 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정체'를 눈치챈 인간이 있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꽤 놀라게 하는군….
나는 굳이 만능의 언어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사용하는 불완전한 언어에도 온전히 진심을 담을 수 있다는걸 보여주듯이, 그에게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정말… 기대하고 있어."
"완성하게 되면 너에게 제일 먼저 보여줄테니까… 그래, 그렇게 기대하고 있으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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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오늘따라 잠이 오질않아 기숙사 앞으로 나와 작은 연못가 앞에 앉아있었다.
손에 잡히는 작은 돌을, 연못가 안으로 던져 보았다.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연못가 안에 떠있던 풍경이 이지러졌다. 하지만 그런 이지러짐은 잠시였고, 연못은 곧 잠잠한 표면으로 돌아왔다.
상상해보았다.
카리에르제가 말하는 '비공정'은 어떤 물건일까, 하고.
물론, 그것이 하늘을 날 수 있는 물건이라는건 알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원리로, 어떤 방식을 이용해서 하늘을 나는걸까?
… 순수한 마법이 아닌, 마도 공학만으로 어떤 물체로 하여금 하늘을 날게 하는건 인간들에게 있어선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카리에르제에겐 특히 더 그랬겠지.
그런데 카리에르제가 보여주겠다는건 단순한 이론일까, 아니면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서 나마 실제로 물체가 하늘을 나는걸 보여주겠다는 걸까?
나는 그런 한가로운 생각들을 하며, 다시 한번 연못가로 돌을 던졌다.
흐려진 물의 표면은 내 모습도, 별도, 달도… 모든것을 어지러트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물의 표면은 아까처럼 다시 잔잔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잔잔하게 돌아온 물의 표면에서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내 뒤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역시, 이 아카데미 라는 곳에 계실줄 알았어요 칼리체 님."
"칼리아넬…."
그녀는 내게 다가오더니, 내 옆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주저 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라는 질문은 필요 없겠다. 그녀는 드래곤인 나를 시야 안에 두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의 요정이니까.
"여왕이라는 자리는 역시 불편하네요. 칼리체 님이 이곳에 계시다는걸 알고 바로 만나러 오고 싶었는데…."
약간 투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한 뒤, 칼리아넬은 내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어리광 부리는것 같나요?"
"글쎄…."
"농담이에요. 저도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인채는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대로다.
앞으로 흘러내린 녹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섬세한 손가락이나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몸의 아름다운 굴곡이 이제 칼리아넬을 어린아이라고 말하기엔 어렵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칼리체님은…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신건가요?"
"…."
"역시, 인간들과 관련된 일이겠죠?"
칼리아넬은 빠르게 물러서며, 대답을 강요하진 않았다.
"네거스텐 제국의 지배자… 레케트리셴 문 여제 라고 했던가요? …인간이 아니더군요."
역시, 알아차린건가.
칼리아넬은 내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한것 같다.
"그녀는 아마도 칼리체 님과 똑같은 드래곤이겠지요?"
"그래. 그녀는 실버 드래곤. 은룡, 레테닌시에스케다."
"어째서 인간들의 여제를 하고 있는 걸까요?"
칼리아넬은 의문조로 말하긴 했지만, 궁금해서 묻는다는 투는 아니었다. 나는 호수를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칼리아넬을 바라보았다.
나와 마주하는 칼리아넬의 눈빛이 왠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 어째서 칼리체 님은… 은룡이라는 분처럼 하지 않는 걸까요?"
"무슨 뜻이지?"
그녀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내 어깨에 기대었다. 요정들 특유의 청량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칼리아넬은 내 어깨에 기댄채, 마치 속삭이듯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봤을때, 현 시대의 인간들은 포화 상태라고 해도 될 정도로 발전해 있어요. 이 페트라발름에 있는 다른 어떤 종족들 보다도. 압도적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에요."
"…."
"그것은 은룡이라는 분이 인간들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드래곤이란 존재는 이렇게 개입하는것 만으로도 한 종족이라는 범주(Category)자체를 몇단계나 끌어올릴 수 있어요. 칼리체 님도…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좀 더 본격적으로 나서도 되지 않나요?"
그렇게 속삭이는 칼리아넬의 목소리가 마치, 유혹하는것 처럼 들려왔다.
좀 더 본격적으로… 라.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 역시 은룡처럼 전면에 나선다면 내가 의도하는 바를 좀더 신속하고, 편하게 얻을 수 있겠지."
칼리아넬은 아무말 없이 계속해서 내 어깨에 머리를 묻은채 내 말을 들었다.
"네 말대로 드래곤은 강력한 존재다. 은룡처럼 통치하는 것 만으로 한 종족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고, 인간들이 위대한 업적이라 칭송할 만한 것도 수십개는 손쉽게 달성할 수 있겠지."
나는 잠시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햐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형상을 한 드래곤을 영웅이라 믿으며, 자신들이 불합리한 현실을 한순간에 바꾸어 버리고 모든걸 이상적인 방향으로 처리할것을 믿으며- "
영웅…. 걸맞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은룡역시 이곳에선 이곳의 인간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은 퇴보하는것이나 다름 없어."
그래… 흑색의 좌가 내게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나아가야 해' 라고 말했었던 것 처럼, 나 역시.
"나는 인간들이… 영웅이란 존재 없이 나아가기를 원한다."
칼리아넬은 내 대답을 듣고,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침묵을 지키며 잠깐동안 함께 연못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연못엔 물고기가 있었던 모양인지,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찰박- 하고 무언가가 튀어올랐다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칼리체 님은 정말… 변하지 않는군요. 저는 이렇게나 변했는데…. 그래서 이렇게나 성장 했는데도 칼리체 님을 의지하는 걸까요?"
나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칼리아넬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칼리체 님, 부탁이 있어요."
칼리아넬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깃들었다. 나는 그것을 쉬이 넘기지 않고, 계속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어질 뒷 말을 기다렸다.
"이곳에서의 일이 모두 끝나게 되면, 요정들의 왕국에 와서… 제가 죽을때 까지만 저와 함께 사시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칼리아넬은, 여전히 내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죽을때 까지… 라고 해봤자, 내게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다. 칼리아넬이 바라는건, 그 찰나와도 같은 나의 시간인가.
고작 그것이라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가, 그녀에게 대답해 주었다.
"알았어."
"… 약속이에요?"
응석을 부리는 듯한 말투로군. 나는 그녀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다시한번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약속할게."
- 작가의말
* 이번화의 주제는 칼리아넬의 프로포즈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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