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으로 대정령사 - 51
지금 여기서 이 백작 딸인 소녀를 도와줘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일까.
시몬은 한번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살면서 귀족과 친해질 기회가 그렇게 자주 오진 않겠지.’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평민은 살면서 귀족을 만날 일 자체가 없다.
시몬이 정령사로서 유명세를 떨치는 날이 온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으로는 귀족과 연이 닿기는 힘들 것이다.
리첼은 본인 입으로 먼저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 소녀를 만난 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짓을 말하거나 입바른 소리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소녀의 당당한 태도. 긍지가 서린 말투를 보고 시몬은 판단했다.
리첼은 시몬을 올려보며 다시한번 힘주어 말했다.
“정령사, 시몬. 저희와 함께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시몬은 리첼의 말에 답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저도 북쪽으로 가던 중이었으니까요.”
시몬은 이 왕국인 아르시아 왕국을 떠날 예정이다. 북쪽의 국경을 넘어서 북쪽에 위치한 모스크까지 가는 것이 지금 가진 목표다.
“그러시면······.”
“가신다는 지역. 하센이라고 하셨죠? 그곳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리첼이 다시 고개를 숙이려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몬이 옷에 손을 닦은 채 악수를 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첼은 웃으며 시몬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웃는 미소가 무척 귀엽고 맑은 소녀였다. 그렇지만 그 미소엔 자연스럽게 기품이 서려 있었다.
시몬은 그 후. 잠시 다른 기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대여섯 남짓했다.
“저희는 모두 백작 가문에 소속되어있는 기사입니다.”
“정령사라고 하셨죠? 잘 부탁드립니다.”
시몬이 보기에는 최소한의 기본 실력은 있는 정도다.
“우선 아가씨께서 주무실 자리를 마련해야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마차 안에서 주무시도록 하고······. 저희는 밖에서 돌아가며 보초를 서기로 할 예정입니다.”
기사들은 부상자를 정리하고, 밤을 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시몬은 그중에서 아직 심한 부상자를 치료해주거나 일손이 부족한 사람을 도와주기로 했다.
“정령사께서 도와주시니 일이 훨씬 편하네요.”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네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귀족가문에 속해서인지 이곳의 기사들은 무척 정중했다. 시몬은 그들과 간단히 대화를 했다.
“저기······. 아가씨.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데 멀리서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말이야?”
“정체를 모를 남자와 동행하는 일이 정말로 괜찮으신지요.”
아마도 시몬이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는지 그녀는 작게 시몬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일부러 몰래 엿들으려고 한건 아닌데. 귀에 들려버렸네.’
시몬은 조금 당황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쪽에 주의를 돌리자니 너무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우리를 도와주신 분이잖아. 지금도 우리 기사들을 도와주고 계시고.”
“그렇습니다만······. 너무 타이밍이 절묘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리첼은 베로니카의 말에 무슨 의미인지 더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속으로 조금은 생각했던 부분이다.
“맞아. 우리가 가장 위험할 때 나타나서 우리를 구해준 사람···. 의심되는 것도 당연해.”
만약 이 내용이 동화였다면 멋진 주인공의 등장이라고 생각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리첼은 지금 암살위험에 처해진 상황이다. 남을 조심하고 경계해서 나쁠 건 없다.
“그렇습니다. 해서, 역시 적에서 보낸 첩자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리첼은 의외로 베로니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역시···!”
“아니. 그렇지만 역시. 너무 번거로워.”
리첼은 백작가의 딸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보아왔다. 리첼은 시몬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했다.
‘정령사를 굳이 첩자로? 그런 수를 쓰기엔 너무 인위적이야.’
그런 경험이 만들어낸 직감이 그녀에게 시몬을 믿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해준 사람까지 의심하자니······. 너무 슬퍼.”
아무리 귀족이고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고 해도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다. 리첼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아가씨.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베로니카는 이 문제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시몬은 그녀들의 대화를 전부 들었지만 절대로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역시 누구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쉽게 믿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 이해해.’
시몬은 그 대화가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베로니카가 이쪽으로 걸어오자 일부러 큰 소리로 물었다.
“여. 베로니카라고 했지? 저쪽에 물가가 있으니 혹시라도 필요하면 쓰도록 해.”
“그래. 알겠다. 참. 혹시 너도 타고 온 말이 있다면 이쪽에 같이 묶어두도록 하지. 우리 말 중에서도 살아남은 말이 있으니······.”
두 사람은 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 * *
“뭐라고? 실패했다는 뜻이냐 지금!”
좁은 방 안에서 중년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먹을 쥔 채 테이블을 내리쳤다. 어찌나 심하게 내리 쳤는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컵이 옆으로 넘어져 엉망이 될 정도다.
그렇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깟 어린 계집년 하나 죽이는데 지금 절반이 죽어서 왔다 이 뜻이냐!”
고함 소리를 듣고 있는 상대는 젊은 남자였다. 차가운 인상을 가진 남자로 이 상황에서도 떨지 않고 할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저희가 예상하지 못한 전력(戰力)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역시 괜히 백작가의 딸이 아닌지······.”
“시끄럽다! 변명 따위 듣고 싶지도 않아!”
중년 남자는 테이블에 있던 다른 컵을 남자 쪽으로 던졌다. 컵이 벽에 날아가 깨지면서 큰 소리를 내며 파편이 튄다.
“우리 ‘두개의 탑’ 길드에선 패배를 용서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괴물이나 귀신이 있든간에 실패는 실패뿐이야. 알겠냐!”
“···네. 알겠습니다.”
남자는 더 이상 길게 말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짧게 대답을 했다.
“우리의 의뢰인께서는 그 백작의 딸을 죽이라고 하셨다. 알겠나.”
중년의 남자는 화를 진정시키려는지 심호흡을 했다.
“더 이상의 실패는 용서하지 못해.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의뢰인께서 용서하지 않으실거다.”
“······.”
“그때는······.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
암살길드. 암살 길드는 다른 길드와 달리 점조직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쉽게 가입하거나 찾을 수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사실상 말이 좋아 길드라고 붙여두었지, 실제로는 그냥 암살을 하는 범죄조직일 뿐이다.
다만 자신들 딴에 가진 명예는 쉽게 넘어갈 것이 아니다. 범죄를 의뢰로 제공해준다는 것은 엄청난 신뢰도 바탕이 되어있어야 했다. 비밀 엄수는 물론이고 실력 면에서도 확신을 줄 정도가 되어야 의뢰인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마라. 그러면······. 정말로 우리에게 다음은 오지 않는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직업이라면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고 넘어 갔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암살자에게 있어 실패는 죽음과 동의어다. 즉, 타겟이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뜻이다.
젊은 남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 * *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숲의 아침은 그렇게 고요하지만은 않다. 날아가는 새의 노래소리가 모두를 깨우기 시작해 점차 소리가 차올랐다.
시몬은 플로렌을 나올 때 타고 왔던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물가로 갔다.
“좋은 아침.”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면 베로니카가 있었다. 시몬은 먼저 인사를 했다. 베로니카는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저기. 시몬. 혹시 말을 탈 줄 아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데······.”
“응? 뭔데?”
“혹시 마차를 몰 줄 아나?”
“마차······라.”
시몬은 말의 고삐를 잡은 채 생각했다.
말을 탄 경험은 전생에도, 그리고 이제는 현생에도 생겼지만 마차를 몬 경험은 두 번의 생을 통틀어서 단 한 번도 없다.
“지난밤에 있던 습격으로 우리 측에 마차를 몰던 마부가 죽고 말았어. 마차 안에는 짐도 있고···. 무엇보다 아가씨께서는 마차를 타셔야 해.”
“그러면 곤란한 상황이네.”
“응. 그래서 마차를 몰 수 있다면 부탁을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어쩐다.
사실 마차를 타본 적이야 있어도 직접 몰아본적은 없다.
말을 탈 수 있다고 해서 마차를 몰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승마는 혼자서 자신이 탄 말을 제어하면 되지만, 마차는 뒤에 있는 수레를 포함해서 한 마리, 혹은 그 이상의 말을 이끌어야한다.
엄연히 다른 행동이다.
‘시키면 못할 건 없지만. 나 스스로도 좀 불안한데······.’
만약 실수를 한다면 그땐 혼자 다치고 마는 정도가 아니다. 마차에 탄 사람도 같이 사고가 나는 것이다.
‘시몬. 괜찮을테니까. 하겠다고 해.’
시몬의 어깨에 올라온 드리아드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안되면 우리 모두가 도와줄게.’
‘너희가?’
‘응.’
드리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머리카락과도 같은 넝쿨이 시몬의 어깨위에 얹어졌다.
‘정령은 그 무엇보다도 자연에 가까운 존재···. 인간과 달리 자연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동물에게는 우리가 더 친근하단다.’
인간도 원래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렇지만 점점 그 기관이 퇴화하여 지금은 정령을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고 말았다.
반대로 동물은 아직도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지진이나 산사태 같은 천재지변이 나기 전에 인간보다 먼저 동물이 도망치는 일도 다 그런 차이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우리를 믿고 승낙해봐.’
‘알겠어. 너희를 믿을게.’
시몬은 자신과 계약한 정령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마차를 몰도록 하지.”
“괜찮겠나? 혹시 억지로 하는 일이라면 사양해도 좋다.”
“아냐. 나에게 맡겨달라고.”
베로니카는 시몬이 자신 있게 나오자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부탁하도록 하지.”
“말은 총 몇 마리지?”
“두필이다. 괜찮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말을 연결해도 된다. 여유 자리는 있으니.”
“으음······. 괜찮아. 혹시 내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타줬으면 해.”
한번에 두 마리를 조정하는 일도 힘든데, 세 마리는 더 힘들 것 같았다.
“그럼 내가 타도 좋나?”
“그러면 그러도록 해.”
베로니카는 시몬이 고삐를 잡은 말에게 다가왔다. 이 말은 시몬이 플로렌에서 도망칠 때 기사의 말을 훔쳐서 타고 온 말이다. 물론 베로니카는 시몬의 이런 사정을 모르니 당연히 시몬의 말인줄로만 알았다.
“순하고 좋은 말이로군.”
베로니카는 말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사단에서 키운 말이여서인지 성격이 온순하고 잘 훈련되어 있다.
“···자. 그러면 출발할 때 말해주도록 해.”
시몬은 자연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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