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외전 : 드래곤 슬레이어(23)-
#4 - Dragon Slayer(23)
얄팍한 천으로 만들어진 커튼을 걷자 눈부신 황금빛 햇살이 집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도무지 눈으로는 쫓을 도리가 없는 빛을 쫓듯, 나는 창문으로부터 집 안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규칙성을 갖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작은 먼지들이 빛의 궤적을 선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으음."
빛이라는 갑작스런 시각 자극 때문인지 침대위에 누워있던 벨로그렌스가 몸을 뒤척이더니 희미하게 눈을 떴다. 하지만 그저 눈을 뜬 것 뿐이다. 그는 여전히 잠에 사로잡힌채 헤어 나올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흐리멍텅한 시선이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내 발끝을 향해 있다가 점차 위로 올라왔다.
쉽게 인지하기 힘든 눈의 움직임이었지만 그 움직임이 워낙 느려 나는 그것을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치 지금의 내 모습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뇌리에 완전하게 새겨 넣으려는 듯한 느낌이다.
알몸위에 얇은 상의를 입자 그 시선이 아쉽다는듯 흩어진다.
"피곤하면 더 자도록 하세요. 지난 밤은… 너무 무리했어요."
아이를 낳아보자는 제안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걸까. 헬케튼의 말대로 그는 무척 기뻐했다. 너무 기뻐한 나머지 그 감정의 크기가 다소 과다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째서 갑자기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
벨로그렌스는 내게 그렇게 질문했다. 나는 그 질문에서 명백한 기대를 읽었다. 나는 되도록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고자 했다. 유감스럽지만 내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내보이고 있는 기대의 정체를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까닭이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는 가족이란 연대에 대해 무척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내 일상적인 대답처럼 건조하게 들리지 않도록 애를 써야했다. 애를 쓴다고 해봐야 그 동안 수집한 감정에 따른 인간들의 목소리 패턴을 그대로 연기할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전에 에밀렌이 낳았던 아기를 보고 느꼈어요. 당신과 내 사랑이 가족의 확장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름 꽤 그럴듯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벨로그렌스는 내 말을 듣고 조금 미묘한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얼굴에 활짝 웃음을 피워 올리며 말했다.
'리체다워.'
나답다라….
벌써 리체라는 요정은 타자에게 어떤 일정함을 인지시켜 줄 수 있도록 일관된 정체성(Identity)을 확립당한 모양이다.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 아닌, 당했다는 표현이 좀 우습긴 하다.
'그러니 함께 노력하도록 하죠. 요정이 인간으로부터 수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힘든 일이니까요.'
'물론!'
그리고 그 대화의 결과가 이것이다.
나는 옷을 살짝 들어올려 내 몸을 내려다 보았다. 온 몸이 그가 남긴 붉은 흔적들로 뒤덮여 있었다. 지금의 내 피부는 색소가 결여되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얗기 때문에 그 흔적들이 무척 도드라져 보였다.
그렇게 적당히 스스로의 몸을 둘러본 후 아침 식사를 만들기로 했다.
주방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집 뒤쪽에 마련된 자그마한 공터로 나왔다. 얇은 상의 하나만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살갗에 닿는 아침 공기가 살짝 쌀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적당히 상쾌한 정도다.
적당히 장작을 모아 불을 지폈다.
벨로그렌스는 내가 간단한 마법쯤은 사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불을 피우기 위한 번거로운 사전 작업은 전혀 필요 없었다. 미약한 마력을 유동시켜 손 위에 불을 피워올리고 그것을 후- 하고 불자 장작 위로 불이 손쉽게 옮겨 붙었다.
그 위에 이 마을에서는 나름 귀한 물건인 철제 냄비를 올리고 어제 미리 길어두었던 물을 부었다. 음, 그 다음은 야채를 잘게 썰어넣고, 율에게서 받은 밀가루를 풀어넣고…. 아, 헬케튼에게서 받은 버섯도 썰어 넣기로 하자.
오늘 아침 식단으로 준비하려는 것은 지금 만드는 야채 스프에 빵, 그리고 과일이었기 때문에 식사 준비는 이것으로 반절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
나머지는 그저 그릇에 담으면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조금씩 연기가 피어오르는 냄비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옷자락이 살갗에 닿아 조금 간지러웠다.
"…."
시간이 조금 지나자 냄비안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냄비에서 나온 증기가 느릿하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던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냄비 안으로 소금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국자를 이 액체를 천천히 저었다. 점점 걸쭉해지기 시작한다.
국자를 들어 한 모금 맛보자 염분은 충분한 것 같았다. '간이 됐다' 라는 표현을 쓰던가.
"아."
뒤로부터 갑자기 온 몸이 끌어안기는 감촉에 놀라 하마터면 국자를 놓칠뻔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구 옷을 이것만 입고 있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벨로그렌스였다.
그는 뒤에서 부터 나를 안은채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채 걱정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 집이 위치한 장소는 마을로부터 다소 거리가 있는 곳인데다 이 주변엔 농사와 같은 생산 활동을 할 만한 곳도 없다.
나는 가볍게 답했다.
"이 시간에 다른 누가 여길 오겠나요."
"음, 나야 좋지만… 그래도 걱정되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엉덩이를 슬슬 쓰다듬었다.
설마 아침에도? 짧게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건 아닌것 같았다. 내 몸을 만지는 그의 손길엔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이건 성애의 목적이 없는 경우다.
아, 눌러 붙겠군.
나는 재빨리 국자를 들어올렸다. 그런 내 움직임에 벨로그렌스는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고 나는 다시금 국자를 이용해 스프를 휘적휘적 젓기 시작할 수 있었다.
"참 신기하단 말야."
벨로그렌스의 흥미는 이제 내 머리카락으로 옮겨진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내 뒤에 선채로 내 머리카락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엇이 말인가요?"
"리체의 야채스프 말야. 특별한게 들어가지도 않는데 항상 참 맛있단 말이지."
그건 아마 내가 극히 미세한 단위까지 재료의 양을 정확히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벨로그렌스에게 이 스프를 제공하며 재료의 양, 재료의 익힌 정도, 소금의 양, 물의 양, 걸쭉함의 정도 등을 독립변인으로 삼아 그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자 벨로그렌스의 반응은 점차 하나로 수렴했다. 그렇게 의도한대로 이 스프를 맛있게 느낀다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그의 말에 응수할 답이 궁하다. 지금까지 그의 반응에 따른 요리 레시피 수정 과정을 일일히 언급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때, 나는 어떤 논리적인 설명도 필요없게 만드는 만능의 단어를 이제는 안다.
"그건 아마 제 사랑이 들어가서 그런게 아닐까요."
"…."
물론 사랑은 형체가 없는 감정이고 그렇기에 그것이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얘기다. 그래도 이런 표현은 관용적으로 사용 가능한 줄 알았는데… 음, 적절치 못했나보다.
벨로그렌스가 얼이 빠진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가 나를 와락 끌어 안고 이리저리 뺨을 비벼왔기 때문에 방금의 단어 사용이 꽤 괜찮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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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벨로그렌스와 나는 마을로 내려갔다. 헬케튼이 밀레유의 제안에 대해 모두의 의견을 묻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소집했기 때문이다.
"벨로그렌스는 어떻게 생각해요?"
조그만 숲길을 지나가느라 다리에 묻은 이슬을 가볍게 털어내며 그렇게 물었다.
"뭘? 아, 그거 말야?"
벨로그렌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명백히 골치아프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며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걸음이 마을에 닿을때쯤이 되서야 입을 열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그는 걸음을 멈추어 잠시 눈 앞에 보이는 마을을 둘러보는듯 했다. 나는 그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결정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내리는 것이었다.
걸음을 재촉해 마을의 중앙부로 가자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직 헬케튼이 자신들을 모은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갑자기 이 마을에 찾아온 '윗마을' 사람인 밀레유와 관련되 있으리라 짐작하는 모습이었다.
"아, 벨!"
벨로그렌스와 함께 농사를 짓는 율의 모습도 있었다.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덕분에 어느새 이 마을의 가장 유명한 인사가 되어버린 벨로그렌스에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가 분분히 흩어졌다.
"으… 그렇게 부르지좀 말라니까요, 정말. 창피하게."
벨로그렌스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나와 함께 율에게로 다가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율 씨."
간단히 고개를 숙이며 그의 인사에 답했다.
내 얼굴만 보면 우물쭈물하던 예전에 비하면 무척 나아진 모습이었다. 이제는 현재의 내가 하고 있는 모습인 요정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진걸까.
"아직 헬케튼 씨는 오지 않은 모양이군요."
"곧 오겠지. 아마, 밀레유라는 윗마을의 아가씨도 같이 오지 않을까."
벨로그렌스의 말에 답하는 율의 표정이 꽤나 복잡했다. 그 역시도 어째서 헬케튼이 모두를 모이라 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옆집 에스데가 뒷산 중턱에서 진흙버섯이 잔뜩 자생하는 곳을 발견했다고 하던데 언제 같이가서 채집해 보지 않겠나?"
"진흙버섯이요?"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벨로그렌스가 그렇게 되물었다.
"그래그래, 진흙버섯. 흠, 모르나? 말려서 차로 달여먹어도 괜찮고 그냥 먹어도 순하고 담백해서 맛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남자한테 참 좋은데…."
율은 재빨리 내 쪽을 힐끗 돌아보더니 민망하다는 얼굴로 벨로그렌스에게로 다가가 작게 귓속말을 했다. 뭘까. 단순한 버섯에 나한테 숨겨야할 비밀스러운 사실이라도 있는걸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벨로그렌스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꼭…! 채집엔 무조건 함께 하고 싶군요."
"흐헤헤. 그렇지? 좋은 정보 알려준걸 감사하게 생각하라구."
둘 모두 이상한 표정으로 웃는게 상당히 수상해보였지만 내가 듣는것을 원치 않아하는 듯한 모습이 명백해 보였으므로 그것에 대해선 묻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잠시 잡담을 하고 있자, 모두의 예상대로 헬케튼과 함께 밀레유가 마을의 중앙에 도착했다.
- 작가의말
* 이건 도대체 언제 마무리 지을지ㅋㅋㅋㅋ
* 이 추운 겨울에 깨가 쏟아지는 커플 얘기를 적고 있자니 좀 슬퍼지는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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