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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2.12.15 05:44
최근연재일 :
2014.05.02 02:28
연재수 :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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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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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글자수 :
570,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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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0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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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

DUMMY

임초서와 서하손은 범계가 살짝 열어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서희가 침대가 걸터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고, 그 뒤로 이븐이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정성스레 머리를 빗기고 있었다. 둘은 범계가 두 사람을 데려왔다고 고하는 말을 듣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븐이 비춰주는 거울을 보고 서희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야 천천히 손님을 맞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임초서와 서하손은 완전히 방심해 버렸다. 누가 보더라도 손님을 청해놓고 단장을 하는 아가씨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서하손이 외쳤다.


“아니,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떠나셔선 안 됩니다!”


서희가 싸늘하게 웃었다.


“누굴 위해 안 된다는 겁니까?”


서하손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섬의 모든 것이 그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비로소 아슬아슬하게 성립되고 있다. 아무도 서희의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임초서가 나섰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 주인한테 들으세요.”


임초서와 서하손의 시선이 이븐에게 꽂혔다. 이븐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서희의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임초서와 서하손의 표정에 난처함, 부끄러움, 감탄 등의 감정이 여러 번 반복해 나타났다. 그리고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는 난처함에 머물러 다른 감정으로 변하지 않았다.

서하손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가씨, 지금 아가씨께서 떠나신다면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제 주인하고 이미 끝낸 이야기입니다.”


서희가 말을 가로막으며 이븐을 쳐다보았다. 이븐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가 서책을 서하손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배의 설계도군요.”

“그 배를 만들어주세요.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븐이 껄껄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이고, 이 아가씨야. 그렇게 말하면 되냐? 널 보내기 싫어하는 분이 서둘러 만들어 주시겠냐고요.”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느냐? 아저씨 그런 분 아니시다.”


순간 서하손의 얼굴에 홍조가 스쳤다.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품었던 자신을 자책하는 얼굴이었다. 이븐이 그를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정말이지 사람 다루는 데는 도가 텄다니까…… 게다가 진짜 무서운 건 이게 다루기로 마음먹고 다루는 게 아니라는 거지.’


임초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 ‘서 장로 성격에 이제 최선을 다해 배를 만들 수밖에 없겠지. 그나저나 도대체 어떤 배이길래……’


임초서가 보니 서하손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임초서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법의 배구나. 네놈이 하는 일이 그렇지……”


이븐이 항변했다.


“거기 어디 마법이 있는데요? 자세히 보세요. 마법의 시대보다도 더 옛날의 배라고요. ‘커티 샥’이라고, 마법의 힘 없이 움직이는 배 중에서는 역사상 가장 빠른 배였죠. 지금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서하손이 인상을 찌푸렸다.


“엄청나군요. 길이가 거의 백 보에 가깝습니다. 이런 배가 왜 필요하지요?”


임초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대답했다.


“그거라면 필요하지. 적에게 해군이 없으니 가장 빠르고 가장 큰 배라면 가장 안전한 성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뭐, 우리도 해군까지는 구성할 수 없지만요. 대양의 용이 먹이로 볼 테니까. 어쨌거나 서희가 섬을 떠나더라도 이 배에 타고 있다면 영감님 말씀대로 이쪽의 가장 안전한 성에 있는 셈입니다. 이 배 자체가 작은 서희도가 되는 거죠.”


이븐이 그렇게 거들자 서하손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고의 기술자들을 모아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기왕 수고하시는 김에 솜씨 좋은 도공(陶工)들도 좀 모아오십시오.”


서하손과 임초서가 의아한 얼굴로 마주봤다. 이븐이 손을 뻗어 서책의 후반부를 펼쳐보여주었다.


“쉽진 않겠지만 제철보다 쉬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임초서는 서책을 보고도 무슨 소리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하손의 두 눈은 책장이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점점 더 커져서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였다.


“이게 정말 가능한 겁니까? 흙을 구워서 칼을 만든다고요?”


서하손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품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임초서가 끼어들었다.


“깨진 도자기는 칼보다 날카로울 수 있지. 그러나 그만큼 쉽게 깨지지 않는가?”

“물론 검을 만들 수야 없지요. 하지만 부엌칼 정도는 만들고도 남습니다.”


임초서가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흙을 선별하고 불에 구워 연마하는 과정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철을 제련하기는 어려우니 가정에서 쓰는 철기를 모으면 검이나 창은 몰라도 화살촉은 꽤 많이 만들 수 있겠구나.”


이븐이 고개를 저었다.


“화살촉도 도자기로 만들 겁니다. 쇠로 만든 화살촉보다는 약하겠지만 약한 만큼 한 번 사용한 화살을 적이 주워서 다시 쓰기도 어려울 테니까요. 무게 중심이 다를 테니 특별히 훈련한 군사들만 제대로 쓸 수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임초서가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게다가 흙은 무한정 있으니 화살촉보다 화살대가 모자라겠다.”


이번에는 서하손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에 쓰인 대로라면 이 흙이 나는 곳은 매우 한정되어 있군요. 대륙을 통틀어 겨우 한두 곳 정도입니다. 그중 한 곳이 다행히 여기서 멀지는 않으나 산지를 확보하려면 오한의 성 두 개를 점령해야 하겠습니다.”


임초서가 책에 그려진 지도를 보니 이 특별한 흙은 주장 강 하구에 넓게 분포했다.


“오주(梧州)와 강문(江門)을 점령해야 지킬 수 있겠군. 홍강 항을 포함하면 점령할 곳이 세 군데겠다.”

“점령하려고 한다면 네 군데여야죠. 초와 동맹을 맺는다고는 하나 소관(韶關)을 확보하지 못하면 난링산맥 서쪽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요.”


이븐의 말을 들은 임초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손이 눈을 빛내며 이븐을 바라보았다.


“당장은 꼭 점령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게지요? 점령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도공부터 확보하라 하시니 말씀입니다.”


임초서가 대신 대답했다.


“아무도 그 흙의 용도를 모르니 서 장로의 수완이면 헐값에 대량으로 들여올 수 있겠지. 허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야.”


서하손이 행정을 장악한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았으나 임초서는 진작부터 그의 능력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서하손은 개털을 팔아 양털을 사오고도 이문을 남길 사람이었다. 용도도 분명치 않은 흙을 들여오는 일이라면 헐값을 치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하손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민심이 우리에게 있으니 의용병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러나 입에 넣어줄 양식이 없고 손에 쥐여줄 무기가 없다면 아무 소용 없겠지요. 그를 위해서는 먼저 부를 쌓아야 합니다. 부를 쌓는 방법에는 농업과 상업이 있으나, 기업이 이 작은 섬 하나니 농업은 불가합니다. 하여 상거래를 통해 이문을 남기는 것밖에 수가 없겠다 여기고 있었으나, 이 도자기 칼을 만들어 전국에 내다 판다면 그 기간을 1년으로 줄일 수 있겠습니다. 허나 우리가 도자기 칼을 내다 파는데, 그 재료를 주장 강 하구에서 사온다면 흙 값이 천정부지로 뛸 뿐 아니라 말씀하신 지역이 일거에 오한 최대의 요충지가 될 것입니다.”


이븐과 임초서는 비로소 서하손이 서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먼저 도자기 칼의 수요와 공급, 판로, 그리고 시장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자 이븐과 임초서에게 원산지를 확보할 방안을 묻고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하손에게 원산지를 빼앗아 안겨주어야 한다.


“무중생유(無中生有)라……”


도자기 칼로 화살촉을 만들어 부족한 무기를 충당할 생각만 하고 있었던 이븐은 서하손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원래 임초서와 안토니오스에게 맡겨두려고 했던 오한 점령 계획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무중생유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냐?”


임초서가 대신 대답했다.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일곱 번째 계책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니, 사실 계책이라고도 할 수 없지요.”


서희가 웃으며 말했다.


“서른여섯 번째 계책은 인생무상(人生無常)쯤 되겠습니다.”


임초서와 서하손이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임초서가 미소를 거두지 않고 이븐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이라 합니다. 저 친구가 이미 일가를 이루었지요. 원래는 도망치는 것이 상책일 때도 있다는 의미이나, 저 녀석이 도망치는 것보다 나은 계책은 없다는 뜻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서희가 환하게 웃으며 이븐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서희가 섬에서 나갈 생각뿐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서하손과 임초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븐은 아직 일곱 번째 계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중생유는 영감께서 말씀하신 것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어느 날 백수건달이 마을 어귀에서 빈둥대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농부를 보았습니다. 게으른 건달은 문득 농부가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궁금해졌지요. 해서 조용히 뒤를 밟다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래미가 마중 나와 농부의 품에 안기며 온갖 재롱을 떠는 겁니다.”


서희가 턱을 괴며 눈을 빛냈다. 눈앞에 예쁜 여자 아이가 재롱을 피우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븐이 서희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백수건달은 농부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지. 자기한테도 저런 예쁜 딸이 있으면 열심히 일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 생각했어. 그러다 그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지.”


서희가 심각하게 물었다.


“고자냐?”


서하손과 임초서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븐은 눈물까지 흘리며 웃다가 간신히 진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제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무중생무(無中生無)일 테지. 우리의 이 건달 녀석은 아주 건강해. 천성이 게으를 뿐이지. 먹여 살릴 예쁜 딸이라도 있어야 열심히 일할 마음이 들 녀석인 거지. 그런데 말이다, 이놈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렇게 예쁜 딸을 낳으려면 예쁜 마누라를 얻어야 하지 않겠어? 헌데 예쁜 마누라를 얻으려면 집도 있고 돈도 좀 있어야 된다고. 그래서 집도 한 칸 마련하고 돈도 좀 벌려면 일단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거지.”

“그런데 열심히 일하려면 예쁜 딸이 재롱을 피워줘야 하고?”


서희와 이븐이 마주 보고 웃었다. 임초서와 서하손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냥 웃어넘길 얘기는 아니었다. 이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중생유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또 마음만 먹으면 의외로 쉽게 끊어지거든요.”


임초서가 물었다.


“지혜로운 자는 그 고리를 어떻게 끊더냐?”


이븐이 눈을 빛냈다.


“빚을 내지요.”

“누가 볼 것 없는 백수건달에게 허투루 돈을 빌려 준다더냐?”

“돈을 빌렸다 치고 집을 구하러 다닙니다. 집을 구했다 치고 예쁜 아가씨에게 집적댑니다. 결혼했다 치고 아이를 만들려고 듭니다. 예쁜 딸이 태어나 재롱을 피운다 치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것저것 다 실패하여 결국 손에 남은 게 하나도 없다 하면, 다시 돈을 빌리러 다니면 그만이지요. 그가 도대체 무엇을 잃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서하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표정만 봐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듯합니다. 할 일이 많은데 미처 모르고 있었군요.”


결연히 방을 나서는 서하손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븐이 임초서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으신 거죠?”


역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물으려던 바를 거의 잊고 있던 임초서가 정신을 차렸다.


“그래. 솔직히 말하마. 나는 네가 그 배를 만들어 도서관 학파의 책을 빼앗아 실어오려 한다 생각했다.”


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겸사겸사죠. 번개를 만드는 장치 아직 갖고 계시죠?”

“그래.”

“우리가 비록 세가 부족하지만 그걸로 한두 번은 큰 변수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그런 게 더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임초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를 위해 악을 행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희가 이 섬을 떠나려는 이유를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이 아이가 제 곁에 있는데 제가 무슨 수로 나쁜 짓을 하겠습니까?”


임초서가 얼굴을 붉히자 이븐이 한 마디 덧붙였다.


“사실은 열도에도 그 흙이 남아 있다 하기에 조금 실어올 생각이었습니다만 서 장로가 그린 그림을 보고 나니 그건 시간 낭비겠더군요.”


임초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사가 안토니오스를 평가할 줄 알았더니 그 위에 서하손이 있구나. 네 이름도 역사에 남을 틈이 없겠다.”


이븐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름이 알려지면 사기꾼 인생도 끝입니다. 누구 밥줄 끊어 먹으려고요?”


임초서는 그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런데 그 서책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 종이로 볼 때 고대의 책이 아니다. 그런 배의 설계도와 도자기 칼에 관한 내용이 책 한 권으로 엮여 있다니,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서희도 그게 궁금했던 터라 이븐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븐은 미소를 띤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아이를 노예로 모시는 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 주의입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임초서는 이븐의 비밀이 못내 마음에 걸려 다시 캐물으려 했으나 서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 어린 소녀가 남의 비밀을 존중하는데 임초서쯤 되는 사람이 가볍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이다. 그러고 보니 서희가 또 한 번 다시 보였다.


- ‘아무리 봐도 둘이 보통 관계가 아닌데 어찌 여인이 정인의 비밀을 캐물으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지아비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시골 아낙네도 아닌데…… 정녕 깊이를 알 수 없는 아이다.’


이븐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항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도 오주와 강문을 칩시다. 소관은 항우가 난링 동쪽을 차지할 때쯤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겁니다.”

“원교근공(遠交近攻). 스물세 번째 계책이구나.”


임초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븐이 한 마디 덧붙였다.


“서른 번째 계책을 조금 뒤튼다 생각해야 합니다. 빼앗을 수는 있어도 지킬 수는 없으니까요.”

“반객위주(反客爲主)?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한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뒤틀어서 주인이 손님 행세를 하는 격이 되겠지만요. 성을 빼앗기 직전까지 간 다음 적당히 약탈하는 척하면서 반대로 재물을 뿌리고는 퇴각하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성을 지키는 장수들이야 책임 문제가 있으니 해적을 격퇴했다고만 보고할 것입니다. 이렇다 할 피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병사들과 백성들에게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성을 빼앗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물을 뿌려 민심도 얻었으니, 오주와 강문은 겉보기에는 오한의 영토지만 속내는 우리 땅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주인이지만 시시때때로 드나드는 손님 행세를 하는 거지요.”


임초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묘한 계책이다. 그 땅을 지킬 필요도 없겠구나.”

“지킬 병력도 없으니까요.”

“그리하면 도자기 칼을 만들 흙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겠다. 그러다 세력이 쌓이면 한 순간에 오한, 강문에다 홍강까지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실로 순수견양(順手牽羊)의 계책이라 할만 하다.”


순수견양이란 기회를 틈타 남의 양을 슬쩍 끌고 온다는 의미로 삼십육계의 열두 번째 계책이다. 그러나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양이 알아서 새로운 주인을 따르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이루기 쉬운 계책은 아니다.

임초서가 그 부분을 지적했다.


“재물이야 서 장로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그런데 성을 거의 빼앗을 지경까지 갔다가 퇴각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양쪽의 사상자가 많다면 득보다 실일 많을 것이야. 우리의 적은 사실 적이 아니라 미래의 아군이 아니더냐?”


이븐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 우리끼리는 병법을 펼치지 맙시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영감님이 제게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을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세 번째 계책 차도살인은 남의 칼을 빌어 적을 친다는 의미다.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는 데는 임초서를 따를 자가 없는데 그 일까지 자기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 섞인 비난이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임초서가 껄껄 웃으며 서하손의 말을 빌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건 나에게 맡겨라.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할 일이 많은데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븐이 방을 나서는 임초서에게 한 마디 던졌다.


“안토니오스 이름 하나 지어주십시오.”


임초서가 걸음을 멈췄다. 그도 안토니오스가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큰일을 그르치는 것은 항상 가장 작은 일이다. 한규 등과의 반목은 임초서에게도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안토니오스가 워낙 거물이다 보니 임초서로서도 쉽게 다룰 수가 없었다.

임초서는 이븐의 말을 안토니오스에게 새로운 이름, 새로운 신분을 주어 과거를 완전히 털어내고 온전히 서희도(逝姬島)에 융화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안토니오스…… 실로 명검이지…… 허나 우리가 쥔 것은 명검의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일 지도 모른다. 너 또한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븐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건 염두에 둘수록 골치만 아픈 일이었다.

그때 서희가 갑자기 이븐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이븐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서희는 지루한 얘기를 견디다 못해 반쯤 졸고 있던 범계에게도 달려가 똑같은 행동을 했다.


“아씨! 잘못했습니다요!”


범계가 화들짝 놀라 침을 닦으며 외쳤다. 서희가 자지러지듯이 웃었다. 어쩐 일인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 ‘분위기 좋을 때 조심하랬다.’


이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서희를 주시했다. 서희는 손에 빗을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하나씩 이리 와라. 예쁘게 빗겨줄 테니.”


타고난 재능과 사고의 깊이가 범인과 다르다 하나 서희도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지금은 그냥 천진난만한 소녀일 뿐이었다. 하루 종일 그녀를 분개하게 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좋아하는 이들만 남은 데다가, 섬을 떠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지자 한껏 들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 이븐과 범계에게도 전해졌다.

범계가 먼저 신이 나서 달려갔다. 이븐이 검을 휘둘러 범계의 코앞에 은빛 벽을 만들었다. 범계는 엄청난 살기를 느끼며 주저앉아 멍하니 이븐을 바라보았다. 검압에 눌려 코끝이 아려왔다. 이븐이 범계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그는 검을 집어넣고 천천히 서희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앉았다. 서희는 그런 이븐이 밉지 않았지만, 장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잔뜩 겁을 먹은 범계를 보자 안쓰러워 이븐을 버려두고 범계에게 먼저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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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 14.05.01 611 7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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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5) 14.05.01 463 8 24쪽
59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4) 14.05.01 503 5 14쪽
58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3) 14.05.01 373 5 17쪽
57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2) 14.05.01 434 4 15쪽
56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1) 14.05.01 434 7 11쪽
55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7) 14.05.01 343 6 25쪽
54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6) 14.05.01 264 6 19쪽
53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5) 14.05.01 450 7 18쪽
52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4) 14.04.30 364 6 17쪽
51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3) 14.04.30 461 4 18쪽
50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2) 14.04.30 307 6 18쪽
49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1) 14.04.30 665 3 17쪽
48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6) 14.04.30 332 5 19쪽
47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14.04.30 504 5 20쪽
46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14.04.30 437 4 19쪽
45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3) 14.04.30 424 5 15쪽
44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2) 14.04.30 263 7 12쪽
43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1) 14.04.30 472 7 24쪽
42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2) 14.04.30 394 8 14쪽
41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1) 14.04.30 246 6 11쪽
40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5) 14.04.30 422 5 24쪽
39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4) 14.04.30 366 6 14쪽
38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3) 14.04.30 308 6 16쪽
37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2) 14.04.30 320 6 23쪽
36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14.04.30 305 4 21쪽
35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4) 14.04.30 356 6 7쪽
34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3) 14.04.30 341 4 14쪽
33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2) 14.04.30 455 5 21쪽
32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1) 14.04.30 469 7 13쪽
31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2) 14.04.30 433 5 15쪽
30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1) 14.04.30 307 9 21쪽
29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9) 14.04.30 468 7 14쪽
28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8) 14.04.30 341 7 24쪽
27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7) 14.04.30 419 7 12쪽
26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6) 14.04.30 309 6 11쪽
25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5) 14.04.30 407 6 15쪽
24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4) 14.04.30 448 6 11쪽
23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3) 14.04.30 374 5 16쪽
22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2) 14.04.29 402 7 15쪽
21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1) +1 14.04.29 538 7 20쪽
20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4) 14.04.29 570 4 18쪽
19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3) 14.04.29 550 6 22쪽
18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2) 14.04.29 406 9 15쪽
17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1) 14.04.29 535 8 13쪽
16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7) 14.04.29 370 9 16쪽
15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6) 14.04.29 513 7 14쪽
14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5) 14.04.29 346 6 25쪽
13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4) 14.04.29 516 8 18쪽
12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3) 14.04.29 559 9 17쪽
11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2) 14.04.29 570 12 10쪽
10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1) +2 14.04.29 691 12 10쪽
9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9) 14.04.29 495 11 8쪽
8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8) 14.04.29 607 13 9쪽
7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7) 14.04.29 653 13 9쪽
6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2 14.04.29 547 13 8쪽
5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5) 14.04.29 682 11 8쪽
4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4) 14.04.29 598 11 8쪽
3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3) 14.04.29 849 14 10쪽
2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2) 14.04.29 1,246 14 8쪽
1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1) 14.04.29 2,224 2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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