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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레아

[유럽史] 유럽판 세계 대전, 유럽 7년 전쟁

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완결

쥬레아
작품등록일 :
2021.04.08 18:44
최근연재일 :
2021.07.2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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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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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집념과 군기, 조르(수어) 전투

DUMMY



지난 편에서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하며 다시 한번 슐레지엔을 사수한 프로이센.



마리아 테레지아는 언제든지 기회가 된다면 슐레지엔을 탈환할 의지가 가득한 상황.



결국 슐레지엔 쟁탈을 두고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의 불씨는 여전히 남게 됩니다.





1. 프리드리히 2세의 오만

1.jpg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천재성에 매우 고취되며 자신감이 매우 상승,




다시 한번 보헤미아를 먹기 위하여 진격을 하게 되죠.




그러나 이 선택의 결과는 프리드리히 2세의 오만이라는 실책을 남게 됩니다.




이상하게 프리드리히 2세는 슐리지엔을 넘어서, 보헤미아까지의 욕심이 줄 곧 내내 보여주는데...




맨날 얻어 터지고 죽을 고생하면서 지는 곳이 보헤미아인데.. 왜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일까요?







21.JPG

[ 좌 : 슐레지엔 - 보헤미아 ]


[ 우 : 슐레지엔 - 보헤미아 - 작센 - 바이에른 ]





우선 지형적으로 【 슐레지엔 - 보헤미아 】 까지 연결되면 영토도 커지는 것은 물론이고,




작센, 바이에른등 독일로 가는 영토가 연결되기 때문이죠.




만약 보헤미아를 안 먹으면, 계속 오스트리아에게 측면이 노출되서 맨날 뚫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작센도 오스트리아 편을 들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보헤미아를 포기하고 슐레지엔만 굳히기로 하는 선택을 했다간?





그러면 【 슐레지엔 - 보헤미아 - 작센 - 바이에른 - 플랑드르 】 로 인해서 프로이센을 포위할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이 영토를 확장하려고 해도 남쪽 길이 막히는 것은 물론, 프로이센에 대한 완벽한 방어 라인이 구축됩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젠 프로이센의 번영을 위해선 보헤미아 점령이 필수불가결이 되고 만 것이죠.




아무튼 이렇게 자신감 있게 보헤미아로 들어간 프리드리히 2세.




보헤미아에 슈타우덴츠 요새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 섣불리 공략 시도를 했다가 아주 대 실패라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슈타우덴츠 요새 공성전의 실패로 프리드리히 2세는...




" 벌판에서 싸우는 것과..... 요새 공략은 또 다르네? "




오늘도 배우시는 참 된 학생 센세, 프리드리히 2세였습니다.







4.JPG



그렇게 다음해 9월에 보헤미아에서 철수, 슐레지엔 국경의 부르케르스도르프에서 프로이센 군이 진을 칩니다.




근데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 오스트리아 군이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졌으니, 당분간 병력 손실로 인해 움직이지 못 할 것이다. "



" 겨울 동안 숙영하며 한 숨 돌릴 수 있겠다. "




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깔아 놓았던 많은 첩보 요원들이 오스트리아로 전령을 보냅니다.




《 지금 프리드리히 2세가 섣부른 공격으로 병력이 줄었다. 》



《 현재 병력은 약 22,000 명으로 파악 된다. 》



《 적은 병력 때문에 프로이센 군이 주저 앉아 쉬고 있다. 》




라고 보고가 옵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카를 알렉산더 공작이 다시 한번 작센 군과 함께 무려 40,000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격 합니다.




결국 1745년 9월 31일 새벽.






5.jpg



-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오스트리아 군 -


- 언덕 아래에 있는 프로이센 군 -






오스트리아 & 작센 연합군이 부르케르스도르프 북쪽의 그라너 코페 언덕에서 자리를 잡아, 프로이센 군에 대한 기습 작전 준비을 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군이 큰 피해를 입어 안 움직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가 1745년 6월에 벌어졌으니, 불과 3개월만에 다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네요.




시간적으로 따져서 생각해보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 부터, 유럽 7년 전쟁 까지.




제가 연재했던 유럽 30년 전쟁편에서는 한번 전투 하고, 그 다음 전투가 벌어지기 까지 1년 이상 넘어가는 일이 많았죠.




그러나 이때부터는 짧으면 한 달, 아니면 몇 달에 한 번 전투가 벌어집니다.







2. 보는 사람이 답답한 기습 작전(1)





다시 시점을 이야기로 돌려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진 이례에 프리드리히 2세는 처음으로 기습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6.jpg



그런데.... 지난 편에서 제가 카를 알렉산더의 문제점을 얘기했죠?




바로 그 문제가 지금도 들어나게 됩니다.




카를 알렉산더께서 예외 없이 하루 반나절을 쉽니다. 그것도 기습 할 준비를 다 해놓고 말이죠!




이때 프로이센 군의 상황을 얘기드리자면,




지금 한창 숙영지 체제로 유지하고 있었기에 각 지역마다 부대를 흩어놓고 쉬고 있었습니다.




전혀 전투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정말 적이 온다고 생각조차 안해서 완전히 방심을 하고 있었죠.




심지어 전술 요충지도 점거하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도 안해서...)







7.jpg



카를 알렉산더는 조용히 접근해서 모든 고지를 점령에 성공한 상태였죠.




그러고선 고지 밑에는 프로이센 군이 훤히 내다보이면서도,




언덕 아래에 있던 프로이센 군은 안개가 자욱해서 그쪽에선 오스트리아 군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렇게 맛갈라게 잘 손질 해놓고 프로이센 군을 덮치면 되는데!




카를 알렉산더께서는,




" 안개가 걷히면 프로이센 군이 우릴 보고 놀라 자빠지겠지? "



" 그러면 도망칠 것이고... 바로 그 타이밍에 공격을 하자! "




라고 판단을 내려 버립니다.





========================================



근데 사실 이 판단은 저의 뇌피셜이 좀 들어갔음을 인지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것도 사실 여러 설이 많은데, 어떤 군사학자가 내린 평에는 평소처럼 빨리 오느라 아군이 지쳐서 좀 쉬고 공격하려 했다등 여러 의견이 있지만




저는 조금은 카를 알렉산더께서 생각이 높은 쪽(???)으로 선회해서 이게 좀 더 맞지 않을까 싶어서 이쪽에 정사를 두고 얘기 드립니다.



==========================================




아무튼 저분이 하필 왜 저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이 프리드리히 2세와의 결정적인 차이인 것 같습니다.




카를 알렉산더는 지금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한번 했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것.




어떻게 보면 프리드리히 2세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게 별 대수롭지 않느냐라고 하실 수 있지만,




이런 반복 실수가 계속 됨에 따라, 사실 이길 전투도 힘들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정말 큰 차이점이 이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3. 보는 사람이 답답한 기습 작전(2)





카를 알렉산더가 속 편히 쉬는 덕분에, 프로이센 군이 드디어 오스트리아 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8.jpg



근데 프리드리히 2세가 전쟁을 통해 아주 훌륭한 습관 이라고 해야 할지 교훈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좋은 것을 깨닫습니다.




『 무조건 새벽 5시 기상! 』




왜냐하면 남보다 빨리, 번개같이 돌격하려고 해서 그렇다고 하네요.




아무튼 프리드리히 2세는 즉각 모든 장군들을 소집하는데,




몰비츠 전투를 교훈 삼아 전투를 치르면 치룰 수록 점점 더 빠른 판단력이 생기며 작전을 지휘합니다.




지난 몰비츠 전투에선 전투 전에 대형 짜다가 한바탕 깨지는 등 실수를 겪었기에...




이번 전투에서 무조건 각 장군마다 공격 포인트를 지정, 진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북치고 피리등 악기들을 불며 흩어진 병력들을 집결시켜, 전장에 안개가 걷히자 마자 프로이센 군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카를 알렉산더 공작께선....




" 이제야 우릴 보고 놀랐네? 곧 도망치겠지~ "




고지 밑에서 프로이센 군이 북치고 피리불며 움직이는 것을 훤~히 보고 있었죠.




근데 과연 카를 알렉산더가 기습 준비 다 해놓고 쉬는데, 다른 장군들이나 참모진들이 그걸 보고 같이 동조해서 구경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9.png



많은 사람들이 카를 알렉산더에게 " 지금 공격! " 이라고 계속 진언했지만, 그냥 무시했던 것이죠.




근데 카를 알렉산더도 혹시나 모를 보험은 들어 놨습니다.




그는 언덕 위에도 많은 포병을 배치시켜 놓고, 만에 하나라도 프로이센 군이 반격을 한다면 언덕 위의 포병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보았던 것이죠.




그러니 안개가 걷히고 적이 반격을 하더라도 포병으로 제압.




뭐 당시 전황에서 보자면 그리 큰 나쁜 선택은 아닐 수는 있습니다.




지금이야 안개 때문에 포병들이 쏘지 못해서 그냥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굳이 적이 다 알아 채고, 안개가 걷히고 포병으로 제압하는 것 보다,




좀 더 수고스럽지만 차라리 기습을 하는게 가장 최선인데 굳이 저런 선택을....




아무튼 카를 알렉산더는 정말 워낙 좋은 지형에 포병들을 깔아 놓아서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엔 없었지만...




전쟁사의 중요한 철칙,




『 항상 자기 기준에서 남을 판단하지 마라 』




좋은 위치, 좋은 상황 등등....




『 이 정도로 완벽하면 적이 물러 나겠지... 그때 공격하자! 』




바로 이 생각 때문에 너무나 많은 전투에서 이길 뻔한 상황을 맨날 지거나 무승부로 끝내버리는 아주 나쁜 생각.




동서양. 중세, 근대, 현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모두가 항상 같은 생각 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카를 알렉산더도 예외 없었습니다.




심지어 일부 경기병들은 벌써 이긴 줄 알고, 프로이센 숙영지로 처 들어가서 약탈도 해버립니다.






4. 조르 전투 1막 : 치열한 언덕 포대 쟁탈전





§ == 오스트리아 병력(+작센) == §



- 약 39,000 ~ 40,000 명



§================§




§ == 프로이센 병력 == §



- 약 20,000 ~ 22,000 명



§================§







10.jpg



카를 알렉산더가 계속 전황을 지켜보니, 프로이센이 동요하긴 했지만 결코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이자




전장에 안개가 조금 걷히자, 포병들에게 사격 개시를 명령을 내려 공격을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 포병들에게 공격을 받은 프리드리히 2세는 휘하 경기병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 기병대가 언덕을 오르지 말고, 언덕 측면으로 돌아가서 대기하라. "



(어차피 언덕 올라가서 포대를 점령하는 것은 보병이기 때문)




이런 명령을 내리고 난 다음에, 보병 1개 연대를 오스트리아 포병이 있는 언덕으로 보냅니다.




첫번째 언덕으로 보냈던 프로이센 보병 연대가 언덕의 북쪽으로 가서 진영을 갖춥니다.







11.jpg



그러면서, 그 유명한 안할트 데사우 공의 레오폴트 1세가 1개 연대를 데리고 언덕 정면으로 올라갑니다.




레오폴트 1세가 언덕 정면으로 올라서 돌파를 시도하자, 포병을 지키는 오스트리아 보병과 매우 격렬한 싸움을 합니다.




결국 지형적으로 유리했던 오스트리아 보병에게 밀려, 레오폴트 1세 군대가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판단을 내립니다.




" 때론 정교한 작전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냥 밀어 붙여야 할 때도 있다! "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비대까지 언덕 앞 쪽으로 전부 투입 시켜, 계속 오스트리아 군을 압박시킵니다.




이렇게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자, 드디어 각 군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었는가에 대한 질적인 문제가 두드러 집니다.







12.png



오스트리아 군의 한계, 그리고 프로이군의 한계의 차이가 있던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이 생각한 한계는




" 이 정도로 일제 사격하고 포를 쏴서 무진장 죽이고 괴롭히면 못 올라 오겠지?! "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군의 생각과 달리 프로이센이 이번엔 예비대까지 투입시켜 강력하게 밀어 붙쳐 또 올라 옵니다.




한편 프로이센 군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 아무리 병력들이 많이 죽고 불리한 지형이라 하더라도.... "




『 제대로 된 승부처라면 힘을 쏟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




바로 이 점에서 큰 차이였습니다.




단순히 대형을 포진해서 깔아 놓기만 한 것, 반대로 주동적으로 전황을 이끌어서 원하는 곳에 대형을 깔아 놓는 것.




지금 전장을 보면, 오스트리아 군이 먼저 포지션을 잡고 대형을 짰는데




거꾸로 프로이센이 먼저 공격을 하는 바람에,




프로이센 군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오스트리아 군이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 수동적 대응 】 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는 바로 저 언덕이 승부처라고 생각해서, 최정예 부대까지 모조리 끌고 와서 투입 시킵니다.







13.jpg



나머지 2개 부대는 오스트리아 부대 앞에 전개해서 붙들어 놓게 하죠.




그랬더니 오스트리아 군은 자기들이 위치한 지형이 워낙 좋으니,




그것에 심취해서 프로이센 군의 움직임에 따라 배치하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쪽 프로이센 군의 진영이 보여주기식 진영이라고는 그쪽 방면 지휘관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죠.




카를 알렉산더가 전황을 두루 잘 보는 인물이었다면,




예비대든 동쪽 대형 병력이든 간에 어떻게든 지금의 승부처에 군대를 지속적으로 투입해야 했는데 이걸 하지 못합니다.







5. 조르 전투 2막 : 결정적인 승패 전환점







14.jpg



프로이센 좌익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오스트리아 우익 부대가 중앙과 서쪽 포대로 지원을 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때 프로이센 좌익을 맡은 지휘관, 페르디난트 공작이 오스트리아 우익이 매우 소극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판단을 내립니다.




" 차라리 우리가 오스트리아 군의 우익을 박살낼까? "




오스트리아 우익에 대한 돌격을 시도, 오스트리아 우익이 무참히 깨져버립니다.







15.jpg



그러자 오스트리아 동쪽 전선이 뻥 뚫리게 되면서, 프로이센 우익이 중앙 측면까지 치기 시작합니다.




또한 중앙 측면을 칠 때, 오스트리아 기병도 숙영지 약탈로 재 기능을 못하는 사이에, 프로이센 기병이 대활약을 펼치며




오스트리아 중앙이 완전히 궤멸, 그리고 언덕도 점령당하게 되며 조르 전투는 프로이센의 완벽한 승리가 됩니다.




결국 조르 전투는 오스트리아 군이 좋은 위치, 좋은 전술(기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와 전략등 모든 면에서 오스트리아 군이 무참히 깨진, 마리아 테레지아의 체면에 망신을 구긴 전투가 아닐 수 없을 겁니다.




해당 조르 전투에 대한 유럽의 유명한 군사 학자가 남긴 평에는....




『 이 승부는 단호함과 군기에 의해서 승부가 결정 났다. 』







8.jpg



단호함이란 프리드리히 2세의 승부사 기질.




그럼 프로이센의 군기는 무엇을 뜻 할까요?




이 군기의 구절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군기라고 하면 어떤 것을 떠오를까요?







16.jpg



흔히 대부분 얼마나 " 복창 크게 하고, 상관의 말에 똑바로 수행하는가. " 그런 부분을 떠오르는게 일반적이죠.




그러나 프로이센의 군기 개념은 그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복창 크게 하고, 제식 똑바로 하고, 사열대에 지휘관 명령에 바로 차렷 자세 등을 " 잘 하는 것 " 이 아니라...




" 왜 하느냐? " 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전장엔 결국 총알이 빗 발치고, 포탄이 날라가서 팔 다리가 잘려나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 위험 천만한 상황 속에서 장교가 명령을 내렸을 때, 부대가 그 명령에 신속하게 행할 수 있는 것 』




즉 프로이센의 군기란 " 실행력 " 이라는 것입니다.

17.jpg

[ 실제 맞은 사진 X ,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





조르 전투에서도 프로이센 군이 언덕을 점령하는데 옆에 사람들이 포탄에 머리 터지고 배 뚫리는 것을 보고 머뭇 머뭇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군이 시체를 밟아가며 진격 했다는 것.




그리고 오스트리아 군은 적이 계속 오는 것에 겁을 먹고 주춤하지만, 프로이센 군은 계속 실행 했다는 것.




바로 이런 부분이 있었기에, 병력이 적었고 먼저 적이 대형을 짰고, 지형이 훨씬 유리했고 대포로 엄청난 피해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불리함을 이긴 것이 결국 군기 라는 것.




이번 전투에서 얼마나 군기라는 개념이 잘 잡혀야 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군기가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전투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 재미난 점이, 프로이센이 프라하에서 퇴로가 막혀 엄청난 탈영병이 생긴 것 처럼...




여차하면 탈영병이 훅 생기는데.....




조르 전투에서 이곳이 승부처라니까 죽음을 불사하고 돌격하는 모습하여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 없이 공격하는 모습.




설령 부대가 와해되더라도 남은 부대가 2선에 모여서, 여러 남은 부대가 다시 하나의 부대로 만들어 다시 공격하는 것.




이러한 반복된 공격을 통해 결국 오스트리아 군을 무너트린 것을 볼 때 참 뭔가 묘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조르 전투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18.jpg



.25 전쟁에 치열한 전투중에 하나였던, 고지전이 기억나네요.





6.25 전쟁의 고지전에서,





『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결국 목숨을 버리더라도 고지를 올라서야 한다. 』





2세기 전의 18세기에 프로이센이 해낸 것을,





20세기 한국 군(국군)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하게 같이 이루어진 모습을 보면서 뭔가 만감이 교차되는 부분이 되네요.






6. 조르 전투 결과




조르 전투의 승패는 승부처에 대한 집념에 갈라졌습니다.




§ == 오스트리아 병력 == §



- 전사 및 부상자 : 4,500 명


- 포로 : 3,000 명



§================§





§ == 프로이센 병력 == §



- 전사 및 부상자 : 3,700 명


- 포로 : 3,00 명



§================§




불굴의 의지로 승리한 프로이센 군.




전투가 끝난 다음, 이번에 치뤘던 전투가 얼마나 아수라장이었는지 현장을 수습하는데만 5일이 걸립니다.




5일 동안 전장을 수습한 후, 프로이센 군이 슐레지엔으로 후퇴합니다.








7. 집념의 마리아 테레지아, 계속되는 전투.





비록 승리를 하긴 했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오스트리아 군이 기습을 시도했더라면?




자신의 군대가 궤멸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슐레지엔까지 빼앗길 수 있었기에....







19.jpg



프리드리히 2세가 전투가 끝난 다음,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강화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 칼에 거절했죠.




불과 두 달 후에 헨델스도르프에서 다시 두 군대가 맞붙게 됩니다.




여기서도 또 오스트리아 대단한게 작센을 꼬득입니다.(???)




근데 이번 조르 전투에서 가만 생각해 보면 작센 군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네요.




그런데 왜 자꾸 오스트리아가 작센을 꼬실려고 안달이 났을 까요? 그리고 뭐가 중요하길리 작센과 함께 갈까요?




작센이 군대가 별로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작센 " 땅 " 입니다.






20.JPG



작센에서 프로이센의 베를린까지는 고작 3일이면 닿는 거리입니다.




오히려 프로이센에겐 슐레지엔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지역이 작센이죠.




그러니까, 이번엔 오스트리아가 작센을 통해 베를린으로 진격하려고 시도하면서




결국 슐레지엔에 있던 프로이센 본진에 대한 빈집 털이를 하는 것이죠.








작가의말

이번 자료 조사하는데 좀 상당히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투 자체 분석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전투 안에 내포된 다양한 교훈들을 분석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잡아 먹히네요.



특히 이번 프로이센 군기와 한국 군기에 대해 자료 조사를 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어려움이 있어서 연재 업로드가 좀 느려졌습니다.



아마 전투가 계속 벌어질 수록, 전투 양상과 교훈이 더욱 심오하고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30년 전쟁이나 영국 내전등에서 다소 하루 1편씩 자주 올렸지만,



아마 유럽 7년 전쟁은 그게 많이 힘들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쓰도록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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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프랑스의 재 침공, 민덴 전투(1759년 8월 1일) 21.07.17 26 2 25쪽
49 프리드리히 대왕의 최악에 위기, 호크키르히 전투 21.07.15 27 2 28쪽
48 프로이센의 사생결단. 조른도르프 전투(完) 21.07.13 23 2 22쪽
47 프로이센의 사생결단. 조른도르프 전투(1) 21.07.10 25 2 16쪽
46 러시아의 진격을 막아라. 조른도프르 전투 개막 21.07.06 23 2 24쪽
45 1758년의 유럽. 앞 날이 캄캄한 프로이센. 21.07.04 36 2 15쪽
44 슐레지엔 리턴매치. 로이텐 전투 21.07.02 27 2 20쪽
43 17년만에 벌어진 슐레지엔 리턴매치. 21.07.01 21 2 19쪽
42 오스트리아의 숙원. 슐레지엔 공세 21.06.30 29 2 18쪽
41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라! 로스바흐 전투(完) 21.06.28 21 2 16쪽
40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라! 로스바흐 전투(2) 21.06.27 23 2 14쪽
39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라! 로스바흐 전투(1) 21.06.26 18 2 20쪽
38 스웨덴의 포메라니아 침공과 베를린 기습 공격 21.06.21 24 1 19쪽
37 反 프로이센 동맹의 공세.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 21.06.16 28 1 10쪽
36 프로이센의 숨통을 조여라. 하스텐벡 전투 21.06.15 29 1 14쪽
35 콜린 전투(2), The Only Easy Day...Was Yesterday. 21.06.14 19 1 13쪽
34 콜린 전투(1), The Only Easy Day...Was Yesterday. 21.06.11 27 1 16쪽
33 노장들의 무덤. 프라하 전투 21.06.02 27 1 22쪽
32 공공의 적, 프로이센의 선택 21.06.01 21 1 15쪽
31 18세기의 군복과 오스트리아 재정 개혁 21.05.31 22 1 20쪽
30 유럽 7년 전쟁의 각 국의 전력(2) 21.05.25 20 1 21쪽
29 유럽 7년 전쟁의 각 국의 전력(1) 21.05.23 23 1 11쪽
28 유럽을 뒤흔든 세 자매의 활약. 유럽 외교 혁명. 21.05.19 23 1 10쪽
27 8년 간의 유럽 상황과 유럽의 외교 관계 21.05.17 23 1 16쪽
26 유럽 7년 전쟁의 시작, 로보지츠 전투(完) 21.05.12 24 1 24쪽
25 유럽 7년 전쟁의 시작, 로보지츠 전투(1) 21.05.11 24 1 16쪽
24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결, 그리고 유럽 7년 전쟁 개전! 21.05.10 22 1 14쪽
23 프로이센 반격의 공세, 케셀스도르프 전투 21.05.09 28 1 10쪽
» 프로이센의 집념과 군기, 조르(수어) 전투 21.05.07 49 1 19쪽
21 무적 프리드리히 2세의 신화 시작,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21.05.03 31 2 20쪽
20 플랑드르 전선의 격돌, 퐁트누아 전투 21.05.02 29 1 13쪽
19 프랑스의 大 오스트리아 침공(2) 21.04.30 27 1 16쪽
18 프랑스의 大 오스트리아 침공 21.04.28 29 2 10쪽
17 국본 군 창설과 데팅겐 전투 21.04.27 36 1 16쪽
16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이탈리아 전선 21.04.26 44 1 9쪽
15 오스트리아 vs 프로이센, 코투지츠(코츠지츠) 전투 21.04.25 70 1 15쪽
14 정글 같은 유럽 외교 21.04.23 105 1 9쪽
13 진격의 프랑스 21.04.22 44 1 13쪽
1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몰비츠 전투 21.04.21 32 1 22쪽
1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제 1차 슐레지엔 전투 21.04.20 30 1 11쪽
10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슐레지엔 침공 21.04.19 43 1 15쪽
9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기와 마리아 테레지아 21.04.16 37 0 14쪽
8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서막 21.04.16 37 1 13쪽
7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막장 가정사 21.04.14 42 1 16쪽
6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유산 21.04.13 44 1 14쪽
5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 프로이센의 개혁(2) 21.04.12 41 0 17쪽
4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 프로이센의 개혁(1) 21.04.11 64 2 13쪽
3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뛰어난 국가 경영 +2 21.04.10 102 3 14쪽
2 강대국 사이에 약소국이 성장하는 방법, 프로이센의 난제. 21.04.09 196 3 8쪽
1 17세기 이후의 유럽과 절대 왕정의 시작 21.04.08 363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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