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뜻밖의 분쟁(紛爭) <02>
[그건 추후에 말해 주겠다. 아직은 언급할 때가 아닌 듯하다.]
홍후인은 승낙하기 전엔 어떤 정보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어떠냐? 구미가 당기느냐?]
그의 말투가 위현룡은 왠지 귀에 거슬렸다.
마치 대세는 기울고, 일은 다 성사되었다는 묘한 어감(語感)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현룡은 그 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가 궁금했을 뿐 홍후인의 바람과는 무관했다.
“죄송합니다만, 전 누구를 암살하기 위해 무공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청성파 제자로 영원히 남을 것이고, 훗날 고수가 된다면 그건 청성파를 빛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사사로이 누구를 암살할 살수(殺手)가 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위현룡은 깨끗하게 거절의사를 표명했다.
[음...]
참으로 답답할 만큼 무거운 심음 소리였고 번뇌마저 가득해 보였다.
홍후인은 내심 암살할 상대를 밝히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위현룡이 이렇듯 충성심을 보이는데 괜히 꺼냈다가 일이 꼬여 버릴 수도 있음이었다.
이번엔 방법을 달리하여 권유에서 빈정거림으로 바꿔 보았다.
[이런 멍청한... 대장부로 태어나서 평생을 필부(匹夫)처럼 여자 치마폭에 묻혀 살다 죽을 놈이었던 게냐!]
사람의 심리를 흔들어 승낙을 유도하려는 것임이 분명했지만 위현룡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사람이 필부입니다. 그 안에 섞여서 그렇게 살아간들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도 행복한 삶이 있고 사랑도 있습니다. 단지 사치와 명예욕이 없을 뿐입니다.“
명예욕을 운운하는데서 홍후인은 기다리지 않고 반박해 나갔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명예가 한낱 뜬구름처럼 느껴지느냐? 그릇된 망상이라고 생각하느냐? 명예를 쫓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것을 높여 주는 것은 사람들이다. 명예는 제대로 쓰면 널리 이로운 법, 어찌 명예욕이라고 하여 폄하(貶下)하는 것이냐!]
홍후인의 일갈에 위현룡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는 간신히 대꾸를 했다.
“허나 선배님께서 말하시는 그 명예는 그런 명예가 아니지 않습니까? 무림을 장악해서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생의 허무함과 추악한 소유욕만 남을 뿐입니다.“
홍후인은 그 말에 속으로 발끈했지만 꾹 참으면서 마치 세상물정 모르는 제자에게 훈계를 하는 학자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명목상 무림을 장악한다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을 생각해보아라. 무림을 장악하게 된다면 무림은 한명의 통치권자에 의해 분란도 없이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에 겨워할 것이고 무기들을 만드는 대장간 주인들은 한숨을 쉬겠지. 마교고 구파일방이고 세력다툼도 멈춰서 있는 고요한 물처럼 잠잠할 것이다. 이래도 아무 것도 아니더냐?]
그의 궤변에 위현룡은 가슴마저 답답해져 왔다.
허망한 꿈에 사로잡혀서 얻어질 이득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무림을 장악하는데 일어나는 피비린내는 맡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인생사는 물처럼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입니다. 하늘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데 인간이 무슨 능력이 있어 하늘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입니까?“
[인간은 물길을 바꾸고 트이게 할 수 있는 존재다. 하늘이 묵묵히 바라본다고? 하늘이 인간사를 포기했다는 생각은 안 해보았느냐? 어차피 인생은 개척인 것이다. 난 오래 전부터 개척을 꿈꿔 왔고, 상실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너에게 그 꿈을 물려주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위현룡은 홍후인의 말에 절대로 공감하지 않았다.
무림은 무력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무력을 무력으로 갈아엎는다고 해도 여전히 무림은 무림이었고 무력의 세상인 것이다.
피로 덮인 대지(大地)위에 새로운 무력의 깃발을 꽂는다 하더라고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 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끝내는 선배님의 헛된 꿈일 뿐입니다. 저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도 않고 평생을 필부로 산다고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소모적인 언쟁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위현룡은 이런 한마디를 내뱉고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라. 이런 기회는 절대 다시 오지 않는다.]
최후의 통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말이 귓가로 들려오고 있었다.
무림에서 최고로 군림하게 해주겠다는데 거절당할지 전혀 예상 못했던 홍후인은 속으로 매우 당황했다.
솔직히 위현룡의 자질을 놓고 봤을 때 그리 탐탁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유일하기에, 아쉽지만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남의 사정도 모르고 단칼에 무 자르듯 거절하는 위현룡을 보자 홍후인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교묘하게 유혹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았으나 위현룡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선배님께서 어떻게 절 최고수로 만들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그걸 이용해서 살인을 저지르실 생각은 마십시오. 저는 선배님이 협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저의 착각이었습니까?“
상대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위현룡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나는 악적을 처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적 말이다!!]
홍후인이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정당함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아까의 기세와는 다르게 왠지 변명처럼 들리는 느낌이었다.
위현룡은 홍후인이 원한에 사로잡혀서 잠시 이성을 잃었다고 믿고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깊은 원한으로 무리수를 두시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훗날 고수가 되면 선배님을 대신해서 그 악적들을 꼭 처단할 것이니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그 전에 그 놈들은 제명 다 살고 죽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미천한 무위를 거론하면서 비꼬는 말임을 아는 위현룡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배님이 보시기에 제가 많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배가 낮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이가 없으시겠지만, 세상은 노력한 만큼 결실을 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력을 포기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결실을 바라보기보다는 제 노력을 바라봅니다. 결실은 그저 덤으로 얻어진다고 믿고 있지요. 최고수가 되어서 무림을 휘어잡아 봐야 어차피 죽음에 이르러서는 다 허무한 것, 아등바등하게 살지 않고 적당히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위현룡의 말에는 삶의 애환이 진하게 베어 있었다.
혈기왕성했던 젊은 날에는 고된 속가제자의 삶을 견디면서 수 백 번도 더 읊조렸던 말이 무림에서 최고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의 벽이 높고 두터움을 알게 되자 스스로 유연하게 사는 법을 터득했다. 때로는 원대한 꿈에 의해 자멸(自滅)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마디로 득도(得道)의 경지였다.
“욕심을 버리니 인생이 참 편하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홍후인은 죽어있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허무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림을 장악할 수 있다는 도전을 접어 둘 수는 없다고 그는 재차 다짐하고 또 했다.
[미련하고 욕심도 없는 놈...무슨 염세주의자도 아니고 삶을 어찌 그렇게 사느냐.]
“하하하, 전 그래도 무척 행복합니다.”
[이놈아...무림에서 활동하려면 성품이 좀 잔악무도해야 하고 탐욕과 권모술수도 적당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야!]
무림 선배로써 홍후인이 근엄하게 훈수를 하고 나섰으나 위현룡은 방긋 웃기만 했다.
“저도 그런 성품은 지니고 있습니다.”
[퍽도 그렇겠구나...]
나이는 삼십도 더 먹어 보이는 녀석이 지나치게 순박하자 홍후인은 이내 체념했다.
위현룡은 아무리 생각해도 야망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었던 것이다.
[그럼 살인청부는 없을 테니 내게 몇 자락만 배워라.]
거절은 당했지만 왠지 기특하게 생각한 홍후인이 적당한 절충을 시도했다.
“안되겠습니다. 저는 청성파 무공 외에 다른 무공을 배울 수 없습니다.”
[거참 복잡한 녀석일세. 그럼 청성파에서 나와서 나를 사부로 삼던지 하면 되잖냐!]
“하하하”
위현룡은 또 한번 웃기만 할뿐이었다.
[젠장...그럼 내공심법만 배워라. 내공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별 문제 없을 것 아니냐!]
“전 청성파 무공만 배울 따름입니다.”
위현룡은 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기존의 태도를 고수했다.
짜증도 이런 짜증이 없었다.
이놈과 조금만 더 밀고 당기다가는 설령 혼백이라하더라도 분통터져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홍후인은 생각했다.
그는 가슴속에 열심히 인내를 새기면서 다시 말했다.
[내공은 그런 것과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무공은 청성파 무공을 배우거라. 내공은 그저 청성파 무공의 위력을 높여 주는 보조적인 기구에 불과함을 왜 모르느냐!]
한심한 생각이 든 홍후인이 위현룡의 부족한 무공지식을 탓하고 나섰다.
계속 거부는 해왔지만 이번만큼은 무림 선배인 홍후인의 말이 옳게 여겨지기도 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저는 기초적인 내공 외에는 배운 것이 없어서... 사실 검을 쓰는데 내공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즈음 되자 홍후인은 기가 막혀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넌 제대로 아는 것이 없구나!! 내공이 필요 없다고? 넌 평생 하수(下手)들과 겨루며 살 생각이냐? 고수들끼리 싸움에서는 검법도 중요하지만 내공의 깊이가 생사를 가른다. 더군다나 보법을 비롯하여 경공등도 모조리 내공이 필요한 것임을 정녕 몰랐단 말이냐?]
“경공을 운행할 정도의 내공은 쌓고 있습니다. 하지만 싸울 때 경공이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빈약한 무공지식을 스스로 느끼면서 위현룡이 약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점점 의기소침해지는 위현룡의 말에 홍후인은 혈압을 쫙 올리며 대응했다.
[헐...뭐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이 있나...]
“제가 왜 머저리라는 것입니까?”
[넌 평생을 일대일로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경공이란 치고 빠지는데 유용할 뿐 아니라 적의 수가 많을 때 필수불가결한 무공이다. 상대가 보법과 경공의 고수이며 너와 같은 실력이라면 네 놈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목이 달아날 것이다!]
“음...선배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겠습니다.”
조금 전 무림장악을 떠들어댈 때보다도 무공지식을 떠들어대는 지금 위현룡은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사람이었는지 인식했다.
[아이고...어쩌다 너 같은 자질 부족한 녀석을 만났는지...]
가르칠 것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싶었는지 홍후인의 엄살이 들려왔다.
“전 청성파 이대제자에 불과합니다. 선배님께서 이해를 해주십시오.”
[어쩌겠느냐...아무튼 내공심법을 가르쳐 줄테니 배워 두거라.]
“정말 상관없는 것이지요?”
마음 한 구석에서 찜찜함이 시원스럽게 사라지지 않기에 물었다.
[그렇다니까! 그렇게 따지면 네 검도 청성파에서 만든 검은 아니지 않느냐! 그 검처럼 내공은 청성파 무공을 도와줄 뿐이다.]
“그럼...선배님이 그리 권하시니 내공심법만 배워 두겠습니다.”
홍후인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무림에서 활동할 당시에 자신을 흠모하던 이들도 꽤 되었고, 무공 전수받기를 청하는 이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지하밀성의 비밀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재수없게 혼령이 되더니만 별 대수롭지 않은 녀석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겠다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평생토록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런 날이 아니겠는가.
[멍청한데다가 고집스럽기까지 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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