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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나르시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2.12.15 05:44
최근연재일 :
2014.05.02 02:28
연재수 :
75 회
조회수 :
36,974
추천수 :
522
글자수 :
570,796

작성
14.05.01 19:09
조회
506
추천
4
글자
20쪽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6)

DUMMY

* * *


한 번 잠든 이븐은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서희는 먹지도 않고 이틀 동안 계속 잠만 자는 이븐이 걱정스러웠지만 달게 자는 사람을 억지로 깨우기도 꺼림칙해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서희가 이틀 만에 방에서 나오자 범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반가워했다.


“아씨! 이제 나오십니까? 배고프시죠? 여기 이것 좀 드셔요.”


서희는 범계에게 손목이 잡혀 옆방으로 끌려가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따뜻한 음식이 정성스럽게 준비되어 있었다.


“금방 준비한 것 같구나.”

“네, 그럼요!”


서희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범계를 바라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서하손이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몇 상 째인지 모릅니다. 아가씨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며 음식이 식을 때쯤 되면 새 상을 차려내라고 어찌나 야단을 피우던지요.”

“저런. 걱정을 끼쳤구나. 서 장로께도 면목이 없네요.”

“아닙니다. 이렇게 일어나셨으니 저도 한시름 덜었습니다. 그나저나 이븐 선생은 아직 주무시나 봅니다.”

“곧 일어나겠지요. 식사 안 하셨으면 함께 드시지요. 범계도 같이 들어라. 혼자 먹기엔 너무 많구나.”


서하손과 범계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감히 겸상을 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였다. 서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서희에요.”


서하손이 난처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제가 점심을 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점심을 먹을 시간에서 많이 지나지는 않았으나 서희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범계는? 너도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니?”


범계는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나이 어린 소녀를 어머니처럼 여기며 곁에서 모셨으나, 지난 이틀간 서하손과 임초서가 수시로 들러 걱정스럽게 서희의 안부를 묻고, 서희의 식사를 준비하는 자들이 몇 번이나 상을 다시 차리면서도 정성에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자 그도 생각이 바뀌었다. 해영 따위를 주인으로 모실 때도 함부로 겸상을 하지 못한 그였다. 그동안 선녀 같은 새 주인께 무례가 지나쳤다는 생각에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희가 묻는 말에 거짓을 고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점심을 배불리 먹었으나 지금 배가 고프지 않을 뿐 결코 부르다고도 할 수 없었다.

서희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범계가 다급히 외쳤다.


“아, 아씨! 아닙니다! 배고픕니다. 함께 드시지요!”

“그래. 네가 먹어라. 나는 입맛이 없구나. 내 주인이 일어나면 함께 들겠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올 테니 따르지 말거라. 아저씨도요.”


서하손은 서희가 일부러 이븐을 주인이라 칭하고 자신을 어릴 때 습관대로 아저씨라 부르는 것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나가서 사람들 앞에서 엉뚱한 행동을 할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서희의 태도가 단호하여 감히 뒤를 따르지 못했다. 어느새 그 또한 범계 못지않게 서희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이븐은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는 자기가 왜 서희의 침상에서 눈을 뜬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 잤으면 어서 밥 먹어라. 먼 길 갈 테니 든든히 먹어 두는 게 좋을 게다.”


이븐이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서희는 이미 행장을 꾸리고 있었다.


“응? 어디 가는데?”

“어디든. 나 여기 살기 싫다.”


이븐은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둘러보니 범계가 죄지은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븐이 눈으로 이유를 묻는데 범계가 시선을 피했다.


- ‘자식이, 귀찮게 하고 있어. 내가 네 입 하나 못 열 것 같으냐?’


이븐이 쓴웃음을 거두고 범계에게 호통을 쳤다.


“네놈이 감히 주인님께 무례를 범했구나!”


범계는 물론이고 서희까지 깜짝 놀랐다.


“왜, 죄 없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그러는 게냐?”


범계는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이븐의 호통을 듣고야 자기 짐작이 옳았음을 깨닫고 서희 앞에 울며 무릎을 꿇었다.


“아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밥이라는 게 함께 먹어야 한 맛이 더 있는 건데 제가 생각이 짧아 그만……”


서희는 이븐에게 뭐라 한마디 더 하려다가 범계가 이렇게 나오자 어이가 없어 그만 웃고 말았다. 그러나 이븐은 범계를 조금 더 떠보기로 했다.


“아무도 네 주인과 함께 밥을 먹으려 하지 않았단 말이냐? 너도? 네가 먹기 싫으면 나라도 깨웠어야 할 게 아니냐? 여자들이 밥 혼자 먹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서희는 이븐의 의도를 알아채고 애꿎은 범계를 나무라는 이븐에게 화를 내려다가 마지막 말을 듣고 다시 웃어버렸다. 범계는 통곡을 하느라 서희가 웃는 것도 몰랐다.

서희가 고개를 저으며 범계에게 다가갔다.


“너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내 주인이 일어났으니 저녁이나 들자. 함께 먹어야 더 맛있다고 했지?”


범계는 벌떡 일어나 몇 번이나 절을 올리고 주방으로 뛰어갔다. 이븐이 서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대하건 너는 너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잖아.”


서희가 미소를 지웠다.


“그랬지. 범계와 서 장로까지 그럴 줄은 몰랐지만.”

“많이 섭섭하더냐?”

“그다지. 조금 어색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떠나겠다는 거냐?”

“나는 이곳에 남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그리고 너는 나를 떠나지 않겠다 약속했지. 어서 짐을 꾸려라.”


이븐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 밥 좀 먹고.”


서희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븐이 고집을 피울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이븐은 나지막이 콧노래까지 부르는 서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달라진 시선을 저렇게까지 불편해할 아이가 아닌데…… 그날 밤 인간들이 좀 심하게 광분해서 겁을 먹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이유는 아닐 거다. 그렇다면 다음 날 바로 이야기했겠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


이븐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리 지모가 뛰어나다 해도 자는 동안 일어난 일까지는 알 수 없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 ‘아니, 그렇다고 여자한테 왜 화가 났냐고 물어볼 수도 없잖아?’


여자는 자기를 화나게 한 이유보다 남자가 그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에 더 크게 분노하는 성염색체를 갖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가 어설프게 이유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들통이 나는 날에는 옐로스톤의 폭발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반드시 들통난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왜 화가 났는지 도무지 모르겠으니 이유를 말해주면 숙고하여 시정하겠다고 사정해서도 안 된다.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파렴치한 행동인 데다가, 자신의 잘못을 여자에게서 찾으려는 극악무도한 인간으로 낙인 찍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 속으로 던져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기억하기도 싫어하는 더러운 죄악을 억지로 입에 담게 하려는 지상 최대의 폭력이기도 하다.

또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서도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하책 중의 하책이다. ‘네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별 내용도 아닐 테니 그냥 내가 잘못한 걸로 치고 치우자. 그나저나 날씨도 좋은데 우리 뽀뽀나 할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당 부분 그런 의미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가만히 앉아 대륙 전체의 판도를 뒤흔드는 이븐의 지모로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 없이는 살 수 없는 동시에, 그 여자라는 존재의 사고를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성염색체를 가진 비극적인 생물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디 아프냐?”


이븐이 머리를 쥐어뜯고 앉아 있자 서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곁에 앉았다. 꿈속에서 맡던 향기가 훅 끼쳐왔다. 이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꿈이 아니었구나!’


이븐은 그제야 자기가 억지로 서희를 끌어안고 잠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런데 서희가 그래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범인은 이븐도, 범계도, 서하손도 아니다.


- ‘임 영감이 공주 행세하는 김에 확실히 해달라고 부담을 줬을 리도 없고…… 혹시 익시온이 다녀간 건가?’


이븐이 점점 창백해지자 서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너무 잔다 했다. 간단히 미음이나 조금 쒀오면 좋으련만, 범계가 또 상다리 휘어지나 안 휘어지나 내기하고 있나보구나. 여튼 조금만 참아라. 곧 음식이 올 테니 먹고……”

“서희야.”


이븐이 서희의 말을 가로막았다. 서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턱을 약간 앞으로 내밀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를 본 이븐이 용기를 내 물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어진 이유가 궁금하구나. 뭐, 평생 살 건 아니었지만 조금 갑작스러워서 말이지. 내가 자는 동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서희는 잠시 이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븐은 당황스러웠지만 꾹 참고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서희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응? 용서할 수가 없다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


서희는 범계와 서하손이 거리를 두자 왠지 섭섭해져서 혼자 산책을 나갔다.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변하는 건 없다던 이븐의 말을 비로소 실감한 것이다. 한참 홀로 걷다 보니 이븐의 말이 철저히 옳다는 것을 알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희가 ‘예전’이라고 생각한 것은 불과 며칠 동안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에도, 그 이전에도 아무도 서희를 본질 그대로 바라봐 주지 않았다. 그리나 이븐만은 ‘예전’ 그대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어떤 환상을 덧씌우건 그것을 어느 정도 즐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며칠 전에 보았던 광신도들은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서희는 섬 뒤편의 이방인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그들이 조금 더 이성적이었다.

서희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방인보다 광신도가 더 많았던 것이다. 살그머니 돌아서려는데 문득 분위기가 이상했다. 한규의 병사들이 그 마을에 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사건 때문에 달려온 모양이었다.


“누가 무슨 사고를 친 게로구나?”


이븐이 물었다. 서희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해영의 감옥에서 구해준 여인을 기억하느냐?”

“그래.”

“안토니오스 장군의 부하 몇이 그 여인과 함께 살아남았다.”

“그랬지.”

“함께 어려움을 겪었으니 정이 생길 법도 하지.”


이븐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남장을 하는 바람에 함께 감옥에 갇힌 여성이었지만, 설사 곱게 치장했다 해도 해적들이 여장남자인 줄 알고 감옥에 가두었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외모였다. 그녀와 정이 싹텄다는 사내가 가엽게 여겨졌다.

다행히 서희는 제 발끝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븐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여인이 한규 장군이 이끌고 온 병사 셋에게 겁탈을 당했다.”

“뭐라고? 그놈들이 미쳤구나!”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서희는 좋은 쪽으로만 해석했다.


“여인의 정인이 사실을 알고 셋 중 하나를 죽였지. 나머지 둘도 크게 다쳤지만 여인의 정인만큼은 아니다.”


이븐이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쉬었다.


- ‘안 그래도 안토니오스와 한규 사이에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은 둘 다 필요한데 골치 아프게 되었구나.’


서희는 이븐의 한숨도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해석했다.


“임초서 장군이 직접 나섰다. 군율에 따라 살아남은 두 명을 공개 처형하고, 사적으로 복수를 행한 여인의 정인도 참수해버렸지.”


이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임 영감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될 테니까. 그러나……’


서희가 이븐의 불안을 확인해주었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토니오스의 창기병대 말고는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다.”


이븐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서희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지만 이븐으로서는 창기병대가 분노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러나 그로서도 임초서 이상의 해답을 찾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창기병대에게 똑같은 군율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을 한 식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븐의 사고는 벌써 창기병대의 불만을 해소하고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슬픔과 분노를 발견하지 못한 서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너도 똑같구나.”


이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응? 뭐라고?”

“그 이방인 여인과 화란 공주의 차이가 무엇이냐? 해영에게 죽음도 허락하지 않았던 너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까지 끊으려 했던 임초서 장군이 이렇듯 냉정할 수 있는 이유 말이다.”

“그야…… 화란 공주는 나와 인연도 있고……”

“이방인 여인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바로 너희들이다! 인연이 없다 하겠느냐?”

“아니, 그건 그렇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어찌했겠느냐?”


이븐은 머리가 너무 좋아서 탈이다.


- ‘이런 빌어먹을. 상상해버렸다. 사람이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화가 날 수 있구나……’


서희가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너는 나를 왜 구해주었느냐?”


이븐은 하마터면 ‘예뻐서’라고 대답할 뻔했다. 간신히 농담을 삼킨 이븐이 서희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는 너는 나를 왜 구해주었느냐?”

“네가 예뻐서 구해준 건 아니다!”


서희가 막힘없이 대답하자 이븐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너는 예쁘다. 허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 너를 구한 것은 아니다. 물론 내가 너를 아끼는 이유에도 네가 예쁘다는 사실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그러나 나는 너와 화란을 여인으로 본 적이 없다. 뭐, 적어도 아직은.”


서희는 여전히 눈을 흘기고 있었지만 화는 적잖이 풀린 모습이었다. 이븐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너를 여인으로 보았다면 용서하지 않았겠구나? 나 상처받았어.”

“농담할 기분 아니다.”

“그래. 미안하다. 계속 해봐라.”

“사내놈들은 말이다……”


서희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븐은 서희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입술이 다시 열렸다.


“사내놈들은 사실 전부 다 강간범이다.”


이븐은 살짝 맥이 풀렸다. 너무 황당해서 억울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이븐의 반응을 읽은 서희는 약이 바짝 올랐다.


“웃을 일이 아니다! 내가 직접 확인도 했다.”

“뭐라고? 대체 뭘 어떻게 확인했다는 게냐?”

“범계를 시켜서 사람들에게 얼마 전 오한에서도 미모의 소녀 하나가 화적들에게 욕을 당했다고 말하라 했지.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같은 이야기를 하게 했다. 대신 이번에는 피해자가 나이 든 중년 여성이었다고 말하라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이븐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흥분한 서희는 이븐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사내놈들은 미모의 소녀가 욕을 당했다는 이야기에만 분개한다. 힘없는 여인에게 가해진 폭력에 분개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와 그의 사랑하는 이들이 겪을 고통 때문에 분개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 사내놈들은 단지 가해자가 부러워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는 후환이 두려워 꾹 참고 있는데 누가 용기를 내어 좋은 걸 차지해 버리니 그에 분개하는 것이란 말이다! 힘만 있으면, 들키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으면, 언제든지 강간범으로 변할 수 있는 괴물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이븐이 서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꾸할 말을 찾을 수도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지만 그래서만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한참 후 이븐이 넋 나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부분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구나.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괴물 한 마리씩은 키우고 있겠지. 하지만 괴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내들도 어린 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으면 웃으며 일으켜 세워주지 않든?”


이븐은 자기가 하는 말을 들으며 서희를 달래기에는 턱도 없는 논리라고 생각했다. 과연 그랬다.


“그래. 그들의 선한 마음이란 게 겨우 그 정도다.”


그때 문밖에서 범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씨, 주인님의 주인 어른.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둘은 말없이 일어나 옆 방으로 건너갔다. 식사를 하는 내내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계는 원래 식사 중에는 말없이 먹는 데만 전념하기 때문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자 이븐이 서희를 보며 말했다.


“범계에게 상담 장군과 서 장로를 좀 모셔오라 해라. 갈 때 가더라도 이야기는 해 줘야지. 우리가 말없이 가버리면 이 사람들이 많이 곤란해진다.”


서희가 범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계가 자리를 비우자 이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서희야. 섬에는 사내들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아내, 그들의 아이가 있다. 어디 이 섬뿐이더냐? 오한은 물론 대륙 전체가 그러하다. 그래서 이들이 칼을 뽑은 것이다.”

“그런 자들이 어떤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냐? 나는 그와 같은 자들이 만드는 세상에 함께 하고 싶지 않다.”

“그래. 너야 나랑 둘이 장난이나 치며 살면 되지. 그러나 다른 여인들과 아이들에게는 나 같은 주인이 없다.”


서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그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뜻이냐?”

“그럴 리가! 너 하나 지키기도 벅차다.”


서희가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 이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나에 대해 좀 알 때도 됐는데? 내가 왜 쟤들을 지켜 주겠냐? 귀찮게. 나는 저들이 스스로를 지키도록 만들 생각이다.”


서희가 한숨을 쉬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얼마나 걸리는데?”

“글쎄? 아주 오래 걸리지 않을까?”


서희가 이븐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이븐이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여기 붙어 있을 필요는 없어. 내 특기가 또 멀리서 장난치는 거 아니냐?”


서희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언제 떠날 건데?”

“그건 서 장로에게 달렸다.”


서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사실 어디 갈 데가 있긴 한데, 너도 이리저리 다니면서 인간들한테 치이고 싶지는 않지? 그래서……”

“그래서?”


이븐은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 몸을 더듬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서희가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행장에서 서책을 한 권 꺼내왔다.


“찾는 게 이거냐?”

“아이고, 놀래라. 이걸 왜 네가 갖고 있어?”

“아파서. 너 보기보다 무겁더라. 빼내느라 고생 좀 했다.”


이븐은 서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서희가 그 표정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설명해주었다.


“정말 기억 못 하는 거냐? 어디서 품 속에 저런 서책을 넣어 와서는 내 위에 엎어져 잠들었잖아. 아프게. 놔주지도 않고 말이야. 범계 시켜서 떼 내려다가 한 번 봐줬으니까 앞으로 내 말 더 잘 들어야 한다.”


이븐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희를 바라보았다. 아직 그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마음이 포근했다.

서희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대체 무슨 책이냐? 언뜻 보기에는 고대의 마법서 같던데.”


이븐은 서희가 책장을 넘겨보지도 않았다는 걸 알았다. 서희는 보고도 안 본 척할 아이가 아니다. 이븐은 한 손으로 책을 건네며 다른 손으로 서희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책을 받아 들던 서희가 깜짝 놀라며 눈을 흘겼다. 이븐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예쁘기만 했으면 이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이 책을 살펴보는 동안 머리 원래대로 빗겨 놓는 게 모두에게 좋다.”


이븐은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 빗을 찾았다. 서희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자기 행장을 가리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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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6 ze******..
    작성일
    14.05.05 11:15
    No. 1

    이븐의 눈이 휘둥그fp 오타입니다.
    다른편에서도 봤는데 기억아안납니다...ㅜㅜ
    접속사가 잘못 쓰인곳이랑
    이븐의 이름이 이브라고 적힌게 하나있었는데....
    이것참 글읽는데만 집중하다보니 오타를 잊게 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8 시우(時雨)
    작성일
    14.05.06 19:07
    No. 2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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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3) 14.05.01 464 6 24쪽
63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2) 14.05.01 448 5 13쪽
62 [3권-괴물의 심연] 2. 괴물의 심연 (1) 14.05.01 612 7 20쪽
»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6) +2 14.05.01 507 4 20쪽
60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5) 14.05.01 464 8 24쪽
59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4) 14.05.01 503 5 14쪽
58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3) 14.05.01 374 5 17쪽
57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2) 14.05.01 434 4 15쪽
56 [3권-괴물의 심연] 1. 심연의 괴물 (1) 14.05.01 434 7 11쪽
55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7) 14.05.01 343 6 25쪽
54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6) 14.05.01 265 6 19쪽
53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5) 14.05.01 450 7 18쪽
52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4) 14.04.30 365 6 17쪽
51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3) 14.04.30 461 4 18쪽
50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2) 14.04.30 307 6 18쪽
49 [2권-희대의 사기극] 5. 희대의 사기극 (1) 14.04.30 665 3 17쪽
48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6) 14.04.30 332 5 19쪽
47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5) 14.04.30 504 5 20쪽
46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4) 14.04.30 438 4 19쪽
45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3) 14.04.30 426 5 15쪽
44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2) 14.04.30 263 7 12쪽
43 [2권-희대의 사기극] 4. 환상의 조합 (1) 14.04.30 473 7 24쪽
42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2) 14.04.30 394 8 14쪽
41 [2권-희대의 사기극] 3. 신의 검 (1) 14.04.30 246 6 11쪽
40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5) 14.04.30 422 5 24쪽
39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4) 14.04.30 366 6 14쪽
38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3) 14.04.30 309 6 16쪽
37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2) 14.04.30 320 6 23쪽
36 [2권-희대의 사기극] 2. 노예들 (1) 14.04.30 306 4 21쪽
35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4) 14.04.30 356 6 7쪽
34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3) 14.04.30 342 4 14쪽
33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2) 14.04.30 455 5 21쪽
32 [2권-희대의 사기극] 1. 노예문서 (1) 14.04.30 469 7 13쪽
31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2) 14.04.30 435 5 15쪽
30 [1권-안강의 난] 5. 산 물고기 (1) 14.04.30 307 9 21쪽
29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9) 14.04.30 469 7 14쪽
28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8) 14.04.30 341 7 24쪽
27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7) 14.04.30 420 7 12쪽
26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6) 14.04.30 310 6 11쪽
25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5) 14.04.30 407 6 15쪽
24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4) 14.04.30 448 6 11쪽
23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3) 14.04.30 374 5 16쪽
22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2) 14.04.29 403 7 15쪽
21 [1권-안강의 난] 4. 사신과 귀신 (1) +1 14.04.29 538 7 20쪽
20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4) 14.04.29 570 4 18쪽
19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3) 14.04.29 550 6 22쪽
18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2) 14.04.29 406 9 15쪽
17 [1권-안강의 난] 3. 죽은 물고기 (1) 14.04.29 535 8 13쪽
16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7) 14.04.29 370 9 16쪽
15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6) 14.04.29 513 7 14쪽
14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5) 14.04.29 347 6 25쪽
13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4) 14.04.29 518 8 18쪽
12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3) 14.04.29 559 9 17쪽
11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2) 14.04.29 571 12 10쪽
10 [1권-안강의 난] 2. 대륙의 흉성(凶星) (1) +2 14.04.29 691 12 10쪽
9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9) 14.04.29 495 11 8쪽
8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8) 14.04.29 608 13 9쪽
7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7) 14.04.29 653 13 9쪽
6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2 14.04.29 548 13 8쪽
5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5) 14.04.29 682 11 8쪽
4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4) 14.04.29 598 11 8쪽
3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3) 14.04.29 850 14 10쪽
2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2) 14.04.29 1,246 14 8쪽
1 [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1) 14.04.29 2,225 2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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