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105화-
"흠, 리블란셰…, 리블란셰."
"…."
나는 책상위에 오늘 지급받은 서적들을 올려놓으며 침대에 업드려 내 성을 중얼거리고 있는 로나벨아크하임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방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책들을 정리한 후였다.
"인간의 고어(古語)로 '백색'이란 뜻이잖아? 이렇게 노골적인 단어 선택이라니…."
그는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실 '현자가 지어준 성'이라는 변명은… 음, 별로 유효하지 않겠군.
"비꼬는 거니?"
그렇게 물으며 탁, 하고 책을 책상위에 세게 내려놓아 보았다.
왠지 모르게… 돌아오는 시선은 비웃음이다.
"네가 책상에 책을 소리내어 내려놓은 것은, 네 불편한 심기를 나에게 알리고자 한 비언어적인 행동이지만 네 멍해 보이는 표정이 그것을 모조리 무력화 시키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아는가, 루루렌칼리체."
… 망할 녀석.
나는 가장 두꺼운 책을 집어 그에게로 휙- 던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채로 간단히 내가 던진 책을 피해버렸다.
"이크-! 이봐 리블란셰 군, 인간들 사이에선 이런말이 있지- 말로 안되니 폭력을 사용한다고."
마음에 드는 말이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하나 더 집어서 등 뒤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의외로 이번엔 명중한 모양인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끄응,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말로 안되니 폭력을 사용한다…, 와 같은 인간식의 비꼼은 드래곤 사이에선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
우리가 진정으로 '대화'를 할 생각이라면, 만능의 언어를 사용했을 테니까.
… 나는 우리 드래곤들 사이에서 '소통'의 불능은 없으리라 굳게 믿는다.
"상당히 아프군."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문지르는 그에게서 던졌던 책을 받아든 나는 이제 책상위에 올려둔 책들을 천천히 책장속에 꼽기 시작했다.
"이봐, 리블란셰 군."
나는 책장으로 다가가던 손을 멈추었다.
상당히 거슬리는군.
"그 '리블란셰 군'이라는 호칭좀 그만두지 않겠니?"
로나벨아크하임은 히죽,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칼리체."
리블란셰 군 이나 칼리체 나 내면에 깔린 그의 장난기에는 변함이 없다는걸 잘 안다. 하지만… 나로선 그에게 칼리체라고 불리는 편이 훨씬 낫다.
"그나저나 너는 어째서 남성 기숙사로 오게 된거지? 뭐 특별히 의도하는 바라도 있는건가?"
… 대화의 내용이 점점 시시해져가고 있는것 같지만, 아무튼 대답해주어야 겠지.
"현재의 나는 남성 이니까."
"아-?"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 일그러진 표정에 깃든 감정이 무엇인지는, 난 잘 알지 못하겠다.
… 아니, 저 표정은 단지 '일그러짐' 일 뿐이다. 인간의 감정 같은 것은 일체도 담겨있지 은 채다.
"왜?"
"넌 아무래도 아직 인간 남성과 여성을 확실히 구분짓지 못하는것 같군, 루루렌칼리체."
내 외모가 여성에 가깝다는건 알지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건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지금의 나를 자세히 살펴보기만 해도 가슴이 없으니까.
"흥, 대강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군. 긴말하지 않겠다. 이미 그 모습을 많은 인간들에게 보인 상태이니 그 인간들의 기억을 전부 조작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깨 길이 정도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게 좋을거다."
흐음, 긴 머리카락이 여성스러움 중의 하나라는 건가.
아무튼 충고는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지.
사실, 용인 내가 인간의 시선을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에 좀더 자연스럽게 녹아들 필요가 있겠지.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다음날 이른 아침, 일출을 보고난 나는 로나벨아크하임의 충고대로 긴 머리를 어깨 정도의 길이로 잘라버렸다.
"…."
지금 내 손엔 가위로 잘라내 버린 긴 흰색의 머리채가 들려있다. … 무척이나 묵직하게 느껴진다.
등까지 덮던 머리카락이 사라지자, 시원하기도 하지만… 일단, 머리가 무척이나 가벼웠다.
몸을 돌려 거울을 보자, 단순히 머리를 잘랐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머리를 자르기 전의 모습과는 내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달랐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전보다는 훨씬 남성다워 보이는군.
뭐… 상대적으로 말이지.
상당하게 깔끔하게 잘랐기 때문에 따로 더 다듬을 필요는 없을것 같다.
나는 머리카락을 잘랐던 가위를 원래 들어있던 서랍에 넣고, 잠시 머뭇거리다 잘라내 버린 긴 머리채를 잘 갈무리해 함께 그 서랍에 넣어두었다.
"…."
살짝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내 가느다란 목을 한번 휘감고 가는 바람은, 이제 수습하기 곤란할 정도로 나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하지는 못했다.
… 약간 아쉬운 마음도 있군.
높은 곳에 올라가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바람의 흐름을 느끼는 사소한 행동은 꽤나 즐거운 유희였는데-
으음, 내게 머리를 자르라고 충고했던 로나벨아크하임은 내가 일출을 보기도 전에 방을 나선 후였다.
아직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침에 녀석의 모습을 본적이 한번도 없군.
게다가 오늘은 일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어났으니, 늦잠을 잤다고 할 수도 없는데…. 도대체 뭘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
오전 강의가 끝났다.
나는 가방에 책을 집어 넣으며, 양 손을 머리위로 들어올려 기지개를 켰다.
강의실의 앞쪽에는 마치, 아무렇게나 휘갈겨 놓은듯한 필기 내용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글씨가 상당히 이상해서, 나는 그것을 알아보기가 약간 힘들었다.
저런걸… 필기체 라고 했던가.
편의를 위해 문자를 뒤틀게 써 놓은것. 실제로, 저것은 정말로 편한가? 잠시 깃펜을 들었다가 놓았다.
으음 … 나는 잘 모르겠군.
"…."
나는 고개를 돌려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오늘은 아침부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따가웠다.
나의 아름다운 외모가 어디에서든 훌륭한 이슈거리가 된다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그 따가운 시선들의 원인은… 아마도 내가 그 긴 머리카락을 한번에 잘라내었기 때문이겠지.
창밖에 보이는 모습은 따분한 교정이 유일했기 때문에, 나는 다소 지루한 시선으로 책상을 내려다 보았다. 다른 인간들의 눈을 의식해 필기하는 '척'하는데 필요한 양피지 조각이나 깃펜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꼬박 두시간을 기다려야겠군. 아, 그렇다면… 잠시 낮잠이라도 자는게 어떨까?
나쁘지 않은 생각인것 같다.
"저기, 리블란셰… 라고 했었지?"
막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는 도중, 어떤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분명… 우리 클래스의 여학생이로군.
"응, 맞아."
나는 고개도 끄덕여 주었다.
"…."
상당히 쭈뼛쭈뼛한 기색이다.
용건이 있어서 말을 걸어온게… 아니었나?
"왜 그러니?"
"저… 머리는 갑자기 왜 잘랐나 해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인간이로군…. 자신이 질문해놓고 자신 스스로가 민망해 할 거라면 왜 그런 질문을 내게 하는 걸까.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그녀에게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
"…."
갑자기 예기치 못한 질문을 해왔던 같은 클래스의 여학생을 뒤로 하고, 나는 강의실을 나와 복도로 진입했다.
복도는 다소 차가운 느낌을 주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대리석 바닥과 상반된,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는데, 학생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라 그런지 다소 더러워져 있었다.
나는 그 융단의 푹신함을 느끼며 창가쪽으로 다가갔다.
점심시간동안 잠깐 낮잠이라도 잘 장소를 물색해 보기로 할까….
"어라, 칼리체!"
어, 그러니까….
"… 아크함?"
아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녀석이로군.
그는 예쁘게 생긴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와 함께 거의 팔짱을 낀듯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아, 같이 식당이라도 가는 모양이로군.
"오전 강의는 모두 끝난거야? 그럼, 너도 같이 식당에 가지 않을래?"
선명하게 웃으며, 내게 그렇게 묻는 로나벨아크하임은 이곳,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에 있는 여느 학생들과 전혀 다를게 없어보였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미안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서. 나중에 부탁할게."
"아,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아, 그리고 오늘은 기숙사 방에 늦게 들어갈 예정이니까 먼저 자도록 해."
… 단단한 가면.
로나벨아크하임은 아직도 다소 어색한 나와는 달리 능숙하게 연기를 끝마치고, 옆에 있는 여학생과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 그의 연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보내고 잠시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있자,
어머, 너 쟤랑 아는 사이니-? 라는, 소녀의 목소리가 아래쪽 계단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로나벨아크하임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는군.
흐음, 슬슬 나가 보도록 할까.
"…."
이제 슬슬 늦가을에 접어드는 날씨라 그런지, 기온이 상당히 쌀쌀해 지고, 주변의 풍경이 앙상하게 매말라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난 양 팔로 차갑게 굳은 어깨를 문지르며, 건물 밖으로 나섰다.
아, 그래. 저기 나무 그늘 아래 마련된 목재 의자가 좋겠군.
의자는 여러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길었다. 혼자서라면… 편하게 누울수도 있겠군.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터 앉으며 머리위를 올려다 보았다.
낙엽이 쓸쓸한 모습으로 매마른 풀숲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주변의 매마름은 곧 다가올 봄의 재탄생을 기약하는 것….
그러고 보니, 계절의 순환역시 정말 질릴 정도로 긴 시간동안 반복되어온 것이로군. 하루를 주기로 끊임없이 뜨고 지는 태양처럼-
태양과 다른 것이라면, 계절은 계속 해서 죽음과 새로운 탄생이 반복된다는 것이겠지.
죽음과 탄생… 그리고 반복이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생각이 날듯, 말듯한 미묘한 기분이었다. 아니, 망각이 존재하지 않는 내게 생각이 날듯 말듯 하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겠지.
"…."
이것은 분명, '기시감'이다.
내가 기억을 리셋하기전, 내가 느꼈던 감각, 그리고 생각이 지금 이곳에 다시 펼쳐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시감은 절대로 잡히지 않는… 마치, 대기중에 흩날리는 미세한 먼지들과 같아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누군가가 멈추어 섰다. 이 아련한 감정에 그다지 눈을 뜨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눈을 떠주는게, 내 앞에 걸음을 멈춤으로서 '대화'를 걸어온 타인에게 존중을 다하는 일이겠지.
"당… 신은?"
눈을 뜬 내 눈앞에 서있는건 선명한 금발을 가진,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무척이나 잘 가꾸어진 풍성한 금발과, 약간의 놀람이 어린채 나를 바라보는 싱그러운 녹빛의 눈동자는, 들여다 보는 것 만으로 그녀가 고귀한 핏줄의 태생임을 알게 해준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녀의 가느다란 몸을 감싸고 있는 정갈한 의복은… 루블라브룸 아카데미의 제복이로군.
그녀는 검지와 중지로 천천히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놀라운 상황을 겪으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습관인듯 했다.
네거스텐 제국의 황녀 펠테넨시아.
곤란하게도 설마, 그녀 역시 이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을 줄이야. 아니, 조금만 생각해 보았더라면 예상할 수도 있었을 일인데….
* 아, 요새 계속해서 바쁜일이 생겨 꽤 오랫동안 연재를 하지 못했군요 ㅠㅠ 죄송합니다.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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