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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유 님의 서재입니다.

2와4사이월의 마법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은유
그림/삽화
표지 by 요나
작품등록일 :
2022.05.11 14:15
최근연재일 :
2024.04.25 00:49
연재수 :
244 회
조회수 :
10,984
추천수 :
682
글자수 :
1,298,011

작성
22.05.11 14:19
조회
933
추천
29
글자
22쪽

1. 지금 당장 지원하세요

DUMMY

0. 내 이름은 넷 마법사죠


크흠.

크흠흠.


신비야.


혹시 카밀로테의 작명법에 대해서 들어봤어?

이 나라 작명법이 꽤나 특이해.


응?

아니.

네 이름이랑은 달라.

우리 마법사들은 아무 이름이나 붙일 수가 없어.

마법사는 태어난 날에 따라 그 사람의 이름이 정해지거든.


예를 들어 4월 마을에 어떤 아이가 28일에 태어났다고 하자.

그러면 성은 4월 마을의 가문 이름을 따서 '떼르'.

이름은 28일에 해당하는 '디드바'.


'떼르 디드바'


이게 그 아이의 이름이 되는 거야.

다른 날도 똑같아.


1월 마을은 은우.

2월 마을은 세유.

4월 마을은 떼르.

5월 마을은 베네빅.




1일에 태어나면 하람.

2일에 태어나면 이트나.

4일에 태어나면 넷.

5일에 태어나면 다날.


모든 이름을 다 말해 줄 수는 있지만 말해봤자 어차피 제대로 듣지도 않을테니 넘어가고.

하여튼 뭐 이런식이야.

이렇게 카밀로테 열두 가문 이름에 태어난 날에 따른 서른한 개의 이름을 조합하면 모든 마법사들의 이름이 정해지는 거지.


아무리 카밀로테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작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여기저기 긁어 모으면 나름 사천 명이 넘는단 말이지.

이름이 겹치는 경우가 다반사야.


지금은 졸업한 2년 위 선배들 중에는 9일에 태어난 사람만 다섯 명이 있었거든?

아훔이라고 부르면 다섯 명이 동시에 답을 하는 통에 교수님께서도 수업할 때마다 귀찮았다고 해.


웃기지?

안 웃기다고?

우이씨.


하여튼 이 나라 작명법 때문에 이런 식의 불편한 경우가 심심치 않게 생긴다고 보면 돼.

그럼에도 마법사들이란 족속은 이름에 힘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라 이 특유의 작명법은 오랜 기간동안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법 중 하나야.


이 작명법에 의해서 정해진 이 몸의 이름이 바로...

'2와4사이월의 넷'이야.


2와 4 사이 월 마을에서 4일에 태어났다는 뜻이지.


응?

왜 우리 가문 이름만 특이하냐고?

우리 선조 중에 유명한 사기꾼 한 명이 있었거든.

그 사람 이름이 트리아트 셋이었어.


3월 마을, '트리아트' 가문에서 3일에 태어난 자.

그래서 '트리아트 셋'.


그래.

네가 아는 그 트리아트 셋 맞아.

용을 이 세상에 풀어놓은 저주받은 마법사.

빨간 머리 사기꾼.


저주받은 마법사 때문에 우리 가문은 가문의 이름도 빼앗기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살고 있어.

아무 이유 없이 욕 먹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제 괜찮은데...

정말 견디기 어려운 건 따로 있어.


우리 가문에게 허락된 업은 쓰레기 청소가 전부야.

그래서 항상 가난해.

단순히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야.


엄마, 아빠도, 가문의 다른 분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지만 카밀로테 안에서 아무런 힘이 없어.

빨간 머리인 나도 학교를 졸업하면 다른 마을 쓰레기나 치우면 살아야겠지.

이런 식으로 가면 우리 가문의 대한 인식이 나아질 기회 자체가 없다는 게 진짜 문제야.


결국 이런 식으로 살다 죽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네가 딱 등장한 거지!

네가 알고 한 건지는 몰라도 네 덕에 이 악순환을 끊을 기가 막힌 방법이 생겼어.


그게 뭐냐고?


***


잔뜩 흥분한 표정의 넷이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용을 죽이는 거야!"


이건 생각 못했지?

와 이거 진짜 대단해.

얼마나 대단하냐면 정말이지 대단해.


대충 이런 속내가 담겨있는 표정을 짓고 있던 넷은 신비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해주길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신비는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왜 그런 얼굴로 봐? 이거 진짜 된다니까?"


용을 죽인다는 계획은 사실 그 골자만 놓고 보면 꽤나 핵심을 꿰뚫는 계획이었다.

빨간 머리를 한 그녀의 가문이 지금까지 욕을 먹는 이유는 모두 용 때문이니 말이다.

먼 과거 인간은 용의 노예로 살아야 했고 간신히 용의 노예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꾸준히 한대륙을 쳐들어오는 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런 용을 이 세상에 풀어놓은 자가 바로 저주받은 마법사.

트리아트 셋, 그녀의 선조인 것이다.


"나랑 우리 가문이 미움을 받는 이유가 저주받은 마법사가 풀어놓은 용때문이라면 내가 그 용을 죽이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된다면 그녀도 그녀의 가문도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용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신비 네가 해결해 줄 수 있잖아? 그러면 진짜 문제는 이거야."


어디 아무 길을 걷고 있으면 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 우선 용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그 용이 확실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곧 있으면 찾아왔다.

용이 제 군단을 이끌고 한대륙에 쳐들어오는 때.

전쟁이 곧이었다.


"전쟁에 참여하려면 먼저 정규군에 들어가야 하는데 엄마가 도통 허락을..."


벌컥


인기척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넷과 꼭 닮은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의 이름은 하람.

넷의 엄마였다.


하람은 방에서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 제 딸을 째려보며 말했다.


"내가 뭐라고?"

"아! 엄마!"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넷은 갑작스레 들어온 하람에게 와락 짜증을 냈다.

하람은 넷의 짜증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는 방을 훑었다.


"누구랑 그렇게 얘기를 하나 했더니 이제 하다 하다 신비랑 대화를 하는 거야?"

"뭐... 그게 어때서!"

"신비가 고양이인 것은 알고 있지?"

"..."


그녀의 말대로 넷의 앞으로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가 배를 뒤집어 까고 누워 있었다.


"하... 내 딸이지만 불쌍해서 어떻게 해. 친구가 없어서 고양이랑 말하고 놀다니."


정곡이었는지 넷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진짜 하지 마."

"아 즨쫘 해지 매~"

"아!"


참다 못한 넷이 베개를 집어던지자 하람은 얼른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애먼 문만 때리고 떨어진 베개를 집어들며 하람이 다시 방에 들어왔다.


"아무리 네가 신비에게 정을 많이 들였다고 한들 고양이는 고양이야. 네가 이름을 붙였다고 갑자기 고양이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알아! 안다고!"

"신비 말고 듀시아랑 놀아. 듀시아."


빨간 머리인 넷에게도 사람인 친구가 한 명은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떼르 듀시아.

명문가인 떼르 가문 출신에 마법에 있어서 천재라 불리는 아이.

빨간 머리로 태어나 온갖 괴롭힘을 당한 넷과는 그야말로 정반대의 삶을 사는 아이가 바로 그였다.


도통 성립할 수 없어 보이는 관계였지만 의외로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붙어 다닐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엄마. 걔도 나도 곧 졸업이야. 엄청 바빠."

"듀시아 그 아이는 뭐. 워낙 잘하니까 걱정 없을 거고. 너는 졸업하면 우리랑 같이 일할 건데 뭘 열심히 한다는 거야? 그냥 대충 해. 대충."

"... 싫어."


넷의 말에 하람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넷. 너 아직도 그 이야기야?"

"엄마.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진짜 열심히 훈련 중이거든?"

"엄마가 싫다고, 안 된다고 얘기했잖아!"


이미 수십 번은 한 이야기.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언제부턴가 딸은 정규군에 들어가겠다 저리 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2와4사이월 가문의 마법사가 쓰레기 수거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난리를 친다.

그런데 평범한 다른 일도 아니고 정규군에 들어간다고?

그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뻔했다.


미쳤다는 둥, 재수 없다는 둥 욕을 먹는 것은 기본이다.

어디 심보가 더러운 사람이라도 만났다가는 그보다 더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군에 들어가기에도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 정규군에 들어간다면 딸은 큰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여러모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절대로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나도 싫어! 싫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넷에 하람의 입이 닫혔다.


"쓰레기 버리면서 살아야 하는 것도!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것도! 이제 더 이상 싫다고!"

"싫어서 뭐! 나처럼 살기 싫다고 그 사지로 직접 걸어 들어가겠다고? 그럴 거면 그냥..."

"미야아아아옹!"


줄곧 가만히 있던 신비가 두 사람 사이로 뛰어 들었다.


"미양! 미야옹!"


앞발을 들어 이리저리 휘젓는 꼴이 꼭 두 사람을 훈계하는 모양새였다.


"..."

"..."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두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기어코 정규군에 들어가야겠어?"

"엄마. 제발 부탁이에요. 한 번만 나 좀 믿어주면 안돼?"

"..."



제 딸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하람은 주머니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가지런히 접힌 종이였다.

하람은 손에 쥔 종이를 대뜸 넷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명중이었다.


"나와서 밥 먹어."




거칠게 문을 닫고 가는 엄마를 향해 넷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왜 이렇게 문은 세게 닫아!"


멀리서 엄마가 '아 바람이라도 불었나보지.'라고 말하는 게 들려왔다.


"내가 저랬으면 엄청 뭐라고 했을 거면서..."


투덜거리며 넷은 제 얼굴을 때린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건 동의서였다.

동의서에는 넷이 군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1. 지금 당장 지원하세요


하늘을 뒤덮은 검은 무언가가 지축을 흔들며 땅에 내려앉았다.

무너지듯 세상이 진동했다.


산처럼 거대한 몸체.

빛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비늘.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날개.

눈앞의 모든 것을 찢어 발기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그건 죽음을 형상화 해놓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죽음에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용' 이라고.


용 맞은편으로는 드넓은 평원을 끼고 인간들의 군세가 도열해 있었다.


"인간들의 나라에! 승리를!"


백금의 중갑을 두른 이가 검을 치켜들고 외치자 그의 뒤로 도열해 있던 수십만의 군세가 평원을 가로질러 용을 향해 달려 나갔다.


"승리를!"


이를 지켜보던 용이 불길하게 일렁이는 붉은 눈을 빛내며 포효했다.

그저 소리를 지른 것일텐데 그 자체가 재해가 되어 앞서달려오던 인간 무리를 쓰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용이 이끌고 온 수만의 아룡들이 날아 올랐다.


아룡은 용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훨씬 작을 뿐더러 용이 부리는 권능은 커녕 그냥 힘만 센 포악한 짐승에 불과하다.

물론 용에 비해서 작다 뿐이지 못해도 인간의 서너 배는 큰 짐승이며 비늘은 평범한 보병은 상처를 낼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단단한 것이라 절대 얕볼 수 없는 짐승이었다.


용의 군세와 인간 군의 충돌은 격렬했다.

인간은 용맹했지만 용맹함만으로 아룡을 죽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룡의 발톱에 인간들의 검이 부러졌고, 이빨에 갑옷이 뚫렸다.

누가봐도 인간 측의 열세였다.


그 순간.


"카밀로테의 마법사들이여!"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 1500여명 남짓한 수의 작은 무리였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으며 그 지팡이 끝으로 형형색색의 빛으로 된 구체가 맺혀있었다.


"적을 섬멸하라!"


빛의 구체는 쏘아짐과 동시에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쩌저적


얼음의 창이 아룡의 목을 꿰뚫었으며.


콰과광


폭발과 함께 아룡의 몸이 거무죽죽하게 불탔고.


쒜에에엑


바람으로 된 칼날이 아룡의 날개를 찢었다.


마법사들의 마법 한 번에 수많은 아룡들이 죽거나 다쳤다.

순식간에 불리했던 전황이 뒤집혔고 기세를 탄 인간 측이 용의 군세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장면은 순식간에 바뀌어 불리한 전황을 단번에 뒤집은 마법사 무리를 비추고 있었다.

마법 처리가 된 철갑은 적의 저주를 막아내고.

칼날과 마법석이 박힌 전투 지팡이 '제다카'가 내뿜는 '정의의 숨결'은 적을 꿰뚫었다.


1500명의 지팡이 끝에 맺힌 빛덩이가 다시 한번 터져나가며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한대륙의 영웅. 너도 할 수 있어.>


새하얗게 물든 배경 한 가운데로 짤막한 문구가 떠올랐다.


<카밀로테 정규군. 지금 모집중.>


마지막 문구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교수가 지팡이를 이리저리 휘저어 영상을 흩었다.

예비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정규군 모집 홍보 영상이었다.

기억 재연 마법을 기본으로 이런저런 시각 효과를 더하여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 모두들 정규군에 지원해라. 알겠지?"


교수가 하는 둥 마는 둥 지원을 독려했고 이에 대부분의 학생들 역시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수업은 여기까지."


늙은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학생들이 교실을 나서자 복도 양 옆으로 예의 정규군 모집 홍보 영상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예비 졸업생인 그들을 겨냥한 수작이었으나 효과는 영 별로였다.


이유라면 간단하다.

이번 졸업 기수가 정규군에 지원하면 1년간의 훈련 이후 곧바로 '연합전'에 참전해야하기 때문이다.


과거 인간들이 용의 노예로 살던 시절.

영웅왕이라는 자가 한대륙에서 용을 몰아내고 자유를 얻어냈다.

하지만 영웅왕이 얻어낸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영웅왕에게 패배하고 한대륙에서 물러난 용은 힘을 비축하고 다시 한대륙을 침략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주기가 꼭 백 년.

용의 군단이 쳐들어오는 시기가 되면 한대륙의 나라들은 서로 연합하여 용에 맞섰다.


연합군 대 용의 군단.

사람들은 이를 연합전이라 부른다.


카밀로테인 중 그 누구도 홍보 영상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다.

98년 전 연합전에 참전했던 1500명의 마법사 중 생환자는 고작 13명이었다.

영상에서 보여줬던 압도적인 모습을 봤을 때는 상상하지도 못할 반전이었다.


용의 숨결 한 번.

적을 몰아붙이던 연합군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이유가 고작 용의 숨결 한 번이었다고 한다.


생환율이 백분의 일도 안되는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정규군에 지원하려는 정신나간 학생은 드물었다.


"듀시아. 드디어 엄마가 허락해주셨어! 지원하러 가자!"


노을에 물든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주홍빛 머리.

붉은 머리를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새하얀 피부.

그녀의 이름은 '2와4사이월의 넷'.

정규군에 지원하려는 몇없는 정신나간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래!"


이에 기다렸다는 듯 나서는 흑발의 단정한 남자 아이는 '떼르 듀시아'.

그 역시 정신이 나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넷과 듀시아는 학교장실로 향했다.

정규군에 지원하려면 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한데 이를 위함이었다.

학교장의 추천서는 추천서에 급을 매긴다면 최고로 쳐주는 것이었다.


학교장실에 도착한 두 사람이 문에 달린 황금종을 울리려는 찰나였다.


"들어오세요!"


별다른 인기척을 내지도 않았건만 학교장실 안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넷과 듀시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학교장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단정하게 기른 턱수염, 깔끔하게 빗어넘긴 흑발, 마지막으로 한쪽 눈에 걸친 외알안경까지.

교육자보다는 학자의 인상에 가까운 중년의 사내였다.


"넷양과 듀시아군. 추천서때문에 온 것이겠죠? 자. 어서 앉으세요."


두 사람이 앉으니 그들 앞으로 찻잔이 날아와 놓였다.

이어서 찻주전자가 날아와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어디보자..."


학교장이 손을 휘적이니 두툼한 서류 더미 사이에서 두 장이 뽑혀서 그의 손에 잡혔다.

그가 빠르게 종이를 훑고는 말했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자격을 갖춘 지원자네요."


연합전의 여파로 최근 이십 년 간 정규군에 지원하는 자들의 수가 대폭 준 실정이다.

이에 정규군 측에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지원 자격을 대폭 낮춘다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써먹으려면 어느정도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니 실상 아무 의미 없는 짓이지만 그들로서도 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 덕에 매년 실력도 없으면서 명예에 눈이 먼 애송이들이 꼬박꼬박 지원하는 실정이었다.

올해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는데 간만에 학교장의 눈에 차는 학생들이 지원한 것이다.


서류에서 시선을 뗀 학교장은 외알안경을 품에 집어넣고는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두 사람은 왜 정규군에 지원하는 건가요?"

"대현자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


먼저 답한 것은 듀시아였다.

카밀로테의 지도자이자 가장 강한 마법사를 칭하는 말.

대현자.

역대 대현자들은 하나같이 정규군을 필수적으로 거쳤으니 대현자를 꿈꾸는 듀시아 역시 정규군을 거쳐야 했다.


"그것도 이번 연합전에서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일텐데? 가능하겠어요?"

"네.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살아 돌아올 겁니다."


학교장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조카님에게 권능자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바랄게요."


'권능자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이 세상을 창조했다 일컬어지는 권능자의 보호가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말이다.

카밀로테인은 물론 대륙 한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축복의 말 중에서는 단연코 최고의 말이었다.


"그러면 넷양은요?"


듀시아와 다르게 넷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언뜻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말을 할지 말지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지 않아 넷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정규군이 된다면... 용을 죽이려고 합니다."


쨍그랑


아무 생각 없이 찻잔을 쥐고 있던 듀시아가 잔을 떨어뜨렸다.

눈이 땡그래진 그는 차마 소리를 지르지 못해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용을 죽인다고요..."


듀시아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의 학교장이 그녀의 말을 몇번이고 되뇌더니 마침내 물었다.


"어떻게요?"


이 질문은 현재 학교장이 할 수 있는 질문 중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이천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연합전은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벌어졌다.

이 말뜻은 그 긴 시간동안 그 누구도 용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대현자만이 용을 간신히 몰아냈을 뿐, 그 누구도 용의 몸에 상처는 커녕 비늘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용을 죽인다는 말이다.

듀시아의 목표가 연합전에서의 생존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현자도 아닌 일개 정규군 부대원의 목표로는 너무나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이를 모르지 않을텐데 넷은 자신이 용을 죽일 수 있다 확신하고 있었다.


"전 용을 죽일 수 있는 마법을 알고 있습니다."

"2와4사이월의 넷양. 제 말 잘 들어요.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트나 학교장님. 터무니 없이 들린다는 거 알고 있지만 제 말에 거짓은 없어요. 전 용을 죽일 수 있어요."


넷이 자신감을 내비치며 단언하는 순간이었다.


벌컥


학교장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학교장님 잠시 시간 좀..."


탐스러운 흑발을 흩날리며 들어오던 여자 아이의 이름은 떼르 딜람.

그녀는 방에 들어오다 말고 걸음을 멈춰 섰다.

넷이 한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 방금 그게 무슨 말일까?"


용을 죽인다는 말을 들은 반응은 학교장이든, 듀시아든, 딜람이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터무니 없는 말을 한 사람이 넷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딜람이 보인 반응은 다른 두 사람과 달랐다.


"내가 잘못들은 거지? 누가 뭘 죽여?"


딜람이 보이는 감정은 명백한 분노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트나 학교장이 나섰다.


"딜람양. 아무리 딜람양이라고 해도 학교장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는 안돼요. 여기 다른 학생들과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이야기라는 거 어차피 추천서에 관한 거 아닌가요? 마침 저도 추천서 때문에 왔거든요."

"그렇다고 해도..."

"그리고 빨간 머리가 용을 죽이겠다는 망언을 내뱉었는데 지금 사소한 예의가 중요한가요?"


하... 어린 것이 벌써부터 어른 말을 여기저기 다 잘라 먹네.

라는 생각을 학교장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녀의 말대로 명분은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질 나쁜 농담쯤으로 취급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넷이었다.


"2와4사이월의 넷. 정신차려. 네가 죽이겠다는 그 용, 저주받은 마법사가 풀어놓은 거야. 네년 선조가 한 짓이라고."


백 년에 한 번씩 수만 명의 사람들이 용의 군단과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

용에 대한 증오는 깊었고 용을 세상에 풀어놓은 저주받은 마법사에 대한 증오는 그보다 더했다.


딜람이 지팡이를 치켜들어 넷을 겨눴다.


"그런데 네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우우웅


"정규군이 되네 마네, 용을 죽이네 마네 한다는 거야."


그녀의 지팡이 끝으로 빛무리가 어렸다.

이를 지켜보던 듀시아가 덩달아 손에 마법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잠깐만. 듀시아."


넷이 그를 제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딜람이 만들어낸 빛덩이에 머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래 알지. 아주 잘 알지. 내 선조가 한 일을 누가 모를까?"

"그렇게 잘 알면 네 주제에 맞게 얌전히 쓰레기나 주워먹고 살아. 네 마을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야."


우우우우웅


빛덩이가 한층 더 강렬해졌다.


"선조께서 싼 똥 내가 치운다고. 그 용. 죽여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이 용같은 년아."

"대현자님도 못한 일을 네가 어떻게? 주제를 좀 아세요. 빨간머리 년아."


우우우우우우웅


마침내 빛덩이가 터지기 직전.


파스스스


돌연 빛덩이가 사그라들었다.

한계까지 마법을 키워나가던 딜람이 무슨 생각인지 마법을 취소한 것이다.

그녀는 마법으로 넷을 공격하는 대신 학교장을 돌아봤다.


"학교장님께서 주실 수 있는 추천서는 두 장 뿐이죠?"

"... 그렇죠."

"한 장은 저 재수없는 녀석한테 갈 거고 말이죠."


학교장은 재수없는 녀석이라 불린 듀시아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죠? 듀시아군은 학년 수석이니까요."


학년 수석이자 천재라 불리는 듀시아가 추천서를 받지 못할 일은 없으니 남은 자리는 하나.


"이기는 사람이 갖는 걸로 하죠. 그 한 자리."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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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와4사이월의 마법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공지 24.01.09 32 0 -
244 244. 이랬다가 저랬다가 24.04.25 4 1 10쪽
243 243. 대위 카밀로테 24.04.20 6 1 13쪽
242 242. 달갑지 않은 재회 24.04.15 7 1 12쪽
241 241. 으악 24.04.13 8 1 11쪽
240 240. 도망쳐 24.04.08 6 1 12쪽
239 239.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돼 24.04.03 9 1 13쪽
238 238. 미칠듯 사랑했던 기억이 24.03.24 7 1 13쪽
237 237. 자연도태 24.03.21 7 1 12쪽
236 236. 나 때는 말이야 24.03.19 7 1 12쪽
235 235. 가면을 벗고 정체를 24.03.18 8 1 12쪽
234 234. 눈치라고는 없는 사람 24.03.14 7 1 13쪽
233 233. 선택 24.03.11 10 1 13쪽
232 232.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어 24.03.10 6 1 12쪽
231 231. 강해지고 싶다고 말해 24.03.07 7 1 13쪽
230 230. 듣고 씹기 안 듣고 씹기 24.03.06 7 1 12쪽
229 229. 재능 24.03.04 7 1 12쪽
228 228. 너 엄청 못하잖아 24.03.01 11 1 12쪽
227 227. 펜던트 속 그림 속의 그 24.02.29 10 1 12쪽
226 226. 자기애가 과한 사람 24.02.28 11 1 12쪽
225 225. 더 뜯으면 안 돼 24.02.27 6 1 12쪽
224 224. 네가 행복하다면 됐다 24.02.22 8 1 12쪽
223 223. 칠인의 위기 탈출 24.02.20 10 1 14쪽
222 222. 기억 넷 24.02.19 9 1 12쪽
221 221. 바보 멍청이 똥꼬 24.02.08 8 1 12쪽
220 220. 손을 뻗는 이유 24.02.06 7 1 11쪽
219 219. 차를 맛있게 마시는 법 24.02.05 9 1 13쪽
218 218. 양치기 노인 24.02.01 8 1 10쪽
217 217. 잡았다 놓쳤다 잡았다 야옹 24.01.31 7 1 11쪽
216 216. 예기치 못한 상실 24.01.30 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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