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109화-
천조각을 이어 만든 얄팍한 꾸러미에 푸른색의 싱싱한 야채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왼팔에 걸쳐 놓은 여성은 허리를 굽히며, 바닥에 늘어놓은 싱싱한 식재료 들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쏟아진 옅은색의 갈색 머리카락… 식재료를 팔던 상인은 평민들 사이에선 흔치 않은, 섬세한 눈썹과 이목구비, 그리고 깊은 기품이 깃든 눈동자에 다소 당황한것 처럼 보였다.
"여기가 좀 상해 보이는데요?"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식재료중 하나를 짚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보신거요, 이건…."
상인은 양손을 내저으면서 까지 그녀의 말을 부정했지만, 결국 서너번 정도 오간 대화 끝에 가격을 약간 깎아주었다.
그녀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구매한 식재료 들을 꾸러미에 넣었다.
꽤나 능숙해 보이는걸.
"으응, 오늘 저녁은…."
저녁 식사 메뉴를 생각하고 있는가. 그녀의 얼굴은 전과 다르게 무척 평안해 보인다. 평범한 일상에 젖어있는 모습.
나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여리한 뒷모습, 가느다란 팔 다리.
무척이나 연약해 보이는 신체이지만, 그녀의 힘은 육체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지. 인간의 모든 신비를 안고 있는, 두개의 좌중 하나.
백색의 좌,
"리체르아."
무척이나 놀란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 내가 바로 한번에 알아볼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신체가 약간 성숙한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당… 신은."
놀람으로 크게 치떠진 그녀의 동공이 곧 줄어들며, 경직되었던 입가가 부드럽게 풀린다. 그것은 마치, 봉오리 져있던 꽃이 천천히 개화하는것 과 같은 모습이라 나는 마치 무언가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으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았다.
백색의 좌, 리체르아의 눈에 퍼지는 아련한 감정은-
"백룡 님."
"어떻게…."
라고, 입을 열었던 나는 그 '어떻게'라는 시작점으로 이어질 질문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이런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루루렌칼리체 님은, 짧아진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거의 달라진게 없어 보이네요."
그녀는 양손을 가슴께로 모으며, 기뻐하는 얼굴로 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거의 달라진게 없다, 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인간'.
팔백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백색의 좌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팔백년이란 세월을 초월할 수는 없다.
"이런곳에서 이야기 하긴 조금 그러니… 저희 집에 오시지 않을래요, 백룡 님."
그녀는 왼손에 들고 있는 꾸러미를 살짝 들어올리며, '맛있는 저녁을 대접해 드릴게요' 라고 덧붙였다.
아카데미로 귀환해야 할 시간은 두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리체르아의 집은 수도의 외곽 쪽에 위치해 있었다.
재화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상류층의 저택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집은 충분히 고급스럽고, 훌륭했다.
"저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 루루렌칼리체 님은 거실에서 느긋하게 쉬고 계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장을 봐온 꾸러미를 들고 주방이 위치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가버렸다.
나는 거실 내부를 천천히 걸어다니며, 집의 내부를 살펴 보았다.
바닥에 넓게 깔려 있는 따뜻한 붉은 색의 카펫, 창가 쪽에 위치해 있는 기묘한 모양의 조각상이 인상적이다.
장식품들과, 약간의 술이 들어 있는 찬장.
소박한 느낌의 샹들리에-
창 밖으론 그녀가 가꾼듯한, 작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 온다. 코 끝을 아릿하게 자극하는, 희미한 향기.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평범한 집이로군.
지글, 지글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백색의 좌가 요리를 하기 시작한듯 싶다.
… 팔백년 전 은룡, 레테닌시에스케와 함께 마경으로 향했던 리체르아. 그녀는 마왕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베델이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마경 밖의 세계를 구했다.
재미있게 되었군.
칠백년을 살아오며 영원에 이르고자 했던 마왕을 부정한 그녀가 팔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고 있다니….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강력한 것이 못된다.
처음에는 무언가의 이유로 영원을 원했던 마왕이지만, 오백년이 지난 후에 그는 결국 영원으로 이루고자 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종국에, 유구한 세월에 지친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베델에게 거의 내어주다 시피 종말을 맞이했었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이유조차 잔혹하게 쓸어가 버리는 세월… 그녀는 어떻게 팔백년이라는 세월 동안 생명과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일까.
"…."
푹신한 쇼파에 몸을 묻은채 얼마의 시간동안 생각에 빠졌을까… 눈을 뜨고 나니 이미 리체르아가 저녁 식사를 모두 준비한 뒤였다.
나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에 몸을 안착했다.
"특별히 아끼던 재료들을 써서 저녁을 만들었어요. 맛있게 드셔주시면 무척 기쁘겠네요, 백룡 님-."
"칼리체로 되었다."
리체르아는 하얗게 웃으며 몸에 두른 앞치마를 벗어 옆쪽 의자에 걸어 놓고, 내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양손을 눈 앞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기도… 하는 건가?
아카데미의 식당에서 인간들이 식사 전에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종종 봐왔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확실히, 지금 '기도'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 거지?"
백색의 좌인 그녀는 지금의 인간들이 믿고 있는 신이 모두 거짓이며, 실제 신은 이 세계를 유지하는 시스템(System)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신을 향한 기도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걸 알고 있을 텐데.
리체르아는 내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기도가 모두 끝난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어떤 '믿음'에 기도하는 건가?"
기도가 꼭 신을 향한 청원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음- 아무래도, 저 스스로에게, 일까요."
"…."
자신 스스로에게 기도한다는 것인가. 얄궂은 일이군.
"그렇게 물으니, 저도 궁금해 지네요. 제가 누군가에게 기도 하는 건지…."
리체르아는 또다시 웃어 보였다. … 기분 탓일까,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희미한것 같다.
"저도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에요. 팔백년 전에, 자신이 '영원'으로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잃어버린 마왕처럼 말이에요."
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식탁위에 놓인 여러 음식을 중, 잘 익어 김을 내뿜고 있는 고기 한 조각과 드레싱이 되어있는 신선한 야채를 포크로 집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맛있군."
"루루… 아니, 칼리체 님은 무척이나 상냥하시군요. 드래곤은 저희 인간의 음식에서 '맛있다' 라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칼리체 님과 같은 드래곤들은 그저 단맛, 쓴맛, 신맛… 등을 '느끼기만' 할 뿐이지요."
리체르아는 왠지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포크를 움직이며, 그녀가 준비한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 정말 오랜 시간이었어요."
아련한 감정을 담고 있는듯한 그녀의 목소리-
그래, 너희 인간들에게 팔백년이란 세월은 말이지….
"아마, 저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거에요. 과거에도, 또 미래에도."
"너는…."
그녀는 접시에 담겨 있는 따뜻한 스프를 스푼으로 떠먹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은… 정말 말도 안되게 강력한 생명체지요?"
"…."
"그렇게 강력했던 마왕…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했던 그조차 오백년이란 세월 동안 제 정신을 유지하지 못했지요. 결국, 베젤…, 아니 베델이었나요?"
리체르아는 멋쩍게 웃었다.
"하여간, 그의 손에 마왕이 칠백년 동안 갖고 있던 깊은 허무가 종말을 고했지요."
"그래…."
지금도 불과 몇분전에 겪은 일처럼,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따뜻한 음식과 타닥 타닥, 타들어 가며 온기를 내뿜는 난로에 몸이 점점 늘어지고 있긴 하지만.
"하지만 저는… 팔백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온전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요. 게다가 마왕이 수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가며 이어갔던 영생을 저는 단지 한 존재의 손짓으로… 정말,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이어나가고 있구요."
"…."
그녀가 지금껏 살아있는 이유는… 은룡에게 있었나.
"이미 짐작하고 계신듯 하네요. 네거스텐 제국의 여제(女帝), 레케트리셴 문."
"…."
"제게 영생과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을 부여해 주신, 렌 님이에요. 저는 영생을 누리길 원하지 않았지만… 렌 님은 제가 죽음으로 이 세계에서 지워지길 원하지 않으셨나 봐요."
리체르아는 그런 말을 하며 왠지 허무한듯 하면서도, 기쁘게 웃었다.
레테닌시에스케… 그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간에게 영생을 부여한 것일까. 끝없이 스러져 가는 한 생명체에 대한 미련…?
그렇다면, 은룡은 진작에 자멸하고 말았겠지.
갑작스레 내가 다니고자 마음먹은 아카데미에 등장한 로나벨아크하임,
그리고 인간들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은룡….
분명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
* 무언가가 있습니다.
* 백색의 좌와 은룡은.. 조금 미묘한 관계.
Comment '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