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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2.12.15 05:44
최근연재일 :
2014.05.02 02:28
연재수 :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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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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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글자수 :
570,796

작성
14.04.3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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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20쪽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DUMMY

"정말 대단한 장수군요."


이븐은 안토니오스에 대한 임초서의 극찬이 충분치 못하다고 느꼈다. 지하드와 서하손은 물론, 안토니오스의 병력 운용을 수도 없이 보았던 가란자조차 새삼 그에게 경탄하고 있었다. 임초서의 조언을 받아들여 적의 사기만 살짝 꺾기로 마음먹었던 지장이, 적의 허점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자마자 한순간에 누구보다도 용맹한 맹장으로 돌변해 무모하리만치 과감한 공격을 성공시킨 것이다.

임초서도 혀를 내둘렀다.


"내가 저 친구를 너무 낮게 보았나 보다. 이미 균형을 논할 수준이 아니구나."

"장군께서 저 장수를 성장시킨 게지요."


병법을 모르는 서하손이지만 그 말에는 임초서조차 간과한 진리가 담겨 있었다. 임초서가 눈을 뜨고 가란자가 성장한 싸움 속에서 안토니오스라고 제자리걸음을 했을 리 없다.

모두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안토니오스에게 빠져들려는데 이븐이 모두를 흔들어 깨웠다.


"그에게 맡긴 일은 걱정 안 해도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걱정을 덜어줄 차례입니다."


서하손은 병법을 모르는 만큼 꿈에서 깨어나는 것도 가장 빨랐다. 처음에는 서희가 이븐을 주인으로 모신다니 대신 견마지로를 마다하지 않겠다며 따라나섰을 뿐이지만, 아무 죄 없는 이방인들과 제국의 공주를 구하는 일임을 알게 된 이상 신도문의 처지를 비관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해적의 수와 섬의 규모로 보아 상선이 끊임없이 드나들 것입니다. 다행히 신도문과 거래하는 어촌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배를 한 척 빌려 나간 다음 섬으로 들어가는 배로 옮겨 타면 의심을 사지 않고 몰래 숨어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서 저를 따르시지요."


일행이 서하손에게 받은 인상은 올곧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선비였다. 그에게 어선을 수배해 위험한 곳으로 항해하게 하고 다시 상선으로 옮겨 타게 만들 수완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두 어깨를 으쓱하고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나마 서하손을 잘 아는 서희조차도 그의 진가를 모르고 있었다.

임초서는 안토니오스를 얻는 왕이 이 난세를 평정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인(武人)의 사고일 뿐이다. 난세를 평정하는 것은 칼이 아니다. 칼은 또 다른 난세를 부를 뿐이다. ‘정복’과 ‘지배’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아직은 그 자신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서하손이야 말로 패도(覇道)를 이루기 위한 굳건한 기둥과도 같은 인재였다. 이제 뜻을 정하고 심지를 굳힌 서하손의 진가가 서서히 발휘되기 시작했다.


"주인아."

"아이고, 깜짝이야! 내가 너 때문에 천수를 누리긴 틀린 것 같다. 말하기 전에 말하겠다고 말을 해야될 것 아니냐? 내 참……. 그래서, 좀 어떠냐? 정신이 드느냐?"


서희가 한숨을 쉬었다.


"말을 하기 전에 말한다고 말해주지 않으면 놀라고, 이미 말을 한 사람이 정신을 차렸는지 아닌지도 구별도 못하는 녀석의 언변에 놀아나는 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들인지 모르겠다."

"가엽지."

"그래. 네가 그래도 심성은 곱다. 그나저나 좀 답답하구나. 얼굴 좀 꺼내다오."


서희는 얼굴을 이븐의 품 속에 묻은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바깥 일 신경 쓰지 말고 한숨 푹 자라는 이븐의 배려이기도 했다.


"바다 바람이 차다. 배에서 내리면 놓아주마."

"배에 선실이 없느냐?"

"작은 고기잡이 배다. 말도 네 흑마밖에 태우지 못했다."


서희는 흑마가 함께 있다는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얼굴을 꺼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아까 듣자 하니 다른 배로 옮겨 탄다 하던데?"

"그래. 서 장로가 이제 곧 해영의 섬에 술과 고기를 실어 나르는 상선이 나타날 거라 했다. 그건 그렇고 그만 이야기하고 조금 더 자 둬라. 너나 나나 부상이 가볍지 않다.“


서희는 몇 번 숨을 몰아 쉬는가 싶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가란자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이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일이 끝나면 서 장로께서 상처를 봐주실 겁니다."


- ‘그런 걸 산 넘어 산이라고 한다, 꼬마야.’


이븐이 쓴웃음 짓자 가란자가 용기를 내 옆에 앉았다.

둘의 인연은 2년 전 가란자가 이븐의 뒤통수를 향해 화살을 한 대 날리면서 시작되었다. 어제 다시 만나 함께 행동하고 있었지만 둘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란자는 많은 재능을 타고 태어났지만 그 중 가장 큰 축복은 천하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마음에 쏙 들어버리는 첫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말에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남다른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하루에 천 리를 가는 명마라 한들 짐마차나 끌다 생을 다하게 마련이다. 가란자 자신은 아르강을 시작으로 천하의 영웅이란 영웅들은 모조리 만나며 그 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필사적으로 성장하려 애쓰는 모습이 선배들 눈에는 밉지가 않았다. 이븐도 슬그머니 옆에 앉는 가란자에게서 뭔가 하나라도 배워가겠다는 의지를 느꼈다.

가란자가 품 속에서 수통을 꺼내 건넸다.


"날이 차니 한 모금 하시지요. 남방계 원주민들이 마시는 술인데, 향은 뛰어나다 할 수 없으나 제법 독한 것이 몸을 녹이는 데는 그만입니다."


서희를 안고 있어 그리 춥지도 않았고, 부상을 입은 몸으로 술을 입에 댈 생각도 없었지만 이븐은 기꺼이 수통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전설의 성인 공자(孔子)도 아주 작은 선물 하나를 들고 와 가르침을 청하는 자를 내친 적이 없다 했다. 재물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의지와 그 성의를 외면하는 자는 군자(君子)라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만하면 향도 나쁘지 않구나. 좋은 술이다."


이븐이 미소를 지으며 수통을 돌려주었다. 가란자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받아 들었다.


"그런데 장수가 전장에 술을 들고 다녀서야 쓰겠느냐? 술은 두려움을 잊게 해주지만 그 대가로 판단력을 가져간다. 일군을 이끄는 장수가 겁에 질려 있다 하면 따르는 부하가 없겠지만 덕분에 부하를 잃을 염려도 없겠지. 겁도 없고 판단력도 없는 장수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법이다."


가란자가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스승님께서도 군에 금주령을 내리신 지 오래입니다. 두려움은 극복할 것이지 잊을 것이 아니라 하셨지요. 허나 장수들에게는 술통 하나씩을 가지고 다니라 명하셨습니다. 장수라면 마땅히 병사들을 안전하게 귀환시켜야 할 책무가 있으나, 인명은 장수가 어쩔 수 없고 하늘이 관장하는 것이니 때를 놓친 이에게 사과주 한 잔 따라 주라 하셨지요."

"이 녀석 봐라? 지금 내가 때를 놓쳤다 여기고 사과주를 따른 게냐?"


이븐이 껄껄 웃자 가란자도 멋쩍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부상이 심하시니 이후의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마음이라도 편히 가지시라는 의미였습니다. 막상 전장에서는 술을 따라 준 적도 없습니다. 그럴 겨를이 있겠습니까? 스승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허리춤에서 찰랑이는 술통을 느끼며 병사들 목숨의 무게를 잊지 말라는 분부셨습니다."


이븐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칼에 죽는 적병의 목숨에도 무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날, 마법의 시대보다도 더 오랜 옛날 초나라 왕이 덕이 있어 성군으로 추앙받았지. 한 번은 왕이 사냥을 하다가 화살을 한 대 잃어버렸다. 왕의 화살을 찾지 못한 중죄를 지은 하인들은 국법에 따라 목이 달아나게 생겼어. 그때 왕이 나서 죄인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초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초나라 사람이 줍겠거늘 무슨 야단들이냐면서 말이야."


가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이로군요."


가란자의 눈이 빛났다. 옛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는 소년의 눈은 그렇게 빛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븐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왕은 사실 자신을 속이는 재주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인간이었다. 역사가 그를 칭송한 것도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왜곡된 덕(德)을 주입시키기 위한 사기극이었지."


가란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하신 바를 들어 보아도 초나라 왕이 성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만."


이븐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성군이란 무엇이더냐? 제 나라 제 백성만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그게 성군이더냐? 그렇다면 크고 부강한 나라의 왕이야말로 성군이겠구나. 더 많은 백성을 사랑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하면 힘과 덕의 차이가 무엇이겠느냐? 나라란 또 무엇이냐? 힘이 미치는 범위까지 땅에 줄을 그어놓고 이 안에 사는 이는 내 화살을 주워도 된다고 말하는 왕을 어찌 성군이라 하겠느냐?"


어느새 임초서와 서하손, 배의 어부들까지 이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지하드만이 일부러 반대편으로 걸어가 애써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가란자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자 이븐이 말을 이었다.


"그 시대에는 지금까지도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라는 인물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초나라 왕의 덕을 칭송하는 말을 듣고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사람이 주울 것인데 왜 하필 초나라인가?”하고 탄식했다 한다. 덕이라는 것은 땅에 아무렇게나 줄을 그어 그 안에 사는 백성을 아끼고, 피부색을 살펴 누가 우리 핏줄인가를 따지는 사고에 있지 않다. 그런 것을 덕이고, 애국이고, 선이라 칭하는 것은 나를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이 마음을 편히 먹기 위해 자신에게 속삭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타국에 해를 끼친 장수를 영웅이라 칭송하는 자들은 언제든지 이웃을 해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고도 또 어디 먹을 게 없나 군침을 흘릴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성군이라 칭송받는 일이 있거든 슬피 울어 마땅할 것이다."


가란자의 눈에서 붉게 타오르는 야심을 읽은 이븐이 그 힘을 옳은 방향으로 쏟아내길 바라며 한 말이었다. 가란자를 잘 아는 임초서가 이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서하손의 마음에도 이븐을 향한 존경심이 깊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작 혈기 넘치는 18세 소년에게는 그 뜻이 다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엉뚱하게도 더 많은 백성을 사랑하는 대국의 왕이 성군이냐는, 힘이 곧 덕이냐는 비아냥을 긍정적으로 듣고 있었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 방향이 이렇게까지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븐도 거기서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악한 가란자는 어른들의 눈을 피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해영… 그러니까, 저 해적 놈은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는 놈입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속여 죽여버리다니 말입니다."


이븐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그 정도인 줄 알았다면 화적보다 해적을 먼저 찾아갔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지."


가란자가 짐짓 한숨을 쉬었다.


"제 고향에도 어리석은 인간들 투성이입니다. 피부색은 고사하고 자기들끼리 혈통이나 따져가며 13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대륙의 산적 떼라는 오명이나 뒤집어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네 민족만의 잘못이 아니다. 먼 옛날 수많은 몽골 부족을 하나로 통일해 제국을 건설한 왕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두려워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니."


징기스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가란자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빛났다. 이븐은 그의 변화를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왕이라고 할 수도 없다. 통치가 아니라 오직 정복만이 목적이었으니. 그가 건설한 대제국은 그가 죽자마자 여러 갈래로 찢어져 오래지 않아 이류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점에서는 유로피아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이름을 빌려준 대왕 알렉산더가 한 수 위일 것이다. 그 또한 머릿속에 “정복”이라는 두 글자밖에 없는 전쟁광이었으나, 징기스칸이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은 반면 알렉산더의 족적은 다양한 문화의 융합이라는 열매가 남았지. 뭐, 그래 봤자 둘 다 깡패들일 뿐이다만."


이븐은 두 명의 위대한 정복자를 깡패라 칭하여 가란자의 왜곡된 가치관에 일침을 가할 생각이었으나 그 또한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가란자가 품은 생각은 실로 기절초풍할 만한 것이었다.


- ‘콩을 하나 심으려 해도 밭을 한 번 갈아엎어야 한다. 이렇게 썩어빠진 세상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우리 칸보다 알렉산더 대왕의 족적에서 더 찬란한 꽃이 피었다면 그가 더 훌륭한 깡패였다는 뜻일 게다.’


이븐은 가란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여기서 한 번 더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더와 징기스칸이 자발적인 깡패였다면 내몰린 깡패도 있다. 자기 이익만을 따지며 약자를 배척하면 괴물이 탄생하기도 하거든. 훈족은 몽골족 주류에게 밀려난 자들이었다. 그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가 바로 그런 괴물이었어. 나라를 세울 생각도 없이 군막에서 생활하며 끝없이 살육만을 자행했다. 서양의 내로라하는 야만인들은 물론이고 수준 높은 문명을 가진 국가들도 속절없이 무너져갔지. 지금의 유로피아 땅에서는 아틸라에게 쫓겨간 여러 민족이 마구 뒤섞여 국가와 민족의 구성이 완전히 변해버렸을 정도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래 놓고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또다시 하루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대륙의 빈민이 되었지. 지금 네 나라, 네 민족이 처한 가혹한 운명은 눈앞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 모든 걸 힘으로만 해결하려 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븐과 가란자가 번갈아 자가당착에 빠졌다.

이븐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던 주장에서 벗어나 몽골족의 비참한 운명을 근거로 징기스칸과 아틸라를 비판했다. 그러나 가란자는 그들에게, 특히 아틸라에게 매료되었다. 이븐의 설명에 따르면 아틸라가 일으킨 파급효과가 더 컸기 때문이다.


- ‘사람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내 나라 내 민족이 다 무엇이란 말이냐? 또한 국가와 민족의 구분이 없다면 따로 어떤 이들이 특별히 비참한 운명을 맞을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무예는 지하드 님께 미치지 못하고, 지혜는 이븐 선생에 미치지 못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는 스승님께 미치지 못하나, 세상을 갈아엎어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일만은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우리 민족이 내세울 만한 유일한 장기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몽골 13부족을 다스리는 것은 어려우나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스리는 것은 다스리는 것을 잘하는 이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몽골을 장악하면 아틸라의 위엄을 재현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 기세로 여목희와 송연국을 치고 화란을 제위에 오르게 하면 묘향을 아내로 맞아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가란자는 저도 모르게 실없는 미소를 흘렸다.

그를 본 이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달콤한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영락없이 꿈 많은 소년이었다. 가슴 한 켠에 자리했던 알 수 없는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정인(情人)이라도 떠올리는 게냐?"


가란자가 얼굴을 붉히며 2년 전 마그니토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븐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르강이 갈증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자해를 해 더 이상의 발작을 스스로 막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란자는 목소리를 낮춰 이븐이 임초서인 줄 알고 화살을 날렸던 일까지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누구에게도 못할 이야기였지만 왠지 사도(邪道)의 기운을 강하게 풍기는 이븐에게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과연 이븐은 껄껄 웃으며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새파란 녀석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도 놀려줄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븐이 아니다.


"그 나이에 정인을 잠시 떠나기로 한 결단은 높이 살만 하다. 헌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 걱정이구나. 네 정인도 너 못지않은 인물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면 너보다도 눈이 좋아 지금도 너를 지켜보고 있거나."


가란자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야… 물론…… 설마 하니 공주님께서 정해주신 인연을 놓기야 하겠습니까?"


이븐이 한숨을 쉬었다.


"네가 여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마을에 열녀가 나면 열녀비를 세워 그 절개를 기린다. 그런데 네 평생 열녀비를 몇 개나 보았느냐? 열녀비를 세우는 것 자체가 그만큼 열녀가 드물기 때문이다. 벌써 2년이나 만나지 못했다 하니 이번 일이 끝나면 당장 달려가서 일단 머리라도 올려주고 오도록 해라. 열녀도 혼인을 해야 열녀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정인을 그 꽃다운 나이에 밑도 끝도 없이 기다리게 하는 사내가 어디 사내더냐? 다른 놈이 채가도 군소리 말아야 할 것이다."

"큰일을 앞두고 어린 아이 정신 산란하게 뭐 하는 짓이냐!"


임초서가 호통을 치자 이븐이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그러나 가란자는 이미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질투가 여인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 아내를 거느린 불한당들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고, 사실 남자야말로 질투의 동물이다. 바람 피운 남편을 용서한 아내는 많아도 반대의 경우는 열녀비보다도 드물다. 남자의 그 어마어마한 소유욕의 근저에는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뻐꾸기 새끼를 키워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의 원리인 것이다.

마그니토의 매력적인 남자들이 한꺼번에 가란자의 눈앞을 스쳐갔다. 질투에 사로잡힌 남자의 직감은 때로 여자를 능가하는 데가 있어서, 영상은 놀랍게도 이베르의 얼굴에서 멈췄다. 가란자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 ‘선생의 언변에 놀아나 아주 별생각을 다 하는구나. 그 희멀건한 샌님까지 걱정하다니, 나도 아직 장부는 못 되나 보다.’


이븐이 그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잘 돌아왔다. 아주 그대로 마그니토로 달려 가버린 줄 알았구나. 저 큰 상선이 바로 옆에 댈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다니 말이다. 이번에는 네 눈보다 내 눈이 더 많이 보았다."


가란자가 놀라 돌아보니 임초서와 지하드는 벌써 배를 옮겨 타고 있었다. 가란자가 얼굴을 붉히며 이븐을 부축했다. 흥정을 마친 서하손이 달려와 그를 도왔다. 흑마는 이븐과 서희를 등에 태우고 고물을 훌쩍 뛰어넘었다.


"정인 생각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진정 대장군의 그릇일 것이다."


이븐이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란자도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순풍을 받아 빠르게 해영의 섬으로 향했다. 가란자가 마그니토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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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4) 14.04.30 363 6 17쪽
51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3) 14.04.30 461 4 18쪽
50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2) 14.04.30 307 6 18쪽
49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1) 14.04.30 665 3 17쪽
48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6) 14.04.30 332 5 19쪽
»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14.04.30 504 5 20쪽
46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14.04.30 436 4 19쪽
45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3) 14.04.30 423 5 15쪽
44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2) 14.04.30 263 7 12쪽
43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1) 14.04.30 471 7 24쪽
42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2) 14.04.30 394 8 14쪽
41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1) 14.04.30 246 6 11쪽
40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5) 14.04.30 421 5 24쪽
39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4) 14.04.30 366 6 14쪽
38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3) 14.04.30 307 6 16쪽
37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2) 14.04.30 320 6 23쪽
36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14.04.30 304 4 21쪽
35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4) 14.04.30 356 6 7쪽
34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3) 14.04.30 341 4 14쪽
33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2) 14.04.30 455 5 21쪽
32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1) 14.04.30 468 7 13쪽
31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2) 14.04.30 432 5 15쪽
30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1) 14.04.30 307 9 21쪽
29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9) 14.04.30 467 7 14쪽
28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8) 14.04.30 341 7 24쪽
27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7) 14.04.30 418 7 12쪽
26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6) 14.04.30 308 6 11쪽
25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5) 14.04.30 407 6 15쪽
24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4) 14.04.30 448 6 11쪽
23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3) 14.04.30 374 5 16쪽
22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2) 14.04.29 402 7 15쪽
21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1) +1 14.04.29 538 7 20쪽
20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4) 14.04.29 570 4 18쪽
19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3) 14.04.29 550 6 22쪽
18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2) 14.04.29 406 9 15쪽
17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1) 14.04.29 535 8 13쪽
16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7) 14.04.29 370 9 16쪽
15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6) 14.04.29 513 7 14쪽
14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5) 14.04.29 345 6 25쪽
13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4) 14.04.29 515 8 18쪽
12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3) 14.04.29 559 9 17쪽
11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2) 14.04.29 569 12 10쪽
10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1) +2 14.04.29 690 12 10쪽
9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9) 14.04.29 495 11 8쪽
8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8) 14.04.29 606 13 9쪽
7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7) 14.04.29 653 13 9쪽
6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2 14.04.29 547 13 8쪽
5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5) 14.04.29 682 11 8쪽
4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4) 14.04.29 598 11 8쪽
3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3) 14.04.29 848 14 10쪽
2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2) 14.04.29 1,246 14 8쪽
1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1) 14.04.29 2,223 2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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