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51화-
"여기 맥주요."
"아, 고마워."
베델은 이 술집의 영업이 끝날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벌써 그가 앉아있는 탁자 위에 쌓여있는 술잔이 열잔을 넘어가고 있다. 저것들… 다 어디로 들어가고 있는 걸까.
"베델,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군요."
"뭐, 그렇지…"
그는 우물쭈물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복장이 어지간히도 부담스런 모양이다. 이제 영업도 끝난것 같으니,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올까나.
"마커스 씨. 이제 옷, 원래대로 갈아입어도 괜찮겠지요?"
"아아, 물론. 영업이 완전히 끝났으니까 말이야. 이제 문도 닫아야 할 시간이고… 하지만 뭐, 저 친구는 칼리체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준것 같으니, 내가 특별히 봐주지."
난 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베델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네요, 옷 갈아입고 올테니까 여유롭게 마시고 있어요."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며 유니폼이 잔뜩 걸려있는 어두운 방에 들어왔다. 이 허약한 몸으로 몇시간 동안을 왔다갔다 하며 주문받고 술잔을 나르려니 정말 힘이 든다. 돈을 번다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음, 그나저나…
봉긋 솟아오른 가슴과 부드러운 몸의 곡선, 나는 지금 여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도 곤란한 것이… 에네리아와 에카테야르는 내가 남자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미리 성별을 정하지 않은 내 실수이긴 하지만… 왠지 이대로는 조금 곤란하군.
마력과 신력을 아주 약간만 개방해 나는 다시 나의 몸에서 성별이라는 것을 없애 버렸다. 여성의 모습일 때의 나는 그 여성스러움이 너무 티가 나서 도저히 여성이라는 것을 숨길수가 없다.
그러니 다시 무성으로 돌아올 수 밖에…
또다시 한숨을 쉬며 벗어논 유니폼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방을 나왔다. 마커스는 다시 얄팍한 헝겁 조각을 가지고 유리잔을 닦고 있었으며, 베델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마커스와 대화하고 있었다.
"아, 칼리체."
"무슨 얘기 하는 중이었나요?"
"하하, 말도 마라. 이 친구가 네게 입힌 복장이 너무 지나치지 않냐고 내게 한바탕 설교를 늘어 놓고 있던 중이었단다."
확실히 노출이 좀 과한 의복이긴 했지. 그 때문에 나는 어쩔수 없이 여성으로 변해야 했고 말이다.
"칼리체, 이 친구가 네 애인이냐?"
"아, 아, 아닙니다!"
내가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베델이 빠르게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왠지 그는 그 질문에 무척이나 당황한것 같은 모습이었다. 흠, 신경 쓰이는건가?
탁자를 짚고 몸을 숙여 베델을 빤히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애인이라… 사랑이란 감정으로 맺어진 남성과 여성의 관계, 인가. 후세를 생산해 종족을 보존시키려는 목적이 있기도 하다. 아니 나는 주된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인간들은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 훨씬 복잡하니까 단언할 수는 없겠지.
흐음- 인간의 기준으론 나도 꽤 매력적이게 생겼으니, 혹시 베델도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엄지손톱 끝을 살짝 깨물었다.
"일이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자. 시간이 너무 늦어서 모두 걱정하고 있을거야."
"으음, 벌써 돌아가려 하나? 내 지금까지 기다린게 가상해서 가게문을 좀더 있다 닫을려 했더니 말이야. 자네 아직 술도 남은것 같고…"
"아, 하하. 괜찮습니다."
베델은 잔에 남아있던 술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는 나를 끌고 술집을 나섰다.
왜이리 급하게 자리를 뜨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시끄러운 술집에서 고요한 거리로 나오니 산뜻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술이란게 뱃속으로 들어가면 인간들은 무척이나 시끄러워져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너어- 무슨 일을 하나 했더니 설마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을 줄이야! 너는 미성년자 잖아! 위험한 일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나를 탓하는 건가?
"하지만 베델이 말한 것처럼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주인도 나쁜 사람은 아닌듯 했고…"
"음- 무, 물론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라는게 술이 들어가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어서, 저기 그러니까 칼리체 같이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괜한 수작을 걸고 싶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
… 꽤나 구체적이로군.
"베델의 걱정은 무용(無用)해요. 설마 마법사인 제가 제 몸하나 지키지 못할거라 생각하는건 아니겠죠?"
"그… 렇긴 하지만 어쨌든 위험하잖아."
언제고 생각하는건데 이 인간의 나에 대한 걱정은 조금 도를 지나치는것 같다. 어찌 생각해보면 에네리아를 생각하는 그류벨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든다. 나를 에네리아에게, 그를 그류벨에게 대입시키면…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던가?
"흐음-, 걱정 마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베델의 걱정은 무용하다니까요."
#
그 다음날부터 베델의 걱정어린, 하지만 조금 귀찮은 염려를 들을 일은 없었다. 그도 며칠뒤에 있을 가문전에 참가해야 하니, 여러모로 준비할게 많이 있는 것이겠지. 뭐, 그래서 덕분에 편하다는 소리다.
그나저나 칼리아넬과 에카테야르는 뭘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매일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다투긴 해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서로 잘 어울려 노는것 같기도 하고…
끼익-
"아, 어서오세요!"
"음- 무척 볼품없는 집이로군."
"하하, 뭐 어떻습니까, 형님. 계집들을 끼고 놀것도 아니고, 가끔 이렇게 소박한 곳에 와서 조용히 술만 마시는 것도 괜찮겠지요."
문을 열고 들어온것은 다소 거만해 보이는 청년 둘이었다. 뭘 어떻게 한건진 모르겠지만, 한껏 모양을 낸 머리에 고급스런 검은색 셔츠와 가죽 바지, 그리고 셔츠의 깃에 달려 있는 어떤 문장이 새겨진 조그마한 뱃지- 딱 보아도 '나 돈이 좀 있소' 하고 써붙인것 같은 모습이다.
… 내 표현에도 이제 슬슬 인간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나오는것 같군.
"호오- 정말 대단한 미소녀로군."
"확실히. 델라피르에서도 저 정도의 미모는 보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왜 이런 촌구석에 있는지…"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그들은 독한 브랜디를 주문하고서 내가 돌아서자 나에 대해 떠들어 댔다. 목소리는 조금도 줄이지 않아, 나에게 모두 들릴 정도였다.
근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외모를 평가받기는 또 처음인데 말야…
아직 이른 저녁이라 손님이 별로 없어 비교적 조용했기 때문에 드문드문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주일 후였나, 가문전이."
"형님도 참. 불과 오일 뒤요."
가문전에 대한 언급이라니…?
그렇다면 이들은, 에네리아의 외가 쪽 사람들인가.
"불쌍하게 됐습니다. 본적은 없지만 에네리아… 라고 했던가. 우리 사촌 동생 말입니다."
"흥, 뭐 우리야 나쁠것 없지. 바루에르 가문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면 바로 우리가문이 로엘가스트 연맹의 백익(白翼)자리를 맡게 될테니 말이야."
그들은 서로 술잔을 부딪쳤다.
쨍- 하는 맑은 소리 뒤로 잠시 침묵이 흐른다.
"술맛은 나쁘지 않군 그래."
"뭐, 그렇네요."
그 이후로 그들의 입에서 가문전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가문전… 나와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들의 입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 조금 집중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하아, 그나저나 겨우 이틀째인데 일이 너무 힘들다. 역시 이런 나약한 몸으론 육체 노동은 무리인가.
그래도 대충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직접 몸으로 체득하게 되니 감회가 조금 남다르군.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것에 대한 '노동'의 댓가로 재화를 받아 집을 사고, 먹을 것을 사고…
"어이, 거기 아가씨."
"네?"
가문전에 관해 이야기했던 그들이다.
"아까부터 유심히 살펴봤는데, 우리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더군. 어때, 좀 더 자세히 들려줄테니, 일이 끝나고 우리와 한잔 하는건? 더불어 우리를 즐겁게 해주면 이런곳에서 일하고 받는 보수의 열배 쯤 되는 돈을 주지."
내게 그렇게 말한건 형 쪽이었다. 술에 꽤 취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의자에 기대어 내게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o'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뭐지 저거, 돈이라는 소린가?
"혀, 형님!"
"어때 아가씨? 난 아가씨가 참 마음에 들거든."
마음에 든다니, 고마운 이야기긴 하지만 그들을 따라가서 까지 가문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 괜찮아요. 그리고 저는 남을 즐겁게 하는데는 별로 재주가 없어서요."
이곳의 보수에 열배라는 말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뭐…? 하하하! 이것참, 정말 순진한 아가씨로군."
그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이나 웃어대더니 탁자위에 금화 하나를 올려두고 동생과 함께 술집을 나갔다.
지불해야 할 금액을 가볍게 초과하는 금액을 두고가다니… 역시 돈이 많은 인간인가 보군.
근데, 그것보다 그 남자, 대체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
마지막에 내게 남겼던 그 웃음 소리가 무척 신경쓰인다. 어쩐지 바보 취급 당한것 같다고나 할까.
"에스페란셰 가문 사람들이구나. 아마, 이 지역을 통치하는 바루에르 가문과 가문전을 치르러 왔다고 했었나… 이거 잘못하다간 지불해야할 세금이 늘어나는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은 해도 별 걱정없는 표정으로 마커스는 탁자위에 올려진 금화를 집었다.
"흐흐, 돈이 많은 도련님들은 이렇게 씀씀이가 커서 좋단 말야. 나중에 또 와주슈-"
그는 금화를 한번 깨물어 보더니 그들이 나간 문쪽으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에스페란셰 가문이라… 에네리아는 제대로 자신의 가문을 지켜 낼 수 있을까? 의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 바루에르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그녀가 좀 가엾다고 생각했다.
정말, 인간들의 갈등이란 이렇게나 비정하다.
아까 그 인간들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은 바루에르 가문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반긴다면 모를까.
듣자하니 에네리아는 그들의 사촌 동생, 인간들의 혈연 관계라는 것은 꽤 긴밀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금전적인 이득 앞에서는 덧없이 스러져 가는 걸까.
나를 안고 울음을 터트리며 복수하겠다고 끝없이 속삭이던 에네리아… 이 사태의 결말이 어떻게 나올지는, 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수고하셨어요."
탁자와 의자를 대강 정리하고 지금껏 일하던 술집을 나섰다. 손안엔 오늘의 일에 대한 보수로 은화 스무개가 들려 있는 상태… 이걸로 뭘 할까나?
짤랑 거리는 은화를 손안에서 굴리며 걷던 나는 묘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린 인간의 아이가 거적데기를 둘러쓰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이상할게 없지만… 그 어린 아이가 기대어 있는 건물 때문에 나는 걸음을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바루에르 가(家)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무척이나 화려한 건물. 재화를 상당량 보유한 인간이 사는듯한 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저택뒤의 그림자 속에 힘없이 기대어 주저앉아있는 어린아이.
정말 묘한 대비다.
고작 이 손안에 들려 있는 금속 덩어리 따위로 인간은 저렇게 커다랗고 화려한 집에서 살 수도 있고, 저 어린아이 처럼 거적데기만을 뒤집어 쓰고 무력하게 그림자 속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돈… 물건을 교환 할 수 있는 사회적 약속, 기호-
자신들이 만들어 낸 관념에 자신들이 지배당하고 있다니,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
내가 다가가자 더러운 꼴을 하고 있는 어린 아이가 나를 올려다 본다. 그 눈동자에 들어 있는 감정은 무엇일까.
무력감?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원망? 아니면, 절망?
하지만 어린 아이는 곧 그런 감정들을 눈깜짝할 새에 지워버리고 헤헤- 하고 바보같이 웃으며 내게 말한다.
"헤, 헤헤- 한푼만 줍쇼, 어르신."
어르신… 이라니?
어두워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손을 내보거라."
방금 일을 끝내고 아직 여성으로 변했던 성별을 원래대로 되돌리지 않아,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가느다랗고 여렸다.
그 때문일까, 어린 아이는 조금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손을 내밀었다.
짜르릉- 하고, 맑은 소리가 나며 어린 아이가 내민 양손에 내게 들려 있던 은화 스무개가 모두 떨어진다.
"앗-!"
놀란 모양인지, 어린 아이는 앙상한 몸을 요동치며 거적데기 사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광원(光源)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아이에게 내 모습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저, 정말 이걸 모두 제게 주시는 건가요…?"
"그래, 그 돈은 네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린 아이는 혹여 내 마음이 변할까 걱정하는듯 은화들을 재빨리 품속에 넣어 놓고서 땅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내게 고개를 숙이며 연거푸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외쳤다.
"…"
나는 그 모습을 고요히 쳐다보다 그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은화 이십개… 그걸로 가난에 지친 저 아이는 잠깐 동안이나마 배를 부르게 할 순 있을 것이다. 결국엔 은화를 다 써버리고 다시 골목에 돌아가 거적 데기를 뒤집어 써야 하겠지만.
즉, 내가 한 일은 근본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도 은화를 줘버리다니, 나는 어리석은 짓을 했군.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란 감정은 들지 않는다.
"호오- 루루렌칼리체."
"아크함?"
적발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청년이 양 손에 노출이 심한 의복을 입고 있는 인간 여성 둘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만 가봐도 좋아. 오늘은 무척 기분이 좋았으니, 자- 특별 서비스다!"
로나벨아크하임은 품속에서 뭔가를 잔뜩 집은뒤 그녀들에게 아무렇게나 건네주었다. 짤랑- 거리는 소리로 보아 아마도… 돈인듯 했다.
"어머, 잘생긴 오빠가 씀씀이도 장난이 아니네-?"
"나중에 또 와요, 잘 대해줄테니까!"
두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로나벨아크하임으로 부터 멀어졌다. 그는 멀어져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다, 이내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떠오르는 허무한 미소.
"쳇, 재미없는 것들이군."
"뭘하는 거냐, 아크함."
"아아, 성실하시군 위대한 백룡 루루렌칼리체 님은. 꼬박꼬박 아크함이라고 불러주는걸 보면 말야."
왠지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 평소와는 조금 다른 싸늘한 시선.
"… 방금까지 기분 좋다며?"
"왠지 널 보니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실은 아까부터 보고 있었지만… 저 골목 구석에 쳐박혀 있는 거지에게 오늘 네가 번 돈을 모두 준 이유는 뭐냐?"
그는 긴 다리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며 물었다.
"글쎄…"
"흥, 그렇게 대답할줄 알았다. 언제고 그랬지… 너는."
언제고 그랬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설마, 내가 기억을 리셋하기 전의 일을 이야기 하는 건가.
"호오, 그런데 너- 오늘은 꽤 좋은 모습을 하고 있구나."
굉장히 차가운 느낌… 그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너무나 차서 살갗에 닿는것 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좋은 모습- 이라는건 지금 내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걸 말하는 건가.
"로나벨아크하임… 너, 오늘은 좀 이상해 보이는군."
"그냥 심술을 부리는 거니까 가만히 있어라. 피하지 말고."
목덜미에 닿는 그의 손이 너무 차가워 움찔 거리며 그의 손길을 피하던 나는 그 말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석양빛 눈동자는 저 멀리, 아득한 시간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통해 무엇을 바라보고, 느끼고 있는 걸까.
"그 모습으로 내게 잠깐의 즐거움을 주지 않겠나, 루루렌칼리체."
"… 아까 어떤 인간도 그 소릴 하더군. 그 즐거움이란게 도대체 뭐냐. 나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재주는 없는데."
"내가 자세히 알려줄까?"
탁-
내 부츠의 뒤끝이 벽에 닿았다. 로나벨아크하임은 나를 벽쪽으로 밀어붙인채 손으로 내 턱을 잡고 내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왠지 강압적인데, 이녀석.
"차갑군."
그의 싸늘한 손가락이 내 목선을 훑는다.
"너는 따뜻하군.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열이 많아."
"놓아라."
나는 그가 몸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 답답해 그의 품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나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즐거운 일에 대해 알려준다 하지 않았나, 루루렌칼리체."
목을 훑고 있던 그의 차가운 손이 그대로 아래로 내려와 옷속을 파고 드는게 느껴진다.
싸늘함이 맨 살갗에 그대로 전해진다.
그대로 옷 안을 훑던 그의 손길이 갑자기 멈추어섰다.
"너, 속옷도 안입고 있냐."
항상 여성의 모습으로 있는건 아니니 속옷까지 입는건 좀 곤란하지… 로나벨아크하임은 왠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있다. 그의 시선은 왠지 내가 한심하다는 것 같아 보여 다소 기분이 상한다.
"더 안하나?"
내 가슴에 닿은 그의 손이 멈춰있어 재촉을 해보지만 그는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내 옷 속에서 손을 뺐다.
"시시하군,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거기다 가슴도 이렇게 작고… 하긴, 애한테 뭘바라겠냐 만은."
괜한 심술이군.
아까도 말했던 것이지만, 오늘의 로나벨아크하임은 정말로 이상하다.
"흥,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옷자락이나 바로 해라."
내가 노려보고 있던가?
그는 자신이 들춰놓은 내 옷자락을 꽤나 섬세한 손길로 정리해 주고, 풀렸던 몇개의 단추를 잠궈 주었다.
난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희미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마저 띄고 있었다.
이런걸 보면 꽤 친절한데, 방금과 같이 제멋대로인 모습도 보이고… 이 녀석도 어지간히 변덕스런 녀석이다.
"가문전 준비는 잘 되어가나?"
"흠- 준비라고 할게 뭐 있겠어. 시시한 인간들은 손가락 하나로도 가볍게 제압이 가능하지. 난 너처럼 쓸데없이 힘을 억눌러 놓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는 피식 웃으며 바람결에 약간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며 나를 내려다 보는 그의 얼굴이 꽤나 오만함에 물들어 있는것 같다. 인간들을 상대로 저런 감정을 품어봐야 아무 소용 없는데.
얄미운 녀석, 그의 상대가 대단히 재치있는 인간이어서 이 녀석에게 골탕좀 먹여줬으면 좋겠다. 이것은 단지, 희망 사항으로 끝날 뿐이겠지만.
콩-
"아얏!"
머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나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너 내가 가문전에서 골탕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마음을 읽는 마법은 우리들, 용밖에 못쓰는 고위의 마법이다. 하지만 그 마법을 사용하려 한다면 굉장한 규모의 마력 유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다 티가 난다니까? 꿀밤은 그 발칙한 생각에 대한 벌이다."
"… 으음."
건방진 녀석.
* 이제 슬슬 진지한 분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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