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본 군 창설과 데팅겐 전투
1. 18세기의 식민지 쟁탈전
지난 편에 신대륙 이야기가 나오며 해외 식민지에 이야기가 나와서, 마침 나온 김에 유럽 7년 전쟁이 지난 전쟁과 다른 점.
바로 유럽 본토 전쟁 뿐만 아니라 해외 식민지 전쟁도 함께 동시에 벌어지기에, 이쪽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지난 편에 젱킨스의 귀 전쟁으로 식민지 전쟁이 시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식민지 쟁탈전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전쟁처럼 그 곳에서 서로 싸우며 땅따먹기로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식민지 쟁탈에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식민지 구역의 적을 몰아내서 땅을 뺏는 방법.
2) 유럽 본토에서 적을 마구 괴롭혀서 뜯어내는 방법.
두번째 이유를 근거로, 영국이 이탈리아 전선에 개입한 이유도, 두 나라(스페인, 오스트리아)가 서로 싸울 때 끼어들어서, 옆구리에 계속 펀치 두들기면 엄청 괴롭죠.
" 괴롭냐? 괴롭지?! 날 그만두게 하고 싶으면 이거 나 줘! 줘라고! "
이러면서 지속적으로 괴롭혀 식민지 영토를 양도 받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스페인의 돈 줄은 서인도(현 쿠바 지역) 제도와 북미 아메리카 대륙입니다.
근데 영국 때문에 시간이 갈 수록 통상로가 줄어 듭니다.
예를 들어서 스페인 본토 항구에서 16척의 함대 출항했는데, 저쪽 바다에는 영국 함대는 30척이 있으면, 한번 붙어 볼 게임이 안되겠죠.
그럴려면 더 많은 전열함 건조해서 병력을 충원해야 하는데, 근데 배 한 척이 정말 가격이 어마어마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본토에서 심지어 프랑스을 건너는 부대와, 나폴리로 가는 원정 군대까지 보내서 싸우니....
스페인에게는 시간도, 돈도, 정신도 없었고, 이렇게 되니 결국 아메리카 대륙의 돈 줄이 끊기게 됩니다.
그 사이에 영국은 빵~긋 웃으면서 스페인을 미친듯이 옆구리에 펀치 계속 날리면서 식민지 요구를 합니다.
영국 함대와 정면으로 붙을 여력이 없어진 스페인이 울며 겨자먹기로, 카리브 해에서 영국에게 세금을 상납하게 됩니다.
카리브 해의 남미는 스페인이 독점했는데, 이걸 뺏을려면 육군을 보내야 하는데 영국이 저 드넓은 지역에 육군 보낼 힘이 딸리니, 해상력을 이용했고,
결국 영국은 모든 카리브 해의 중간 기척지들을 전부 점령해서 모든 스페인 배들에게 세금을 받으며 아주 짭짤한 수익을 뽑아 먹습니다.
30년 전쟁때도 그랬지만, 진짜 저렇게 얄미운 짓거리만 하니까 유럽 국가들이 조금씩은 다 이가 갈리는 요소가 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전쟁하면서 돈 딸리면, 결국 돈 빌리는 곳도 영국이라는 점....
영국이 유럽 본토를 바라보는 시점은 딱 2가지 일겁니다.
팰 놈과 돈 줄 놈.
돈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영국이 돈 빌려줘도 곱게 주지 않습니다. 고리대금으로 높은 이자율을 덤탱이로 줍니다.
근데 이래서 유럽 역사가 정말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아무리 상대방 나라가 이가 갈리고, 저 놈이 예전에 나한테 0000 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당장 현실로 바라봐서, 지금 전쟁에서 밀리지 않을 려면 저 원수 같은 놈에게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하고, 때론 손을 잡아서 동맹도 해야 하는.
그리고 북미 대륙 식민지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식민지 중에 가장 식민지 땅이 적은 나라가 영국입니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제일 지분이 많았죠.
근데 영국이 야금 야금 뺏어서 드넓은 아메리카 영토를 흭득한 것으로, 치사하지만 철저히 자국에게 이익이 되는 판단을 통해 영토를 얻었다는 점.
만약 영국이란 나라가 고리타분한 나라였으면 지금 미국은 아마 프랑스 혹은 스페인어로 언어를 말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직도 스페인 영향이 짙게 남은 부분 서부 지역의 지명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지역명도 사실은 칼리포 공국이란 설이 있고,
도시 이름중에 샌프란시스코, 샌디에고, 샌타로자 같은 " 샌 " 자도 사실 스페인어의 " 성인(Saint) " 의 뜻으로.
스페인식 지명이 남아있죠.
프랑스 쪽에는 미시시피강 유역 ~ 퀘벡까지였고, 대표적인 지명으로 루이지애나 주(루이의 땅)이 있죠.
그래서 앞으로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 기나긴 전쟁에서 아메리카 대륙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데,
기나긴 시간동안에 벌어진 전쟁에서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조금씩 먹어치우죠.
2. 국본 군 창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위주로 조명해서 초반부를 설명드렸는데,
이제 새롭게 떠오른 영국이니, 영국이 당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때 어떠했는지에 대해 얘기 해보겠습니다.
오스트리아 전쟁이 터진 이유가 살리카 법에 따라서, 여성은 왕이 되지 못한다는 근거로 전쟁이 시작되었죠.
근데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등이 있기에, 여성의 왕위 전통성을 인정하는 나라였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왕위 지지를 선언합니다.
심지어 1742년에 영국의 조지 1세는 《 국사 조칙 》 을 받들기 위해서 16,000 명의 군사를 파견하면서
[ 빨간 선 : 국본 군 ]
오스트리아 - 영국의 동맹이 형성되고, 하노버 + 네덜란드가 포함하여, 『 국본 군 (Pragmatic Army) 』 이 창설됩니다.
국본 군의 궁극적인 목적은 "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승권자로 인정한다. " 를 기치로 뭉쳐, 44,000 명의 군세가 형성됩니다.
놀라운 점은 왕이었던 조지 2세가 직접 국본 군에 참전까지 하지만, 참전 명목은 하노버의 선제후로 참가하게 됩니다.
참고로 네덜란드가 동맹 군에 껴있는데, 동맹군이 되었다는 것은 친해서 모였을 것 같은데....
사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서로 전쟁까지 할 만큼 사이가 나쁜 나라였습니다.
특히 두 나라는 해상 무역을 두고 가장 큰 라이벌이었고, 인도네시아 땅이 네덜란드 식민지였는데 전쟁에 패배해서 영국이 모두 빼앗긴 전례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럽 동네는 친하다는 얘들 진짜 거의 없습니다.
제가 좀 과격하게 더 말하며 아주 엉망진창 동네입니다.
다시 국본 군으로 이야기를 돌려서,
이제 이렇게 모인 국본 군은 드넓은 유럽 중에 목표를 어디다 둘까요?
오스트리아가 뺏긴 슐레지엔?
바로 바이에른이었습니다.
프랑스도 아니고, 스페인도 아니고, 프로이센도 아니고....
왜 바이에른 일까요?
바로 지금 전 유럽 전장들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보급선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바이에른의 상황만 보더라도, 항상 세계사에서 저런 교통의 요지가 되는 나라들은 딱 둘중 하나입니다.
무진장 강하거나, 무진장 약하거나. 힘을 키워 사방에 뻗어서 영토를 얻게 되느냐, 아니면 맨날 후드려 맞고 사느냐.
그러면 바이에른은 국방에 힘을 쓰지 않았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30년 전쟁 이후, 바이에른도 프로이센과 마찬가지로 군비 증강에 상당한 투자를 했고, 주변 국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비용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훈련은 잘합니다. 외국 교관들 전부 초빙도 하고 여러가지 했죠.
이렇게 알토란같이 잘 군대를 키워서, 실전에 투입하면 실력 발휘가 안되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튼 졸지에 국본 군의 목표가 된 바이에른.
하지만 국본 군이 동맹군으로 뭉쳤다 하지만, 또 안에서는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사람이 어째든 자기 지역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죠.
[ 좌 : 하노버 선제후의 조지 2세 ]
[ 우 : 헤센 하나우 공략 ]
하노버 공국의 조지 2세는 자기가 국본 군에 참전했는데...
" 혹시 내가 없는 틈에 누가 하노버를 치면 어떡하지? "
라고 생각해서, 자기 영지 주변에만 싸울려고 해서, 조지 2세는 헤센의 하나우 공략을 결심합니다.
그 이유는 하노버 주변을 강화를 하기 위함이죠.
3. 데팅겐 전투 1막
프랑스도 국본 군의 창설이 되자, 노아유 장군에게 새롭게 군대을 편성해서 투입합니다.
노아유 군대가 헤센의 하나우에 가서 교묘한 덫을 짜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죠.
[ 1. 마인강 포위 ]
국본 군은 마인강을 점거해서 진을 치니까,
노아유는 노련하게, 마인강의 상류와 하류를 점령해서 보급로 차단을 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갈 곳은 데팅겐으로 빠질 곳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데팅겐으로 빠져나가는 길이야 말로 프랑스의 완벽한 덫이었죠.
왜냐하면 산이 있고, 강이 있는 좁은 길로 나가야 하는데,
[ 2. 그라몽 군대와 포병 배치 ]
데팅겐 앞에는 노아유 조카의 그라몽 공작이 이끄는 23,000 명의 군대가 길을 막고 있던 것입니다.
조지 2세는 오직 데팅겐 밖에 하노버로 갈 퇴로가 없었고, 산과 강 사이의 좁은 길.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프랑스 포병이 배치하고 있으니...
[ 3. 국본 군 포위 완성 ]
강 따라 갔다간 협곡에서 포격을 맞는 동시에, 앞에는 그라몽 군대, 뒤에는 노아유 본대가 대기
정말 기가 막힌 포위망이 아닐 수 없었죠.
이렇게 되면서 조지 2세와 노아유 군대의 데팅겐 전투 전투가 벌어집니다.
4. 데팅겐 전투 2막
포위망에 갇힌 조지 2세의 국본 군.
강 건너에 있는 프랑스 포병이 열혈히 국본 군을 향해 맹폭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예상 외로 포격에 인해 피해가 누적됐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6시간 동안 데팅겐을 향해 강행 돌파를 하면서, 그렇게 그라몽 공작이 있는 데팅겐으로 갑니다.
국본 군이 포병에 맞으면서도 돌파하는 일이 벌어진 이유는 퇴로가 막혔기 때문에 안에 있으면 굶어 죽든지 포위망에 갇혀 죽던지.
결국 죽는 것 밖에 없기에 죽을 힘 다 짜내서 갔을 것이고,
또한 지금 이렇게 모인 국본 군이 연합 군인데, 보통 연합 군의 경우에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면 부대가 붕괴하면서 뿔뿔히 흩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조지 2세가 이끈 국본 군은 얻어 맞으면서, 부대가 붕괴되지 않고 6시간 동안 진격했다는 것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본 군의 의외의 빛이 발할 때, 완벽한 포위망으로 결코 질 수 없을 전투를 짜놓은 프랑스 군이 실수를 저지릅니다!
프랑스 군의 유명한 기병대, 【 메종 드 루아(Maison Du Roi) 】 가 있었습니다.
이 기병대는 그냥 기병대가 아니라, 프랑스 왕실 근위 기병으로, 최정예 기병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왕이 어디로 갈 때, 왕이 탄 마차 앞 뒤로 호위하는 기병이 바로 메종 드 루아였죠.
그런데 데팅겐 전투에서 메종 드 루아가 공명심과 더불어,
6시간 동안 포병들의 맹폭에도 국본 군이 붕괴되지 않은 조바심이 겹친 나머지...
그라몽 공작이 명령도 내리지 않았는데, 메종 드 루아 기병 지휘관이 " 모든 기병대 돌격! " 을 외치며 국본 군으로 돌진한 것이었죠.
메종 드 루아 기병에 대해 쪼금 더 얘기 하지면, 흔히 그들의 말에 의하면 『 불패 신화 』 가 있어서,
" 우리 기병대는 어떤 부대도 무너지지 않는다! "
" 우리 앞에는 오직 승리 뿐이다! "
라고 하네요.
아무튼 메종 드 루아가 돌격을 감행, 국본 군의 선봉을 격파하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그러자 그라몽 공작도 " 좋아! 이때가 찬스다! " 라고 생각하여, 보병들까지 전부 투입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메종 드 루아가 실수했다고 하지만, " 딱히 틀린 판단은 아니지 않을까? "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체적인 전황을 봤을 때 이건 매우 대단히 프랑스 군에게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메종 드 루아가 국본 군과 함께 섞이는 바람에, 그 동안 잘 괴롭히고 있었던 프랑스 포병대가 포를 쏘지 못한 것이었죠.
이건 절대 국본 군의 계략이 아닌, 오직 프랑스가 스스로 해서 약이 독으로 변한 셈이었죠.
그리고 지금 메종 드 루아가 3개 중대를 격파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차라리 입구 컷을 당했으면 그냥 외벽에서 좀 싸우다가 말았을 텐데....
적진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죠.
[ 국본 군에게 포위 된 메종 드 루아 ]
저 좁은 협곡을 쇄기 처럼 박혀 들어가니.... 거꾸로 메종 드 루아가 포위가 된 격이었습니다!
마치 모양이 핫도그에 막대기 꽂아 놓은 것은 것 같네요.
5. 데팅겐 전투 3막
프랑스 군의 포병이 중지되자, 드디어 국본 군이 반격을 시작되고, 이 반격에 제대로 먹혀 들어갑니다.
전장 상황이 밖에서 그라몽 공작이 투입한 보병대가 있다지만,
실상 전투는 메종 드 루아가 설치고 있는 좁아 터진 협곡이기 때문에 사실상 프랑스 보병도 메종 드 루아가 갔던 중간 길로 비집고 들어가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격 작전에서 그동안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 있던 오스트리아 3개 연대가 프랑스 군의 측면을 공격.
오스트리아 군의 측면 공격에 프랑스 군이 완전 붕괴로 이루어집니다.
데팅겐 전투에서 군사 학자들은 이런 평을 합니다.
『 스스로 포위 된 프랑스 군 』
하지만 메종 드 루아는 정말 결사적을 싸웁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근위 연대이다 보니 프랑스의 최정예라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이들은 전부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백작 등, 명성 높은 귀족들이 많이 전사합니다.
그러자 병사들 사기는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5. 데팅겐 전투 결과
데팅겐 전투의 결과는 누구는 무승부라고 합니다.
물론 이건 전투 자체만 봤을 때의 피해를 고려해서 해당되는 말이겠죠.
전황과 전술등을 고루 보았을 때, 이건 프랑스가 큰 실책을 범한 전투였습니다.
비록 6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이긴 하지만, 프랑스가 조금 더 침착했더라면....
아니면 하루 이상을 끌었다면 적이 탈진해서 승리했거나, 아무리 못해도 이렇게 까지 심하게 깨지진 않았을 겁니다.
심지어 하노버 공국의 조지 2세도 사로 잡을 뻔 했던 기회를 프랑스 본인이 날려 먹은 짓.
특히 메종 드 루아는 귀족으로 구성된 군대이기 때문에, 귀족이란 고급 인력이 낭비된 것도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이죠.
물론 그렇다고 메종 드 루아가 궤멸적인 피해로 다시 재기 불능이냐고 하냐면, 그건 또 아닙니다.
불과 6 개월 만에 복구가 되죠.
왜냐하면 많은 귀족들이 메종 드 루아에 입대하고 싶어하던 사람이 정말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들어오고 싶어서 뇌물까지 받쳤는데, 왜 이렇게 메종 드 루아에 가고 싶어 했냐면,
까놓고 말해 전쟁은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 10년에 1번 정도 하는데,
그 전까진 궁정에서 연회하며 술 마시며 춤 추고 노는데, 근세 프랑스 영화에 연회에서 노는 얘들이 바로 그들이며,
메종 드 루아라는 근위 기병으로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프랑스가 시원하게 날려 먹으면서 국본 군은 간신히 데팅겐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후에는 곧 겨울이 찾아 오는 바람에, 전투는 소강 상태에 빠져 철수하면서 헤센 하나우 방면 전장은 끝나게 됩니다.
6. 데팅겐의 미담.
이 전투가 조금 특별한 것이 미담이 있습니다.
국본 군은 몇 시간 동안 고립 당하고 강행군 하고, 전투하느라 모두가 지치고 배가 고팠기에 부상병을 전부 두고 갑니다.
데팅겐 전투 말고도, 많은 전투의 끝은 협정을 맺어서 서로 갈 길 가자는 식으로 끝냅니다.
이때 데팅겐 전투의 협정 내용을 요약하면...
" 서로 포로 교환할 시간이 없으니, 양측에 잡힌 포로 학대 하지 말고, 부상병 치료해주자. " 입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가 서로 다친 귀족들이 많다 보니, 서로 좋게 좋게 끝을 맺게 되면서, 당시 전투에서는 나름 신사적이 였다고 하네요.
이탈리아 전선에 이어서, 독일 방면 전선에서는 국본 군이 창설되어 데팅겐 전투를 치뤘습니다.
한 번의 전투가 끝났을 뿐, 아직 수 많은 전선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방팔방. 복잡하게 흘러가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과연 국본 군의 출현은 어떤 결과를 맺게 될지.
다음 편에서 계속 됩니다.
- 작가의말
본 글은 유럽 7년 전쟁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 저의 견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00% 진실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주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오타 및 문장 흐름이 잘 맞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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