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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2.12.15 05:44
최근연재일 :
2014.05.02 02: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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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01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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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8)

DUMMY

* * *


“흑마가 빠르다고 자랑하는 거냐?”

“걷고 있거든?”

“왜 선두에 서냔 말이지. 위험하게.”

“전장도 아닌데 호들갑 떨지 마라.”

“안전할 때만 선두에 서고 위험할 때는 슬그머니 물러설 거냐?”


서희는 시선을 왼쪽 하늘에 두고 입을 삐죽 내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혼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무슨 뜻이야? 전장에서도 선두에 서겠다는 거야?”

“기왕 나선 거.”


이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홍강 항에 상륙한 순간부터 서희는 모든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임초서가 이끄는 2천여 병사를 보고 잔뜩 긴장해 있던 어민들도 서서히 축제 분위기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효과보다도 서희의 안전이 더 걱정이었다. 그 성격에 적을 만났다고 갑자기 뒤로 물러설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의 서희는 설사 꽁꽁 숨겨 놓는다 해도 눈부시게 빛을 발할 것이다. 어디에 서건 군의 사기와는 상관없었다.

사실 검술만 놓고 보면 서희는 이븐이나 지하드보다도 몇 단계 위에 있었다. 일대 일로 대결해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얘기가 다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븐을 포함한 친위대 백 명은 그럴 때 목숨을 바쳐 서희의 방패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방패가 뒤에 있어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너 갑자기 너무 적극적이다? 왜 그러는 건데? 얘네들 싫다며?”

“싫지.”

“그런데? 사람들 시선을 즐기기 시작한 거냐?”


서희는 그를 잠시 노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경우 열을 올려 부인하며 오해를 바로잡으려 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입을 다물어 버리면 상대가 긍정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븐은 서희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희는 이븐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서희의 침묵은 그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떠보려 한다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결국 이븐이 백기를 들었다.


“나는 노예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주인이 되고 싶은데.”

“안 그러면 내가 데리고 다니겠느냐?”

“말을 잘 들으려면 그 심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


서희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븐은 잠자코 그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네 말을 듣고 깊이 생각을 해 보았다.”

“짚이는 데가 너무 많다. 내가 말이 좀 많아야지.”

“아는구나. 한걱정 덜었다.”


서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내들의 마음이 다 그와 같다면 그것은 사내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본성이 악하다 하여 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네가 말했지? 섬에는 여인과 아이들도 있다고. 그 아이들 중에도 사내아이가 반이다. 아직 죄를 짓기도 전에 그들을 벌하겠느냐?”

“거 참. 그때도 말하려다 말았는데, 사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다.”


서희가 코웃음 쳤다.


“사람이라고 다 눈이 두 개는 아니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뭐, 그래도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범계를 예뻐하는 것 아니겠느냐?”


바짝 뒤따르던 범계가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섰다.


“아씨! 전 눈이 두 개인데요?”

“그래, 그래. 그래서 더 예쁘지.”


범계는 서희가 활짝 웃는 것을 보자 안심하며 다시 반 보 뒤로 물러섰다. 이븐이 쓴웃음을 지었다.


- ‘든든하고 쓸모가 있긴 한데, 가끔 두들겨 패주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지……”


서희가 그런 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범계 구박할 생각했다가는 죽을 줄 알아라.”

“너무 노예만 예뻐하는 거 아니냐?”

“내리사랑이지. 어쨌건 나도 말 잘 듣는 착한 주인한테 예쁜 짓도 좀 하고 그래야 하지 않겠냐 싶더라.”

“응? 진짜? 어떻게 해줄 건데?”


서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해주고 있지 않으냐. 네가 이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만들겠다 하였으니 돕기로 마음먹었을 뿐이다.”

“뭐야, 그건. 내가 무슨 성인군자냐? 별 상관도 없는 놈들 지켜주겠다고 아끼는 노예를 위험에 빠뜨리는 대가로 노예에게 감사하기까지 해야 하는 거야? 싫어. 물러서.”


서희가 피식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눈으로 확인도 해야겠다. 임초서 장군이 죽은 공주의 이름과 내 얼굴을 팔아 만들려는 세상이 저 섬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냥 둘 수 없지.”

“어쩔 건데?”

“목을 베겠다.”


이븐은 입을 다물고 서희의 표정을 살폈다. 흔들림 없이 단호한 얼굴이었다. 이븐은 그만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서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웃는데? 내가 못할 것 같으냐?”


이븐은 시선을 의식하여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아니, 그럴 리가. 영감이 한창때로 돌아가도 너를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영감이 너한테 당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져서 말이야.”


서희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입을 다물고 전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행군에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븐도 더 이상 군소리하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뭐, 그래서 기분 좋은 것도 사실이니 거짓말은 아니지…… 그런데 이것아. 정말 모르겠느냐? 너는 이미 진짜 왕이 되어 있지 않느냐! 네게 바치기 위해 좋은 세상 만들려는 신하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목을 치겠다 말하고 있다. 네가 그 세상을 받고 안 받고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왕은 세상을 손에 넣는 자가 아니라 그 뜻에 맞게 세상을 바꾸는 자다. 셀 수 없이 많은 왕을 보았으나 나는 그런 왕을 너를 포함하여 두 명밖에 알지 못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미소가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 ‘빌어먹을. 또 싫은 놈이 생각나 버렸다. 기분 좀 좋을라치면 귀신같이 존재를 상기시킨단 말이지.’


이븐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부대를 지휘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사실 그는 사람을 두고 부리는 데는 소질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백만 대군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군을 지휘하는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이븐은 행군을 멈추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둘러보니 멀리 강문(江門) 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이쪽에서도 저쪽이 보이고, 저쪽에서도 이쪽을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백인대는 수를 과장해 위엄을 보이고자 일렬 횡대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범계가 서희의 깃발을 높이 들고 곁을 지켰다.


- ‘어라? 뭐지? 절묘한데? 누가 지휘한 거지? 백인대에 인재가 있나 보구나!’


이븐은 그 인재를 찾아 부관으로 삼아 지휘를 떠넘길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서희가 그 좋은 기분을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다.


“아무래도 좀 도와줘야겠다.”


서희를 태운 흑마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언덕을 내려갔다. 이븐과 범계가 비명을 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투에 가담해선 안 된다는 임초서의 엄명을 받았던 백인대는 뜻밖의 사태에 깜짝 놀랐으나 그 누구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서희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서희를 선두로 범계와 이븐이 좌우를 지키고, 그 뒤로 불과 백여 기가 일렬횡대로 늘어서 언덕을 쓸어내리는, 병법에도 없는 기묘한 진형이 만들어졌다.

기병 5백을 이끌고 매복해 있던 안토니오스는 서희의 백인대가 언덕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한순간 공황에 빠졌다. 계획에 없었던 정도가 아니라 그가 심중에 품었던 전투 양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움직임이었다.

주장강 하류의 강문 성과 상류의 오주 성은 남쪽 해안에 치우쳐 있지만, 좌우로 보면 오한의 한가운데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강을 끼고 있으니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할 요건을 모두 갖춘 셈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북으로 송연국과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서로는 남방계 원주민 국가의 도발에서 가깝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동쪽 초나라와의 전선과는 보급 기지로도 쓸 수 없을 만큼 거리가 있다. 서희도(逝姬島)를 오한을 위협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간주하지 않는 한, 오주와 강문은 군사적으로 전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후방 지역일 뿐이다.

오한이 서희도를 제대로 인식하기 전에 두 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해야 했다. 그 방편으로 임초서가 택한 첫 번째 목표는 홍강 항에서 가까운 주장강 하류의 강문 성이 아니라 상류의 오주 성이었다. 그 이유는 두 성을 지키는 장수와 주둔하는 병사의 수에 있었다.

실제로는 동서남북으로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오한이 아직 서희도를 염두에 두지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 서, 북쪽의 위협만으로도 이미 국운이 외줄을 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외줄이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배에 구멍이 뚫리면 선장 이하 모든 선원이 힘을 합쳐 물을 퍼내고 함께 살 길을 도모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한은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제 곧 가라 앉을 배에서 뭐든 값나가는 것을 챙겨 자기 혼자 내리려고만 들뿐, 물을 퍼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탐욕이 눈을 가린 이들에게는 금은보화를 끌어안고 있어도 물에 가라앉으면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았다.

작은 공이라도 세울 기회를 얻으려는 장수들이 뇌물을 바쳐 스스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이미 국운이 기울었다 여기고 전선의 상대국과 은밀히 교류를 나누려는 의도도 다분했다. 따라서 교분을 쌓아봤자 별로 남을 것도 없는 남방계 원주민과의 전선에는 실력은 있으나 연줄이 없는 무관들이 배치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오주나 강문 같은 후방은 정쟁에서 패해 한직으로 밀려난 자들이나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통에 미운털이 박힌 진정한 충신이 지키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주장강 상류 오주 성을 지키는 젊은 장수 송시진(宋始眞)이었다. 인재가 드문 오한에서 수년 내로 대장군의 인을 받아 마땅한 걸출한 인물이었으나, 의(義)를 중시하는 그가 이러한 진흙탕에서 버텨낼 재간은 없었다.

오주 성으로 좌천되었으나 송시진은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원래 오주와 강문에는 주둔 병력 없이 치안 유지를 위한 민병대 정도만 운용하고 있었으나, 송시진이 오주에 부임한 후로는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를 모집해 3천에 달하는 수비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강문 성은 사정이 달랐다. 한때는 결코 송시진에 뒤지지 않는 인재였던 강문 성주 황노준(黃盧準)은 정쟁에서 패해 야심이 꺾이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연일 주색에 빠져 사치를 즐기며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도 천(千)을 넘지 못했다.

따라서 이븐의 순수견양(順手牽羊), 즉 양이 스스로 새 주인을 따르게 만드는 계책을 이루기 위해서는 송시진이 지키는 오주를 제압해야 했다. 강문 성 백 개를 제압한다 한들 아무도 승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임초서라 해도 송시진쯤 되는 장수가 병사 3천으로 굳게 지키는 성을 2천으로 무너뜨릴 재간은 없었다. 병법은 지지 않는 방법이지 기적을 일으키는 비책이 아니다. 상대도 병법을 알면 어쩔 도리가 없다.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임초서가 찾은 해법은 송시진이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성을 나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병사 2천에서 백을 떼어 서희의 친위대로 편성하고, 거기서 또 7백을 떼어 안토니오스에게 주어 강문을 치게 했다. 위기를 느낀 황노준이 가까운 오주의 송시진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안토니오스는 2백을 화적으로 변장시켜 강문 성 주변 논밭과 인가를 습격하게 했다. 갑자기 나타나 창과 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쳐대는 2백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영락없는 화적이었다.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던 농민들은 금세 이상한 낌새를 챘다.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두르는 자들의 표정이 장난스럽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논밭을 마구 짓밟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만히 보니 경작물이 다치지 않도록 논길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온갖 재물이 떨어져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던 자들은 그 곁을 지나는 화적의 말을 듣고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우리는 서희도에서 왔습니다. 고생이 많으시지요? 작은 선물을 가져왔으니 오랜만에 이웃들과 잔치라도 벌이시지요.”


말은 발보다 빨라서, 화적인 줄로만 알았던 자들이 사실은 서희도에서 온 의적(義賊)이라는 소식이 순식간에 전해졌다. 사람들은 곧 서희도의 주인이 사실은 휘제국 적통 화란 공주라는 풍문을 떠올렸다. 그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멀리 다른 곳에 있던 백성들까지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다. 병사들이 고함을 치며 그들을 흩어버렸다. 몇몇이 그 틈에서 사정을 설명했다.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한 사연이 있습니다. 진짜 화적을 만난 것처럼 흩어지셨다가 저희가 지나가면 돌아와 선물을 거두어 가세요.”


안토니오스는 백성들이 그 말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화적 연기를 하는 자들이나 쫓기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나 모두 풋내기 연인들의 소꿉장난처럼 즐겁게 웃으며 논밭 사이를 뛰어다녔지만, 눈앞에 재물이 있는 이상 이웃보다 먼저, 더 많이 챙기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병사들이 지나간 길 뒤로 성급하게 재물을 챙기려는 자들의 행렬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강문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은 기가 막혔다. 겁도 없이 성 바로 앞에서 화적질을 하는 놈들이 있질 않나, 그 뒤를 백성들이 하나둘씩 따르지 않나, 민란이 일어났다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보고를 받은 황노준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화적들이 짓밟고 있는 논밭은 백성들의 것이 아니라 황노준의 것이다. 거기서 나온 작물로 황노준이 황제가 부럽지 않은 사치를 누리고 있다. 거기다 민란이라니? 여기까지 밀려난 것도 서러운데, 여기서 더 어디로 가라고 감히 하찮은 민초들이 반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황노준은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놓은 채 전군을 이끌고 성문을 나섰다. 전군이라고 해 봤자 기병 8백에 지나지 않았으나 화적 2백 정도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본 2백은 계획대로 슬금슬금 도망치며 적을 유인했다.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진 황노준의 8백이 서희도의 2백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임초서 밑에서 남방계 원주민을 상대로 실전을 치르고 서희도에서 다시 강훈련을 소화한 정예였다. 게다가 양 군 사이에는 재물을 챙기려고 모여든 백성들이 있었다. 황노준은 그 백성들이 민란에 가담한 자들이라 간주하고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모두 안토니오스의 계산대로였다.

임초서가 강문을 도발하는 임무를 안토니오스에게 맡긴 것은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는 전장에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명장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는 것이다. 민심을 얻으려면 이쪽에서 선정을 베푸는 것 이상으로 저쪽에서 학정을 자행해야 한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보다 학대 당하는 부인을 유혹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과 같은 이치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사랑하는 이가 있는 여인을 사랑해버린 착한 남자는 여인이 행복하도록 남몰래 뒤에서 도와준다. 그러나 단지 욕심을 채울 생각뿐인 나쁜 남자는 여인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유혹하기 쉽도록 그녀의 행복을 뒤흔들 생각뿐이다.

착한 남자는 여인과 그녀의 정인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으면 그것을 해소하여 두 사람이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나쁜 남자는 없는 오해도 만들어 둘 사이를 갈라 놓으려 애쓴다. 악의는 선의보다 자생력이 강해서, 나쁜 남자의 유전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퍼지게 된다. 그리하여 인류는 언제나 악화일로에 있다.

안토니오스의 성정이 악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방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으니 작은 정에 이끌려 큰일을 그르칠 염려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임초서가 구체적으로 백성들을 위험에 빠트리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그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하고 목적을 달성할 균형 감각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오히려 덕(德)과 지(智)에 다소 치우친 경향이 있는 임초서보다 이 임무에 더 적합한 장수였다.

서희 또한 전체적인 작전 계획을 이븐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그를 위해 백성들이 희생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렇기에 언덕 위에서 강문의 병사가 백성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목격하자 일이 틀어졌다고만 생각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구하러 내려간 것이다.

안토니오스 입장에서는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그도 서희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서희가 있기에 성립한 세계다. 그러나 그 세계가 제 갈 길을 가기 위해서라도 이번 임무는 너무나 중요했다.

지금 안토니오스가 5백을 이끌고 나서면 황노준의 8백 정도야 간단히 궤멸시킬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송시진의 원군을 이끌어 낼 수가 없다. 이미 빼앗긴 성을 자기 성을 비우면서까지 구원하러 올 리가 없다. 중앙에 원군을 요청할 것이다.

따라서 송시진의 사고에서 그들은 화적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일개 화적으로서 무능한 황노준과 박빙의 승부를 연출하여 송시진이 혀를 차며 원군을 보내게 해야 했다. 이기기도 쉽고 지기도 어렵지 않으나,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양상을 유지하려면 수가 높아도 몇 단계는 높아야 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싸움판 한가운데 놓인 예쁜 바둑돌 하나를 지켜내야 한다는 제한이 있다면 상대가 바보이기만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토니오스는 그 와중에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 ‘이븐 선생과 범계가 있다. 직접 본 바는 없으나 그들의 무용(武勇)이 과장일지언정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군을 이끄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어쨌건 서희 아가씨 한 분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만약 군을 통솔하는 재주도 있어서 저 백인대가 강한 힘을 발휘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골치다. 앞선 2백과 힘을 합치면 저 오합지졸 8백을 깨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면 모든 게 헛수고다. 하지만 지금 군을 통솔하는 것으로 보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일단 두고 보는 게 낫겠다.’


안토니오스도 사내인 이상 그 또한 서희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안토니오스였다. 아무리 서희를 위해서라고 한들 일을 그르쳐 버리면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균형 감각이 지금은 모험이 최선이라는 방향으로 올바르게 기울어 있었다.


한편 황노준은 갑자기 우렁찬 함성과 함께 언덕 위에서부터 흙먼지가 피어오르자 깜짝 놀라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 불과 백 기로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달려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 수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의 군은 황노준의 미세한 중심 이동에 크게 반응한 다음이었다. 병사들 모두 그들의 지휘관이 언제든 제 한 몸 살겠다고 자기들을 버릴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군대에는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 사람이 주춤하면 한 걸음 물러설 뿐이지만 8백이 주춤하면 한두 걸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선두가 열 걸음을 달리면 후미는 백 걸음을 달려도 따라잡지 못한다. 모두가 한 몸과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대열은 순식간에 흐트러진다. 그것이 군을 통솔하는 것의 어려움이다. 이렇다 할 전투를 경험한 적도 없고, 목숨을 바칠만한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한 강문의 병사들은 단 한 순간의 우왕좌왕으로 도망치는 농민들과 거리가 벌어져 버렸다.

그를 본 서희는 말머리를 살짝 돌렸다. 만일 황노준 군이 다시 농민들을 추격하면 양 군이 서로 마주치게 될 만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백인대가 그 뒤를 따르며 대열을 갖추니 자연스럽게 황노준 군의 속도가 더욱 늦춰졌다.

자연스럽게 황노준의 8백과 서희의 백인대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나란히 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서희의 진로가 살짝 황노준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황노준 군을 유인하던 2백은 갑자기 서희가 나타나 선두에 서자 깜짝 놀라며 전속력으로 되돌아왔다. 모두 이미 서희에게 목숨을 바친 이들이었다. 그때 황노준은 겨우 백여 기를 이끌고 겁도 없이 앞을 막아선 이의 정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녀임을 알고는 넋이 나가 있었다. 병사들도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도저히 창을 겨누어야 할 적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정면에서 화적 떼 2백이 죽기살기로 달려오니 수적 우세도 잊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선두에 서 있던 황노준은 본능적으로 속도를 늦추어 병사들 뒤로 숨어들려 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서희의 부하들과 달랐다. 누구도 자진하여 그의 방패가 되려 하지 않았다. 황노준은 낭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아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부하들도 그에 보조를 맞추었다. 화가 난 황노준이 좌우의 병사 하나씩을 베며 소리쳤다.


“적을 눈앞에 두고 물러서다니! 그러고도 네놈들이 영광스러운 오한의 병사들이더냐! 물러서는 놈들은 모두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보아라! 도적놈들은 수도 얼마 되지 않는다! 어서 싹 쓸어버려라!


한 번도 오한의 병사임을 영광스럽게 여겨본 적 없는 이들이었지만 전사(戰死)와 처형은 남겨진 가족들에게 차이가 크다. 병사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앞으로 나섰다.

서희는 그들과 아군 2백의 움직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싸움을 막으려고 나섰다가 도리어 전면전으로 이끌게 생긴 것이다. 달려오는 2백은 기세로 보아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이유도 분명했다.

이븐도 병사를 수족처럼 부리는 재주가 없을 뿐 상황을 파악하는 눈은 임초서 못지않았다.


- ‘서희를 구하러 오는 거다. 서희가 안전한 곳으로 가면 싸움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하늘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와 백인대와 2백을 적절한 곳으로 옮겨준다면 모를까, 그로서는 아군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방도가 없었다.

그때 서희가 갑자기 흑마를 몰아 오른쪽으로 달렸다. 이븐과 범계 등 백인대가 크게 놀라며 서둘러 뒤를 따랐다. 그러나 흑마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어 서희 혼자 멀리 떨어져 버렸다.

마주 달려오던 2백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전장에서 홀로 떨어져 나갔으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누가 시키기도 전에 일사불란하게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서희와 황노준 군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정면으로 충돌할 뻔한 양 군이 비켜 부딪히며 스쳐 지나갔다. 한쪽은 죽을 힘을 다해 막으려 하고, 반대쪽은 굳이 그 벽을 뚫으려 하지 않으니 양쪽의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거리를 따라잡으려 박차를 가하던 이븐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 ‘지금까지 서희가 군을 이끌고 있었다. 나와 범계가 좌우를 지키고, 백인대가 그 뒤를 따르도록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구나!’


돌아보니 충돌의 피해도 거의 없었다. 원하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와 두 부대를 움직인 것 같았다. 이븐은 백인대에서 인재를 찾아 부관으로 삼겠다는 꿈이 깨져버렸음을 느꼈다. 모두가 그저 서희를 따랐을 뿐이다. 백 명이 일렬로 늘어서 세를 과장한 것도 병사들이 그저 서희를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움직인 결과였다. 언덕에 일렬로 늘어서서 지켜보지 않으면 서희의 움직임에 재빨리 호응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서희는 계속 오른쪽으로 돌면서 쓰러져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덕분에 백인대가 겨우 흑마를 따라잡았다. 이븐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희의 표정을 살폈다.


- ‘큰일났다. 얘 화났어.’


이븐은 서희가 또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학살의 현장은 전장과 다르다. 전장에서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모두 전투 능력을 잃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굳이 확인 사살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살이 목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앞선 이가 밟고 지나간 희생자를 뒤따르는 이가 한 번씩 창으로 찌른다. 저항할 힘이 없는 민중이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

서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 두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 애꿎은 백인대가 겁을 먹고 고개를 숙였다.

이븐은 지금 서희를 달랠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돌발 행동을 예측 가능한 범위로 한정할 방법을 찾는 게 현명했다.

이븐이 보니 황노준 군은 왼쪽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아군 2백은 황노준 군의 진로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서희와 황노준 군 사이를 막을 생각이었다.

이븐이 서희에게 다가가 다급히 속삭였다.


“적병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야. 적장만 치면 될 일에 죄 없는 병사들을 상하게 하진 말자.”


서희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그런 명령에 따르라 했더냐?”

“따르지 않으면 가족이 해를 당하는 걸? 병사들에겐 죄가 없어. 그들을 벌한다 해도 우리 병사들까지 상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서희는 이븐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백인대가 흑마의 속도를 실감하며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뒤처지지 않았다. 서희가 속도를 내지 않은 턱분이었다.


- ‘다시 군을 이끌고 있다. 병법을 아는 아이가 아닌데 마치 검을 휘두를 때처럼 필요한 곳에 필요한 수를 가져다 놓는구나.’


이븐이 백인대의 이동에 따른 전황의 변화를 살피다가 속으로 찬탄을 금치 못했다.

백인대가 왔던 길로 천천히 되돌아가자 정신없이 뒤를 따르던 2백이 발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전열을 가다듬은 황노준의 8백은 그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화적으로 분한 2백은 죽기살기로 황노준을 저지하려 할 테고, 그렇게 양 군이 맞부딪히면 백인대가 그 뒤로 우회해 적의 측면을 칠 수 있었다.


- ‘반도 안 되는 전력이지만 병사의 사기와 질이 다르다. 피해가 없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이쪽의 압승일 것이다. 그러면 곤란한데…… 에라 모르겠다. 뭐, 이제 안토니오스가 나서겠지.’


그때 안토니오스는 일견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서희의 움직임에 숨어 있는 이치를 깨닫고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 ‘병법을 아는 자의 움직임이 아니다. 일련의 행동에 군령이라고는 하나도 내려지지 않았다. 서희 아가씨가 직접 군을 훈련시키고 통솔한 바도 없으니 순전히 자발적인 움직임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저 결과를 순전히 행운이라 할 수 있는가? 양쪽 모두 피해가 없었고 학살도 저지했다. 백성들도 저 아리따운 아가씨가 스스로 몸을 던져 민중을 구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건 이미 민심을 얻은 정도가 아니다!’


서희와 이븐 등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어느새 농민들이 농기구를 손에 들고 몰려나와 전투에 가담하려 하고 있었다. 서희의 깃발 아래 정말로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안토니오스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 ‘하지만 지금 본격적으로 민란이 일어나선 안 된다. 중앙 정부가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면 모든 게 허사다. 게다가 현재 전황으로 보면 민중이 전투에 가담하기 전에 서희 아가씨가 황노준 군을 전멸시킬 거다. 반도 안 되는 병력으로 말이지. 그렇다면…….’


이보다 더 극적인 건국 신화가 있을까?

안토니오스는 문득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 ‘신화는 만들면 그만이다. 소재는 이미 차고도 넘치게 제공했다. 나머지는 민중이 알아서 부풀려 퍼뜨리겠지. 지금은 이 강문보다 오주가 훨씬 더 중요하다.’


마침내 안토니오스의 창기병 5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황노준은 반도 안 되는 적에게 휘둘려 버리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서 죽기살기로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다 안토니오스를 발견하고는 체통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본대가 따로 있었구나! 모두 전속력으로 성으로 돌아가라!”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으나, 두 배가 넘는 병력으로도 완패를 당할 운명에 처해있던 황노준에게는 안토니오스의 창기병대가 차라리 구원병이었다.

안토니오스의 진로는 똑바로 황노준을 향해 있었다. 황노준이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곧바로 성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정말로 그를 막을 생각이었다면 성으로 달려가 진로를 차단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안토니오스의 의도는 황노준을 성으로 몰아넣어 송시진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창기병대의 움직임은 목양견이 양떼를 우리로 몰아넣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서희에게는 창기병대가 황노준을 돕고 있다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임초서가 안토니오스를 극찬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그가 생각 없이 실수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븐은 서희의 한쪽 눈썹이 씰룩 치켜올라 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가만히 다가가 속삭였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출정했는지 잊지 말자. 저 백성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황노준 저자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원한다면 내가 특기를 살려서 오늘 밤에라도 목을 따다 줄게.”


이븐은 서희가 정말로 그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할 수도 없지만, 아직은 해서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물론 서희는 그 정도로 분별이 없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게 두 개 있다.”


이븐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데?”

“안토니오스는 충분히 학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네가 한 발 빨랐던 거지. 안토니오스가 죽인 것도 아니고, 안토니오스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야. 화낼 상대를 착각하지마. 쟤는 대의를 저버리지 않았어.”


서희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표정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때 황노준을 성으로 몰아넣은 안토니오스가 다가와 농민들의 봉기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븐은 잠시 서희를 내버려 두고 안토니오스와 함께 분주히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애썼다. 그러나 농민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설득에 응하지 않았다. 이븐의 언변으로도 간신히 진짜 왕을 발견한 민중의 마음을 한꺼번에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감했다.

이븐과 안토니오스는 그러다 문득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사실 그 시선 하나하나에 담긴 경외감으로 볼 때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서희도에 사는 서희라고 합니다. 여러분께 힘이 되어 드리려고 왔는데 이렇게 도리어 해를 끼쳐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서희는 아직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시신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농민들은 가족과 친구를 잃은 슬픔보다 그 눈에 맺힌 이슬에 반응하여 함께 눈물을 흘렸다.

서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나선 사람들입니다. 같은 슬픔을 겪지 않도록, 오늘은 모두 조용히 돌아가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안토니오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븐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저 한 마디에 벌써들 돌아가고 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여태 우린 뭘 했답니까? 이제 어디 가서 말 좀 한단 소리도 못하겠습니다.”


이븐도 실소를 참지 못했다. 안토니오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서희 아가씨께서 저런 표정으로 고개 숙여 부탁하시는데 무시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틀림없이 귀머거리에 장님일 겁니다.”


이븐은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을 모두 돌려 보낸 서희가 다가와 안토니오스를 바라보았다. 안토니오스는 말에서 내려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븐과 범계를 제외한 모두가 그를 따랐다. 그나마 범계는 얼결에 말에서 내리려다가 이븐이 붙잡아 그와 함께 서희의 좌우를 지키게 한 것이었다.

서희는 그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븐은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려워 조마조마했지만 서희는 자기가 뱉은 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단은 이븐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돕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뒷일은 안토니오스 장군께 맡기겠습니다.”

“명 받들었습니다.”


몸을 일으킨 안토니오스가 내린 첫 번째 명령은 서희가 몸을 쉴 막사를 짓는 것이었다. 창기병대가 명을 받으려 하자 백인대가 나서서 그 일을 양보하지 않아 작은 충돌이 있었다. 서희는 지칠 대로 지쳐 그 모습을 보고도 그냥 자리를 피해버릴 뿐이었다. 이븐과 범계, 그리고 자발적으로 순번을 정해 항상 곁을 지키기로 한 백인대 열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이븐이 그를 보고 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인기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서희가 그를 보며 눈을 흘겼다. 이븐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고마워.”

“뭐가 말이냐?”

“예쁜 짓 해줘서.”


서희는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의미를 이해하고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기왕 돕기로 한 거니까……”


서희가 여전히 저기압이자 이븐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남은 하나는 뭔데?”

“응?”

“참을 수 없는 거. 두 개랬잖아. 말해 봐. 내가 해결해 줄게.”

“아, 그거……”


서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말투 말이다. 정신이 산란하다. 앞으로는 단둘이 있을 때만 허락하겠다.”


이븐은 그 말을 듣자 안심이 되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명 받들었습니다!”


서희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피식 웃어버렸다. 이븐도 마주 웃었다.

그 순간부터 이븐은 정말로 단둘이 있을 때만 서희를 그만의 사랑스러운 노예 소녀로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이븐은 범계나 임초서, 서하손 등을 제외한 다른 이가 곁에 있을 때는 서희를 철저히 주군으로 모셨다. 그리하여 그 둘의 진짜 관계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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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4) <3권 끝> +2 14.05.02 508 5 33쪽
7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3) 14.05.02 433 5 16쪽
7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2) +2 14.05.02 448 4 25쪽
7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1) 14.05.02 434 4 20쪽
71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0) 14.05.02 336 5 27쪽
70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9) 14.05.01 453 4 26쪽
»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8) 14.05.01 421 5 35쪽
68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7) 14.05.01 428 4 13쪽
67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6) 14.05.01 405 6 25쪽
66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5) 14.05.01 417 4 13쪽
65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4) 14.05.01 484 8 14쪽
6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3) 14.05.01 464 6 24쪽
6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2) 14.05.01 447 5 13쪽
6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 14.05.01 610 7 20쪽
61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6) +2 14.05.01 506 4 20쪽
60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5) 14.05.01 463 8 24쪽
59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4) 14.05.01 503 5 14쪽
58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3) 14.05.01 372 5 17쪽
57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2) 14.05.01 434 4 15쪽
56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1) 14.05.01 434 7 11쪽
55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7) 14.05.01 343 6 25쪽
54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6) 14.05.01 264 6 19쪽
53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5) 14.05.01 450 7 18쪽
52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4) 14.04.30 363 6 17쪽
51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3) 14.04.30 461 4 18쪽
50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2) 14.04.30 307 6 18쪽
49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1) 14.04.30 665 3 17쪽
48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6) 14.04.30 332 5 19쪽
47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14.04.30 504 5 20쪽
46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14.04.30 436 4 19쪽
45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3) 14.04.30 424 5 15쪽
44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2) 14.04.30 263 7 12쪽
43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1) 14.04.30 472 7 24쪽
42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2) 14.04.30 394 8 14쪽
41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1) 14.04.30 246 6 11쪽
40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5) 14.04.30 422 5 24쪽
39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4) 14.04.30 366 6 14쪽
38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3) 14.04.30 307 6 16쪽
37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2) 14.04.30 320 6 23쪽
36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14.04.30 305 4 21쪽
35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4) 14.04.30 356 6 7쪽
34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3) 14.04.30 341 4 14쪽
33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2) 14.04.30 455 5 21쪽
32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1) 14.04.30 469 7 13쪽
31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2) 14.04.30 432 5 15쪽
30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1) 14.04.30 307 9 21쪽
29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9) 14.04.30 467 7 14쪽
28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8) 14.04.30 341 7 24쪽
27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7) 14.04.30 418 7 12쪽
26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6) 14.04.30 309 6 11쪽
25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5) 14.04.30 407 6 15쪽
24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4) 14.04.30 448 6 11쪽
23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3) 14.04.30 374 5 16쪽
22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2) 14.04.29 402 7 15쪽
21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1) +1 14.04.29 538 7 20쪽
20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4) 14.04.29 570 4 18쪽
19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3) 14.04.29 550 6 22쪽
18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2) 14.04.29 406 9 15쪽
17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1) 14.04.29 535 8 13쪽
16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7) 14.04.29 370 9 16쪽
15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6) 14.04.29 513 7 14쪽
14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5) 14.04.29 345 6 25쪽
13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4) 14.04.29 515 8 18쪽
12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3) 14.04.29 559 9 17쪽
11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2) 14.04.29 569 12 10쪽
10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1) +2 14.04.29 690 12 10쪽
9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9) 14.04.29 495 11 8쪽
8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8) 14.04.29 606 13 9쪽
7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7) 14.04.29 653 13 9쪽
6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2 14.04.29 547 13 8쪽
5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5) 14.04.29 682 11 8쪽
4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4) 14.04.29 598 11 8쪽
3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3) 14.04.29 849 14 10쪽
2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2) 14.04.29 1,246 14 8쪽
1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1) 14.04.29 2,223 2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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