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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유 님의 서재입니다.

2와4사이월의 마법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은유
그림/삽화
표지 by 요나
작품등록일 :
2022.05.11 14:15
최근연재일 :
2024.04.25 00:49
연재수 :
244 회
조회수 :
10,992
추천수 :
682
글자수 :
1,298,011

작성
24.01.23 17:44
조회
8
추천
1
글자
11쪽

212.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DUMMY

텔제민 본대 정중앙.

왕자가 머무는 막사에는 아돌 왕자를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골락을 이끄는 시장들.

텔제민의 최상급 기사인 오검들.

그리고 그들을 수행하던 몇 사람.


막사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건 이들이 모두 초점을 잃은 눈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장 막사 밖으로는 굉음이 터져나오고 있었으며 강렬한 힘의 충돌이 만들어낸 여파로 온 천지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 역시 지진이라도 난듯 불길하게 흔들거리는 건 당연했다.

인간을 초월한 히펠렌스나 볼 꼴 못 볼 꼴 다 봤을 지도자들이 초연함을 유지하는 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수행하는 자들마저 아무런 반응 없이 앉아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흑...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가만히 있던 이 중 한 명이 발작하듯 몸을 떨더니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 우는 이의 정체는 일개 병사도, 혹은 기사도 아닌 다름 아닌 딜람과의 전투에서 팔 하나를 잃은 히펠렌스였다.

다섯 번째 검.

그녀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를 본 두 번째 검, 캐롤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한숨만 내쉴 뿐 그녀를 달래거나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다섯 번째 검은 그녀가 나선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정신이 무너져 내린 사람을 무슨 수로 달래겠는가?


무엇보다 캐롤 스스로도 다른 이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희망 한 줄기 없는 상황.

그야말로 절망뿐인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키고 이끌어야 할 두 번째 검이라는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에 대한 답을 구할 존재가 한 명 있었지만.


"아돌 저하."

"..."

"저하!"

"... 왜 그러지?"


그 역시 상태가 안좋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니.

정신적인 충격이라면 이쪽이 더 컸을 것이다.

그나마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이성을 붙들고 있는 거지.


그만큼 그들이 만 하루 동안 겪은 참상은 끔찍한 것이었다.


- 그럼 동의한 것으로 알고 절반을 먹도록 하지. 그래도 누구를 살릴지 선택권 정도는 그쪽에게 넘길테니 빨리 정해서 알려주게.


골락의 초월자인 아우레우스를 마저 집어삼킨 에텔크리시의 말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막사를 나서는 그를 누구도 막아세우지 못했다.


- ... 부상자, 약한 사람들, 경지가 낮은 순으로 저들에게 보내도록 해라.


에텔크리시가 너무도 손쉽게 초월자를, 그것도 강한 편에 속하는 초월자를 처리한 것을 본 사람들은 아돌의 명령에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그리하여 시작된 제사장들의 식사는 끔찍했다.

아무것도 모른채 제사장들이 있는 막사 안에 들어가던 사람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지금 저 막사에 몇 명이나 들어간 거지?

- 다시 나온 걸 본 사람이 있어?


때마침 막사에서 흘러나온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공포에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도주는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약속한 사만오천여명의 사람들은 사방으로 갑작스레 솟아난 까만 벽에 막혀 갇히고 말았고 벽 너머에서 나직이 들여오는 비명은 오래도록 멎지 않았다.


남은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목채 너머로 자리 잡은 수천 수만 개의 눈알들은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자리를 지키는 것 뿐이었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들이 약속을 지켰다는 점인가?


시장 중 한 명의 웅얼거림이었다.


- 그걸 다행이라고 할 수나 있나?


속 좋은 소릴 한다며 누군가 그를 비웃었고.


- 그럼 다행이지! 아닌가? 저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해보게. 가령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말을 하면서도 민망했는지 부끄러움에 얼굴을 아래로 푹 숙인 시장의 눈에 보인 것은 땅에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검은색의 무언가였다.


- 이게 무슨...


제사장들에게 약속했던 만큼의 인원을 정확히 보낸 아돌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 가만히 있어.


어느새 막사 안으로 들어온 두 제사장, 레플루앙시와 에텔크리시가 그를 만류하였다.


-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이냐!

- 미안. 이건 나도 예상 못했어.


레플루가 어깨를 으쓱였다.


- 미래를 보는 네가 예상을 못했다니! 그게 말이 되나! 어서 그만 두지 못해!

- 아니 뭐. 배고프다고 칭얼거릴 거 같기는 했는데 애가 그렇게 허기져 할 줄 몰랐지.


순간 아돌은 그 '애'라는 자가 누구를 칭하는지 깨달았다.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던 제사장.

다른 누구보다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던 그를 말하는 것이리라.


- 나도 말리고 싶은데 지금 애를 건드리면 나도 큰일 나서. 미안. 대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지켜줄게.


레플루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까만 기운에 물든 대지에서 커다란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에텔크리시와 레플루앙시가 힘을 합쳐 아돌이 있는 막사 안에 솟아난 주둥이를 다시 돌려보냈다.

다만 다른 곳은 사정이 달랐다.


남은 자들을 헤아리기 위해 히펠을 퍼트려놨던 아돌의 얼굴이 시시각각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 약속을 먼저 깬 쪽에서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여기있는 사람들의 목숨이라도 지키고 싶다면 가만히 있게.


에텔과 레플루는 대규모 식사를 마친 이후 서서히 되돌아가는 까만 기운을 따라 막사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아돌 앙귀스는 자신에게 살아있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아니.

그럴 자격이 없는 무능하고 추악한 자라는 것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캐롤."

"...! 네. 저하."

"난 성군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쟁으로 이룬 나라고 전쟁으로 이뤄갈 나라였다.

피로 쌓은 보좌 위에서 그는 깨끗한 척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전쟁터 가운데에서 바득바득 살아남을 거라고 다짐했고. 살아남는다면 무슨 수를 쓰든 강해지리라 결심했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것.

굴욕적으로라도 삶을 연명한다면 강해질 수 있고 강해지면 언제고 그에게 굴욕을 갚아줄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넘을 수 없는 제사장이라는 벽을 마주한 날.


"어쩌면 난 그날 죽었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머리를 숙이지 않고 싸웠다면.

그래서 차라리 제사장의 손에 죽었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이 꼴은 면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 말이다."


처음에는 목숨을 연명하고자 했고.

이후에는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헛된 꿈을 꾸었고.

이번에는 백성의 절반이라도 살리자는 희망을 품었다.


그가 고른 선택지는 하나같이 오답이었다.


"아우레우스 시장. 그녀처럼 싸우다 죽기라도 했다면... 내 백성이 죽으며 남긴 것들을 이어받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당장 죽어도 아무런 상관 없을 몸이었다.

이 이상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가 살면서 쌓아왔던 모든 것은 이미 벽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져 내린 이후였는데 말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캐롤이 물었다.


"저하. 이대로... 도망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더더욱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차라리 끝까지 이기적이기라도 하세요. 바득바득 살아남으세요. 그래서..."


캐롤은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후를 논하고 싶었지만 곧 그 끝에는 지독한 어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핫. 그래. 살아도 아무것도 없다."


아돌은 탁자 위에 놓인 검을 내려다봤다.

제때 휘둘러진 적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는 쓸모없는 검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니."


늦어도 너무 늦게 뽑아든 검을 들고 아돌은 막사를 나섰다.


***


다시 어린 소년의 모습이 된 칼리다비스.

그를 상대하는 테노부스.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전심을 다해 공격을 날리는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기에는 너무 빠르고 강했다.

눈에 기운을 집중시켜 보아도 잔상만 흐릿하게 남을 정도의 움직임을 따라 잡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오래도록 훈련을 해온 자들인만큼 흐름은 읽어낼 수 있었다.


"불리하네요."

"그러게요."


볼 수 없음에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가령 테노부스의 전력이 어느정도인가?

함께 별동대로 나서며 봤던 테노부스의 기운은 놀라우리만큼 강하고 거대했지만 지금의 테노부스가 끌어다 쓰는 양을 감당할 수 있을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물론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히펠을 끌어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퍼버버버벙

카가각

쿠우웅


쉴 새 없이 펼쳐지는 공방 중에 힘을 흡수할 여력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불행히도 이들의 예상은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이뤄졌다.

디스탕시온을 쥔 테노부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으며.

이를 별동대원들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그가 지쳤다는 증거였다.


"뭐야 뭐야. 아저씨. 벌써 끝이야?"


테노부스가 휘두른 검의 궤도 너머에서 몸이 사라진 칼리다가 다시 등장한 것은 테노부스의 코앞이었다.

뒤늦게 반응한 테노부스가 주먹을 휘둘러보았지만 칼리다는 이미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후였다.


"실망이야! 엄청 강한 척 하더니!"

"허억... 허억."


대꾸할 여력조차 없을 정도로 지친 테노부스는 자신을 마무리 하지 않고 여유나 부리고 있는 칼리다에게 감사해야할 지경이었다.


"칼리다. 어서 마무리 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이를 지켜본 레플루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치만! 벌써 끝내면 재미없는데!"

"하... 정말이지."

"그리고 어차피 아저씨가 우리보고 시간만 끌고 있으랬잖아!"

"야! 그 입. 그 입 좀! 그건 비밀이었잖아."


칼리다의 말에 별동대원들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심지어 분노에 휩쌓였던 테노부스까지 모두가 동시에 품 속의 병을 꺼내 깨트렸다.


"예쁘네. 노란색. 난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레플루앙시는 비뚜름하게 웃기나 할 뿐 그들을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별동대원들은 다급히 물감을 통해 이레와 페트라가 있을 곳으로 가려고 했지만.




"... 막혀 있어요."


이레가 만들어놓은 통로는 이미 막힌 이후였다.

테노부스가 디스탕시온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내가 막을 테니 너희들은 서둘러 그쪽으로..."

"누구 마음대로?"


어느새 별동대원들의 퇴로를 막아선 레플루앙시의 손에는 까만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우리랑 놀아. 이왕이면 죽어주면 더 좋고."

"그렇다고 빨리 죽지는 말고!"


콰아아아앙


별동대원들의 앞뒤로 터져나온 까만 기운이 그들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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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238. 미칠듯 사랑했던 기억이 24.03.24 7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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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235. 가면을 벗고 정체를 24.03.18 8 1 12쪽
234 234. 눈치라고는 없는 사람 24.03.14 7 1 13쪽
233 233. 선택 24.03.11 10 1 13쪽
232 232.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어 24.03.10 6 1 12쪽
231 231. 강해지고 싶다고 말해 24.03.07 7 1 13쪽
230 230. 듣고 씹기 안 듣고 씹기 24.03.06 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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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224. 네가 행복하다면 됐다 24.02.22 8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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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218. 양치기 노인 24.02.01 8 1 10쪽
217 217. 잡았다 놓쳤다 잡았다 야옹 24.01.31 7 1 11쪽
216 216. 예기치 못한 상실 24.01.30 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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