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기이(奇異)한 인연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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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아침 공기를 맞으면서 한 사람이 검을 휘두르고 있다.
위현룡(爲賢龍).
원연홍에게 검법을 전수 받아 불철주야(不撤晝夜)로 연마한 지금 그의 검술실력은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 그가 익히는 검법은 신학검법으로써 이미 절반정도의 성취를 이룬 상태였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난해하고 깨달음을 얻기 힘들긴 하나 정식제자가 아닌 속가제자가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위현룡은 절대 자만하지 않고 늘 부족한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수련에 몰두했다.
그에게는 과거에 가졌던, 무림 최고의 고수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보다는 원연홍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작은 꿈이 더 소중했다.
혹자는 그를 졸장부라고 폄하(貶下)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꿈의 가치란 것은 남들이 평가하기보다 자신이 평가할 때 가장 빛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들에게 하찮은 꿈으로 보일지라도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과는 늘 다른 법이었다.
아무튼 그가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검법을 연마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오늘이 고대하던 청성파의 비무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청성파 장문인 원기종이 돌아왔고 미루어졌던 비무날짜는 오늘로 잡혀졌다.
지금 위현룡뿐 아니라 청성파 정식제자와 속가제자들 모두 수련을 하고 있을 것이다.
수련을 그다지 하지 않았던 자들이라도 비무날짜에 맞닥트리자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하루를 위해 열심히 수련을 하려 할 것이다.
위현룡은 흐르는 땀방울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절대 마음의 평정을 읽어서는 안 된다. 비무건 아니건간에 그저 평소처럼 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을 든 손이 조금씩 떨려 오는 것을 억지로 떨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한번 커다란 동작을 취하면서 검을 앞으로 쭉 뻗었던 그는 다시 한번 신학검법을 반복해서 연마했다.
어차피 신학검법의 육할정도에 막혀 더 이상 진전도 볼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전반부라도 능숙하게 숙달시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몰입된 상태로 검을 휘두르는데 뒤쪽에서 나직한 찬사가 들려왔다.
“좋구나.”
무인이란 늘 그렇듯이 위현룡도 반사적으로 몸을 수그리면서 방어자세를 취했다.
전방에는 두 사람이 태연자약하게 서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누굴까...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미동도 느끼지 못했다.)
일단은 아무런 살기도 느껴지지 않기에 위현룡은 얼른 검을 뒤로 물리면서 정중히 물었다.
“노선배님들은 누구십니까?”
연배가 높아 보여서 붙인 호칭이 노선배님이었다.
그중 한 명이 껄껄대면서 웃더니 입을 연다.
“내가 기억 안 나는 것이냐?”
뜬금없는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위현룡이었으나 이내 상대가 누군지 머리에 떠올랐다.
“선배님은 오래 전에 청성파를 방문하셨던 단대인 아니십니까?”
청성파 원기종을 만나러 예전에 한번 방문했던 단중이라는 사람이고, 노파심에 자신이 위험을 경고해 주었던 그 사람이었다.
“하하하. 그래 기억하는구나.”
위현룡은 청성파와 연이 깊은 마교 수뇌 단중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자 얼른 다가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몰라보고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단중이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얼른 위현룡의 인사를 피해 내며 말했다.
“이 녀석아 잠깐 기다려라. 나보다는 이분께 먼저 읍을 해야 한단다.”
영문을 몰라하는 위현룡에게 단중이 황송한 듯 옆에 있는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은 마교 교주이시다. 어서 예를 올려라.”
“마교에서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 불리는...”
약간 중얼거린 위현룡은 상대가 누구인 것을 알자마자 허둥지둥 무릎을 꿇어 예를 다하려 노력했다.
“하하하. 내가 뭐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것이냐...”
마교교주 허석문(虛碩炆)-
키는 단중(但中)보다 작은 편이였고 붉은 도포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동그란 얼굴형에 잔주름들이 세세하게 협곡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험난한 인생의 풍파를 많이 견디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었고 온화하나 굳건한 기상에서 닥쳐온 난관을 회피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모두 극복해 왔다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교주라고 해서 오만함과 근엄한 인상만을 풍기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고 겸손한 말투를 사용할 줄 아는 것같이 보였다.
아무튼 뜬금없이 청성파에 교주까지 대동하고 단중이 출현한 이유는 지하밀성에서 원기종의 도움이 지대하였기에 감사의 뜻으로 방문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지하밀성으로 인해 마교는 무림에서의 고지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된 것이다.
“네 이름이 위현룡이라고 들었다.”
잠시 위현룡을 속속들이 훑어보던 교주 허석문이 물었다. 이미 그는 위현룡에 대해 단중에게 많은 설명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네. 그렇습니다.”
위현룡은 아직도 수그린 고개를 감히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잠시 보니까 검을 잘 다루더구나. 그것도 왼손으로 말이다.”
“사고로 오른팔을 못 쓰게 되어서 부득이하게 왼손으로 익히고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대답이었다.
“하하하. 보통사람같으면 낙담하고 포기했을텐데 실의를 딛고 일어서는 것을 보니 매우 기특하구나. 속가제자라고 들었는데 무공도 매우 뛰어나구나.“
“과찬이십니다.”
교주 허석문은 망부석처럼 굳어져 있는 위현룡을 손수 일으켜 세워 주면서 말했다.
“나는 네가 마교를 위해 행한 공을 잊지 않고 있단다. 정말 고맙구나.”
어리둥절한 위현룡은 잠시 교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마교의 인물들과는 일면식도 없었던 자신이 무슨 공을 세웠단 말인가.
그 눈치를 챈 단중이 지하밀성에서 도움 받았던 일을 언급했다.
“아...”
솔직히 위현룡도 그 영상이 현실의 일면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저 불길한 꿈을 꾸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일종의 직감만 가지고 앞뒤가리지 않고 단중에게 충언을 한 것에 불과했다.
하여간 결과가 좋아서 단중을 비롯하여 마교 부교주 조양천과 청성파 장문 원기종을 구하게 된 것을 알게 된 위현룡은 비로소 얼굴에 밝은 빛을 띄우고 말했다.
“소인은 그저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보다도 가신 일이 잘 해결되었다니 감축드립니다.“
“그래서 교주께서 너에게 큰상을 내리려고 하신다.”
그러나 단중의 말에 위현룡은 급히 정색을 보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청성파의 속가제자로써 청성파를 위해서 나서게 된 것입니다. 상은 이미 제가 속가제자로 있으면서 청성파에서 수도 없이 받은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위현룡의 진심어린 겸양에 허석문과 단중은 마음속으로 은근히 탄복하고 있었다.
(공을 세우고 약간의 보답이라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저 속가제자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같군.)
교주가 제안하듯이 한마디 했다.
“괜찮다면 너를 마교에 초대하고 싶다만은...”
그의 말에 단중과 위현룡이 함께 놀랐다.
“교주님...그것은 좀...”
일개 속가제자를 교주가 직접 초대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마교의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 될 수도 있었기에 단중은 만류를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교주는 단호했다.
“네가 청성파의 속가제자로 있기엔 너무 아까운 재목이니 원한다면 마교에서 네 꿈을 펼칠 수 있게 도와줄 의향도 있다.“
단중은 경악스런 얼굴로 마교교주를 한번 쳐다보다가 위현룡을 쳐다보았다.
위현룡도 단중과 거의 엇비슷한 표정으로 있더니 이내 읍을 하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소인이 교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마교로 간다면 제 인생에 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인은 청성파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소인은 이 곳에서 차가운 겨울을 맞이하기로 오래 전부터 결심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고된 속가제자의 생활을 각오한 위현룡의 말에 교주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네 자질을 봤을 때 마교에서 무공을 갈고 닦는다면 뛰어난 고수가 될 것이 자명한데 어째서 가시밭길을 택한단 말이냐?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자세한 연유는 말씀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만 그 가시밭길을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교주님의 호의를 물리치는 소인의 심정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위현룡은 가깝게 친한 곽유와 천승비를 포함하여 속가제자들의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있었다.
수년간을 동고동락했던 그들을 버리고 혼자만의 꿈을 쫓아 떠날 수는 없었다.
또한 평생을 원연홍의 곁에 남아 보살피겠다고 맹세까지 한 자신이 아니던가. 위현룡에게는 청성파가 처음이자 마지막 문파였고 그의 인생길이며 무덤자리였다.
교주는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어렴풋이 청성파에 대한 그의 충정을 느꼈다.
(참으로 충직한 자로군...)
“네 결심이 그렇다면 더 이상 강권하지는 않으마. 대신 내 초대를 받아서 마교에 한번 들려주는 것까지 거절하지는 말거라.“
교주의 진심어린 어투에 곁에 있던 단중이 다 황송했다.
마교 교주가 평소에도 지위고하를 논하지 않고 소탈하게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나 일개 속가제자한테까지 이럴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림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무릇 지위와 서열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데 까맣게 후배인 속가제자에게 교주가 어떻게 저렇게 빌 듯이 부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척 당황한 위현룡은 교주의 행동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정말 교주님은 큰 그릇이시다.)
위현룡은 재차 말했다.
“소인은 속가제자의 신분이라서 교주님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그 일은 내가 청성파 장문인께 부탁을 해 놓을 것이니 염려 말거라.”
이쯤되면 자신이 입에 올렸던 권유를 끝까지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집념이나 다름없었다.
“교주님...그렇게 까지야...”
단중이 허겁지겁 만류를 하려는데 교주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원장문인께서 허락하면 괜찮겠느냐?”
어떻게 보면 집요할 정도로 허석문은 위현룡을 마교에 초대하려고 하고 있었다.
마교 교주인 그는 성격상 한번 마음에 드는 자는 편한 지기처럼 대하기를 밥 먹듯 하는 위인이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대장부다운 기개를 가진 자를 만나서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인지도 몰랐다.
위현룡은 이렇게까지 교주가 신경을 써주자 내심 고마움을 금지 못했다.
“소인이 어찌 교주님의 명을 거스리겠습니까. 비무가 끝나는 대로 장문인께 청하여 마교에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고맙구나”
도대체 누가 고마워해야 할지 모른다는 듯 교주 허석문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교주님께서는 청성파 비무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위현룡은 오늘이 청성파 비무대회가 있다는 것과 그들의 출현의 시기가 적절하여 짐작해 물었다.
“그래. 지하밀성에 관한 일로 원장문인께 인사도 드리고 청성파 비무도 관전할 겸해서 방문한 것이니라.“
“아...”
“너도 비무에 참가하는 것이냐?”
허석문이 친근하게 관심을 표현하면서 물어왔다.
“네. 소인이 미력하나마 정식제자의 반열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네 정도 실력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아까 네가 연마했던 검법이 무엇이냐?”
“신학검법이라고 합니다.”
“네가 보기엔 그 신학검법을 아직은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 듯하구나.”
교주는 위현룡의 약점을 꿰뚫어 보고 있듯이 한마디했다.
“그렇습니다. 소인이 우둔하여 절반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약간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면서 위현룡이 인정을 했다.
“내가 작은 선물을 주도록 하마.”
교주 허석문은 단중의 검을 잠시 빌려서 자세를 잡았다.
“교주님...그것은 좀...”
교주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 챈 단중이 기어가는 소리로 애원하듯 말렸다.
그러나 허석문은 들은 척도 않고 검에 내력을 주입시키고 있었다.
마교의 무공을 다른 문파 제자에게 전수해준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 될 수 있었다.
문파끼리 분쟁이 일어난 소지도 있을뿐더러 마교의 무공은 마교인에게만 전수해야 함은 마교교주라면 꼭 지켜야 할 법도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허석문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잘 보고 이 검초를 익히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힘들어했던 신학검법의 난해함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허석문은 위현룡이 가로막혀 어려워하던 검초의 맥을 직접 짚어 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엇비슷한 검초를 가르쳐주면서 위현룡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다.
교주는 곧바로 시전을 시작했다.
“일초, 담월향풍(淡月香風)!” [담화한 달빛아래 향기로운 바람이 이는구나.]
“이초, 독수고방(獨秀孤芳)!“ [홀로 빼어난 외로운 향기.]
“삼초, 오상탁로(傲霜濯露)!“ [오만한 서리 이슬에 씻겨,]
“사초, 춘풍도상지(春風到常遲)!“ [훈훈한 봄바람 더디기만 하네.]
어떻게 보면 한 폭의 시화(詩畵)같은 운치가 있는 초식명이었다.
이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위현룡은 마치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초식들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비록 네(四)초식이긴 해도 이 초식을 익히다 보면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교주는 검결과 함께 몇 번이나 거듭해서 보여주는 친절을 잊지 않았다.
위현룡은 그의 눈짓을 받아서 즉시 검을 뽑아 시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움직임은 둔하고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신학검법보다 난해했으면 난해했지 결코 쉽지 않구나.)
위현룡은 더욱 집중력을 발휘하여 네 초식의 검법을 쉬지 않고 시전했다.
초반보다는 확실히 자세가 잡혀져 가는 것 같자 교주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그만 가도록 하마.”
그러나 위현룡은 이미 검초에 몰입이 되어서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에 마교 교주가 먼저 인사하는데 거들떠도 안보는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보다못한 단중이 나서려는데 교주가 얼른 만류했다.
“놔두시오. 단대인도 알다시피 검법이라는 것은 깨닫기 시작했을 때 멈추지 말아야 하는 법이 아니오.“
잠시동안 힘차게 검을 휘두르는 위현룡을 주시하던 허석문의 눈에 돌연 이채가 번뜩였다.
그의 눈은 위현룡이 허공에 긋고 있는 검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단대인...보셨소?”
“네, 방금 보았습니다.”
“위현룡이 어떻게 저 검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시오.”
“네. 제가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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