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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2.12.15 05:44
최근연재일 :
2014.05.02 02:28
연재수 :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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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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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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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3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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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DUMMY

마충천은 제자 백여 명을 이끌고 홍강(紅康) 항으로 달려갔다. 해영이 근거지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그곳을 거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어민들은 한 번도 해적의 영역을 침범한 적이 없는 신도문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으나,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가워했다. 신도문이 마침내 해적의 무자비한 수탈로부터 백성을 구해주기로 마음먹은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마충천도 낯짝이 있는지라 어민들의 환영을 받자 심히 민망했다. 그러나 신도문이 폭열단과 순조롭게 손을 잡으면 해적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어민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그들의 호의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신이 난 어민들이 묻지 않은 것까지 시시콜콜 떠들어 대는 통에 시간은 오히려 더 걸렸지만, 덕분에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어민들은 해영이 워낙 신출귀몰한 자라서 언제 상륙했는지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지금은 부두가 한창 분주할 때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섬으로 돌아갔다면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띄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말은 해영과 서희가 아직 육지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 자가 평소 수하를 거느리지 않고 혼자 다니곤 합니까?"


마충천이 일부러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을 골라 정중히 예를 갖추며 물었다. 노인은 황송해 몸 둘 바를 모르며 이미 굽은 허리를 더욱 더 굽히려 안간힘을 썼다.


"웬 걸요. 남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여기면서 지 몸 하나는 끔찍하게 아끼는 놈입지요. 몰래 나다녀야 할 때도 호위 무사 하나는 항상 달고 다닌답니다. 장로님께서도 들어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왜, 범계(範鷄)라고요, 머리는 좀 모자라지만 그 자가 노를 저으면 돛을 펼 필요도 없다는 장사지요."


마충천은 간담이 서늘했다. 둘째 사형 옥상정(屋常正)과 넷째 사형 김태용(金泰庸)이 암행 중에 범계와 시비가 붙었다가 그의 철장에 혼줄이 나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온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어디 가서 말도 꺼내지 못할, 신도문 역사상 최악의 수치였다. 신도문은 보복은 고사하고 말이 새나갈까 봐 쉬쉬하고 있었다.

사실 설욕할 방법도 없었다. 마충천은 여섯 장로 중 검술이 두 번째로 뛰어난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옥상정이었다. 거기에 김태용이 힘을 더했는데도 상대가 되지 못했으니 신도문에 범계를 꺾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머릿수도 신도문이 해적에 미치지 못하니, 신도문으로서는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폭열단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범계가 객점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만일 장석이 끝내 분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해영을 쳤다면 마충천도 마지 못해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둘 다 지금쯤 산 사람이 아닐 터였다.


- ‘범계의 용력이 항우에 비견된다 한들 그도 역시 사람이다. 해영과 단둘이 있다면 우리 백 명을 상대하기에는 중과부적일 게야.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마충천은 그렇게 마음을 다 잡으며 다시머리를 굴렸다.


- ‘장석, 그 돌대가리가 잔뜩 열이 올라 있으니 그가 먼저 해영을 친다면 이겨도 좋고 져도 우리에게 나쁠 게 없다. 화적과 해적이 원수가 되어 서로 물어뜯게 만든다면 이게 바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고(以夷制夷)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以毒制毒)는 계책이 아니겠는가? 그 와중에 서희 그년도 죽어 버리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해영이나 장석이나 모두 그년의 미색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기대할 바는 못 된다. 내가 틈을 노려 그 목을 벨 수밖에.’


마충천은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할 속셈으로 제자 열 명만 거느리고 떠나며 나머지는 항구에 남겨 두었다. 해영이 서희를 데리고 섬으로 돌아가 버리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 길로 객점으로 돌아가 추적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한달음에 객점에 도달한 마충천은 어안이 벙벙했다. 객점 밖 양지 바른 곳에 아직 흙도 마르지 않은 무덤이 둘이나 생겼고, 짧아진 해가 물들인 노을만큼이나 얼굴을 벌겋게 달군 술취한 상인 몇이 그 앞에서 곡을 하고 있었다.

마충천이 기이하게 여겨 잠시 지켜보는데, 왁자지껄한 객점에서 상인 몇 명이 나와 곡을 하던 자들에게 어서 들어가 보라고 손짓을 했다. 곡을 하던 자들은 술판으로 돌아가고, 차례가 돌아온 자들이 임무를 이어받아 형식적으로 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충천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폭열단이 시신을 수습하러 올 때를 대비해 어떻게든 화를 피해 보려고 머리를 짜낸 게 분명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객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들 보시게. 이후 별다른 일 없었는가?"


부모형제를 잊게 만든다는 낮술도 그 목소리를 무시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취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충천을 향했다. 상인들은 마충천을 보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마충천이야말로 모든 일의 원흉이었지만 상인들이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사실 꼭 내막을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화적과 손을 잡고 꽃 같은 소녀를 악당에게 진상하려던 자 아닌가? 마충천, 장석, 해영, 그리고 상담 중에서 한 사람을 믿고 따라야 한다면 그들은 상담을 선택해야 했다. 불쌍한 소녀가 노예로 팔려갔다는 사실에 분개한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악당 중에서만 지도자를 고르는 것은 인류의 가장 오랜 습성 중 하나다. 어리석은 아이들은 어쩌다 한 번 매를 든 자애로운 스승을 증오하면서, 언제나 자기들을 괴롭히던 깡패 녀석이 가끔 하나씩 던져주는 사탕에 감동하여 충성을 맹세한다. 원수 같은 화적의 장례까지 치러주고 그 앞에서 곡이나 하고 앉아 있는 자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잠시나마 믿었던 상담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자 엄청난 배신감에 몸서리쳤던 그들에게 마충천은 그야말로 유일한 희망이자 등불이었다.

상담에 관한 증언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졌다. 마충천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워 인상을 찌푸리자, 그게 상담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고 착각하고는 더욱 신이 나서 상담의 악행을 꾸며내는 자들도 있었다. 취한 정신은 다른 취한 정신이 지어내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 버리고는 거기에 다시 살을 붙였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에는 해영의 거처를 물으러 왔던 상담이 어느새 그와 한패가 되어 있었다.

마충천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상담이라면 안강의 난 때 마그니토를 빠져나와 지난해부터 오한에 머물고 있다는 객장이 아닌가? 뛰어난 용병술로 남방 원주민 부족들을 여러 차례 정벌한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무예도 역적 임초서에 비견될 만 하다던데, 이거 정말 큰일이구나! 더구나 그 자가 해영과 한패라고? 조정의 신임을 얻고 있는 그가 해영과 한패라면 관군이 해적과 손을 잡았다는 말이지 않은가! 벌써 우리 신도문이 화적과 화의를 맺은 걸 알고 우리를 견제하려는 게 틀림 없다!’


마충천은 이제 서희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해영과 상담, 그리고 범계를 모두 제거하는 게 상책이었다. 더 이상 서희를 독단으로 살려 둔 마충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도문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는 똑똑한 제자 하나를 골라 빠른 말에 태워 신도문에 이 사태를 알리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아홉을 데리고 상담의 뒤를 밟았다. 지리에 밝은 상인들은 상담이 떠난 방향과 자기들이 준 정보 등을 종합해 그의 현재 위치까지 산출하는 등,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마충천이 몇 마디 치하하고 말에 오르자 취객들은 성은이라도 입은 듯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마충천은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어 취객들에게 이런 어리석은 요식 행위는 집어치우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장석이라면 이 괴상한 장례식을 보고 잊었던 일까지 기억해 내 한쪽 눈을 잃은 책임까지 그들에게 묻고도 남을 위인이었지만, 괜히 그의 일을 방해했다가 반감을 사서 좋을 게 없다는 계산이었다. 지금은 그런 일에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는 첫 번째 목표물, 상담밖에 보이지 않았다.


- ‘분명 혼자라 했겠다? 제아무리 용장이라 한들 한꺼번에 우리 신도문의 정예 아홉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한 번 보자!’


마충천과 그의 제자 아홉이 바람처럼 노을 속으로 사라져갔다.


* * *


장석은 산채의 전 병력을 소집은 해놓았으나 해영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참모라고 해 봤자 간신히 언문이나 읽고 쓸 줄 아는 게 전부인 자들뿐이었다. 자랑할 건 머릿수밖에 없는 화적이다 보니, 생각해 낼 수 있는 방책이라야 뿔뿔이 흩어져 무작정 절세미녀와 사내 하나를 찾는 것뿐이었다. 가뜩이나 오합지졸이 병력을 나누기까지 하면 찾는다 한들 또 다른 낭패겠지만,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사내 하나 계집 하나를 어쩌지 못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장석 자신은 정예 백 여기를 이끌고 가장 유력한 후보지를 하나씩 급습하기로 결정했다. 눈을 하나 잃었다는 건 결코 가벼운 부상이 아니지만, 그만큼 서희에 대한 집착이 더욱 커져서 견뎌낼 수 있었다. 크나큰 대가를 지불했으니 반드시 되찾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장석은 그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눈을 하나 잃고도 대군을 이끌고 와 그녀를 포용하는 늠름한 모습에 반해버릴 서희를 생각하니, 고통을 참고 말을 달리면서도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둔한 장석의 머리로도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홍강항이었다. 그러나 해적의 영역을 침범하면서까지 어민들을 닦달할 필요는 없었다. 믿음직한 우군, 신도문의 제자들이 벌써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장석은 크게 고무되어 신도문 제자들을 치하하고 말머리를 객점으로 돌렸다. 가봐야 뚜렷한 수도 없겠지만 달리 가볼 곳도 없었다. 그리고 그도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충서의 방문으로 완전히 마음을 놓아 버린 상인들은 이제 곡도 하지 않았다. 벌써 한 달 치 매상을 가뿐히 올린 객점 여주인만 신이 나도록 술판이 점점 더 거하게 무르익고 있었다. 장석이 보니 객점 앞 양지바른 곳에 묘가 하나 있는데, 그 앞에 비뚤비뚤한 글씨로 “暴熱單志士二人之墓(폭열단 지사 2인의 묘)”라고 새긴 나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언문만 간신히 깨친 장석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래도 참모랍시고 부하 하나가 나서 그 뜻을 풀이해 주었다. 장석은 실소를 흘리며 객점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해영이 어디로 갔는지 고하면 죄를 용서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은 목숨인 줄 알아라!"


장석의 일갈에도 완전히 술을 깬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날 하루만도 벌써 몇 번이나 죽음의 공포에 떨었고, 그때마다 다 잘 넘어갔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술은 사람을 낙관적으로 만든다.

그나마 술이 깬 자들이 폭열단원을 장사 지낸 공을 은근히 드러내며 장석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장석도 그들이 해영의 행방을 알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특하면 기특했지 죄는 하나도 짓지 않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심사가 뒤틀렸다. 자기가 호통을 쳤는데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비틀대며 다가와 공치사나 하려 들다니, 이놈들이 정신이 나갔구나 싶었다. 대낮부터 시작해 해가 서산을 완전히 넘어가도록 술판이 이어졌으니 다들 정신이 나가도 몇 번은 나가야 정상이지만, 폭열단 부두목 장석 앞에서 할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해영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지?"

"아이고, 저희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요? 마 장로님이 그 해적 놈과 상담이라는 악당을 쫓아가셨으니 여기서 술이나 한잔하시며 기다리시면 곧 기별이 있을 겝니다. 어서 상석에 오르시지요."


장석의 심기를 더욱 건드리는 말이었다. 그가 싸늘하게 웃으며 실로 어처구니없는 트집을 잡았다.


"그러니까 네놈들은 해영의 행방도 모르면서 내 수염의 비밀을 알고는 배를 잡고 웃으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는 말이구나."


그 말을 듣자 반 이상이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장석이 한 마디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부하들에게 명했다.


"여기 이놈들을 싸그리 쓸어 버리고 값나가는 것들을 모두 모아라! 내 혼례의 예물로 삼아 그 죄를 덜어 줄 것이다!"


장석의 명을 듣고도 아직 술이 다 깨지 않은 자들이 태반이었다. 저항도 없고 비명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과음으로 괴로워하는 자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살육이 자행되었다. 따를 자를 잘못 선택한 죄가 자손대대로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중죄라 할 때, 희생자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상인들이 피땀 흘려 모은 돈은 여주인의 손을 잠시 거쳐, 아직 식도 올리지 않은 장석의 결혼 축하 예물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장사를 말아먹고 기록적인 매상까지 모두 빼앗긴 젊은 과부는 그래도 목숨을 건졌다는 데 감사해야 했다. 죄 없는 자들에게 큰 벌을 내린 장석은, 아까 비문의 뜻을 풀이한 부하에게 여주인을 상으로 주는 너그러움을 과시하며 부하들의 인심을 얻었다.


* * *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난 이븐은 반사적으로 불이 살아있는지부터 살폈다. 모닥불은 이미 숯이 되어 은은한 열기만이 남아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으니 상관없겠거니 생각하다가 문득 실소가 터져 나왔다.


- ‘노예 하나 부리기 더럽게 힘들다 진짜.’


이븐은 그제서야 서희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서희가 깔고 누웠던 털방석이 이븐이 등을 기댄 바위에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옷도 자기가 덮고 있었다.


- ‘나도 다 됐구나. 기척 하나 느끼지 못하다니. 그나저나 이 녀석이 어디로……’


"이븐! 네 이놈!"


이븐이 서희 걱정을 다 맺기도 전에 쩌렁쩌렁한 호통이 울렸다. 이븐은 놀라기는커녕 호통의 주인공을 크게 반겼다.


"이야! 임 영감님, 무사하셨네요. 그때 그 꼬마도 있구나. 아니, 이젠 꼬마라고 부를 수도 없겠는걸?"


2년 전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그 붉은 눈을 잊을 리가 없었다.


"임 영감이라 부르지 마라. 그 이름 버린 지 오래다. 나는 오한의 객장 상담(嘗膽)이다."


이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름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바꾸면 어쩝니까? 그러니까 정체가 드러나지요."


상담이란 이름은 옛말 “와신상담(臥薪嘗膽)”에서 따 온 것으로, 역적으로 몰려 핍박받는 처지를 끊임없이 상기하기 위함이었다. 세간에는 그 유래를 아는 자가 드물지만, 온갖 인재가 가득한 조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임초서도 그걸 모를 리 없었으나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그 이름을 고집했다. 사실 이름이야 어쨌건 그만한 송곳이라면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임초서가 이븐의 비아냥을 무시하고 다그쳤다.


"공주 마마는 어디 계시느냐?"

"뭐라고요? 아니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쩝니까?"


임초서는 이븐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이 사기꾼 말은 곧이곧대로 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재차 다그쳤다.


"네놈이 외람되게도 마마를 노예로 사들여 달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왔다. 발뺌할 생각일랑 말아라. 게다가, 뭐? 마마께서 하사하신 이름으로 해적질을 해? 내 오늘 네 목을 베지 못하면 역적의 오명을 달게 받을 것이다!"


임초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뜻 검을 뽑지 못했다. 화란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븐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한 손으로 임초서의 등 뒤를 가리켰다. 임초서와 가란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났느냐? 네가 불을 꺼뜨리는 바람에 생선은 회로 먹게 생겼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공주님."


서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비아냥치고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구나. 이름에 집착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원한다면 노예라고 불러도 좋다. 어리석은 것."


사건 하나 터질 때마다 이름을 바꾸는 이븐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가 뭔가 항변하려 하는데 서희가 입을 막았다.


"손님이 계신 줄 알았으면 조금 넉넉히 잡아올 걸 그랬습니다. 그래도 네 사람 요기할 정도는 될 듯하니 함께 앉으시지요."


임초서는 서희를 보고는 다리가 풀려 휘청대며 한 걸음 물러섰다. 상인들이 말한 선녀가 화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초서의 말만 듣고 이븐과 화란이 함께 있을 거라 의심치 않았던 가란자도 자신의 붉은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화란이나 묘향보다도 아름다운 미녀가 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놀라움을 드러낸 사람은 이븐이었다.


"뭐야! 너 존댓말 할 줄 알잖아!"

"그럼 어르신께 반말을 하라는 거냐?"


서희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고는 임초서에게 돌아섰다.


"어르신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제 주인이 워낙 예와 도를 모르는 자라 저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검술도 어디 가서 부족하다 느껴본 적 없는 이븐이지만, 언제나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검이 아니라 화려한 언변이었다. 평생 말로 남에게 밀려 본 적이 없었던 이븐은 이 즐거운 도발에 흠뻑 빠져 임초서와 화란의 일은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나는? 나도 너보다 어르신인데 왜 나한테만 반말하는데?"


서희가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려는 축생(畜生)에게 어찌 예를 갖추겠느냐?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받아들여라."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소녀가 반말을 한다고 불쾌하게 여길 이븐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 아이가 너무나 귀여워 그저 조금 더 놀고 싶을 뿐,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임초서도 맥이 탁 풀려버린 데다가, 이븐이 하는 짓은 아무리 이상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괴이한 대화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뭐야! 그러기 없어! 나는 네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네가 자결하지 못하게 하려고 부득이하게 노예로 삼은 거잖아! 빨리 나한테도 잘해줘!"


서희는 이븐이 거의 어리광을 부리자 한(寒) 데 자서 살짝 정신이 나간 줄 알고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거 참. 사내대장부가 그깟 일로 공치사는. 그래서 지금 은혜를 갚으려는 것 아니냐?"


이븐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희가 임초서의 호통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자신은 오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지만, 그를 모르는 서희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자들이 나타나 자기를 베려 하자 중재하러 나선 것이었다. 이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 또는 포근함을 느꼈다. 그리고 곧이어 냉정을 되찾았다.


"어림없는 소리 마라. 나는 결코 네가 그 은혜를 갚아 버리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네 말대로 되나 보자. 얼른 갚아 버리고 떠날 테니까."


이븐은 서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임초서에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공주님의 행방은 저도 모릅니다. 공주님께서 하사하신 이름으로 해적질한 적도 없고요. 탓하시려거든 해적의 이름을 하사하신 공주님을 탓하십시오. 뭐, 군주는 무치(無恥)라 하였으니 그럴 수도 없겠지만."


이미 납치 혐의가 벗겨진 마당에 해적 혐의까지 사라져 버리니 임초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힘없이 숯이 되어 버린 모닥불 앞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븐은 그런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기어이 속을 한 번 더 긁었다.


"역적의 오명을 달게 받으시렵니까?"


증거도 없이 사람을 베겠다고 나선 임초서가 과오를 인정하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자, 이븐이 서희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쳇."


서희도 은혜 갚을 기회를 날려 버려 아쉽다는 듯 나지막이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이븐이 묻자 임초서가 한숨을 쉬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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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2) +2 14.05.02 448 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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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2) 14.05.01 434 4 15쪽
56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1) 14.05.01 433 7 11쪽
55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7) 14.05.01 343 6 25쪽
54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6) 14.05.01 264 6 19쪽
53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5) 14.05.01 450 7 18쪽
52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4) 14.04.30 363 6 17쪽
51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3) 14.04.30 461 4 18쪽
50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2) 14.04.30 307 6 18쪽
49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1) 14.04.30 665 3 17쪽
48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6) 14.04.30 332 5 19쪽
47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14.04.30 504 5 20쪽
46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14.04.30 436 4 19쪽
45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3) 14.04.30 424 5 15쪽
44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2) 14.04.30 263 7 12쪽
43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1) 14.04.30 472 7 24쪽
42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2) 14.04.30 394 8 14쪽
41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1) 14.04.30 246 6 11쪽
40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5) 14.04.30 422 5 24쪽
39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4) 14.04.30 366 6 14쪽
38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3) 14.04.30 307 6 16쪽
37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2) 14.04.30 320 6 23쪽
»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14.04.30 305 4 21쪽
35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4) 14.04.30 356 6 7쪽
34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3) 14.04.30 341 4 14쪽
33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2) 14.04.30 455 5 21쪽
32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1) 14.04.30 469 7 13쪽
31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2) 14.04.30 432 5 15쪽
30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1) 14.04.30 307 9 21쪽
29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9) 14.04.30 467 7 14쪽
28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8) 14.04.30 341 7 24쪽
27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7) 14.04.30 418 7 12쪽
26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6) 14.04.30 308 6 11쪽
25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5) 14.04.30 407 6 15쪽
24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4) 14.04.30 448 6 11쪽
23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3) 14.04.30 374 5 16쪽
22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2) 14.04.29 402 7 15쪽
21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1) +1 14.04.29 538 7 20쪽
20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4) 14.04.29 570 4 18쪽
19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3) 14.04.29 550 6 22쪽
18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2) 14.04.29 406 9 15쪽
17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1) 14.04.29 535 8 13쪽
16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7) 14.04.29 370 9 16쪽
15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6) 14.04.29 513 7 14쪽
14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5) 14.04.29 345 6 25쪽
13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4) 14.04.29 515 8 18쪽
12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3) 14.04.29 559 9 17쪽
11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2) 14.04.29 569 12 10쪽
10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1) +2 14.04.29 690 12 10쪽
9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9) 14.04.29 495 11 8쪽
8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8) 14.04.29 606 13 9쪽
7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7) 14.04.29 653 13 9쪽
6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2 14.04.29 547 13 8쪽
5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5) 14.04.29 682 11 8쪽
4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4) 14.04.29 598 11 8쪽
3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3) 14.04.29 849 14 10쪽
2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2) 14.04.29 1,246 14 8쪽
1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1) 14.04.29 2,223 2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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