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안강의 난] 1. 요수 사냥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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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이 열렸다.
병사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파블로가 이끄는 수비대도 흙먼지를 뒤집어 썼을 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연회장 창가에서는 지금 막 들어선 일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국경 수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입장할 정도면 황제의 칙사가 틀림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뒤룩뒤룩 살이 찐 노인이 한 청년의 부축을 받으며 리무진을 간신히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수비대를 제외하면 일행은 단 두 명뿐이었다. 아무리 휘 제국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황제 사절단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되는 규모였다.
모두가 의아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 하이연을 알아봤다.
"아, 저 분은 시인 차르 하이연 님 아닙니까?"
"어머, 그 ‘오르간’의 시인 말씀이신가요?"
귀부인 한 명이 급히 테라스로 나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말을 듣고 하이연을 모르는 사람들까지 우르르 테라스로 몰려나왔다.
"백작 부인이 소문난 예술 애호가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건 거의 일국의 재상에 버금가는 대우군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가장 세력이 약한 제후국으로 꼽히는 노보카잘의 재상 몰리에르 경이었다.
노보카잘은 비옥한 카자흐 초원 남쪽에 자리잡고 있지만, 휘 제국과 유로피아, 그리고 아라비아 연합이 만나는 꼭짓점과도 같은 위치여서 여러모로 곤란을 겪는 나라였다. 지난 백년 간은 이렇다 할 전란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 진영 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할 여지도 없었다. 국토가 언제 전장으로 변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만을 안고 살아야 했다. 휘 제국도 노보카잘을 세 세력의 충돌을 완충하는 비무장 지대로 여기고 있었다.
간신히 나라로서의 구색만 갖추고 있는 약소국 사절단에게는 이번에도 그에 걸맞은 대우가 준비되어 있었다. 재상 몰리에르 경과 수행원 두 명, 그리고 단 한 명의 호위 무사로 구성된 노보카잘 사절단은 말 네 마리가 끄는 아우디를 타고 산길을 올랐다. 엔진룸을 비우고 마부석을 설치한 소형 마차였다. 몰리에르는 한낱 글쟁이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은 섭섭함을 비꼬아 말한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예의 귀부인이 눈치 없이 말을 받았다.
"정말이에요. 백작 부인은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정말 잘 아시는 분이에요, 정말."
몰리에르가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본 몰리에르의 수행원이 용기를 내 모시는 주인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렇지만 예술가에게 저런 안락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이연 시인이 그 ‘오르간’ 이후로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저런 생활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고 해도 칭찬만으로는 살 수 없는 법이거든. 허영에 찬 일부 귀족들이 먹여 살리는 예술가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칭찬을 바치는 게 이 시대의 예술이지."
몰리에르가 반쯤 키득거리며 말했다.
테라스에 서 있던 사람들이 호흡을 삼켰다. 몰리에르의 수행원까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재상의 듬성듬성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마그니토의 황금색 군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가 뭔가 말을 꺼내려는데 몰리에르가 선수를 쳤다.
"그런 점에서 저 하이연 시인은 운이 좋은 사람이지. 백작 부인은 아주 드물게 두 가지 모두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흔해 빠진 허영 덩어리들과는 다르거든. 진짜에게는 진짜를, 싸구려에게는 그에 걸맞는 사두마차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분배하시는 분이니까 말이야."
몰리에르가 말을 마치자 수행원들이 숙연해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몰리에르도 자신이 지나치게 옹졸하게 굴었다는 걸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얼어붙었던 테라스의 공기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너도나도 백작 부인의 심미안과 덕성을 입이 마르게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몰리에르가 누구인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리에르 일행은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황금색 군복을 입은 사내가 급히 뒤를 따랐다. 몰리에르의 호위 무사가 멈칫 돌아서며 그의 진로를 막았다. 군인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검으로 가져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낌새를 챈 수행원 하나가 돌아서며 물었다. 몰리에르도 뒤를 돌아보았다. 군인이 황급히 검에서 손을 뗐다.
"노보카잘의 몰리에르 경이시지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마그니토 영주 친위대장 테오도르 아르강입니다."
몰리에르가 차갑게 웃었다.
"백작 부인을 모욕한 죄를 묻겠다는 건가?"
몰리에르의 시선은 아르강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에 닿아 있었다. 아르강이 겸연쩍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일종의 직업병입니다. 저보다 강한 상대가 진로를 막아서면 그렇게 되지요."
"최전선의 친위대장쯤 되는 사람이 겸손이 지나치군.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걸 보니 참 든든한걸? 휘 제국의 성벽은 여전히 물샐 틈 없다고 주군께 보고하겠네. 기뻐하실 거야. 뭐, 그뿐이겠지만."
몰리에르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벌써 몸을 반쯤 돌렸다. 아르강이 급히 그를 붙잡았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송구스럽기 이를 데 없군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마그니토의 성벽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입니다."
몰리에르가 천천히 돌아서며 주변을 살폈다. 잘못 엮였다가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만한 발언이었다. 아르강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제국을 지키는 건 벽이 아닙니다. 그 벽을 지키는 사람들이지요."
몰리에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든든하다고 하지 않았나."
"저의 충심을 알아주시니 황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지요."
몰리에르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르강을 바라보며 할 말을 찾으려고 애썼다. 대화를 서둘러 끝내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그러나 아르강은 멈추지 않고 민감한 주제로 한 발 더 나갔다.
"그런데, 마그니토와는 이와 잇몸과도 같은 노보카잘의 사절단에게 사두마차를 배정하고 한갓 딴따라들은 수비대까지 붙여서 호위한 것은 백작 부인의 본의가 아닙니다."
몰리에르는 아르강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백작 부인의 사람인지, 그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아르강이 자기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인상만은 지울 수 없었다. 목구멍에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만두게. 신경 안 쓸 테니."
아르강은 몰리에르의 반응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꿋꿋하게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만일 백작 부인이 어떤 의도를 갖고 그렇게 처신했다면 오히려 문제가 덜 심각했을 겁니다. 뭐라고 간언할 말이라도 있었을 테니까요."
"누가 옵니다."
몰리에르의 호위 무사가 미동도 하지 않고 나지막이 경고했다. 아르강은 호위 무사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마차 배정에는 아무 원칙이 없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거지요. 물레방아가 도는데 어떤 칸이 맑은 물을 받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몰리에르 경은 운 나쁘게 허름한 칸에 떨어진 맑은 물이십니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곳의 물레방아는 어떤 물이 맑은지 탁한지도 구별 못 하는 존재입니다."
몰리에르가 아르강을 빤히 쳐다봤다. 아르강은 돌연 호탕하게 웃었다.
"어쨌건 몰리에르 경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물론 노보카잘 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가 힘을 합쳐야 하겠지만요."
"맞아요. 백작님 건강이 회복되신다는 보장도 없는데, 여자 혼자 몸으로 지기에는 짐이 너무 무겁답니다."
몰리에르 일행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작부인이 시종 둘을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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