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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2.12.15 05:44
최근연재일 :
2014.05.02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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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02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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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4) <3권 끝>

DUMMY

* * *


영수를 처치한 원정대는 지하드가 회복할 때까지 산을 넘지 않고 열흘을 더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암벽을 깨고 사다리를 놓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 사흘 만에 둥지에 닿을 수 있었다.

새끼는 모두 네 마리였다. 그러나 여러 날 동안 먹이를 얻어먹지 못하자 일대 비극이 일어나 있었다. 다른 놈들보다 두 세배는 덩치가 큰 놈이 두 마리를 쪼아 죽이고 살을 뜯어 먹어버린 것이다. 나머지 한 마리는 공포에 질려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작고 허약한 녀석이었다.

가란자는 튼튼한 놈보다 허약한 놈에게 더 정이 갔다. 큰놈의 잔인한 성정이 꺼려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작은놈의 한쪽 눈이 그와 마찬가지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눈은 그에게 행운의 상징이었다.

가란자는 매를 먹이고 관리하는 일을 이베르에게 맡겼다. 그들 중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래도 일군을 이끄는 장수인데, 가축이나 돌보게 하여 모욕감을 안겨줄 의도였다. 원래부터 이베르에게 동정적인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즐거워했다. 이베르는 화가 치밀었지만 거역할 용기도 없었다.

열흘이 지나자 지하드도 간신히 다시 말에 오를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아직 부러진 늑골이 다 낫지는 않았지만, 자기 한 사람 때문에 더 지체해서는 안 된다며 진군을 재촉했다. 지하드가 고집을 피우자 가란자도 더 반대하지 못하고 산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호브드 군대와 대치했다.

호브드는 인구가 5천에 불과한 작은 부족이었다. 그러나 창칼을 들고 싸움터로 나온 자는 2천이 넘었다. 노인과 아이, 여자들까지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가란자는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첫 싸움입니다. 첫 싸움만큼은 잔꾀에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힘으로 눌러야 합니다. 가장 세력이 약한 호브드를 상대로 그리하지 못하면, 다른 부족들은 설사 우리에게 무릎을 꿇는다 해도 결코 마음으로부터 납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를 규합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나 몽골족은 원한보다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힘에 반응하는 자들입니다. 여자와 어린 아이까지 창을 들고 나섰다 하여 결코 방심하거나, 손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원정대는 그 말을 듣고 각오를 새로이 다졌다. 방심은커녕 몽골 전사들의 억센 피가 여자와 아이들에게까지 흐르고 있다 생각하니 간담이 다 서늘했다.

가란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상자는 뒤로 물러서시오. 소중한 전력을 헛되이 낭비할 수 없소. 대부도 뒤로 물러서십시오. 군령입니다.”


군령이라는 데야 지하드로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란자는 지하드가 명을 받자 이번에는 이베르를 향했다.


“장수된 자가 병사들의 등 뒤에 숨어 있어서야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선두에 서서 전공을 세워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시오.”


이베르는 순간 말에서 떨어져버릴 뻔했다. 저 거친 몽골족과의 전투에서 선두에 서라는 것은 창칼을 손에 쥐어 본 적도 없는 그에게 죽으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거부할 명분도 없고 용기도 없었다. 그 또한 군령이었다.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 ‘오늘 여기서 생이 다하는구나. 아…… 화영…… 그대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가란자는 사색이 된 이베르를 보고 냉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명을 내렸다.


“이미 여러 번 강조했지만 몽골 전사의 무서움은 창칼이 아니라 활에 있습니다. 결코 방패를 어깨 아래로 내리지 마시오. 자, 그럼 이제 가봅시다!”

원정대가 크게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가란자는 곧 팔을 휘둘러 그들을 붙잡아 세울 수밖에 없었다. 호브드 진영에서 세 사람이 말을 타고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란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믿음직한 두 사람을 데리고 마주 걸어나갔다. 여섯 사람이 양 진영 사이 한가운데서 만났다.


“호브드 족장 울리아라 하오. 그대들은 누구요? 무슨 일로 우리를 치려 하는 거요?”

“달란자다 왕자 가란자가 온도르한과 여목희의 전횡을 끝내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이제 몽골 전체가 내 발아래 엎드릴 테니 천리(天理)를 거스르려 하지 말고 항복하여 그 목숨을 부지하도록 하라.”


가란자를 수행한 원정대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눈을 마주쳤다. 항복할 생각으로 나선 이도 일전을 각오하게 만들만한 오만방자한 말투였던 것이다. 대화를 시도하는 상대에게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브드 족장 울리아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다행히 감정을 쉽게 폭발시키지는 않았다.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묻겠소. 신께서 저 산을 넘도록 허락하셨소?”


가란자는 그들이 영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족장의 단장 끝에 날개를 펼친 매가 조각되어 있었다.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났지. 내가 이 손으로 하늘로 돌려보냈다. 지금 우리 몽골에 필요한 것은 덧없는 신이 아니라 새로운 맹왕, 나 가란자라는 하늘의 뜻이다.”


호브드 족장 일행은 크게 놀라면서도 그 말을 믿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오? 신께서 그대에게 길을 양보하셨단 말씀이오?”

“못 믿겠다면 증거를 보여 드리지.”


가란자가 이베르를 불러 새끼 매 두 마리를 가져오게 했다. 한 놈은 크고 한 놈은 작았으나, 솜털이 빠지고 새 깃털이 나기 시작한 새끼 매들은 큰놈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놈도 덩치가 어지간한 성체 못지않았다. 분명 호브드 족이 모시는 신의 후손이 틀림없었다.

족장 일행은 입을 쩍 벌리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가란자가 그들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전과 달리 사뭇 부드러운 말투였다.


“저 산의 신이 내게 길을 열어주면서, 그대들의 충심을 잊지 못하고 이 아이들을 남겨준 모양이오.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지 말고 천리를 따라 나와 함께 새로운 대 몽골 제국을 건설하라고 말이오. 그대들이 내게 힘을 빌려준다면 오래지 않아 여기 우리를 도우러 온 카자흐 연맹의 군사들을 돌려보내고, 온전히 우리 힘만으로 몽골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약속하겠소.”


호브드 족장은 멍한 얼굴로 가란자의 말을 듣다가 문득 새끼 매들을 쳐다보고는 짧은 탄성을 뱉었다. 그의 시선이 새끼 매와 가란자를 번갈아 오갔다. 가란자는 그가 작은놈과 자신의 한쪽 눈이 같은 색깔인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서희도에서는 이븐 선생이 서희 아가씨를 화란 공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서 저들이 믿는 신의 화신이 되고 있다.’


족장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가 입을 열지 못하자 가란자가 쐐기를 박았다.


“하루 말미를 주겠소. 부족의 뜻을 하나로 묶어놓으시오. 그대가 안목이 있어 보이니 어리석게 천벌을 자초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오늘은 그만 물러가겠소.”


가란자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양 군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군사를 물리고 각자의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진영으로 돌아온 가란자가 참모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호브드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모두 안심하고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원정대는 호브드의 진의를 몰라 몹시 불안해했지만, 가란자는 호브드가 그를 적대시할 가능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몽골족은 미신에 약하다. 특히 이 변두리 중의 변두리 지역의 원주민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 사실을 알고있는 가란자는 벌써부터 아수타이를 공략할 계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천운은 가란자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전투가 벌어졌다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었을 이베르야말로 하늘의 보살핌을 받은 이였다.

그러나 이베르는 가란자와 사정이 조금 달랐다. 하늘에 감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비를 넘긴 것이 아니라 위기가 닥쳤다는 것을 이제 겨우 알았을 뿐이다. 그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베르는 밤을 틈타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명색이 일군의 지휘관이라는 자가 탈영을 하다니,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는 전사(戰死)가 아니라 살해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빠져나갈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원정대가 바짝 긴장한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란자가 안심하고 편히 쉬라고 명령했지만 적을 코앞에 둔 이들에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병사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번갈아 불침번을 서며 혹시 모를 야습에 대비했다. 지하드조차 잠을 이루지 못하고 틈틈이 경계 태세를 점검했다.

다음 날 오후, 호브드 족장이 일족을 이끌고 가란자의 진영을 찾았다. 가란자는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눈을 비비며 그 앞에 나섰다. 지하드를 비롯한 원정대 전원은 가란자의 대담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적이 항복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더라도 군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장수가 취할 행동으로는 지나친 감마저 있었다.

가란자는 그렇게 아직 잠도 덜 깬 얼굴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적의 항복을 받아내는 일이 눈을 뜨고 냉수 한잔을 들이키는 것과 같은 일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족장에게 형식적인 치하의 말을 전한 가란자는 막사로 돌아가다 말고, 마치 이제 막 떠올랐다는 듯이 잔치 준비를 명했다. 호브드 족도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 준비를 시작했다.

몽골인들은 원래 거추장스러운 예와 절차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하드와 원정대도 그렇게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이건 정도가 지나친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호브드 족이 진심으로 승복했다고 믿기도 어려웠다. 원정대는 몽골족이 어지간해서는 굴복하지 않는 거친 민족으로 악명이 자자하니, 속에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여겼다. 몽골인이 얼마나 담백하고 직선적인지, ‘소이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숨긴다)’가 그들과 얼마나 거리가 먼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잔치는 일주일이 넘게 계속되었다. 지하드와 원정대도 조금씩 이들의 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하드는 호브드족이 다른 마음을 품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븐보다도 몇 수는 더 높은 사기꾼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일 그렇다면 깨끗이 당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하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경계를 풀어 버리자 원정대도 하나둘씩 술자리에 섞이기 시작했다. 술잔을 나누다 보니 세상에 이렇게 소탈하고 사람 좋은 이들이 없었다. 열흘이 지나자 원정대고 호브드 족이고 할 것 없이 뒤엉켜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를 아끼게 되었다. 바로 가란자가 기다린 것이었다. 호브드와 싸워서 이겼다고 해도 전 군이 하나가 될 때까지 그렇게 가란자 자신부터 솔선하여 방심하며 술판을 벌였을 것이다.

연일 술판이 벌어지고 경계심이 사라지자 이베르에게도 기회가 왔다. 그는 낮에 빠른 말을 골라 군영 밖에 묶어 두고, 한밤중 잔치가 한창 무르익기를 기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모두의 관심 밖에 있다는 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지난 열흘간 아무도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그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가끔이라도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은 가란자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묘향을 떠올릴 때마다 부록처럼 따라오는 잡념일 뿐이었다.

막상 떠나려 하자 이베르는 문득 화가 치밀었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그는 단지 사랑을 했을 뿐이다. 그 대가로 이제 정처 없는 도망 길에 올라야 한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베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은커녕 자기 자신을 지킬 힘조차 없었다.

이베르는 자연스럽게 새끼 매 두 마리를 떠올렸다. 원수 같은 가란자가 그것들을 애지중지하니, 가지고 가버리면 작은 복수가 될 터였다. 나아가 잘 길들일 수만 있다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


- ‘나로 하여금 가축이나 돌보게 만들었단 말이지? 좋다. 명을 따르마. 그런데 기왕이면 군을 이탈하지 말라는 명령도 내리지 그랬더냐?’


사실 그의 이탈은 엄밀히 말해 죄가 아니었다. 작전과 통솔은 실질적으로 가란자의 책임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이베르가 군을 이끄는 장수였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새끼 매를 둔 막사로 갔다.


- ‘두 마리를 다 가져갈 수는 없겠다. 기왕이면 크고 튼튼한 놈이 좋겠지? 작은놈은 죽여버리자. 저 눈깔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그러나 막상 손을 쓰려하자 문득 마음이 약해졌다. 며칠 안 되지만 그동안 먹이고 돌본 정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베르는 무언가 살아있는 것을 단 한 번도 죽여본 적이 없었다. 그는 큰놈을 안아 들고 작은놈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혀를 차며 돌아섰다.


- ‘눈깔 시뻘건 놈들끼리 잘해봐라.’


이베르는 그 길로 군영을 떠나 마그니토로 말을 달렸다. 다음 날 정오가 훨씬 지날 때까지 아무도 그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부재는 굶주린 새끼 매가 천막을 찢어버릴 기세로 울부짖으며 알려졌다. 가란자는 화염이라도 토해낼 기세로 화를 냈지만 분노를 받아내야 할 대상은 그곳에 없었다. 이베르가 당당히 걸어나갔다 해도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자가 없었을 테니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소중한 영수의 관리를 이베르에게 맡긴 것도 바로 가란자 자신이었다.

지하드가 나섰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풀어 영수 새끼를 회수해야 한다. 남은 놈보다 사라진 놈이 훨씬 더 크고 튼튼하니 훗날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게야.”


가란자로서는 이베르가 작은놈을 데려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붉은 눈의 영수가 있어야 호브드 족을 장악하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놈이 아깝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가란자가 입을 열었다.


“매를 길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영수라면 더하겠지요. 그러나 역시 만에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우리가 한 마리를 잃고, 누가 될지도 모르는 적에게 한 마리를 보태준다면 두 마리를 손해 본 셈이니까요. 영수 두 마리라면 전쟁의 승패를 가를 차이일 것입니다.”


가란자는 지리를 잘 아는 호브드 족에게 주변 지역을 수색하게 하고, 전령을 보내 이베르의 이탈 사실을 마그니토에 알리게 했다.


가란자는 호브드 족 수색대가 이베르를 잡아 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루의 여유가 있었다 하나, 길도 잘 모르는 데다가 몸통 만한 새끼 매까지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 이베르가 몽골 족을 따돌리고 알타이산맥을 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 번 따르기 시작한 운은 끝까지 이베르를 버리지 않았다. 아수타이가 움직이는 바람에 호브드 족 수색대가 임무에 충실히 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브드의 심상치 않은 기류가 아수타이에 전해진 모양이었다.

알타이와 한가이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맹주 아수타이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최대 2만에 달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원정대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호브드 족 전사를 모두 동원해도 이쪽은 5천에도 미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니 가란자도 수색에 많은 인원을 할당할 수는 없었다. 병사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호브드가 외부 세력과 결탁했다고 확신한 아수타이는 정예 3천을 보내 결전의 의지를 보였다. 가란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전군을 이끌고 아수타이가 진을 친 넓은 평원으로 향했다. 가란자는 튼튼한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마그니토 병사들을 전면에 배치했다. 아수타이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낼 기세였다.

뛰어난 궁술이 몽골 족의 가장 강력한 무기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들이 접근전에 약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엄청난 기동력에 휘둘릴 대로 휘둘리다가, 큰 희생을 감수하고 억지로 접근전으로 몰고 간 다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것이 몽골 족에게 패하는 가장 흔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마그니토 병사들의 갑옷과 방패는 그대로 넓은 평원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성벽이 되었다. 그 뒤에 용맹한 호브드 전사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아수타이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고 지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수타이는 선봉 3천이 적의 기세에 눌려 슬금슬금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호브드가 더 강한 상대에게 굴복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외부 세력이라는 자들이 3천에 미치지 못하고, 호브드의 전사들이 그 뒤를 받치고 있다고 하니 도대체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호브드가 전력을 온전히 보전한 채로 다른 이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불과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마치 원래부터 하나의 군대였던 것처럼 두 집단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니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도 없었다.

아수타이의 놀라움은 지원군 8천이 도착한 후에 더욱 커졌다. 선봉 3천에 더하여 두 배가 넘는 병력으로도 적의 진형을 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아수타이의 1만 1천과 호브드의 2천 정예 간의 싸움처럼 보였다. 그러나 넓은 평원 위를 자유자재로 달리는 마그니토 3천 기갑병이 호브드의 움직이는 성이 되어주니 아수타이의 기동력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호브드는 전력으로 달리다가도 갑자기 안전한 성으로 들어가 버리니 위력이 몇 배나 강해졌다.

당황한 아수타이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한계까지 동원해 단번에 전투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갑옷과 방패에 몸을 숨긴 마그니토 병사들이 진짜 성(城)이라고 쳐도, 2만에 달하는 아수타이 전 병력이 한꺼번에 들이친다면 호브드 전사 2천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병법에도 성을 빼앗으려면 열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하였으니, 아수타이가 선택한 정공법은 정답에 가장 근접한 전략이었다.

아수타이가 거리를 두고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을 본 가란자는 곧 적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참모진은 가란자의 설명을 듣고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호브드를 흡수하고, 반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적을 농락하는 젊은 지휘관을 향한 신뢰가 벌써 그만큼 쌓여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호브드 전사들이 여유만만이었다. 그들로서는 가란자가 신이라는 증거를 이미 넘칠 만큼 목격한 셈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지하드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직 그만이 가란자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하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그니토로 보냈던 전령이 돌아와 전한 소식 때문이었다.


“괜찮겠느냐?”


평소와 다름없이 진형을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드가 넌지시 물었다.

가란자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으며 대답했다.


“원정대가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여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저들이 평범한 진짜 성이라면 무너질 병력 차이입니다. 허나 움직이는 성을 치려면 병사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는 병법에도 나와있지 않지요. 다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지하드는 코 위로는 인상을 쓰고 아래로는 미소를 지으며 가란자를 바라보았다. 가란자는 묘한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하드가 묘향의 일을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란자도 지하드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그깟 일에 정신이 팔려 대업을 그르칠 정도로 한심한 놈은 아닙니다.”

“안다. 그런 그릇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두 사람은 쓰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막사로 돌아갔다.

지하드는 가란자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도 거짓이 없었다. 가란자는 분명 여자 문제로 큰일을 그르칠 인물이 아니었다. 임초서가 도대체 어떻게 키워놓았는지, 군사를 수족처럼 움직이는 용병술은 마그니토의 정예들조차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하드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젊은 왕을 모시는 신하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걱정이다. 그 어떤 천하의 기재라 하더라도 나이는 결코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을 때, 나이는 그 자체로 어찌해볼 수도 없는 한계가 되곤 한다.

아수타이의 병력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 진작에 2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고도 호브드의 묘한 진형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분지의 또 다른 부족 울링까지 전투에 동원하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력 차이는 점점 더 커질 판이었다.

그러나 지하드는 적의 그러한 움직임이 오히려 고마웠다. 가란자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벌어주는 셈이었던 것이다. 사실 가란자의 상태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묘향의 소식을 들은 후로 잠을 이루지 못하여, 다른 한쪽 눈까지 충혈되어 양쪽의 색깔이 거의 같아질 지경이었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판단력 저하도 결코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몽골을 떠나고 임초서를 따르고 야심과 실력을 키워온 것은 모두 묘향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내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열아홉은 이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해 내기에 적당한 나이가 아니다. 아니, 어떤 일에는 적당한 나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스스로를 가두던 알을 깨고 나와 큰 뜻을 세우게 만들었던 여인이 가당치도 않은 자를 따라 도망쳐 버리는 경험을 하기에 적당한 나이는 도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사실 이베르의 행동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었다. 도망치는 주제에 영수를 훔쳐가질 않나, 쫓기는 주제에 태연하게 왕궁으로 걸어 들어가 묘향을 데리고 도망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성공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가란자가 보낸 전령도 이베르가 자기 앞에서 달려가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속도를 높이지 않았었다.

격노한 카잔은 군령을 어기고 귀한 손님을 납치한 죄를 물어 이베르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연적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가란자에게도 책임을 물으려는 것을 남중서와 파블로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전령은 그 일까지는 전하지 않았지만 지하드는 듣지 않아도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가란자의 정신은 그런 일에까지 닿을 여유가 없었다.

지하드는 그저 난처할 뿐이었다. 가란자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거나 맡은 바 책무를 소홀히 하는 기미가 보이면 뭐라고 할 말이라도 있겠는데, 매일매일 조금씩 혈색만 더 나빠질 뿐 도무지 책잡을 일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하드에게는 그게 더 위태로워 보였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았을 때는 외상이 전혀 없는 쪽이 더 위험하다. 초점이 평소보다 더 먼 곳에 놓여있는 가란자의 두 눈은 그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지하드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 ‘우리 군의 움직임에 흔들림이라고는 없다. 가란자도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흔들리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승부는 그 작은 차이에서 갈리는 것이다. 적은 벌써 2만, 호브드 척후병의 이야기로는 울링에서도 1만에 달하는 병력이 다가오고 있다 한다. 허풍이 좀 심한 친구들이니 실제로는 많아야 6, 7천 정도겠지만 상황이 변한 것만은 확실하다.’


지하드의 불안은 전염성이 매우 강했다. 원정대가 나이 어린 지휘관을 믿고 따른 데는 지하드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가란자 자신이 몇 번이나 자기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럴 수 있었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바로 지하드의 신뢰 가득한 눈빛이었다. 지하드쯤 되는 자가 믿고 따르기 때문에 원정대도 군말 없이 따른 것이다.

최근에는 호브드 전사들이 가란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바람에 원정대의 시야가 더욱 흐려져 있었다. 몇 배나 더 많은 적을 상대로 지리적 이점도 없는 평지에서 싸워야 하는데 누구도 전투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원정대의 눈에 지하드의 불안한 표정이 들어오고, 다음으로 가란자의 초점 없는 눈이 비로소 눈에 띄었던 것이다.

지하드는 자신이 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음을 깨닫고 크게 자책했다. 병법을 잘 모르는 자신이 표정 하나로 그 정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그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책임이나 따지고 있을 때도 아니었다.

지하드는 원정대와 호브드 전사들 중에서 우두머리 격인 자들을 모아 가란자를 찾아갔다. 가란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맞았다.


“그러지 않아도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주셨으니 제가 먼저 경청해야겠지요?”


여유만만한 태도, 가란자 그 자체였다. 원정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하드의 눈치를 살폈다. 지하드가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바람에 자기들까지 오해를 했다는 원망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지하드는 가란자의 붉은 눈이 전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하드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어른을 놀리는구나. 부끄러운 이야기다만, 병법을 논하는 데 있어 우리 중 너보다 나은 자가 없다는 것을 네가 알고 우리가 안다. 자, 이제 경청 다 했느냐? 이제 우리가 경청하도록 하마.”


참모진의 의견을 들으며 생각할 시간을 벌 작정이었던 가란자는 지하드가 이렇게 시원하게 나와버리자 난처하게 웃을 뿐, 선뜻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평소의 그라면 겸양의 말이라도 늘어놓으며 생각을 정리했을 터다. 지금의 그에겐 그만한 여유도 없었다.

가란자가 머뭇거리자 참모진은 비로소 몇 배나 되는 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 병사가 마땅히 지어야 할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뒤이어 대단히 상식적인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적이 수가 많으니 일단 물러서는 게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최소한 알타이산맥까지 후퇴해서 지리적인 이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호브드 족 전사들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합니까? 지금까지처럼 싸우면 적이 몇 배가 되건 상관없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후퇴해버리면 우리 부족 땅을 다 내줘야 되는데요? 애들이랑 노인들은 어쩌라고요?”


원정대와 호브드 족 사이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지하드가 나섰다.


“결코 우리 형제나 다름없는 호브드 족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오. 허나 지금은, 그 뭐냐 작정상 후퇴라는 걸 해야 할 때인 듯하오. 우리가 여기서 패해버리면 마을의 가족들도 안전하지 못하겠지요. 차라리 먼저 손을 써서 잠시 몸을 피하게 하는 게 낫지 않겠소?”


가란자의 막사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지하드의 말은 결국 호브드 족과 원정대가 남남일 뿐이라는 사실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가진 동지는 때로 적보다 더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가란자가 난데없이 이마를 짚고 웃기 시작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코로만 내뿜는 웃음소리가 막사의 공기를 더욱 싸늘하게 식혔다.


- ‘잘하는 짓이다. 여자 하나 때문에 수하가 서로 반목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사부님 뵐 낯이 없구나.’


가란자는 이븐의 말을 떠올리며 더욱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 ‘쫓겨난 여자보다 죽은 여자가 불쌍하고, 죽은 여자보다 잊혀진 여자가 불쌍하다 하셨지. 떠난 여자는 잊는 게 상책이라고도 했다. 만일 일이 이리될 줄 미리 알고 그리 말한 것이라면 결코 적으로 돌려선 안 될 사람이라 하겠다.’


가란자는 이제 아예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지하드조차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란자가 천천히 웃음을 그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 ‘여인 하나를 위해 세운 뜻이 여인 하나로 인해 무너지는 거야 놀랄 일이 아닐 테지. 그러나 이제 내게 큰 뜻이 없다 하여 이들을 모두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죽기 살기로 싸우면 3만이라 한들 상대못할 것도 없다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서둘 이유가 이제는 전혀 없다.’


가란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알타이산맥까지 후퇴한다. 마을 전체를 산속으로 옮기겠다.”


호브드 족은 잠시 가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군말 없이 명을 받았다. 임무를 받고 막사를 떠나려는 호브드 족을 가란자가 불러 세웠다.


“마을에 얽매이지 마라. 너희들은 내 형제가 아니더냐? 대륙 전체가 곧 우리의 안방이 될 것이다.”


가란자의 표정에는 여유와 자신감이 가득했다. 가란자를 신의 현신이라 믿고 있는 호브드 족의 사기를 일거에 드높이기에는 충분했으나, 지하드의 눈에는 억지로 꾸며낸 자신감으로만 보였다. 가란자의 붉은 눈은 여전히 붉기만 할 뿐, 아직 타오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하드는 바로 다음 순간부터 자기 눈을 의심해야 했다.

한 인간의 언어는 그의 사고(思考)에 크게 좌우된다. 누구도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할 수는 없다. 어쩌다 운 좋게 단어들이 놀라운 방식으로 조합되어 나온다 하더라도, 그 언어와 사고 사이에 괴리가 있다면 단순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고가 전적으로 언어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고의 도구이며, 때로는 그 도구가 전적으로 사고를 규정해버리기도 한다. 주정뱅이들은 자기가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을 자기가 들으면서 그것이 원래부터 자신의 가치관이었다고 쉽게 믿어버린다. 연인과 다투는 여인은 자기가 퍼붓는 말을 자기 귀로 들으며 비로소 자기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선언(宣言)이 사상과 신념에 선행하기도 한다.

지금 가란자가 그랬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 생각을 하고 있다기보다 그저 눈앞에 떠난 여인을 그리며 머릿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너를 잃은 슬픔이 아니다. 네가 나 대신 아르강 선왕 폐하 같은 분을 선택했다면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기쁘게 보내주었겠지. 허나 너는 단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도리를 모욕하였다.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대가로 선택한 것이 어찌 그런 소인배란 말이냐?’


가란자가 막사에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살기가 등등하여 아무도 이유를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하드는 그의 눈빛이 예전보다도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보고 좌우에 명을 내려 전군을 집합시키라 전했다. 가란자는 짐짓 모른 체하며 병사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원정대와 호브드 전사들이 모두 모여 도열했다. 가란자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 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알타이산맥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잘들어라! 그것은 후퇴가 아니다! 대륙 전체가 이미 그대들의 것이니!”


그 한 마디에 호브드 족의 사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원정대는 가란자의 허풍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면서도 호브드 족의 함성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이 용맹한 전사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가란자에 대한 신뢰도 새삼 깊어졌다.

그러나 가란자의 말은 전혀 농담이나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그의 모든 것을 불태울 큰 뜻을 다시 한 번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단지 호브드 족을 달래기 위해 꺼낸 한 마디가 그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사고를 규정하고 있었다.


- ‘나는 너를 찾지 않겠다. 허나……’


가란자가 함성을 그치지 않는 전사들 머리 위로 가슴 속의 불길을 뿜어냈다.


“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내 땅을 밟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가란자가 2인칭 호격을 사용했다는 데 주목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이를 향한 말로만 들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온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사실 한 사람에게 성립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성립할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단순한 허풍, 평범한 패기 따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호브드 족은 물론이고 원정대조차 순간적으로 그 말을 완전히 믿어버렸을 정도였다. 가란자 자신도 자기 목소리에 실린 힘에 도취되어, 자기가 뱉은 말이 실현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떠난 여인에게 그녀가 무엇을 잃었는지 알려주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사상 최악의 정복자가 마음 깊이 품었던 진정한 동기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3권 끝>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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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6 ze******..
    작성일
    14.05.05 20:06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18 시우(時雨)
    작성일
    14.05.06 19:09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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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4) <3권 끝> +2 14.05.02 508 5 33쪽
7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3) 14.05.02 433 5 16쪽
7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2) +2 14.05.02 448 4 25쪽
7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1) 14.05.02 434 4 20쪽
71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0) 14.05.02 336 5 27쪽
70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9) 14.05.01 453 4 26쪽
69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8) 14.05.01 420 5 35쪽
68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7) 14.05.01 428 4 13쪽
67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6) 14.05.01 405 6 25쪽
66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5) 14.05.01 417 4 13쪽
65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4) 14.05.01 484 8 14쪽
6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3) 14.05.01 464 6 24쪽
6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2) 14.05.01 447 5 13쪽
6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 14.05.01 610 7 20쪽
61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6) +2 14.05.01 506 4 20쪽
60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5) 14.05.01 463 8 24쪽
59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4) 14.05.01 503 5 14쪽
58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3) 14.05.01 372 5 17쪽
57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2) 14.05.01 434 4 15쪽
56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1) 14.05.01 434 7 11쪽
55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7) 14.05.01 343 6 25쪽
54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6) 14.05.01 264 6 19쪽
53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5) 14.05.01 450 7 18쪽
52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4) 14.04.30 363 6 17쪽
51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3) 14.04.30 461 4 18쪽
50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2) 14.04.30 307 6 18쪽
49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1) 14.04.30 665 3 17쪽
48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6) 14.04.30 332 5 19쪽
47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14.04.30 504 5 20쪽
46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14.04.30 436 4 19쪽
45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3) 14.04.30 424 5 15쪽
44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2) 14.04.30 263 7 12쪽
43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1) 14.04.30 472 7 24쪽
42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2) 14.04.30 394 8 14쪽
41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1) 14.04.30 246 6 11쪽
40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5) 14.04.30 422 5 24쪽
39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4) 14.04.30 366 6 14쪽
38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3) 14.04.30 307 6 16쪽
37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2) 14.04.30 320 6 23쪽
36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14.04.30 305 4 21쪽
35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4) 14.04.30 356 6 7쪽
34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3) 14.04.30 341 4 14쪽
33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2) 14.04.30 455 5 21쪽
32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1) 14.04.30 469 7 13쪽
31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2) 14.04.30 432 5 15쪽
30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1) 14.04.30 307 9 21쪽
29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9) 14.04.30 467 7 14쪽
28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8) 14.04.30 341 7 24쪽
27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7) 14.04.30 418 7 12쪽
26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6) 14.04.30 309 6 11쪽
25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5) 14.04.30 407 6 15쪽
24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4) 14.04.30 448 6 11쪽
23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3) 14.04.30 374 5 16쪽
22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2) 14.04.29 402 7 15쪽
21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1) +1 14.04.29 538 7 20쪽
20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4) 14.04.29 570 4 18쪽
19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3) 14.04.29 550 6 22쪽
18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2) 14.04.29 406 9 15쪽
17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1) 14.04.29 535 8 13쪽
16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7) 14.04.29 370 9 16쪽
15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6) 14.04.29 513 7 14쪽
14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5) 14.04.29 345 6 25쪽
13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4) 14.04.29 515 8 18쪽
12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3) 14.04.29 559 9 17쪽
11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2) 14.04.29 569 12 10쪽
10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1) +2 14.04.29 690 12 10쪽
9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9) 14.04.29 495 11 8쪽
8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8) 14.04.29 606 13 9쪽
7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7) 14.04.29 653 13 9쪽
6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2 14.04.29 547 13 8쪽
5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5) 14.04.29 682 11 8쪽
4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4) 14.04.29 598 11 8쪽
3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3) 14.04.29 849 14 10쪽
2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2) 14.04.29 1,246 14 8쪽
1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1) 14.04.29 2,223 2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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