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가는 문 -26화-
기껍게도, 베델뿐만 아니라 나와 칼리아넬 역시 왕궁에 머무를수 있었다.
마릴렌 공주가 베델에게 거는 기대가 꽤 큰 모양이었다. 아니면 기사 베르딧 에게서 내가 마술사라는 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녀에겐 분명히 내가 마술사라는 사실이 전해 졌을 것이다.
그녀는 내전을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전력을 찾길 원하는 모양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와같은 인간들의 분쟁에 깊게 개입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나는 이곳에서 그저 마력을 약간 잘 다룰줄 아는 소녀, 아니면 소년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
난 커다란 창문앞에 마련된 흔들 의자에 앉아서 밖을 내려다 보았다.
바깥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보이고 있었는데, 정원의 중심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모양인지 연못의 표면은 잔떨림 조차 없이 고요했다.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는 고요한 연못의 표면은 마치 깨끗한 거울과도 같아 하늘위에 떠있는 백색의 달을 비추어 내고 있었다.
그 광경이 주위에 드리워져 있는 거대한 나무들과 대단히 잘 어울렸다. 아마도 이 방을 만든 자의 의도에 이 풍경이 속해 있었을 지도- 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잠도 오지 않는데, 저 연못을 좀더 가까운 곳에서 구경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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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날씨는 생각보다 쌀쌀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그리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아까 까지만 해도 지나다니던 왕궁의 시녀들이 보이지 않아 이곳에는 내 발걸음 만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별 생각없이 연못으로 다가간 나는 누군가 이미 와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베델과… 마릴렌 공주?
"… 런곳에서 뵙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또렷하게 들려온다. 바람이 불지 않아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다.
"평소 자주 오는곳이에요."
"아, 예.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둘은 우연히 마주친 모양이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존재를 숨기게된 나는 나무뒤에 기대어서서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니 굳이 가지 않아도 돼요. 이 풍경은 한달에 한번밖엔 볼 수 없는 것이니까요.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서 독차지할 정도로 욕심쟁이는 아니에요."
"그, 그렇습니까."
베델은 그녀의 말을 듣고 연못을 떠나려는 몸을 멈추어 세웠다. 하지만 신분이란 차이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베델은 꽤 불편해 보였다.
마릴렌 공주는 베델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서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세상이 멈춰 버린것 같은 침묵이 흐르고 마릴렌 공주의 목소리가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듯 그 침묵을 깨트려 버렸다.
"이 나라의 사람들,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지요?"
"네? 아- 네."
베델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얼결에 답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요. 저도 충분히 그들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까요."
"… 도대체 어쩌다가 백작과 후작이 충돌하게 된겁니까?"
그는 긴장했음이 역력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뻔한 이야기지요. 이 나라의 세력 대부분을 그 두사람이 나누어 쥐고 있으니, 둘이 서로를 견제 하는건 필연적인 일이었어요. 그 견제가 점점 커지고 커지다 보니 이런 지경에 이른거죠. 근본적인 잘못은 왕실에 있다 하겠네요. 왕실이 그들을 휘어잡을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지 못해 일어난 일이니까요."
"대체 어쩌다가…"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인 내가 여자라는 것과 쇠약하신 아바마마가 오랫동안 왕의 자리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죠. 그들은 내가 왕위에 오르는걸 방해하고 있어요."
마릴렌 공주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철저히 감정이 배제된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지금 까지 내가 본 어느 인간보다 가장 감정이 없는 인간인것 같았다.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일단 겉보기가 말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약하게 나마 감정이 실리고 있었다.
"왜 일개 용병인 당신에게 공주인 제가 이런 이야기 까지 하는지 모르겠군요. 보름달은 기이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사실인 모양이네요."
"시, 실례했습니다. 공주님."
"아뇨, 그래도 왠지 그대에게 말하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베델은 아까부터 허둥지둥이고 공주는 끝까지 차분한 모습이다.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둘의 대화는 보는것 만으로도 꽤 재미가 있다.
"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건방진 귀족 둘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이 나라에 평화를 가져올 생각이에요."
공주의 대답은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방법이 막막 하군요. 왕실의 세력이 두 귀족중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요. 말 그대로 영광만이 남은 왕실이죠."
"…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공주님. 아, 물론 제가 최선을 다한다 해서 공주님이 고민하는 문제가 해결되는건 아니지만요."
"용병같지 않은 사람이군요. 그대가 내게 그렇게 말할 정도의 의리는 없을텐데요. 유감스럽지만 이 상황에서 당신에게 돌아갈 의뢰비도 그리 많을것 같지 않구요."
다소 차게 말하는 공주에게 베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전 정처 없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 다니는 일개 용병일 뿐이지만, 아나키스트 왕국은 제 조국이거든요."
"…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흐른다.
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조용히 그 장소를 빠져 나왔다.
아참, 연못은 구경하지도 못했군.
그렇게 몸을 돌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구냐, 이곳은 공주님이 가계신 곳인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달이 구름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그 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부드러운 미남형의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너는…!?"
그는 너무나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이 아니구나! 당신은 누구지!?"
역시 현자라는 건가, 이 모습을 보고 단번에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해 내다니… 그는 내가 인간의 사회에 나오게된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했던 현자 베르센크 였다.
"나다, 인간의 현자."
나와 그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돈다.
"…. 설마, 당신은- 백룡, 루루렌칼리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환희가 깃든다. 나를 본게 그렇게나 반갑단 말인가?
"어,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리고 인간의 모습이라 해도 이 모습 역시 진실한 나, 네가 생각하고 있을 대역 따위가 아니다."
"그, 그렇습니까…"
그는 기이한 감정이 깃든 눈을 하고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실례지만, 잠시 몸을 만져보아도 되겠습니까."
"응."
내가 긍정하자 그는 내 백색의 머리카락 부터 만져 나가기 시작한다. 머리카락, 이마, 눈썹을 따라 이어지는 코까지 그의 손길이 닿는다.
그의 마치 지극히 귀한 어떤것을 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은 내 입술, 턱을 따라 가느다란 목, 쇄골에 까지 이른다.
그의 손길이 조금 간지러웠기에 나는 고개를 약간 움츠리고 말았다.
"정말,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군요."
현자라서 그런걸까, 단순히 보이는 걸로는 납득하지 못했던 모양이지.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 인간…"
말 되는군.
난 결코 인간이 아니지만 지금은 완벽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인간처럼 허기 따위의 생리 작용을 겪는건 아니지만.
"놀랐습니다. 설마, 루루렌칼리체 님을 이런곳에서 만나게 될줄이야."
"칼리체 라고 불러라."
"칼리체- 입니까. 과연, 그 모습에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군요."
바보, 그냥 이름뒤에 세글자일 뿐이다.
그런데 방금 까지와는 분위기가 달라진것 같은 느낌이다.
지독히 염세적이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녀석이 지금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정말…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이런 사랑스런 소녀의 모습으로 이 왕궁에서 만나게 될줄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아직 소녀인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꽤 키가 컸기 때문에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는 차가운 손으로 내 얼굴을 매만지며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 만지작 거려라. 그만하면 놀라움은 가시지 않았나?"
내 목선을 훑던 그의 손이 흠칫 하고 떨린다.
"아, 실례했습니다."
"칼리체!!"
베르센크가 내 얼굴에서 손을 때기도 전에 뒤에서 베델의 외침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의문이 들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지?"
솔직히, 좀 놀라고 말았다.
바보같을 정도로 누구에게나 호의로 다가가던 베델이 미약하긴 하지만 명백한 적의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베르센크에게 묻고 있었다.
베르센크는 풀어진 표정을 순식간에 굳히고는 베델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베르센크 드 마하이브."
"… 당신, 현자였나?"
"그렇다."
"요즘은 현자라는 자가 어린 소녀를 희롱하기도 하나?"
둘은 서로를 차갑게 노려본다.
베르센크야 그렇다 치더라도 베델의 반응은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 그때, 산적들에게 붙잡혔을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닌것 같았다. 베르센크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 내가 용이라는 것을 다른 자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다.
베델과 대화하다가 자칫 실수를 할 수 있으므로 용의 언어로 베르센크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그는 알았다는 뜻인지 나를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희롱이라니?"
"그럼 칼리체에게 한 그 행동이 희롱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생각해보니 베르센크의 행동이 희롱으로 보일 여지도 있었던것 같군.
베르센크는 나를 보며 이놈은 뭡니까- 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시선에 답해 주지 않았다.
"본인의 허락을 받고 한 행동이오. 그렇지 않소, 칼리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델의 얼굴이 구겨졌다.
베르센크는 품속에서 금색 줄이 달린 시계를 꺼내며 말했다.
"예상치 않은 일로 시간을 보낸것 같군. 후, 내가 현자라는걸 알면서도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자네는 어리석은건지 용감한건지 모르겠네. 아 물론 나는 얼토당토 않게 신분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그런 자들과는 다른 사람이네. 그리고 내 행동에 오해가 생길 여지는 많았네만."
신분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하고 말할때의 베르센크의 어조는 지나치도록 냉엄했다.
"자네는 좀 신중해질 필요가 있는것 같군. 아니면…"
그는 내쪽과 베델을 번갈아보며 재밌다는듯, 하지만 조금 날카로운 모습으로 웃어 보였다.
"이만 가보겠네. 그리고 칼리체, 나중에 보지요."
베르센크는 내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미끄러져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칼리체, 현자와 알고 있던 사이야?"
물론, 현자가 나를 찾아온 적은 있지만, 사실대로 대답해서야 내가 그에게 말해놓았던 깊은 산속에서 살아왔다는 말에 헛점이 생기게 된다.
베델과는 오랜 시간을 같이 있게 될것 같으니 그런 헛점을 만드는 것은 현명치 않다.
"아뇨, 오늘 처음만난 사이에요."
"그래? 그럼 그가 어째서 너에게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던 거였지? 설마 네게 협박을 한건 아니었고?"
"협박이라니, 어째서죠?"
"그, 그야… 칼리체는 깜짝 놀랄 정도로 미인이니까."
베델의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그의 이야기가 어째서 그렇게 종결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협박같은건 없었어요. 내 몸을 만져도 되겠냐는 물음에 응한것 뿐이에요."
"그러면 안돼! 여자애가 처음보는 남자에게 몸을 만져도 된다고 말하다니, 그런건…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허락해야 되는거라구."
"그런가요."
그저 몸을 만지는데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일단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베르센크, 초반부에 등장했던 현자 녀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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