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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2.12.15 05:44
최근연재일 :
2014.05.02 02:28
연재수 :
75 회
조회수 :
36,917
추천수 :
522
글자수 :
570,796

작성
14.05.0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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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추천
6
글자
19쪽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6)

DUMMY

아직 조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집단이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것을 막은 일등공신은 서하손이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몰랐지만 일단은 2천이 넘는 병력과 3천에 달하는 포로를 먹이고 재우는 일이 시급했던 것이다.

섬 뒤편에 이방인 노예들을 동원한 집단 농장이 있었고, 해적의 가족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으니 섬의 인구는 2만에 달했다.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는 하나, 필요한 물자를 안정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서하손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그가 책임지던 신도문의 살림보다 훨씬 규모가 커졌지만, 서하손은 일국의 재상을 맡아도 그 능력이 마르지 않을 타고난 행정가였다.

부지런히 상선이 드나들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자 그나마 민심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서하손이 가장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이미 다 하고 있었으니, 이제 다른 이들이 제자리를 찾아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임초서가 정신을 차린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식솔이 이렇게 늘어나지만 않았더라도 서하손은 서희와 함께 진작에 이 섬을 떠났을 것이다. 물론 결정은 이븐이 했겠지만 말이다.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쥔 이븐 또한 서희와 함께 수상성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서희의 회복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서희를 치료하는데 전념하고 남는 시간에는 해영을 방문했다. 혹시라도 그가 죽어버릴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범계가 부지런히 오가며 음식을 날랐다. 하인과 노예는 모두 풀어주어 마을로 보냈기 때문에 성에는 단 네 사람뿐이었다. 가란자가 가끔씩 들러 상황을 보고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자 서희가 생기를 되찾았다. 이븐이 해영을 보고 오는데 서희가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아닌데. 그러지 말고 며칠만 더 쉬자."

"다 쉬었다. 제법 솜씨가 좋구나. 저 해적 피보다 네 피가 훨씬 맛있다."

"피를 맛있게 만드는 솜씨가 좋다는 뜻이냐? 피만 마시고 알아서 나은 줄 아시는데요,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세요?"

"아신다. 수고했다. 어서 가자. 흑마가 보고 싶다."


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이븐이 그 뒤를 따르며 억양 없이 투덜댔다.


"야호. 칭찬받았다."


마침 범계가 음식을 들고 뛰어 오다 그들과 마주쳤다.


"어디 가십니까? 먹을 걸 가지고 왔는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서희가 환하게 웃었다.


"착하구나. 우리 범계가 걱정해준 덕분에 이제 다 나았다. 밥은 나중에 먹자꾸나. 배고프면 먼저 먹어도 된다."


범계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몰랐던 서희가 다 나았다니 뛸 듯이 기뻤다. 게다가 한 일도 없이 칭찬까지 받으니 먹지 않아도 배가 든든했다. 그래도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서희가 영 걱정스러웠다.


"아씨, 제가 업어드릴까요?"


서희는 사양하려다가 범계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래. 우리 범계 등에 한 번 업혀볼까?"


서희를 업은 범계는 신이 나서 흑마보다도 씩씩하게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나 그 기분대로 앞으로 질주하지는 않았다. 아픈 서희가 어지러울까 봐 새색시처럼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옮겼다. 서희가 걷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이븐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 보니 정말로 저 녀석이 걱정해준 덕분에 나은 것 같구나. 난 쓸모없는 놈이었어."


서희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자책하지 마라. 너도 주인치고는 쓸만한 편이다."

"야호. 칭찬받았다."


이븐이 다시 억양 없이 말하자 이번에는 서희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븐도 함께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서희야. 부탁이 하나 있다."

"무엇이냐?"

"지금부터 임 영감을 찾아갈 텐데, 가는 동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말아다오."


서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만 잘해주는 게 그렇게 샘이 나더냐?"

"응. 그것도 그런데…… 아니, 사실 그게 제일 큰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쨌건 지금은 내 말을 따라다오."


서희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 여기고 흔쾌히 승낙했다.


"알았다. 가끔은 주인한테도 잘해줘야지."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잘해줘야겠다."


이븐이 농담을 진지하게 받자 서희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어떻게 더 잘해주랴? 우리 예쁜 범계만큼 잘해주랴?"


범계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걷느라 땀까지 뻘뻘 흘렸다. 이븐이 이마에 손을 얹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 나이에 사람 다루는 데 도가 터버렸을꼬……"


서희는 범계를 다루려고 마음먹고 다루는 게 아니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이븐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으나 가끔은 사람 가지고 노는 데 도가 튼 자신조차 서희의 손바닥 위에 올라앉아 있는 느낌을 받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서희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 말에 악의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너를 범계처럼 대해줄 수는 없다. 너와 이 아이가 다르니 당연하지 않겠느냐?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아라. 대신 어떻게 더 잘해줬으면 좋겠는지 한 번 말해봐라. 어지간하면 들어주겠다."


이븐이 크게 웃었다.


"물론이다. 내가 너를 주인으로 모실 수는 없지 않겠느냐?"


서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범계가 좋았다. 속에 무슨 꿍꿍이를 품었는지 알 수 없는 인간들과 달라서, 범계는 배가 고프다 하면 배가 고픈 것이고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면 정말로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보는 눈에 사랑만 가득할 뿐 아무 욕심도 없었다.

그러나 서희가 범계를 아끼는 마음은 흑마를 아끼는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녀 마음속의 재산 목록 1호는 범계와 흑마가 아니라 바로 이븐이었다. 이븐도 서희가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을 뿐, 자기를 무척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미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켜준 사이 아닌가? 그러나 그도 서희가 자기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즐거워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부터 그가 하려는 부탁이 얼마나 쓸데없는 소리인지도 알지 못했다.


"사실 더 잘해줄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보든 그냥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다오."


어차피 타인의 시선이야 그녀의 관심 밖이었고, 그를 떠날 생각도 없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다. 서희는 이븐이 조금만 더 살갑게 대해달라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사흘간 잠도 자지 않고 극진히 간호해 준 이븐이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니 적잖이 쑥스러웠지만 크게 인심 한 번 쓰자 마음먹고 있던 서희는 다소 맥이 풀렸다. 그리고 왠지 화가 치밀었다.


"그런 소릴 하는 걸 보니 또 누굴 속여먹을 궁리를 하고 있는 게로구나? 노예 된 자로서 주인이 엇나가도록 보고만 있을 순 없다."


기분이 좋은 줄 알았던 서희가 갑자기 차갑게 돌변하자 이븐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는 감히 농담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급히 변명했다.


"안 엇나갈 거거든? 네가 옆에서 지켜볼 것 아니냐? 지켜보고 판단해라. 그리고 이번에도 거짓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통촉해주면 안 될까?"


이븐이 생각보다 훨씬 당황하자 서희는 이를 악물고 미소를 지웠다.


"범계야.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빨리 가 줄래? 내 주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 얼른 가서 봐야겠구나."


범계에게 서희는 솜털보다 가벼웠다. 아니, 서희를 업자 등에 날개를 단 것처럼 몸이 더욱 가벼웠다. 하늘을 날아도 힘들지 않을 판에 조금 더 빨리 걷는 게 대수겠는가? 오히려 천천히 걷는 게 훨씬 더 힘들었다.

범계가 수상선 복도를 흑마처럼 질주했다. 이븐보다 먼저 가봤자 서희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서희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도 굳이 범계를 말리지 않았다.

이븐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서둘러 뒤를 쫓지는 않았다.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며 혹시 다른 변수가 없는지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었다. 너무나 대담해서 그렇지 안 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원래 사기는 황당무계할수록 더 잘 먹히는 법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가뜩이나 느릿느릿하던 발걸음이 아예 멈춰버렸다.


- ‘설마 겨우 이 정도 일에 개입하진 않겠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이븐이 다시 걸음을 뗐다.


- ‘뭐, 개입한대도 이젠 별수 없다. 나는 내 방식대로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까. 내가 찾은 답이 그 자식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죽으면 그만이다. 내가 언제부터 죽음을 두려워했더냐?’


서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모험을 해야 했다.

그의 발걸음에 결연한 의지가 실렸다.


* * *


이븐과 서희가 흑마를 타고 나타나자 서하손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겼다.


"서희야! 좀 어떠냐? 괜찮은 게냐?"


서희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븐이 나섰다.


"아직 며칠 더 요양해야 합니다. 그건 그렇고 임 영감은 여전하지요?"


서하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디서요?"


서하손도 이제 이븐이 유일한 희망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묵묵히 앞장서 걸었다.

임초서는 마을에서 가장 허름한 초가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가란자가 대청 마루에 앉아 그를 지켰다. 그가 반갑게 맞았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낭자도 이제 많이 나아지셨나 봅니다."


이븐이 말했다.


"영감님께 내가 왔다고 일러라. 서 선생도 함께 들 것이다."


가란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란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란자는 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븐이 어깨를 힘껏 꼬집어 비튼 것이다.

이븐이 그 옆으로 몸을 날리며 미소를 보냈다.


"막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막지 못한 것이다. 야단맞을 일은 없을 게다."


어차피 이븐이 힘으로 밀고 들어가겠다면 지하드나 돼야 막을 수 있다. 그는 단지 임초서에게 가란자의 비명을 들려주기 위해 꼬집은 것이다. 가란자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 사이 이븐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영감님! 저 왔습니다. 그간 별고……"


이븐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칫하더니 달려가 바닥에 놓인 반상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하얀 수건에 싸여 있던 검이 함께 날아가 버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임초서는 검이 날아가 버리자 한숨을 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를 씻으려 한다. 방해하지 말아라."


깜짝 놀라 뛰어들어온 가란자와 서하손이 상황을 깨닫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븐이 손을 저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죽으면 죄가 씻긴답니까?"

"빚이 천금이다. 가진 게 서푼뿐이지만 그라도 돌려드려야지."

"내가 이래서 돈을 안 빌려준다니까. 벌어서 갚을 생각을 해야지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임초서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벌써 며칠을 그렇게 울었을진대, 진정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았다.


"이제 와서 세상을 다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누구에게 바치란 말이냐?"


이븐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아주 호통을 쳤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보기 드문 충신인 줄 알았더니 황실이 기르는 한 마리 개에 지나지 않았으니! 영감의 충심은 황가의 적통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소? 그 적통이 최악의 폭군이었다면 당신은 그 명에 따라 백성을 더욱 세게 물어 뜯었겠소이다."


임초서가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공주님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성군이셨다!"

"그렇겠지! 공주를 위하는 것이 곧 백성을 위하는 길이었겠지! 나도 그리 알고 있소. 그래서 지금 하려는 행동은 공주를 위한 것이오, 백성을 위한 것이오? 웃기지 마시오! 영감은 지금 평생의 숙원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기 자신이 불쌍해서 견디지 못하는 것뿐이오!"


임초서의 목소리가 점점 더 노기를 띠었다.


"네놈이 사람을 어찌 이리 능멸하느냐! 신하가 주군을 따르는 일이다!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라!"


문가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서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서희의 차분한 목소리에 방 안의 뜨거운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버렸다. 임초서가 고개를 돌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게 무엇이오?"


서희는 멍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구하고자 했던 이를 구하고 나머지를 모두 잃었다면 기뻐하셨겠습니까?"


거친 질문이었지만 그 의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임초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븐이 대신 대답했다.


"그럴 리야 있겠느냐? 다만 이렇게 세상을 등지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해적 두목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구나. 그자가 겁탈하고 목숨을 빼앗은 이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데, 지금 단 한 사람에 대한 대가만 치르고 있으니."


이븐은 영특한 서희가 자신을 돕는 줄 알고 은근히 임초서를 자극하려고 나섰다가 자기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서희가 코웃음 쳤다.


"사람이 가까운 이를 위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탓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허나 여러분 개인의 일에 괜히 백성을 들먹이지는 마십시오. 왕이건 황제건 자기들끼리 얘기지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왜 여러분 일에 우리가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해야 합니까?"


이븐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임초서를 깨는 게 급선무지만 이렇게 자기까지 깨져버리면 계획에 큰 차질이 있었다.


- ‘저 녀석이라는 변수를 계산하지 못했구나. 상수(常數)로만 생각했으니 내가 어리석었다.’


이븐이 쓴웃음을 짓는데 서희가 돌아서며 말했다.


"가자, 주인아. 그래도 저 어르신은 그 해적 놈과 다르니 죽음을 허락해 드려야 옳을 것이다."


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흑마에 올라탔다. 범계가 그 옆에 서서 이븐을 기다렸다.

임초서는 참담하고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븐은 역시 그보다 뻔뻔했다.


"가실 때 가시더라도 책임은 다하고 가십시오."


임초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븐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한규 장군이 이끌고 온 병사 2천은 화란 공주를 본 적도 없습니다. 순전히 영감 한 사람만 바라보고 가족을 버리고 조국을 등진 자들이지요. 영감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가버리시면 저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가서 사과라도 한마디 하시고 죽어도 그들 손에 죽으시지요."


임초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란자에게 명했다.


"한규에게 병사들을 집합시키라고 전해라."


이븐이 한 마디 보탰다.


"수상성에 2천이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방이 있다. 범계에게 이야기해두었으니 안내해 달라 해라."


가란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뛰어나갔다. 임초서가 이븐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느냐?"


마을에서 수상성은 섬의 끝에서 끝이었다.


"하늘 보기 부끄럽잖아요. 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이븐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방에서 나가버렸다.

서하손은 눈앞이 캄캄했다. 뭔가 상황을 호전시킬 계책을 내놓을 줄 알았던 이븐이 오히려 한 술 더 뜨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급히 따라나서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이븐이 선수를 쳤다.


"2천 명이 먹을 술과 음식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잔칫상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서하손이 고개를 갸웃했다. 행정을 장악한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뜬금없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였다.


"못할 건 없습니다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닌 듯합니다."


이븐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이 살며 하루쯤 좋은 날도 있어야지요. 그렇지 않니, 서희야?"


서희도 이븐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어리둥절해 있다가 이븐이 그렇게 말하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손은 자기가 나서지 않으면 서희가 고생할 거라 여기고 긴말 하지 않고 서둘러 잔치 준비에 들어갔다.

서하손이 자리를 뜨자 서희가 이븐에게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일이 생각대로 잘 안 풀린 모양이구나. 너무 낙심하지 말아라."


이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그래. 덕분에 말이다. 허나 이 정도로 포기할 것 같았으면 시작도 안 했다.’


"낭자가 걱정하실 문제가 아니오. 낭자도 이미 알고 계시는 듯하지만 저놈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백만의 목숨도 파리 한 마리보다 중히 여기지 않는 자라오. 임초서 장군도 결국은 목숨 하나일 뿐이니 저 자에게 뭐 대수겠소?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몰라도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일 겝니다."


이븐이 돌아보자 지하드가 한쪽 구석에 기대 서 있었다. 이븐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냐, 엿들은 게냐? 과연 대장부로구나."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데도 듣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라 귀머거리일 것이다."

"그렇지. 귀신은 귀가 밝지."


이븐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그니토의 추억이 떠올라 갑자기 침울해졌다.

지하드가 냉소를 지었다.


"어울리지 않는 표정 짓지 말아라. 악마 주제에."


이븐이 미소를 지었다.


"한 사람과 백 사람의 목숨 중 어느 것이 중하냐?"

"그걸 고민씩이나 해야 아는 놈이지, 너는."

"백 사람이 중하다."

"고민 많이 했구나."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 하나와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천(千)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 보았느냐?"


지하드의 두 눈이 무섭게 불타올랐다.


"백일의 약속을 잊게 하지말아라."


지하드가 한 걸음 다가서자 범계가 심호흡을 하며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븐이 힘없이 웃었다.


"그래서 아직은 너에게 죽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지하드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살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범계는 자기가 뭔가 착각했다 여기고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이븐이 몸을 날려 서희 뒤로 흑마에 올라타며 한 마디 더 던졌다.


"너도 잔치에 와라. 너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조금이나마 짐을 덜게 해주마."


지하드는 천천히 멀어져 가는 이븐 일행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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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4) <3권 끝> +2 14.05.02 507 5 33쪽
7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3) 14.05.02 433 5 16쪽
7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2) +2 14.05.02 448 4 25쪽
7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1) 14.05.02 434 4 20쪽
71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0) 14.05.02 336 5 27쪽
70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9) 14.05.01 453 4 26쪽
69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8) 14.05.01 420 5 35쪽
68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7) 14.05.01 428 4 13쪽
67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6) 14.05.01 405 6 25쪽
66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5) 14.05.01 417 4 13쪽
65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4) 14.05.01 483 8 14쪽
6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3) 14.05.01 464 6 24쪽
6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2) 14.05.01 447 5 13쪽
6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 14.05.01 610 7 20쪽
61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6) +2 14.05.01 506 4 20쪽
60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5) 14.05.01 463 8 24쪽
59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4) 14.05.01 503 5 14쪽
58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3) 14.05.01 372 5 17쪽
57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2) 14.05.01 434 4 15쪽
56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1) 14.05.01 433 7 11쪽
55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7) 14.05.01 343 6 25쪽
»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6) 14.05.01 264 6 19쪽
53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5) 14.05.01 450 7 18쪽
52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4) 14.04.30 363 6 17쪽
51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3) 14.04.30 461 4 18쪽
50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2) 14.04.30 307 6 18쪽
49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1) 14.04.30 665 3 17쪽
48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6) 14.04.30 332 5 19쪽
47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14.04.30 504 5 20쪽
46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14.04.30 436 4 19쪽
45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3) 14.04.30 424 5 15쪽
44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2) 14.04.30 263 7 12쪽
43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1) 14.04.30 472 7 24쪽
42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2) 14.04.30 394 8 14쪽
41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1) 14.04.30 246 6 11쪽
40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5) 14.04.30 422 5 24쪽
39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4) 14.04.30 366 6 14쪽
38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3) 14.04.30 307 6 16쪽
37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2) 14.04.30 320 6 23쪽
36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14.04.30 304 4 21쪽
35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4) 14.04.30 356 6 7쪽
34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3) 14.04.30 341 4 14쪽
33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2) 14.04.30 455 5 21쪽
32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1) 14.04.30 469 7 13쪽
31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2) 14.04.30 432 5 15쪽
30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1) 14.04.30 307 9 21쪽
29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9) 14.04.30 467 7 14쪽
28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8) 14.04.30 341 7 24쪽
27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7) 14.04.30 418 7 12쪽
26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6) 14.04.30 308 6 11쪽
25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5) 14.04.30 407 6 15쪽
24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4) 14.04.30 448 6 11쪽
23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3) 14.04.30 374 5 16쪽
22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2) 14.04.29 402 7 15쪽
21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1) +1 14.04.29 538 7 20쪽
20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4) 14.04.29 570 4 18쪽
19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3) 14.04.29 550 6 22쪽
18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2) 14.04.29 406 9 15쪽
17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1) 14.04.29 535 8 13쪽
16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7) 14.04.29 370 9 16쪽
15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6) 14.04.29 513 7 14쪽
14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5) 14.04.29 345 6 25쪽
13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4) 14.04.29 515 8 18쪽
12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3) 14.04.29 559 9 17쪽
11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2) 14.04.29 569 12 10쪽
10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1) +2 14.04.29 690 12 10쪽
9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9) 14.04.29 495 11 8쪽
8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8) 14.04.29 606 13 9쪽
7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7) 14.04.29 653 13 9쪽
6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2 14.04.29 547 13 8쪽
5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5) 14.04.29 682 11 8쪽
4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4) 14.04.29 598 11 8쪽
3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3) 14.04.29 849 14 10쪽
2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2) 14.04.29 1,246 14 8쪽
1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1) 14.04.29 2,223 2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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