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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2.12.15 05:44
최근연재일 :
2014.05.02 02:28
연재수 :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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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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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글자수 :
570,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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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30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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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DUMMY

가까이 가보니 안토니오스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촌이었다. 해적이 한 짓인지 그들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고 주민들이 스스로 떠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무너진 담벼락 틈으로 잡초가 자라고 서늘한 정적이 피부를 스치는 것이, 어느 집에서 귀신이 나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아직 안토니오스가 숨어 있는 곳까지는 한참 멀었는데 임초서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일행은 영문도 모르고 그를 따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임초서가 입을 열었다.


"오한의 객장 상담이 안토니오스 공을 뵙고자 하오. 병사를 이끌고 오지도 않았고 일행은 여기 보이는 자가 전부요.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부디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낮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텅 빈 골목을 따라 소리가 흐트러짐 없이 메아리쳤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한참이 지나자 골목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가란자는 전장에서 안토니오스를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매번 참패를 거듭한 안토니오스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가란자는 재빨리 활을 꺼내 겨누는 동작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마침내 안토니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란자는 그만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안토니오스가 부장 두 명만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이쪽보다도 적은 인원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독수를 쓸 의도가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승패를 떠나 서로를 인정하고 깊이 존경하고 있는 임초서와 안토니오스가 사적인 감정으로 전장이 아닌 곳에서 검을 겨눌 리가 없었다. 가란자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상담 장군을 뵙게 되다니 일생의 영광입니다. 소장 안토니오스가 인사드립니다."


안토니오스가 말 위에서 예를 갖추며 말하자 상담이 답례했다.


"전장에서 그대를 만난 것이 이미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소. 하늘이 허락하시어 오늘 이렇게 그대를 마주하게 되었으나, 때가 이러하니 술 한 잔 나누지 못함이 애석할 따름이오."


임초서로서는 그만하면 거두절미 본론으로 들어간 셈이었지만, 말 많은 사람일수록 남들이 말을 빙빙 돌리며 시간을 끄는 것을 더 못 견디는 법이다. 이븐은 두 사람이 마치 연인들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가란자까지 나서 사랑을 고백하려 하자 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해영이라고 합니다. 해적 아니고 동명이인이니 오해 마십시오. 화급을 다투는 사안이니 실례를 무릅쓰고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임초서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안토니오스 역시 화급을 다투는 사안이라는 데 동의하는 것 같았다.


"그전에 제가 먼저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상담 장군께서는 저희를 토벌하러 오신 겁니까?"


임초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어떻게 여기까지 진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이미 오한의 객장은 아니오. 보다시피 병사도 하나 이끌고 오지 않았소."


안토니오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큰 짐을 하나 덜어낸 모습이었다.

이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관군의 공격을 걱정하시는 것은 지금 군사 작전 중이라는 뜻입니까?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희는 오한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안토니오스는 고개를 저을 뿐 사정을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았다. 사실 경계를 풀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서로의 의중을 떠보느라 시간을 얼마나 낭비해야 할지 몰랐다.

이븐이 그 고리를 끊으려 마음먹고 막 입을 떼려는데 임초서가 선수를 쳤다.


"내 진짜 이름은 상담이 아니라 임초서라네."


안토니오스는 뜻밖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임초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안토니오스는 유로피아 국경 시즈란 출신이어서 휘 제국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제국 표준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고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저 해적 놈의 본거지에 화란 공주께서 갇혀 계신다네.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 구해내야 하는데 보다시피 손이 부족해. 이제 자네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말해준다면 서로를 도울 길이 있을지 찾아 볼 수 있을 걸세."


임초서가 말을 맺자 안토니오스도 숨김없이 사정을 이야기했다.

안토니오스는 백 명이나 되는 식솔을 거느리고 떠돌아다니다가 남방계 원주민 부족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상대가 나빠 돈을 받은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부족이 그들을 보는 눈초리가 고울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설상가상으로 임초서의 군대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만 갔다. 그렇게 만든 것이 안토니오스 자신이었으니 그 결과는 고스란히 안토니오스가 책임져야 했다. 도저히 그곳에 더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딱히 갈 곳도 없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한 휘 제국에서 이방인들이 백 명씩 몰려 다니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뿔뿔이 흩어졌다가는 더욱 쉽게 악당의 표적이 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오한의 해영이라는 자가 이방인을 우대해 일자리와 살 곳을 마련해준다는 소문을 접했다. 안토니오스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부하 열 명을 선발해 소문을 확인하게 했다. 그런데 거기서 사단이 났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 해도 정치판에서는 어린 아이와 다를 바 없다. 안토니오스는 용병이 열 명이나 몰래 국경을 넘는 것을 정치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비싼 돈 주고 고용한 용병이 적에게 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원주민 부족들은 이 이방인들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아군일 때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용병이 적이 된다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이미 열 배나 되는 병력으로도 당해내지 못했던 전력이 있었다. 가뜩이나 무시무시한 상담이라는 장수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생긴 것이다.

열 명의 선발대가 떠나고 사흘째 되는 밤, 부족 국가 연합군이 깊이 잠든 창기병대를 일제히 습격했다.


"살아남은 건 여기 있는 삼십여 기가 전부입니다. 원래는 장군께 투항하려 했으나, 패군지장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여겨 몰래 국경을 넘었지요."


부장 둘은 비명에 간 동료들을 떠올리는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이븐은 그때 국경에 임초서가 있었다면 30기나 되는 패잔병이 들키지 않고 국경을 넘을 수 없었을 테니 양쪽 모두에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토니오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행운은 아직 하나 더 남아있었다.


"그렇게 되니 더 생각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해영이라는 자를 찾아가려고 했지요. 그러다 먼저 보낸 열 명 중 간신히 도망쳐 온 한 명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해영이라는 자에게 속아 모두 옥에 갇혀있다고 합니다. 소문을 들어보니 그 자는 감언으로 이방인을 꾀어 들여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섬에서 노예로 부린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부하들을 구하려고 틈을 보고 있는데 상황이 워낙 복잡하게 돌아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목적이 완전히 같았던 것이다.

임초서와 안토니오스가 손을 맞잡고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븐이 대화를 다시 본론으로 이끌었다.


"솔직히 저도 각자 구해내야 할 사람이 같은 곳에 갇혀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길 뻔했습니다만, 아직 그렇게 생각하긴 이릅니다. 무사히 구해내야 다행인 거겠죠. 자, 대책을 세워봅시다. 섬에는 우리가 몰래 잠입하겠습니다. 창기병대는 장점을 살려 저 해적들을 여기에 묶어두시고요. 신도문이 세가 약하니 적당히 편을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신도문이 이겨도 곤란합니다. 해적이 퇴각해버릴 테니까요."


임초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문이 창기병대의 도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게 관건이겠군. 동료가 섬에 갇혀 있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어떤가? 신도문에 협조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이븐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초서의 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안토니오스와 신도문 사이에는 일면식도 없을 테니 어떤 문제가 있을 리도 없다. 칼을 겨누던 적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단체이니 조금 껄끄럽기는 하겠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다. 도대체 왜 여기 숨어서 눈치만 보고 있었을까?

이븐이 보니 안토니오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저 신도문이라는 자들은 관의 위임을 받아 치안을 책임지고 있다지요."


임초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관군이 여기로 오고 있는가?"


안토니오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척후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장군께서 계시던 서쪽 전선에서 출발한 기병 2천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이제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겁니다. 관군이 신도문을 도와 해적을 소탕하려는 건지, 저희를 쫓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관군이 오면 신도문과 한 편에 설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지요. 저희들은 적으로만 인식될 것입니다. 장군께서도 군을 떠나신 지금, 제가 투항한다 해도 제 부하들을 구하려 애써줄 리 없겠죠."

이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관군이 나타나는 순간 해적은 뒤도 안 돌아보고 섬으로 도망가겠군요. 골치 아파졌네……"


그때 안토니오스가 나타났던 골목에서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기병 하나가 다급히 보고했다.


"대장님! 신도문 쪽에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어림잡아 천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습니다."


아르강이 인상을 찌푸렸다.


"관군이냐?"

"관군은 아닌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냥 오합지졸인데, 수가 워낙 많아 해적이 슬금슬금 퇴각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븐이 나섰다.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십시오. 일행 중에 눈이 좋은 놈이 있으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여기 계속 서 있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안토니오스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도 없이 앞장서 골목으로 말을 몰았다.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임초서와 가란자를 보자 창기병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경외와 적개심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임초서는 그들에게 짧게 예를 표하고 곧바로 가란자를 채근했다. 명을 받은 가란자가 전장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화적이군요. 저놈들이 왜 신도문 편을 들까요?"

"깃발이 있느냐?"


이븐이 묻자 가란자가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붉은 바탕에 금색 실로 수를 놓았는데 펼쳐 있지 않아 읽을 수는 없습니다."

"‘노(魯)’가 아니면 ‘장(張)’일 것이다. 구별할 수 있겠느냐?"

"둘 중 하나라면 ‘장’은 아닙니다."

"폭열단 두목 노자철(魯滋鐵)이다. 장석과 마충천의 일이야 그 둘의 독단으로 한 행동이고 아직 알려지지도 않았을 테니 공식적으로 신도문과 폭열단의 연대는 깨지지 않았다. 신도문의 요청을 받고 도우러 온 게 틀림없구나."


가란자의 시력을 모르는 창기병대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임초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도문은 관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게다. 화적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저들도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안토니오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역시 관군은 저희를 치러 오는 것이겠군요."


임초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역적 임초서를 잡으러 오는 것일 수도 있지."


이븐이 끼어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은 나중에 생각합시다. 중요한 것은 지금 화적이 왔고, 또 관군이 오고 있다는 겁니다. 일이 이 정도로 복잡하게 얽히면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래. 지금 해적이 기가 질려 퇴각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 창기병대가 해적을 도와 관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겠습니까? 주로 신도문의 전력을 줄여야 합니다. 관군은 화적과 해적을 구별할 수도 없을 테니 난전이 벌어질 겁니다."


해적이나 화적이나 원래 관군을 크게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싸움에서 먼저 등을 보였다가는 향후 세력 다툼에 큰 장애가 된다. 관군과 죽기살기로 싸울 필요는 없겠지만 화적은 해적보다, 해적은 화적보다 더 오래 버티려 할 것이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어쩌면 둘이 힘을 합쳐 관군을 상대할지도 모른다. 초나라에 남방계 원주민에 여목희까지 신경 써야 하는 지금의 오한에는 이 도적 떼들을 소탕할 여력이 없었다.

안토니오스가 전장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문은 벌써 싸움에 이긴 것처럼 들떠서 지원군을 맞고 있군요. 시선이 온통 화적에게 쏠려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서른 기로도 한두 번쯤 적진을 갈라 혼란에 빠트릴 수 있겠습니다."

안토니오스의 속도를 잘 알고 있는 임초서도 거들고 나섰다.


"자네라면 그건 일도 아니겠지. 그러나 수가 너무 부족하니 무리하지는 말게나. 두 번이나 가를 필요도 없고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네.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상대에게는 따끔하게 벌침 한 방 놔주는 정도로도 충분해. 제대로 얻어맞으면 정신없이 받아치려고만 들 수도 있거든. 사기를 꺾는 데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주는 정도가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어."


안토니오스는 임초서의 말을 경청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장군을 당해내지 못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군께서도 한 번보다는 두 번이 낫다고 여기실 것 같습니다. 제 수하가 부족하니 걱정해주시는 줄로 압니다. 허나, 지금은 신도문의 사기를 꺾는 것만큼이나 해적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서른에 불과한 기병이 기세가 오른 적에게 두 번이나 벌침을 놓는 것을 보면 해적도 사내인 이상 피가 끓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임초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게. 오히려 껍질만 벗겨내듯이 지나치는 것이 해적의 눈에는 전공이 더 분명하게 보일 테니 사기도 많이 오를 게야."


안토니오스는 임초서에게 예를 갖추고 부하들에게 명을 내려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븐이 그에게 말했다.


"신도문을 치고 해적에게 달려가며 이방인을 받아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하십시오. 그들을 돕겠다고 하면 속 꿍꿍이야 어쨌건 일단은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관군의 목적을 모르니 놈들이 오면 재빨리 몸을 빼십시오. 시간만 벌어주시면 됩니다. 저희는 배를 구해 섬으로 잠입하겠습니다.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공주님과 함께 창기병대도 반드시 구해내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맡기겠습니다."


안토니오스의 창기병대가 힘차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퇴각 명령을 내리려던 해적왕 해영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기회를 놓쳐버렸다.

신도문은 자기들이 지르는 함성에 묻혀 창기병대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오도록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눈치챈 자들이 지르는 비명도 함성과 구별되지 않았다. 몇몇은 창에 목이 꿰뚫리고도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신중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적이 생각보다 훨씬 한심하자 안토니오스는 신도문을 지나 폭열단까지 반으로 갈라버렸다. 우군이 열어준 길에서 적의 기병대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폭열단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전력이 압도적이어서 아예 싸움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적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게 또 너무 적다 보니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후속 부대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토니오스의 30기가 달려나간 탄력으로 반원을 그리며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대각선을 그리며 있지도 않은 후속 공격에 정신이 팔린 폭열단과 신도문을 또 한 번 갈랐다. 겨우 그 정도 수로 다시 한 번 돌입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데다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허에 허를 찔린 셈이었다. 창기병대는 무인지경을 지나듯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적진을 빠져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자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해영은 이 용맹한 기병대가 이번에는 자기 진영으로 달려오자 잔뜩 긴장해 전투태세를 갖추었으나, 해적에게 협력하겠다는 안토니오스의 말을 듣고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족 외의 인종은 원숭이보다 못하게 여기는 그였지만 이 정도 원숭이들이라면 두고두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터였다. 이미 범계를 사육한 전력도 있었다. 그러다 곧 도리질을 했다.


- ‘아니지. 범계 놈이야 모자란 데가 있으니 몰라도 저놈들은 쉽지 않을 것이다. 허나, 지금 미리 걱정할 문제겠느냐? 일단은 써먹어 달라니 써 먹어줄 뿐이다.’


해영은 하나씩 붙으면 상대도 안 될 것들이 힘을 합쳐 덤비니 분통이 터지면서도 퇴각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일거에 전황이 역전되어 버리자 지금이 신도문과 폭열단에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히고 해적의 입지를 완전히 굳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정보하에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그는 노자철이나 신도문 장로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악인이었으나 능히 한 무리를 이끌만한 능력과 안목이 있는 자였다.

한편 후속 공격이고 뭐고 없이 단 30여 기에 두 번이나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도문과 폭열단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해적에게 크게 한 번 망신을 당한 전력이 있는 신도문 둘째 장로 옥상정의 분노가 컸다. 지난번과 달리 쉬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오늘 목숨을 걸고 설욕하지 못하면 신도문 내에서 입지를 회복할 수 없을 터였다.

화적은 화적대로 어려움에 처한 동지를 구하러 왔다가 체면을 제대로 구겨버렸으니 절대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노자철 또한 이 싸움의 승패가 향후 세 세력의 관계를 자리매김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처절한 혈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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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4) <3권 끝> +2 14.05.02 508 5 33쪽
7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3) 14.05.02 433 5 16쪽
7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2) +2 14.05.02 448 4 25쪽
7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1) 14.05.02 434 4 20쪽
71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0) 14.05.02 336 5 27쪽
70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9) 14.05.01 453 4 26쪽
69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8) 14.05.01 421 5 35쪽
68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7) 14.05.01 428 4 13쪽
67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6) 14.05.01 405 6 25쪽
66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5) 14.05.01 417 4 13쪽
65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4) 14.05.01 484 8 14쪽
6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3) 14.05.01 464 6 24쪽
6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2) 14.05.01 447 5 13쪽
6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 14.05.01 610 7 20쪽
61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6) +2 14.05.01 506 4 20쪽
60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5) 14.05.01 463 8 24쪽
59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4) 14.05.01 503 5 14쪽
58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3) 14.05.01 373 5 17쪽
57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2) 14.05.01 434 4 15쪽
56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1) 14.05.01 434 7 11쪽
55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7) 14.05.01 343 6 25쪽
54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6) 14.05.01 264 6 19쪽
53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5) 14.05.01 450 7 18쪽
52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4) 14.04.30 364 6 17쪽
51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3) 14.04.30 461 4 18쪽
50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2) 14.04.30 307 6 18쪽
49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1) 14.04.30 665 3 17쪽
48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6) 14.04.30 332 5 19쪽
47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14.04.30 504 5 20쪽
»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14.04.30 437 4 19쪽
45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3) 14.04.30 424 5 15쪽
44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2) 14.04.30 263 7 12쪽
43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1) 14.04.30 472 7 24쪽
42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2) 14.04.30 394 8 14쪽
41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1) 14.04.30 246 6 11쪽
40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5) 14.04.30 422 5 24쪽
39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4) 14.04.30 366 6 14쪽
38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3) 14.04.30 307 6 16쪽
37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2) 14.04.30 320 6 23쪽
36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14.04.30 305 4 21쪽
35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4) 14.04.30 356 6 7쪽
34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3) 14.04.30 341 4 14쪽
33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2) 14.04.30 455 5 21쪽
32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1) 14.04.30 469 7 13쪽
31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2) 14.04.30 432 5 15쪽
30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1) 14.04.30 307 9 21쪽
29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9) 14.04.30 468 7 14쪽
28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8) 14.04.30 341 7 24쪽
27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7) 14.04.30 419 7 12쪽
26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6) 14.04.30 309 6 11쪽
25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5) 14.04.30 407 6 15쪽
24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4) 14.04.30 448 6 11쪽
23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3) 14.04.30 374 5 16쪽
22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2) 14.04.29 402 7 15쪽
21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1) +1 14.04.29 538 7 20쪽
20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4) 14.04.29 570 4 18쪽
19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3) 14.04.29 550 6 22쪽
18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2) 14.04.29 406 9 15쪽
17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1) 14.04.29 535 8 13쪽
16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7) 14.04.29 370 9 16쪽
15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6) 14.04.29 513 7 14쪽
14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5) 14.04.29 346 6 25쪽
13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4) 14.04.29 516 8 18쪽
12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3) 14.04.29 559 9 17쪽
11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2) 14.04.29 569 12 10쪽
10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1) +2 14.04.29 691 12 10쪽
9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9) 14.04.29 495 11 8쪽
8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8) 14.04.29 606 13 9쪽
7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7) 14.04.29 653 13 9쪽
6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2 14.04.29 547 13 8쪽
5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5) 14.04.29 682 11 8쪽
4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4) 14.04.29 598 11 8쪽
3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3) 14.04.29 849 14 10쪽
2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2) 14.04.29 1,246 14 8쪽
1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1) 14.04.29 2,224 2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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