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고은유 님의 서재입니다.

2와4사이월의 마법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은유
그림/삽화
표지 by 요나
작품등록일 :
2022.05.11 14:15
최근연재일 :
2024.04.25 00:49
연재수 :
244 회
조회수 :
11,014
추천수 :
682
글자수 :
1,298,011

작성
24.03.01 20:00
조회
11
추천
1
글자
12쪽

228. 너 엄청 못하잖아

DUMMY

멀리서도 잘 보이던 데클락은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더 컸다.

데클락 바로 밑자락에서 사는 이트나는 당연했고 메레오 상단에서 오래 일한 자들에게는 이 광경이 익숙했지만 멋모르고 상단주를 욕하던 신입은 이 광경이 처음이었는지 감탄사를 연발했다.


짐을 내리는 데에만 한나절이 걸렸다.

정박지에는 적당한 크기의 마을이 있었고 메레오 상단은 마을 사람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어찌보면 상단 덕에 먹고사는 마을이니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우였다.


마을에서 제공해준 숙소는 적당히 갖출 것을 갖추고 깔끔한 곳이었다.

상단주의 고집으로 이트나는 그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깊은 밤 먼저 자리에 누운 이트나 옆으로 씻고 나온 데셀이 눕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다가오자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데셀이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마무시한 양의 술을 몰래 버리고 오는 길이었다.


- 이건 비밀이지만 저는 사실 그리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트나는 그가 왜 이리 번거로운 짓을 하는지 알 거 같았다.


이트나와 따로 사석에 있을 때를 제외하면 그는 손에 독주를 놓지 않았다.

말투도 달랐다.

이트나에게는 정중한 말투였는데 밖에 나가면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사람을 연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매일 밤 술을 퍼 마시는 상단주.


이런 식의 인식이 퍼져 있어야 밤에 몰래 움직이기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엑살라니스로 짐을 운반하는 중에 문제가 생겨 상행이 늦춰진다 하더라도 의심을 덜 받을 것이고 말이다.


젤로트라는 호위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데셀의 말에 따르면 술집에서 홀로 술을 퍼마신 젤로트는 지금쯤 비틀거리며 숙소로 오고 있을 것이라고.

자신과 다르게 젤로트는 히펠로 술기운을 날려버릴 수 있기에 사람들 앞에서 직접 마시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저기. 이트나님."


옆에 따로 놓인 침대에 조심스레 누운 데셀의 목소리였다.


"저번에... 이트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아냐고 물으셨죠?"


목소리에 살짝 취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 아주 안 마신 것은 또 아닌 모양이다.

아직 죽음의 숲을 끼고 있지 않아 밤새 짐을 옮길 필요가 없으니 술에 좀 취한다고 문제가 될 것은 아니지만 이트나는 어쩐지 불편한 이야기가 시작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카논님께서 이트나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가지고 다니셨거든요."


펜던트에요.

그렇게 덧붙이는 데셀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 번씩 꺼내보시더라고요."


이트나는 데셀이 말하는 펜던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한참 차고 다니다가 그와 만나기 시작한 이후로 잘 차고 다니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벌써 오 년 전 이야기다.

오 년 전 이야기를 말하는데 아직도 저런 생생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날의 기억에 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퍽 중요했던 모양이다.


"사실 제가 카논님을 좋아했습니다."


음.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오해는 마세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을 접었으니까요. 근데 그때 본 그림이 이트나님이었습니다."


듣자하니 이트나란 사람은 꽤나 괜찮은 사람 같았고.

카논이 이트나의 그림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 자신의 마음을 전할 생각이 사라졌다고 한다.


"더군다나 제 눈치 없는 호위기사가 저를 영 도와주지 않기도 했고요."


두 사람이 몇 번 만나는 것 같더니 오래지 않아 카논에게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젤로트가 용기를 많이 준 모양이더라고요."


처음부터 카논의 앞길을 가로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막상 또 일이 그렇게 흘러가니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런데 이트나님을 만나고나니, 이트나님께서 옛말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카밀로테에서 한 그 수많은 일들을 듣고 나니... 한 켠에 남았던 미련이 싹 사라지지 뭡니까?"


정말 멋진 사람과 잘 만나고 있구나.

내가 뭘 시작하려고 했어도 끼어들 틈이 없었겠구나.

뭐 그런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단다.


데셀은 마침내 제 몫의 사랑을 마무리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련함을 가장했고 꽤나 실제로도 그럴듯했지만 군데군데 헛헛함이 도드라져 있었다.


"저는..."


솔직한 데셀의 감정에 이트나가 느끼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데셀비아가 생각하는 이트나와 실제 이트나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괴리가 있었다.

이트나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의 사지를 붙들었다.


피가 튀는 장면.

살려달라 애원하는 소리.


독사에 있으면서 행했던 실험 속 장면이었다.


여태 잘 짊어지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버거웠던 모양인지 기억에 짓눌린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지는 그의 귀로 데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 어떤 면에서 그리 말씀하시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는. 사람은 흔들리며 나아가는 자들이지 않습니까?"


앞으로 나아가는 중에 흔들리지 않는 자는 없으며 흔들리지 않고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없다며.

데셀이 웃었다.


"카논님이 즐겨하시던 말씀이었죠."


데셀의 목소리에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동시에 사지를 짓누르던 감각도 사그라들었다.


"그렇네요."


같은 사람, 같은 말.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겪은 공통된 기억에 두 남자는 금방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한참 과거를 추억하다 문득 중요한 것이 떠오른 듯 데셀이 주제를 돌렸다.


"아.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옆 침대에 누워있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제가 기사나 마법사는 아니지만 이런 게 가능합니다."


그가 집중을 좀 하는가 싶더니 그의 주변으로 불명확하게 늘어선 그림자가 스물스물 일어나기 시작했다.

데셀은 이 특별한 능력으로 그림자를 조종할 수 있어 몰래 움직일 때마다 잘 써먹고 있다고 했다.


이를 본 이트나가 미간을 모았다.


"어떻게 배운 겁니까?"

"배웠다고... 하기에 좀 애매하네요.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 깨달았다고 할까요."

"깨달았다고요?"

"꿈을 꿨던 거 같긴 한데... 확실치 않습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묘하게 현실감이 있어서 이게 꿈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꿈 말이에요."


그렇게 생생한 꿈이 막상 일어나니 꿈의 내용은 커녕 꿈을 꾸기는 했던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어나고 남은 건 이상한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감각과 머릿속에 남은 선박 도면이었다고.


"사람들은 저를 조선술의 천재다 뭐다 칭하지만 아르도 호를 만드는 법도 이날 같이 알게 된 겁니다."

"... 그렇군요."


데셀의 숨겨진 능력에 대해 들은 이트나의 얼굴은 어쩐지 복잡해 보였다.


***


날이 바뀌고 상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물건을 가득 실은 수십 채의 마차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계약한 싸구려 용병단이 행렬 주변으로 경계를 서는 둥 마는 둥 있었고 행렬의 중심에 상단주와 상단주가 직접 관리하는 마차가 위치하고 있었다.


"크~. 바다를 누비는 사나이들이 마시는 게 럼이라고 하지만 난 이렇게 꽃향기가 나는 술이 좋단 말이지."


마차 지붕 위에 누워서 술을 들이키는 상단주의 모습에 주변의 눈이 곱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서 그를 호위하던 용병단 중 입이 가벼운 자들이 저들끼리 소근거리고 있었다.


"... 저건 왜 마차 안에서 얌전히 마실 것이지 밖에서 저 지랄이랍니까?"

"저 놈 이 근방에서는 유명해. 개차반이라고."

"근데 왜."

"돈을 많이 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저기 저 호위기사. 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피를 마시는 기사'다."

"헉. 설마 살인이 취미라는 그 '피로 목욕을 하는 기사'요?"


선임 용병의 말에 신입이 기겁을 하며 젤로트를 돌아봤다.

과연 선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임무는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 없었다.

이 일대에 조금이라도 생각을 할 줄 아는 자라면 '피로 강을 만든 기사'를 건드릴 사람은 없었으니까.


멀리서 용병들이 하는 말을 훔쳐 들은 이트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상단주님. 저게 다 무슨 소립니까?"

"응?"

"젤로트씨가 피를 마시네, 피로 목욕을 하네 뭐 이런 말들이요."

"아. 그거?"


데셀도 그렇고 소문의 당사자인 젤로트도 그렇고 이미 숱하게 들은 말이었는지 반응이 담백했다.


"그 왜 씨바것들이 내 돈을 노리고 덤벼 드니까. 우리 호위 기사께서 손 좀 봐준 거지."


우선 데셀은 욕지거리와 함께 웃어 젖혔으며.

젤로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소문에 대해 해명했다.


"별 거 아닙니다."


자신의 장병도에 의해 팔다리 하나둘씩 잃은 자들이 수두룩하단다.


"야~. 내가 네가 잘라놓은 팔다리 치료해준다고 든 약값만 얼만지 모르겠다."


두 사람이 떠드는 말의 속뜻은.

'사람들이 감히 딴 생각을 품지 못하게 일부러 공격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래도 죽지 않도록 처치는 잘 해줬다.'

뭐 이런 것이리라.


이트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전과 다르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젤로트씨는 보이는 것과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

"아니 그렇잖습니까? 보기에는 그리 강하신 거 같지 않은데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무슨 영웅왕은 되는 줄 알겠어요."

"..."


이트나의 말에 사방에서 시선이 따갑게 날아와 꽂혔다.

그 의미는 대개 '저 미친 사람은 누구이길래 피의 기사를 자극하고 있는 건가?' 정도 였다.

일부 동정 어린 시선도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힘든 일을 겪었길래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인가.'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트.. 유고님의 말씀은 제가 약해보인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지금 이트나의 신분은 난파된 배의 생존자이자 기사였다.

이름도 특징이 뚜렷한 카밀로테의 이름 대신 엑살라니스의 이름을 쓰기로 한 상태.

데셀은 그에게 되도록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이트나는 일부러 젤로트를 도발하고 있었다.


젤로트는 어떻게 해야겠냐며 데셀을 바라보았지만 데셀 역시 사전에 합의된 행동이 아니었는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고서 빙긋 웃는 이트나를 보고 있으니 젤로트는 상단주의 눈치고 뭐고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없으신 거 같은데. 여차하면 한 번 확인해 보시던가요."

"그럴리가요? 제가 눈만큼은 엄청 좋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 확인해 보시라고."


마차 지붕 위에 누워서 술을 들이켜야 하는 데셀은 연기도 잊고 벌떡 일어나 이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점심 때가 다 된 거 같으니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요. 어떻습니까? 상단주님. 허락만 해주신다면 젤로트씨와 한 수 겨뤄보고 싶은데."


밥 먹고 즐기기에는 이만큼 좋은 여흥도 없지 않겠냐며 웃어 젖히는 이트나의 모습에.




손에 쥔 장병도를 땅에 내리 찍으며 젤로트가 말에서 뛰어 내렸다.


"합시다. 그거."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젤로트가 장병도를 들어 이트나를 겨눴다.


"괜찮겠어요? 나를 상대하기에는 젤로트씨. 많이 부족하잖아요?"


이트나는 역사적으로 먹히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도발을 시전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2와4사이월의 마법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공지 24.01.09 33 0 -
244 244. 이랬다가 저랬다가 24.04.25 4 1 10쪽
243 243. 대위 카밀로테 24.04.20 6 1 13쪽
242 242. 달갑지 않은 재회 24.04.15 7 1 12쪽
241 241. 으악 24.04.13 8 1 11쪽
240 240. 도망쳐 24.04.08 6 1 12쪽
239 239.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돼 24.04.03 9 1 13쪽
238 238. 미칠듯 사랑했던 기억이 24.03.24 8 1 13쪽
237 237. 자연도태 24.03.21 8 1 12쪽
236 236. 나 때는 말이야 24.03.19 9 1 12쪽
235 235. 가면을 벗고 정체를 24.03.18 9 1 12쪽
234 234. 눈치라고는 없는 사람 24.03.14 7 1 13쪽
233 233. 선택 24.03.11 11 1 13쪽
232 232.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어 24.03.10 7 1 12쪽
231 231. 강해지고 싶다고 말해 24.03.07 8 1 13쪽
230 230. 듣고 씹기 안 듣고 씹기 24.03.06 8 1 12쪽
229 229. 재능 24.03.04 8 1 12쪽
» 228. 너 엄청 못하잖아 24.03.01 12 1 12쪽
227 227. 펜던트 속 그림 속의 그 24.02.29 10 1 12쪽
226 226. 자기애가 과한 사람 24.02.28 12 1 12쪽
225 225. 더 뜯으면 안 돼 24.02.27 6 1 12쪽
224 224. 네가 행복하다면 됐다 24.02.22 9 1 12쪽
223 223. 칠인의 위기 탈출 24.02.20 11 1 14쪽
222 222. 기억 넷 24.02.19 10 1 12쪽
221 221. 바보 멍청이 똥꼬 24.02.08 9 1 12쪽
220 220. 손을 뻗는 이유 24.02.06 8 1 11쪽
219 219. 차를 맛있게 마시는 법 24.02.05 10 1 13쪽
218 218. 양치기 노인 24.02.01 9 1 10쪽
217 217. 잡았다 놓쳤다 잡았다 야옹 24.01.31 8 1 11쪽
216 216. 예기치 못한 상실 24.01.30 6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