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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레아

[유럽史] 유럽판 세계 대전, 유럽 7년 전쟁

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완결

쥬레아
작품등록일 :
2021.04.0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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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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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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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재 침공, 민덴 전투(1759년 8월 1일)

DUMMY



1. 서부 전선의 루텐베르크 전투








1.JPG



조른도르프, 호크키르히 전투 등 치루면서, 프로이센 군의 질적 하락은 순식간에 떨어져 갑니다.




그러면서 연합군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 오며, 프로이센을 더욱 옥죄입니다.




한편 프로이센은 무엇보다 가장 싫어 했던 소모전이 돌입합니다.




근데 프로이센 군은 원래 소모전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소모전의 뜻이 다르게,




『 우린 강하니 너희들을 박살내서, 약한 쪽이 먼저 지치면 협상 한다. 』




이런 마음에서 전투를 하는 것이, 승리해서 그 땅을 정복할 마음은 없습니다.




근데 하필 싸우는 얘들이 전 유럽에서 한 덩치 하는 형님들이시고, 또 너무 많이 덤비니...




거꾸로 프로이센이 소모전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먼저 들어오는 놈이 있으면, 걔를 쥐어패서, 어리버리 할 때 협상해서 전쟁에 빠지는 모양세를 바랜 것이죠.




하지만 정작 현실은 때린 놈도 맞아보니 많이 아픈 겁니다...;;




한 동안 동부 전선에만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엔 서부 전선으로 시선을 돌려 보겠습니다.




1758년 9월. 프랑스 군이 로스바흐 전투 이후로 한 동안의 침묵에서 깨어납니다.







2.JPG



프랑스 군은 하노버 근처의 헤센으로 공세를 취합니다.




만약 헤센이 함락 되면 하노버가 공격 당할테니, 당연히 헤센을 구하기 위해서 영국 & 하노버 연합군이 출동합니다.




그리고 1758년 후반기가 되면, 영국 본토에서 일부나마 지원 병력이 오기 시작.




이렇게 프랑스 군 vs 영국 & 하노버 연합군(이하 연합군으로 통칭)과 대결을 벌이는데,




10월 10일에 양 측의 군대가 루텐베르크에서 전투가 발발합니다.





§ == 프랑스 병력 == §



- 병력 : 39,000 명



§================§






§ == 영국 & 하노버 연합군 병력 == §



- 병력 : 14,000 명



§================§







3.JPG



당시 전투 직전에 연합군이 급하게 헤센으로 오는 바람에 대포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이때 시기의 전쟁에서 대포는 반드시 필수였기 때문에, " 과연 대포가 없이 전투가 가능한가? " 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를 피할 수는 없는 요량이니 결국 전투를 임하긴 합니다.




정작 프랑스 군은 적이 대포가 없는 것을 알자, 신나게 대포를 쏴서, 결국 전투는 프랑스 군이 승리합니다.




매번 패전을 했던 프랑스 군은 무려 10개월 만에 따낸 값진(?) 승리였던 것이죠.




이때 전투 교전 비율이 놀랍습니다.







§ == 영국 연합군 병력 == §



- 사상자 : 4,000 명


- 포로 : 800 명



§================§






§ == 프랑스 병력 == §



- 사상자 : 600 명



§================§






너무 할 정도로 교전 비율 차이가 아주 크게 났습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승패를 가른 요소가 바로 포병.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로스바흐의 뼈아픈 패배에서 프랑스 군은 씻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전쟁이라는게 로스바흐 처럼 크게 졌다가, 다시 이기면 사기가 오르기 마련이죠.




사기가 오른 프랑스 군이 이듬 해에 다시 프로이센을 공략하기로 결심합니다.




때마침 프로이센 군도 지금 상태가 제정신이 아니니, 공격하기 딱 좋은 시기였죠.




그렇게 해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 민덴 전투 】 였습니다.









2. 1759년의 유럽. 바람 앞에 등불의 프로이센







사실 민덴 전투로 제가 바로 얘기 했는데,




루텐베르크 전투가 1758년 10월에 벌어진 전투.




그리고 민덴 전투는 1759년 8월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즉 제가 거의 1년을 껑충 뛰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듯 싶습니다.




우선 1758년 ~ 1759년에 민덴 전투가 벌어지기 까지.




프로이센 군은 케이/팔지그 전투 등에서 너무 많이 얻어 맞으며,




더이상 숙련된 병력이 전부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당시 1759년에 대해 많은 역사가들은 『 프로이센 역사상, 가장 큰 시련의 시기 』 라고 평가 받습니다.




그리하여 벌어진 민덴 전투.







4.png

[ 민덴 전투 배치도 ]





이때 민덴 전투는 러시아 군과 공조하며 같이 공세를 하면서,




두 군대가 사방에서 프로이센으로 총 공격을 가하면서 시작된 전투입니다.




프로이센 군도 이제 사정이 위태하니, 영국과 하노버 연합군도 도와주기 위해 병력을 파견.




영국 & 하노버 군을 이끄는 페르디난트와 프로이센 군이 합동으로 민덴에서 전투가 치뤄집니다.




당시 프랑스 군의 자존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이 전까지 프랑스 군이 계속 프로이센 군을 격파해서,




로스바흐 전투 당시의 기억을 잊을 정도로 자존심이 드높았고,




" 이제 서부 전선의 최강자는 프랑스다! " 라고 자부할 정도가 됩니다.




프랑스는 한술 더 떠서, 오스트리아에게 이러한 통보까지 내리는데....




《 우리 프랑스 군은 하노버를 점령한 후, 단독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하겠다. 》




라는 아주 당창 포부를 밝힙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 군의 편지를 받자, 아주 기대했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마리아 테레지아도 계속해서 승전보가 올라오니 당연히 그렇게 믿을 수 밖엔 없었을 겁니다.




아무튼 프로이센은 프랑스 & 러시아 군이 오고 있으니, 가장 중요한 승부처라고 생각한 민덴.




민덴에서 병력을 배치하여 전투가 이루어 집니다.








3. 민덴 전투 1막






당시 민덴 전투에서 놀랍게도 프로이센의 점령지였던 작센.




작센이 이미 대세가 글렀음을 판단하여,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 편에 붙어 같이 싸웁니다?!




작센은 프랑스에게 말하기를....




" 우리가 베를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여, 도와주겠습니다. "



" 우리도 길은 안다. 하지만 우리 편에 붙는다면 받아들이겠다. "




아무튼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작센과 함께 민덴 전투가 벌어집니다.





§ == 프랑스 & 작센 병력 == §



- 병력 : 57,000 명


- 대포 : 162 문



§================§






§ == 프로이센 & 영국 & 하노버 연합군 병력 == §



- 병력 : 42,000 명


- 대포 : 170 문



§================§







5.jpg



프로이센 사정이 안 좋다곤 했지만, 민덴 전투에서의 프로이센 연합군 숫자는 얼추 꽤 나옵니다.




이때 프로이센 연합군에는 영국이 약 1만 이상의 많은 병력을 지원, 또한 기병대도 일부 있었죠.




1759년 8월 1일. 양 쪽의 연합군이 전투가 시작 됩니다.




처음에 프랑스 군이 움직이며 바스타우 강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근데 프랑스 군 앞에는 영국 군이 가로 막고 있었죠.




영국 & 하노버 연합군을 이끄는 페르디난트.




그는 사실 민덴 전투 이전에 굉장히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 우리가 병력도 적고, 상황이 아주 불리하다.... "




그때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페르디난트 편지를 쓰는데,




기록에 의하면 줄 병력은 없어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글을 썼다라고 합니다.




그냥 이런 편지로 퉁치는게 별거 아닐 수 도 있지만... 사실 남 자존심 세워주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통하는 것이니




아주 소용없는 짓은 아니였을 겁니다.









4. 민덴 전투 2막 : 도긴개긴의 연합군들






아무튼 이제 곧 프랑스 군과 교전이 임박해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영국 군은 유럽 대륙으로 거의 처음 싸우죠.






6.jpg

[ 민덴 전투의 영국군 보병. ]





이때 영국 2개 보병 여단이 앞에 있었고, 뒤에는 페르디난트의 근위 연대가 있었습니다.




우선 페르디난트는 영국 2개 보병 여단에게 명령을 내리길...




" Advace on the beat of drum. (북소리 따라 전진하라.) "




그런데.... 그에게 명령 전달이 잘 못 전달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 Advace to the beat of drum. (북소리 나는 곳으로 가라.) "




라고 말이죠... 한마디로 적을 향해 돌격하라는 뜻인 겁니다;;




틀린 명령인줄도 모르는 영국 2개 보병 여단이 단독으로 프랑스 군을 향해 돌격합니다.




반대로 프랑스 군은 병력도 적은 놈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자 의아해 하지만...




아무튼 돌격하러 오니, 프랑스 군은 대포를 쏘며 마구 공격합니다.







7.JPG



뒤에 있던 페르디난트도 갑자기 난대없이 돌격하는 장면을 보니 화들짝 놀랍니다.




" 저렇게 돌격하면 다 죽어! 당장 참모들을 보내서 돌아오도록 해! "




페르디난트의 명령에 참모들이 가지만, 프랑스 군의 포병 사격에 가지도 못하고 사망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자 페르디난트도 판단을 다시 생각합니다.




"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지원해야 겠다. "




라고 해서, 근위 연대를 쫒아 보냅니다.







8.jpg

[ 루이스 조르주 에라스메 드 콩타드 ]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프랑스 지휘관 중에 【 콩다드 후작 】 이 있었는데, 제가 콩다드 후작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영국 2개 보병 연대가 단독으로 앞으로 나서니, 당연히 프랑스 군의 시선이 그 쪽으로 집중 됩니다.




콩타드 후작은 저 모습을 보자, 기병대를 보내서 격파시킬려고 합니다.




참고로 콩타드 후작은 기병대에 대해서 대단히 과신이 있던 지휘관이었죠.




근데 좀 불안한게... 프랑스가 기병만 믿고 날려먹은 전투를 생각해 보면....;;




아무튼 프랑스 기병대의 제 1파가 돌격합니다.




영국 군은 사각형 방진으로 짜고서, 3열로 서서 첫번째 기병대를 막아 냅니다.




이렇게 기병대가 실패하면, 두번째 공격은 보병과 포병으로 공격한다든지.




아니면 보병과 기병으로 보내서 싸워야 할텐데...




콩타드 후작은 제 2파 기병대를 다시 보냅니다.




그리고 아주 의외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두번째 프랑스 기병대의 공격에, 영국군이 흔들리는 것이죠!




거의 붕괴 직전에 다달할 무렵.




아까 페르디난트가 근위 연대를 보냈다고 했었죠.




정말 타이밍 좋게 붕괴 직전에 근위 연대가 도착, 제 2파 프랑스 기병대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죠.




그리고 두 군대는 같이 전진을 시작합니다.







9.jpg

[ 영국 보병 연대에게 돌격했으나 실패한 프랑스 기병대 ]





예상외의 선전에 프랑스 군은 심히 당황하지만, 콩타드 후작은 세번째 기병 돌격을 시도합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실패로 돌아가고, 반대로 이젠 프로이센 연합군이 사기가 오릅니다.




프로이센 연합군은 이 좋은 타이밍을 이용하여, 프랑스 연합군에게 총 공세에 돌입합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프랑스 군이 맞서야 하는게 당연한 그림 같은데...




오히려 반대로 프랑스 군이 후퇴합니다?!




근데 하필 후퇴하는 장소가 프랑스 군에 발목을 잡습니다.




앞서 프랑스 군안 바스타우 강을 건너서 왔었죠.




이때 건너던 다리가 무척이나 좁았습니다.




그래서 질서 있게 후퇴를 해야 하는데, 다리가 좁다 보니...




한꺼번에 병사들이 몰리며 병목 현상이 발생, 여기서 많은 병사들이 압사 합니다.




프랑스 연합군의 황당한 일 말고도, 영국 연합군 쪽에서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습니다.







10.jpg



영국 기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샤크빌 지휘관이 있었는데,




페르디난트가 위험에 빠진 영국 2개 보병 연대를 지원 하라고, 샤크빌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샤크빌은 진군을 하는데, 조금 가다가 갑자기 병사들을 멈춥니다.




그가 왜 멈췄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아무도 모릅니다.




페르디난트는 샤크빌 지휘관이 가다가 멈추니까, 계속 전령으로 " 빨리 가! " 라고 합니다.




하지만 샤크빌은 페르디난트의 명령을 계속 무시합니다.




결국 보다 못한 페르디난트가 샤크빌을 해임시키게 하고, 다음 후임자에게 임무를 넘기라고 합니다.




근데 샤크빌은 지휘권 양도를 거절하며,




" 왜 내가 후임자에게 지휘권을 내놓아야 하는가. 이 기병대의 지휘관은 나다! "




끝까지 지원하러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민덴 전투에서 영국군 기병대는 참가하지 못한 전투로 남습니다.




보통 총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복종을 했다는 것은 거의 총살감이나 다름 없는 행위이었죠.




나중에 샤크빌 지휘관은 군법회의에 회부가 되서, 그때의 판결을 살펴보면...




《 두 번 다시는 왕을 위해서 싸우지 못한다. 》




라고 판결이 납니다.....만?




샤크빌 지휘관이 영국에서 대단히 유력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모양입니다.




뒤에서 로비를 해서 다시 지휘관으로 복직됐다고 하며,




그리고 훗날 샤크빌은 미국 남북 전쟁의 지휘관이 됐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이 지휘권을 잡으면 당연히 전쟁을 잘 할리가 없겠죠?




남북 전쟁에서 아주 대차게 말아먹는 지휘관으로 악명을 남깁니다.







5. 민덴 전투 결과





샤크빌 지휘관이 명령 불복종을 했지만.




어째든 프로이센 & 영국 연합군은 예상치 못한 영국 2개 보병 연대의 활약으로 인해,




프랑스 연합군을 강 건너로 물러나게 만듭니다.




이대로만 간다면 프로이센 연합군이 승리가 자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프로이센 연합군은 후퇴하는 프랑스 연합군에게 대포를 발사하며, 몰아내는데 성공.




결국 프랑스 군은 본토를 향해 제대 단위 구분도 없이, 황급히 도망갑니다.




민덴 전투로 인해서, 프랑스 군은 재기 불능의 피해를 봅니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작센 군도 합류해서 전투에 참가했는데 얘기가 하나도 없었죠?




그냥 간단히 말해서, 프랑스 군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구경하다가 지니까 쓱~ 빠졌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는데...




30년 전쟁 부터 지금까지 작센은 참 한결(?)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드네요.






§ == 프랑스 & 작센 병력 == §



- 부상/전사/실종 : 7,086 명



§================§






§ == 프로이센 & 영국 & 하노버 연합군 병력 == §



- 부상/전사/실종 : 2,762 명



§================§








6. 프랑스. 어째서 무능한 지휘부가 있는가(1)








11.jpg



제가 위에 민덴 전투의 승패를 너무 가볍게(?) 말하는 것 같아서, 다시 상기 시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프랑스 군은 거의 약 50,000 명의 병력으로 싸웠습니다.




이 숫자는 아마 프랑스 군이 다른 전투에 참가했던 숫자를 비교해보면, 나름 많이 준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 군은 그 전까지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사기가 아주 높았죠.




이런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덴 전투에서의 프랑스 군에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럽고, 참혹한 패배를 맛 보았습니다.




제가 유럽 7년 전쟁에 다른 전투들이 많았지만,




굳이 언급한 이유는 【 무능했던 프랑스의 지휘부 】 를 살펴보며, 철저히 고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럽 7년 전쟁 이전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부터 다시 과거로 시선을 돌려보면.




프로이센이라는 나라가 결코 부강하고 큰 나라가 아니였음에도, 대단히 짧은 시간에 큰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프로이센에게 자극을 받은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도 철치부심하여 다양한 개혁으로 많은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12.jpg



이런 두 나라의 특징은, 【 사관학교 제도 】 입니다.




반면에 프랑스는 아직까지 사관학교 제도가 없었고,




모든 지휘권은 귀족 & 부르주아(지휘권을 샀던 자본계층) 에게만 있었습니다.




근데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르주아들이 더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귀족이 장교가 되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이 귀족 가문의 족보를 산다든지. 아니면 판사등 고위 관료가 되는 것 보단.




차라리 지휘권을 돈으로 사는 게, 신분 상승이 그나마 쉬웠던 부분입니다.




쉽게 말해 매관매직이 아주 성행했음을 다시 엿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도 매관매직으로 귀족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적정한 선이 있었습니다.




특히 군 지휘권에서는, 『 대 부대의 총 지휘는 무조건 귀족 』 이 암묵적인 룰이었죠.







8.jpg



그리고 이번 민덴 전투에서의 콩타드 후작.




콩타드 후작도 메종 드 루아(근위 기병) 출신이었죠.




아무튼 세간에는 " 장교 = 귀족 " 이란 생각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에,




새로히 성장한 신분 계층들이 장교로 와르르 쏟아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7. 프랑스. 어째서 무능한 지휘부가 있는가(2)





현재 프랑스는 루이 15세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실질적 권력자는 퐁파두르 부인이었죠.







13.jpg



그리고 퐁파두르 부인이 굉장히 많은 라인 정치를 펼쳤습니다.




많은 주요 지휘관 자리에는 그녀의 낙하산 인사들이 차지합니다.




퐁파두르 부인의 세력들을 보고, 그들 말에 표현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 아첨에는 능했지만, 군사적 능력은 형편없는 자들. 』




이번 민덴 전투의 패장이었던 콩타드 후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콩타드 후작은 20대에는 메종 드 루아 출신으로 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30대가 되면 해외 공관으로 파견 나갔죠.




근데 당시 유럽의 해외 공관을 생각하면....




뭐 나름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매일 파티를 열어서 노는 사람들로 인식했습니다.




뭐 근데 파티라고 해서 띵까띵가 하염없이 놀았던 것은 아니고...




이들이 해당 지역에 인맥을 쌓고 뭔가 꼬득일려면 파티를 열어서 사람도 만나고 친분도 쌓고 해야죠.




해당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을 익해서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좋은 파티(?)도 있습니다만...




굳이 제가 따로 얘기 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죠.




아무튼 콩타드 후작이 오랜 시간 동안 해외 공관 생활을 하다가, 유럽 7년 전쟁이 터지자 군인으로 복귀합니다.







8.jpg



그리고 콩타드 후작은 메종 드 루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항상 이런 관념이 있었습니다.




" 전쟁터에서 기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




그래서 민덴 전투 당시에, 영국 2개 보병 연대가 치고 나가자, 기병 돌격을 했던 그 장면!




바로 이런 장면에서 콩타드 후작은 자신의 신념에 한 점 의심도 않았습니다.




" 저 정도 보병은 충분히 기병으로 쓸어버릴 수 있지! "


(라떼는 마리야~ 저 정도 보병이만 한 방이었으~)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고 민덴 전투에서 프로이센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그들의 보고는 모두 한결 같았습니다.




《 프랑스 군이 보병과 같이 기병을 운용했다면, 전투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




실제로 홀로 돌격해서 고립됐던 영국 2개 보병 여단의 지휘군, 킹슬레이 장군이 본인 일기에 이렇게 씁니다.




《 나는 그때 제발 프랑스 보병이 나타나지 않길 기도했다. 》




콩타드 후작이 기병 1파를 보내서 실패했다면, 다른 전략으로 대응을 했었어야 했는데,




똑같은 전술을 3번 연속 시도하다 보니, 유리했던 전투를 완전히 망가트렸습니다.




반면 페르디난트는 전황을 보자, 본인의 근위 연대 보내어 결정적인 타이밍에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을 봤을 때, 민덴 전투의 패배 요인은 『 무능한 프랑스 지휘부 』 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18세기의 유럽. 승리를 하려면 과거를 개혁하라.





유럽 7년 전쟁(왕위 계승 전쟁)을 연재를 시작하면서 극초기에 사관학교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민덴 전투에서 다시 한번 사관학교 제도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사관학교 제도에 대한 고찰을 해볼려고 합니다.




제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두 나라의 특징이 사관학교 제도라고 했는데.




그럼 왜 사관학교 제도가 왜 중요했을까요?







12.jpg



사관학교가 단순히 교육을 시켜서 우수한 장교를 배출하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죠.




사실 까놓고 말해, 프랑스 군의 중대장, 소대장들을 일일히 다 살펴보면 유능한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군대는 자기가 우수하다고, 잘 굴러가는 개인주의 집단이 결코 아닙니다.




군대는 전체 집단으로써, 소속된 사람들에게 【 신뢰 】 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서로 다른 곳에 살아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다보니.




소속된 사람들이 연결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관학교 제도에서 10개월을 같이 살아 보면?




당연히 쟤는 성적 좋고, 난 나쁘고. 단순히 능력의 비교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대끼고 살다 보니, 쟤는 맥주를 좋아하는데, 나도 좋아해.




그래서 서로 술친구가 되서 사석에서도 하하호호 하면서 절친이 되는 것.




바로 이런 【 유대 관계 】 형성의 기능을 하는 것이 사관학교 제도입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유대 관계를 맺을 만한 공간도 없고,







14.jpg



심지어 귀족이나 부르주아로 형성되다 보니...




" 나 같은 귀족이, 저런 평민 밑에 일 하라고?! "



" 저 놈은 *** 지방이라는 벼락출세 좀 하는 놈들이 사는 곳에서 사네? "




서로 지역 차별. 신분 차별로 막 뒤엉키다보니, 서로 밥도 같이 안 먹고 따로 살며 개인주의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그 사람에게 측면을 맡긴다고, 당연히 마음에 안드는게 문제가 아니라.




" 저 놈이 날 싫어해서 일부러 날 죽일려고 지는 척 하겠지! "




라고 의심하고, 상대방도 당연히 똑같은 의심을 하니 서로 돕질 않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날까요?




" 니가 가면 나도 갈게. 그게 아니면 난 무조건 여기 눌러 앉을거임! "




하면서 서로 눈치 보면서 제대로 이동을 못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음...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콩타드 후작의 기병 돌격이 나름 일리는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콩타드 후작이 메종 드 루아 출신이니...




메종 드 루아는 상위 귀족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나마 자기 말에 믿을 수 있는 군대가 메종 드 루아 기병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3번 연속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다른 부대는 너무 혼합되서 신뢰가 없어서 그렇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네요.




그럼 반대로 프로이센 군대를 살펴봅시다.







15.jpg



프로이센 군대는 초창기에도 말했지만, 구타를 해서 군기를 잡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군대 구타에 대해 옹호한다거나 잘했다고 하는 말은 절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물리적인 방법이라도 써서, 만들려고 했던 것이 【 군인으로서의 동질감 】 입니다.




흔히 이런 말들이 있을 겁니다.




" 군인이라면 이래야지! "



" 전쟁에 참전하는 병사라면 이렇게 해야지! "




마치 【 공유되는 군인다움 】 을 새겨 넣을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 군인이라면 등 돌리고 후퇴하는 것은 절대로 안돼! "



" 비록 후퇴해도, 다시 부대로 복귀해서 싸워야해! "




이런 식으로 그들의 정신을 새겨 넣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프랑스는 이 점을 못했다는 것.




아무튼 프랑스 군이 이런 부분을 못해서 지니까...




어떤 귀족이 이런 말을 합니다.




" 우리도 프로이센 처럼 체벌(이라 쓰고 구타)를 도입하자! "




하지만 당연히 실패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 】 을 봐야 하는데...




프랑스는 있는게 돈이니까, 여기저기 사람 모아서 돈으로 " 잘해봐! 힘내! " 하는데...




세상에 아무리 돈으로 다 된다고는 하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게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가장 쉽게 선택하려고 해서 안되는 것은 가장 망하는 지름길인 것이고,




이건 18세기 프랑스 뿐만 아니라, 지금 현대의 수 많은 나라들과 대한민국도 같은 문제점을 다 있습니다.




민덴 전투는 단순히 프랑스 군의 무능해서 형편없이 졌다는 전투의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때에 보여준 프랑스 군과 당시 정부를 바라봤을 때,




과연 지금 우리도 마냥 비웃을만한 처지인가를 다시끔 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한 전투라고 생각해서 언급했습니다.











8. 민덴 전투 이후의 프랑스 군







민덴 전투가 끝나고....




프랑스 군은 전투 패전에 대한 책임을 위해, 군법회의가 소집됩니다.




하지만 군법회의에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이 귀족이었습니다.




민덴 전투는 거의 쓰러져가는 프로이센에 대해 제대로 한방 때려주면 쓰러질 수준이었는데,




이런 중요한 전투에서 큰 패전을 겪었으니, 당연히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게 마땅했죠.




하지만 군법회의 사람들이 귀족이었기 때문에, 패전했던 많은 주요 지휘관들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고,




특히 콩타드 후작은 총 지휘를 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책임을 물지 않았고 끝나며....




이후에도 소소한 전투가 있긴 하지만, 이 처럼 대규모 전투는 사실상 힘들어지며,




서부 전선에서의 프랑스는 그 힘을 잃어 버립니다.








민덴 전투의 개요. 그리고 어째서 패전했는가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프로이센 입장에선 대단히 다행스럽게도 승리한 전투.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후에 유럽은 어떻게 흘러 갈지 살펴 보겠습니다.





작가의말

본 글은 유럽 7년 전쟁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 저의 견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00% 진실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주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오타 및 문장 흐름이 잘 맞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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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史] 유럽판 세계 대전, 유럽 7년 전쟁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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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희망이 없는 프로이센 21.07.19 34 2 13쪽
51 프리드리히 대왕, 절망을 느끼다. 쿠너스도르프 전투 21.07.18 22 1 30쪽
» 프랑스의 재 침공, 민덴 전투(1759년 8월 1일) 21.07.17 28 2 25쪽
49 프리드리히 대왕의 최악에 위기, 호크키르히 전투 21.07.15 28 2 28쪽
48 프로이센의 사생결단. 조른도르프 전투(完) 21.07.13 24 2 22쪽
47 프로이센의 사생결단. 조른도르프 전투(1) 21.07.10 26 2 16쪽
46 러시아의 진격을 막아라. 조른도프르 전투 개막 21.07.06 24 2 24쪽
45 1758년의 유럽. 앞 날이 캄캄한 프로이센. 21.07.04 37 2 15쪽
44 슐레지엔 리턴매치. 로이텐 전투 21.07.02 28 2 20쪽
43 17년만에 벌어진 슐레지엔 리턴매치. 21.07.01 22 2 19쪽
42 오스트리아의 숙원. 슐레지엔 공세 21.06.30 30 2 18쪽
41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라! 로스바흐 전투(完) 21.06.28 22 2 16쪽
40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라! 로스바흐 전투(2) 21.06.27 24 2 14쪽
39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라! 로스바흐 전투(1) 21.06.26 19 2 20쪽
38 스웨덴의 포메라니아 침공과 베를린 기습 공격 21.06.21 25 1 19쪽
37 反 프로이센 동맹의 공세.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 21.06.16 30 1 10쪽
36 프로이센의 숨통을 조여라. 하스텐벡 전투 21.06.15 30 1 14쪽
35 콜린 전투(2), The Only Easy Day...Was Yesterday. 21.06.14 20 1 13쪽
34 콜린 전투(1), The Only Easy Day...Was Yesterday. 21.06.11 28 1 16쪽
33 노장들의 무덤. 프라하 전투 21.06.02 28 1 22쪽
32 공공의 적, 프로이센의 선택 21.06.01 23 1 15쪽
31 18세기의 군복과 오스트리아 재정 개혁 21.05.31 23 1 20쪽
30 유럽 7년 전쟁의 각 국의 전력(2) 21.05.25 21 1 21쪽
29 유럽 7년 전쟁의 각 국의 전력(1) 21.05.23 25 1 11쪽
28 유럽을 뒤흔든 세 자매의 활약. 유럽 외교 혁명. 21.05.19 24 1 10쪽
27 8년 간의 유럽 상황과 유럽의 외교 관계 21.05.17 24 1 16쪽
26 유럽 7년 전쟁의 시작, 로보지츠 전투(完) 21.05.12 25 1 24쪽
25 유럽 7년 전쟁의 시작, 로보지츠 전투(1) 21.05.11 25 1 16쪽
24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결, 그리고 유럽 7년 전쟁 개전! 21.05.10 23 1 14쪽
23 프로이센 반격의 공세, 케셀스도르프 전투 21.05.09 29 1 10쪽
22 프로이센의 집념과 군기, 조르(수어) 전투 21.05.07 50 1 19쪽
21 무적 프리드리히 2세의 신화 시작,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21.05.03 32 2 20쪽
20 플랑드르 전선의 격돌, 퐁트누아 전투 21.05.02 30 1 13쪽
19 프랑스의 大 오스트리아 침공(2) 21.04.30 28 1 16쪽
18 프랑스의 大 오스트리아 침공 21.04.28 30 2 10쪽
17 국본 군 창설과 데팅겐 전투 21.04.27 37 1 16쪽
16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이탈리아 전선 21.04.26 45 1 9쪽
15 오스트리아 vs 프로이센, 코투지츠(코츠지츠) 전투 21.04.25 71 1 15쪽
14 정글 같은 유럽 외교 21.04.23 106 1 9쪽
13 진격의 프랑스 21.04.22 45 1 13쪽
1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몰비츠 전투 21.04.21 33 1 22쪽
1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제 1차 슐레지엔 전투 21.04.20 32 1 11쪽
10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슐레지엔 침공 21.04.19 45 1 15쪽
9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기와 마리아 테레지아 21.04.16 38 0 14쪽
8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서막 21.04.16 38 1 13쪽
7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막장 가정사 21.04.14 43 1 16쪽
6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유산 21.04.13 45 1 14쪽
5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 프로이센의 개혁(2) 21.04.12 42 1 17쪽
4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 프로이센의 개혁(1) 21.04.11 65 2 13쪽
3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뛰어난 국가 경영 +2 21.04.10 103 3 14쪽
2 강대국 사이에 약소국이 성장하는 방법, 프로이센의 난제. 21.04.09 198 3 8쪽
1 17세기 이후의 유럽과 절대 왕정의 시작 21.04.08 364 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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