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숙원. 슐레지엔 공세
1.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 못한 오스트리아 군.
작센에서의 콜린 전투.
하노버 전투.
동프로이센 전투.
연속적인 패전으로 인해 패망이 드리워졌던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대왕.
그러나 로스바흐 전투의 승리로 재기에 성공하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쉽게 무너지지 않음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근데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후국들이 두드려 맞고 있었을 때...
오스트리아 군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요?
우선 오스트리아 군도 나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 꽤 민감한 내부 사정이 발생했습니다.
지난 편에서 다운 백작이 콜린 전투에서 이겼으면....
이때 오스트리아는 16년 동안 내내 패전만 하다가 처음으로 승리했으니까, 승리의 주역이던 다운 백작.
그가 차기 총 사령관으로 두지 않을까? 이게 상식적인 생각이겠죠.
하지만 여기서 대단히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일이 꼬이게 되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동생, 【 카를 알렉산더 】 공작이 총 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오스트리아는 다 좋은데... 카를 때문에 말아먹은 전투가 너무 많아서 좀 내쳐야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이것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런 평가를 내놓습니다.
《 오스트리아 황실의 이해 관계를 보여준 사건. 》
심지어 지난 콜린 전투에서 다운 백작에게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신의 훈장을 수여했다고 했죠.
사실 다운 백작 뿐만 아니라, 카를 알렉산더도 수여 받았습니다.
그럼 무슨 공로로 훈장을 받았는지 살펴 보면, 프라하에서 적을 붙들어 놓았다는 공로라고 하네요;;;
근데 카를를 이렇게 우대해주는게 시동생, 카를이라서 밀어준 것도 있겠지만.
남편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서, 남편 기를 세우기 위해서 카를을 밀어줬다는 설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둘 모두일 수 도 있고, 살짝 남편을 더 우선시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듭니다.
아무튼 정작 큰 공로를 세웠던 다운 백작은....
훈장은 받았으나, 진급이 없는 평소와 다름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로스바흐 전투 중에, 오스트리아에게 운이 따라줍니다.
현재 프로이센 군이 로스바흐에서 정신 없이 싸우고 있었죠.
이때 오스트리아 군이 보헤미아에 있던 프로이센 군을 공략합니다.
[ 빨간 지역 : 루사티아, 현 동부 독일의 체코 인접 지역 ]
그래서 보헤미아에 있던 프로이센 군을 밀어내어, 루사티아 지역으로 밀어냅니다!
나중에 프리드리히 대왕도 보헤미아 소식을 듣게 되죠.
근데 보고를 받았던 프리드리히 대왕도 정신이 없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 군이 프로이센 군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막대한 보급품까지 챙기는 호재가 겹칩니다.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 황실의 입장에선...
" 이것 봐라. 카를 알렉산더 공작이 총 사령관이 되니까, 우리 전략이 착! 착!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
그 전까진 솔찍히 거의 누가봐도 인맥빨로 밀어주는게 보이니까 황실도 그냥 노코멘트했는데,
좀 공적 쌓으니까 큰 소리 뻥뻥 친 것이죠.
카를 알렉산더 공작은 보헤미아를 밀어내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밀고 가기로 결정.
루사티아까지 전진하여 진을 칩니다.
이렇게 되면, 작센 근교의 로스바흐에서 프로이센 군이 정신 없이 싸우는 도중에,
루사티아에서 한번 더 강력히 카를 알렉산더가 공세를 펼친다면?
프로이센에겐 아주 위협적인 상황이 직면하지 않을지 싶습니다......만!
우리의 카를 알렉산더.... 이젠 또 강조하기도 참 뭐하는 인물입니다...
카를 공작이 죽치고 앉아서 휴식을 취합니다.
그것도 하루 쉬고, 하루 띵까띵까 노는데,
이 이틀만에 오스트리아 군 기강이 무너집니다!
왜 그러냐면, 너무 병사들을 풀어놓고 쉬는 바람에 생긴 참사였던 것이죠.
오스트리아 군이 좀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보통 분위기가 좋으면 내부에선 더 단결된 모습이 보이는게 일반적입니다.
근데 오스트리아는 탈영병이 발생해버립니다?!
제가 이걸 보고 고개가 갸우뚱 했습니다.
노는데... 탈영병이 생기다니?... 아...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 난감했습니다.
근데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니...
원래 부대가 진을 치고 휴식을 하더라도, 후사르 같은 기병이 계속 정찰을 하면서 사주 경계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튀어봤자, 후사르 같은 정찰대에게 걸리기 때문에 탈영을 잘 안한다고 합니다.
당시 군대...아니지 요즘 현대 군대도 마찬가지지만 결국 군기가 풀이면 다 튑니다.
그런데 이때 카를 알렉산더께서 기병 정찰대를 느슨히 한 것으로 추측되서,
병사들이 기회가 생겨 탈영했지 않았을까가 제 견해이며,
또한 이 시기가 7~8 월 쯤 되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은...
" 곧 있으면 추수철인데.... "
농사 때문에 걱정하면서 돌아갈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일이 겹쳐지며, 오스트리아 군 기강이 무너지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 사건을 두고, 오스트리아 수상이었던 카우니츠.
제가 예전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사절로 보냈던 인물로 처음 등장했죠.
군 기강이 무너진 오스트리아 군에 대해 카우니츠가 이런 말을 합니다.
『 우리 오스트리아 군이 작전 능력을 갖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카를 공을 소환하는 것 뿐이다! 』
하지만 오스트리아 황실은 카우니츠의 발언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그 중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의 반응을 살펴보면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 내 동생의 소환은 나와 오스트리아의 불명예로 간주 하는 것이다!! 』
라며 카우니츠에게 경고를 날립니다.
또한 한번 더 발생한 내부 갈등에 대해서도 역사가들은 이런 평가를 내립니다.
《 (중략)...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는 능력 위주보다는 황실의 이해 관계 때문에 군대를 망치기 시작한다... 》
근데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 신성 로마 제국에선 그럴 수 있다 쳐도...
그간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훌륭한 결단력을 봤을 때... 그녀는 이런 일을 방조했다는게 이상할 법 합니다.
근데 세상이라는게 사람이 현명하다고 해서, 전부 다 효율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것 같지만...
제가 지난 편에도 얘기 드렸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 하는 와중에도 쇤부른 궁전 같이 엄청 화려한 건물을 지었다고 얘기 했었죠.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인드를 살펴보면....
왕실의 권위, 그에 따르는 권력적 제도. 또한 권위만 세운다고 전부가 아니죠.
【 황실의 권위를 위해서, 황실 사람이 군대를 지휘해야 한다. 】 라는 것에 대해 그녀는 강한 집착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째든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국 황실 사람이 어느정도는 군권을 쥐고 있어야는 생각이 있었기에 이런 사태가 터진 것이죠.
또한 이것이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하기도 어려운 것이 당시 정치 구도입니다.
18세기 정치 구도를 보면 오스트리아의 행동이 맞는 부분도 있고,
심지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보면, 남편 프란츠도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물론 남편을 생각해서, 고르고 골라 제일 약한 놈한테 보냈는데....
우리 프란츠 1세 황제께선 돈을 좋아하시지 전쟁을 좋아하지 않으셔 박살이 나셨죠.
이때 풍문에 의하면, 직접 지휘는 안하고 애첩 데리고 놀다가 졌다는 야사가 있다고 하네요.
뭐 아무튼 이런 군사적 능력이 형편 없음을 알고, 결국 재정 관리만 하는 쪽으로 돌리셨죠.
하지만 반대로 카를 알렉산더는 전쟁 전에는 딱히 나무랄 데가 없었던 지휘관이었습니다.
(하필 그 적이라는게 프리드리히 대왕이고, 프로이센이라서 꼬인 것이지만...)
그래서 그나마 로트링겐 가문에서 군사 담당으로 돌린게 카를 알렉산더였습니다.
오스트리아도 자기 나름은 최대한 효율적이고 유능한 인물로 꼽아서 쓰긴 했지만,
지금 현대는 이런 정치 방식과 인맥 위주에 대한 강한 불신감이 있기에 안 좋게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2. 프랑스의 연합군보다 무서운 오스트리아 군.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의 내부 사정에 대해 첩자로 보고를 받습니다.
카를 알렉산더가 총 사령관이 된 것. 심지어 루시티아에 주저 앉았은 것에 대해, 그는 대단히 안심합니다.
그 덕택에 프로이센 군이 로스바흐 전투에서 올인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큰 승리를 얻게 되죠.
그러는 한편, 루시티아에 있는 베베른 공작에게 43,000 명의 병력을 추가 지원.
루시티아에 오스트리아 군을 견제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오기 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 군에 대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에 대해서는 로스바흐 전투 병력 숫자 비교만 봐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연합군이 약 40,000 명에 비해, 프로이센 군은 20,000 명으로 2배나 되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루시티아에 42,000 명을 보내서 견제하라고 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겠죠.
3. 총명함과 어리석음에 종이 한장 차이.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지금 프랑스와 연합군이 로스바흐에서 싸우고 있기에,
지금 딱 슐레지엔을 치기에 더 없이 좋은 시기였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 군에는 2가지 루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로스바흐 후방 공격하여, 연합군과 합세하여 몰살시킬 것인가?
2. 슐레지엔 루트로 가느냐?
2가지 루트를 가지고 회의를 합니다.
다운 백작은 1번 안.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방 공격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황실 맴버들은 2번 안. 슐레지엔!
왜냐하면 황실 사람들은 저 놈에 슐레지엔을 빼앗겨서 탈환을 목적으로 싸우고 있기에 강한 집착이 있었고,
결국 2번 선택지가 되면서, 다운 백작의 일기장에는 정말 많이 좌절 했다고 하네요...
또한 일설에 의하면 다운 백작도 프로이센 군과 직접 대결을 피하려고 했고, 그런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유럽 7년 전쟁에서, 다운 백작이 전쟁 영웅이 못 됐냐면,
다운 백작이 총명하고 똑똑하긴 하지만, 가능하면 프로이센과 안 붙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운 백작의 주특기는, 항상 적의 보급로 차단이었죠.
적이 스스로 물어나도록 하는 것이 다운 백작의 대전략이었습니다.
누구는 " 장군이 적과 싸워야지! 겁쟁이! " 라고 하시는 분도 있지만,
손자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고 하는 것 처럼, 현명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적을 회피하는게 아니라, 붙을 땐 붙고, 회피할 땐 회피 해야하는 사물의 명확힌 판단이 중요한데...
다운 백작도 은근히 카를 공작과 비슷한 맥락이 있던 것이,
그는 꼭 한판은 붙어야 할 때에도 안 붙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42,000 명의 병력을 지원 받은 베베른 공작.
휘하 장군이었던 빈터펠트에게 10,000 명의 병사를 주고,
최전방이었던 모이에서 오스트리아 군 견제를 하도록 시킵니다.
그리고 베베른 공작, 자신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오스트리츠 라는 곳으로 진격합니다.
[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헝가리 귀족 자제 출신 ]
1757년 9월 7일. 카를 공작이 나르다시라고 하는 나름은 유능한 기병 장군이 있었습니다.
카를 공작은 20,000 명 병력을 나르다시 장군에게 주고, 모이에 있는 빈터펠트를 공격하게 시키며,
【 모이 전투 】 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5. 모이 전투
빈터펠트는 오스트리아 군이 반드시 자기 한테 올 것이라고 예상하여, 언덕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의 공세의 시작은 척탄병이었습니다.
척탄병 연대가 프로이센 군을 공격하는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오스트리아 척탄병은 그냥 그저 그랬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가 방어를 했으면 했지. 먼저 언덕에 올라가서 공격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죠.
그런데 오스트리아 척탄병 연대가 프로이센이 차지하고 있던 언덕을 점령해 버린 것이죠!
이때 나르다시 장군은 본인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언덕 뒤쪽으로 돌아가, 후방 차단을 위해 공격하면서,
프로이센을 앞 뒤로 샌드위치 해버리겠다는 작전을 펼칩니다.
결국 앞 뒤로 공격 받은 프로이센.
격렬한 전투 끝에 프로이센 지휘관이었던 빈터펠트 장군이 전사!
앞 뒤 포위와 지휘관의 전사. 결국 프로이센 남은 10,000 병력도 전부 괴멸해 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르다시 장군이 얼마나 유능한지 조금은 보여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리고 이 승리로 인해, 오스트리아 언론이 가만 있질 않았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 언론을 살펴보니, 상당히 언론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정말 빨리 이 소식을 국내에 알려, 연일 대서 특필을 냅니다.
그러면서 황실에 우호적인 언론은, 카를 초상화를 신문에 실려...
《 카를 공작이 해내었다! 》
라고 그에 대한 옹호 기사도 내고 그랬다네요.
물론 그게 휘하 장군(부하)이 다 한 일이긴 하지만, 어째든 부하의 공적 = 상사의 공적(?)이기도 하죠.
6. 도망치는 놈. 추격하는놈.
모이 전투에서 완패한 프로이센.
지휘관이었던 베베른은 모이 전투의 패전을 듣자 깜짝 놀랍니다.
결국 어찌하지 못하고 오스트리츠 진격을 멈추고, 급히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리죠.
[ 브레슬라우까지 도망치는 베베른 공작. ]
베베른 공작의 철수가 어디까지 이어지냐면,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지(수도), 브레슬라우 앞까지 철수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어디냐면,
제가 예전에 하디크가 베를린 급습 했었던 그때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아무튼 베베른이 줄행랑을 치니, 당연히 카를 공작은 추격을 합니다.
[ 베베른 공작의 뒤를 쫒아가는 카를 공작. ]
카를 공작의 추격은, 18일이 되자 이젠 조우하기 직전의 거리까지 마주하게 되죠.
이젠 카를 공작이 베베른 코 앞까지 왔으니, 【 베베른을 공격하면 끝나는 상황 】 입니다!!
그런데... 또 카를 공작님께선 이번에도 여지 없이 휴식을 하십니다.
카를 공작이 왜 휴식을 했냐면...
" 우린 3일 동안 쉬지 않고 행군했다. "
[ 무사히 브레슬라우로 도망치는데 성공하는 베베른 공작. ]
그리고 베베른은 적이 휴식하고 있는 것을 알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브레슬라우로 도망에 성공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은 땅을 치며 " 코 앞이었는데! " 라고 후회했다고 하네요.
지휘관들도 카를 공작에게 항의 했는데, 카를 공작의 답변이 걸출합니다.
" 어차피 적들은 브레슬라우에 가도 보급을 받지 못한다. "
" 우린 브레슬라우를 포위하면 적은 스스로 자멸 할 것이다. "
" 왜 굳이 적과 교전하여 병력을 소모하는가? "
그리고 이후의 상황은 카를을 마냥 비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때 카를에게 운이 따라주었고, 또 그의 판단도 정확했습니다.
7. 부하의 공적은 상사의 공적.
베베른 공작이 브레슬라우에 입성 한 후, 요새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카를 공작이 본인의 낙관론을 펼칩니다.
" 저 요새? 우리가 금방 깰 수 있다! "
하지만 다운 백작은 그의 말에 반박합니다.
" 지금 우린 공성포가 없습니다. 어떻게 요새를 공략합니까? "
" 걱정하지 마라. 내게 다 생각이 있다. "
카를 공작이 다운 백작을 안심시키고, 나르다시 장군을 호출합니다.
이때 나르다시 장군은 승진하고 싶은 욕망이 컸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 나에게 기회를! " 이라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죠.
카를 공작은 나르다시 장군에게 20,000 명의 병력을 주며 명령을 내립니다.
" 요새를 포위하여, 적을 고사시키는 작전을 해라. "
하지만 나르다시 장군 성격에 적이 스스로 항복할 때 까지 기다리는 인물이 아니였죠.
그는 카를 공작의 명령도 없이 포위를 하지 않고, 바로 요새로 치고 들어갑니다.
근데 한번 생각해야할 점이.... 기병 가지고 어떻게 요새를 공략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요새 지형을 살펴봐야 합니다.
요새 근처에는 능선이 하나 있었고.
또한 여기서의 요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방팔방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는 아니였습니다.
브레슬라우 지역이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요새에도 성문이나 교통로등 입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프로이센 군도 지금 병력 가지고 모든 입구를 틀어막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나르다시 장군이 요새 주변으로 정찰병을 보내어, 경비가 허술한 곳을 기어코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 허술한 입구에 대한 대 공세를 펼치게 되죠!
11월 12일. 그것도 대낮에 습격을 하는 대담한 공격. 프로이센이 변변찮은 저항 없이 순식간에 함락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요새 공성전의 승리로, 6,000 명의 프로이센 포로를 사로 잡습니다.
이렇게 따지면, 프리드리히 대왕이 *로스바흐 전투에서 얻은 포로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로스바흐 전투의 프로이센이 잡은 포로 : 5,000 명.
요새에 패배한 베베른은 도망. 뒤에서 쉬고 있던 카를 공작은 나르다시 장군을 불러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 정말 수고 했다. 우리가 브레슬라우를 점령한다면 그대는 승진을 하게 될 것이다. "
이로써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브레슬라우. 그리고 슐레지엔을 걸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운 백작은 계속 " 과연 이게 맞는 일인가? " 라고 연신 의문을 품은 채 말이죠...
드디어 오스트리아가 그토록 고대했던 슐레지엔을 차지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섭니다.
과연 프로이센은 이대로 허무하게 슐레지엔을 내 줄 것인지.
아니면 역시나 강력한 힘으로 오스트리아 군을 밀어낼 것인지는 슐레지엔 전선의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 작가의말
본 글은 유럽 7년 전쟁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 저의 견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00% 진실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주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오타 및 문장 흐름이 잘 맞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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