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정훈의 비밀 (4)
“나는 이윤규를 처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서 이제 실행해 옮기기 위해서 잠입을 했다네. 근데 대기를 타고 있던 내 주변으로 갑자기 발소리가 여러 개 들려왔지.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싶었지만, 그 발소리는 점점 나를 옥죄어 오고 있었네.
이윽고 발소리가 일제히 멈추자, 나는 이건 망했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뛰쳐나왔지. 역시나 밖에는 십여 명의 장정이 나를 포위하고 있었네. 그래도 당시의 나는 복수를 위해 힘을 기르고 있던 때여서 상대할 만했지.
게다가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그때의 나는 꽤 호리호리하니 날랬었네. 나는 재빨리 포위가 느슨한 쪽을 파악하고 그곳을 파고들어 도주를 시작했지.”
확실히 지금의 정훈은 딱 곰을 떠올리면 될 정도로 큰 덩치를 가진 느릿한 이미지이다. 하지만 경기 중 한 번씩 보여주는 반응속도는 그가 과거에 날랬었다는 것을 믿을만하다.
“나는 정신없이 도주했고, 그들을 따돌렸을 무렵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났지. 내가 숨어있던 그 장소는 포수 동료 한 명이 윤규의 거처를 염탐해서 알려준 장소로, 나와 그 단둘만이 알고 있던 장소였지.
그런데 그 장소가 그렇게 허무하게 들켜버렸다? 이건 필시 그 동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서 나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그에게 달려갔다네. 동료가 있는 곳에 도착해서 그를 찾고 있는데,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그곳으로 향했지.
그곳에는 동료가 무사히 있었지만,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네. 그리고 둘이 대화 내용은 충격적이게, 나를 체포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네.”
와··· 이 남자도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아왔었구나···. 부친의 사망 이후 배신의 배신이 이어지다니··· 이 사람이 나와 한진을 신뢰하고 이런 어두운 과거사를 꺼낸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배신을 당해서 복수하려는 사람 앞에서 다시 배신하다니···. 저라면 그런 상황에서 절대 못 참았을 것 같습니다.”
“뭐, 나도 사람인지라 같은 생각이었지. 그 장면을 본 순간 바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나는 그 자식을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버렸지. 하지만 거기서 나는 참았어야 했네. 옆에 함께 있던 보부상이 마침 밖에 대기하고 있던 장정들을 데리고 와서 나를 체포했거든.
참고로 그 배신자 녀석은 반병신으로 살다가 다른 포수 동료들에게 버림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들었네.
그 뒤로 나는 보부상 감옥으로 끌려가서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지. 내 몸이 성한 곳이 없는 것은 짐승을 상대해서 그런 것보다는 그때 얻어맞은 후유증으로 인해 이렇게 된 것이 컸지.
아무튼, 실컷 두들겨 맞은 이후에 감옥에 갇힌 나에게 보부상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렸다네.”
전에 정훈이 말하기를 당시 조선에는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았는데, 특히 보부상은 그 세력이 막강하고 규율이 엄격하여 공권력의 심판 대신에 보부상 자체적으로 죄인을 심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정훈 형님은 이렇게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대체 그 규율이 엄한 보부상에서 어떻게 살아나오신 겁니까?”
“여기에는 또 그럴만한 이야기가 있었지. 그 이야기가 내가 이렇게 황성 기독교 청년회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야. 자, 이제 암울한 이야기는 거의 끝나가니 다시 한 잔씩들 하지?”
휴, 사실 정훈의 이야기는 맨정신으로 듣고 있기 힘들기는 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격이라 술자리에서 그만하라고 말도 못 하고 남의 신세 한탄을 들어준 적이 많았지만, 정훈의 얘기는 진짜 힘든 얘기여서 말이다.
우리는 정훈의 한잔하자는 정훈의 제의에 다 같이 또 한 잔씩을 들이켰다.
“크하하핫, 계속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그렇게 감옥에 갇혀서 배신의 배신을 당한 일을 되새기며 그래도 둘은 저세상 동무로 데려간 게 다행인지, 아니면 마지막 남은 녀석을 해치우지 못한 것에 분해야 할지 생각을 하며 그 날을 기다렸지.
이윽고 내 처형일이 다가와서 죽음의 문턱에 다가간 그 순간, 저 멀리서 황급히 말을 타고 달려오는 자가 있었네. 그자는 보부상 간부와 대화를 나누더니 나에게 다가와서는 수갑을 풀고 어디론가 데려갔지.
나는 저 보부상이 왜 나를 이렇게 순순히 이자에게 보내주는 건지 의문을 품으며 순순히 따라갔는데, 그곳에 도착해보니 이게 웬걸,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분과 마주할 수 있었다네.”
“그게 대체 누구길래 그러십니까?”
정훈은 뜸을 조금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황제 폐하셨네. 뒤늦긴 했지만, 보부상 내에서도 내 아버지를 존경했었고 나를 가엾게 여긴 사람이 몇몇 있었는데 그들이 내가 처형당할 일이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도록 힘써 주었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나는 정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지.”
“와···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정말 다행이었군요.”
“크하하핫, 그랬었지···. 하지만 살아났다는 안도도 잠시, 사회적으로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다네.”
사회적 죽음?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사회적 죽음이요? 이건 무슨 말씀인지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가 황제 폐하의 도움으로 보부상의 판결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나를 배신했던 포수 동료가 나를 사형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증거들을 확보하여 보부상에 밀고한 상태였고, 황제 폐하께서도 나를 빼내오는 대신 이 판결을 바꿀 방법은 없었다고 하셨지.
하지만 대신 내가 살 수 있는 선택지를 주셨는데, 그게 바로 공개적으로는 사형을 당했다고 하고 신분을 바꾸어 다른 이로 살아가라는 명이었네.”
아, 그래서 사회적 죽음을 맞았다고 한 거였구나. 이제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나에게 선택지가 있겠는가?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이고, 이전보다 더욱 실낱같겠지만, 복수의 기회가 살아있을 테니, 당연히 황제 폐하가 제시한 선택지를 택하기로 했지.
그렇게 나는 얼마 전에 죽음을 맞이한 나와 동갑인 현정훈이라는 사내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지. 그 후 몇 년간은 깊은 산속인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도록 체형을 변형시키고 말투부터 행동거지까지 하나하나 바꾸었지.
내가 이곳에 있던 것은 오직 황제 폐하와 명을 받은 심부름꾼만이 알고 있었지. 그리고 그 심부름꾼이 바로 여기 있는 김산 녀석일세.”
!!!
그랬구나. 사실 아까부터 이 진지한 얘기를 왜 하필 김산 녀석이 함께 듣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고 있던 참이다.
“이야, 산아. 네가 조금 다시 보인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심부름꾼이라니?”
“영준 형님, 대체 저를 뭐로 보시는 겁니까? 저도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정훈은 김산을 보면서 피식 웃더니 얘기했다.
“음··· 영준 자네가 보는 대로 이 녀석은 엉덩이가 가벼운 녀석이 맞긴 하네. 하지만 내가 이 녀석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네. 특히 이 아무도 없는 산에서 숨어지내야 했을 시기에 가끔 술도 가져와 주고, 말동무도 많이 해주었지.
당시에는 내가 따로 말은 안 했지만, 이 녀석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을 것이네.”
“정훈 형님, 저를 그렇게 좋게 보고 계셨던 겁니까? 진작에 말씀 좀 하시지··· 하여튼 사내놈이라고 무게 잡으시기는··· 그러다가 때를 놓치면 영영 마음을 전달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저처럼 그때그때 할 말을 하고 사십시오!”
김산이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너는 좀 너무 할 말, 안 할 말 다 하고 다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냐?
“내 얘기를 계속하자면, 살아났다는 것에 대한 안도도 잠시, 처음 이곳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는 다시 나에게 찾아온 것은 좌절감이었지. 목숨은 부지했지만, 복수의 순간이 기약할 수 없을 만큼 밀렸으니 말일세.
사실 산이 녀석도 처음에는 마냥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어. 왜냐면 이 녀석은 황제 페하께서 보낸 일종의 감시역이었으니 말이야.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복수심에 눈이 먼 내가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하는 마음에 붙이셨을 거라는 것은 알지.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결국 황제 폐하도 나를 믿지 못해서 이런 기생오라비 녀석을 붙여놓으셨나 하는 마음에 괜히 으르렁 대기도 했었지.”
“어휴, 그때는 진짜 말도 마십시오. 어찌나 까칠했던지, 처음 1년여간은 정말 힘들었다오. 그만두고 싶어도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이라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든 꾸역꾸역 다가갔었죠.”
“그래서 내가 지금은 잘 대해주지 않느냐? 여기저기 둘러봐라. 내가 너만큼 편하고 잘 대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얼씨구, 그런 분이 저에게는 이 맛있는 안주와 술을 꽁꽁 싸매고 계셨던 겁니까? 참~ 잘해주고 계십니다~!”
무거운 이야기가 끝나가자 김산 녀석은 또 정훈과 만담을 찍으며 분위기를 확실하게 환기시켰다. 이런 걸 보면 김산 이 녀석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눈치가 정말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쩌다가 산이에게 마음을 열게 되신 겁니까?”
정훈은 이 질문을 듣자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큼큼··· 사람이 누군가에게 가까워지기 좋은 시기는, 아무래도 그 사람이 힘들 때 아니겠는가? 에잉, 나는 여기까지밖에 못 말하겠네. 궁금하면 산이 녀석에게 듣던가!”
정훈은 이 말을 내뱉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산이 녀석에게 마저 내용을 듣기로 했다.
“그래서 정훈이형과 가까워진 계기가 어떤 일이었냐?”
“에휴, 정말 솔직하지 못한 양반이라니까···. 사실 별거 없습니다. 그날은 하늘이 노했는지, 며칠째 비가 내렸던 날인데, 못해도 사흘에 한 번씩은 찾아가 보라는 명을 받았지만, 그때는 도저히 제 목숨이 왔다갔다할 정도로 길이 험해서 일주일은 못 갔었죠.
그러다가 비가 좀 잠잠해질 때쯤에 미운 양반이래도 걱정이 좀 되어서 이것저것 챙겨서 궂은 길을 헤치고 정훈 형님에게 도착했죠. 아니 근데 이 양반이 바로 누운 것도 아니고 어디 가다가 쓰러진 듯이 엎어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가가서 머리를 만져보니 불덩이가 따로 없었는데, 이어서 몸통도 만져보니 그냥 온몸이 불덩이더라고요. 그래서 별수 있겠습니까. 팔자에도 없는 사내놈을 보살피게 되었죠.”
하긴 여자에 미친 김산 녀석이 남자, 그것도 우락부락한 정훈을 간호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겠군.
“정말 별거 없긴 한데, 충분히 그럴만하기는 한 것 같구나.”
“간단히 말해서 별거 없는 거지, 저 덩치를 며칠간 보살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제가 무슨 일까지 했는지 아십니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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