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고종 황제 알현 계획
경기가 끝났지만, 저번처럼 뒤풀이는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 경기도 물론 처음이라 그런지 힘든 경기였던 것은 맞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막판에 그 이상의 집중력을 다 같이 쏟아부어서 그런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들 집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그런 선수들을 우리도 굳이 잡지는 않았다. 나야 경기에서 딱히 한 게 없었고, 한진은 경기 출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먹으면 뒤풀이든 훈련이든 할 수 있었겠지만, 선수들의 사기 문제도 있고 우리도 따로 계획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수들을 다 보내고 나서 한진에게 물었다.
“한진아, 오늘 좀 어땠냐? 일본 녀석들 말이야.”
“아, 그거라면 예상대로였지. 파리가 좀 꼬이기는 했다. 한 3명 정도? 근데 생각보다 관중들의 응원 열기가 대단해서 녀석들 좀 당황한 모습이더라. 아마 조사도 생각만큼 못했을 거야.”
사실 경기 전, 한진에게 귀띔을 해놨었다. 성남구락부 쪽에서 분명 염탐을 올 것이라고 말이다.
한진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고 하고, 경기를 안 뛰니 딱히 하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경기를 안 뛰는 몇몇 후보 선수들에게 수상한 거동을 펼치는 자에 대한 감시를 부탁하고 한진은 이를 총괄했다.
그들에게서 사인이 몇몇 곳에서 왔고, 한진은 그곳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마침 딱 걸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에게 제재를 가한다거나 할 수는 없었으므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오늘 그들이 가져간 정보는 우리 팀을 만날 때 크게 쓸모가 없을 것이므로, 상관은 없었다.
끽해야 강아지가 늑대가 된다거나, 고양이가 호랑이가 된다는 정도를 예상할 테지, 하지만 이를 어쩌나 우리는 강아지가 매로 변하고, 고양이가 고래로 변해있을 텐데?
어쨌든 그대로 보내주기는 아쉬워서, 감시하던 팀원에게 사인을 내려 그들을 은근슬쩍 골탕 좀 먹여줬다.
가다가 실수인 척 물을 조금 쏟는다던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하면서 은근히 한 대씩 툭툭 친다던가, 일부러 뒤에서 깜짝깜짝 놀랄 정도의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던가 말이다.
조금 유치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은근히 신경이 계속 쓰여서 염탐에 집중을 못 했을 것이다. 실제로 계속 신경을 긁어대자, 그들은 7회 무렵에 신경질을 내며 경기장을 떠났다.
흐흐흐··· 안 그래도 염탐을 제대로 못 했을 텐데, 정작 중요한 마지막 3이닝을 못 봤다니 성공적인 방해 공작이었다.
이후 우리는 길례태와 다음 경기에 대한 준비를 논의했다.
“길례태 씨, 성남구락부 쪽에서 염탐을 다녀갔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 경기 중간에 들었습니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나 군요.”
“다행히도, 우리 YMCA 단원들이 열심히 방해해 준 덕분에 전력 유출이 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마지막 3이닝은 아예 보지도 않고 갔고, 무엇보다 우리 전력의 절반 이상인 한진이 출전을 안 했으니 말이죠.”
“그것참 다행이군요. 근데 저쪽에서 염탐하러 왔다면, 우리도 분석하기 위한 염탐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영준 씨가 저번에 잠깐 다녀오셨다고는 들었습니다. 좀 알아내신 게 있으셨나요?”
길례태도 확실히 정보의 중요성에 인지하고 있다. 자신이 조사한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조사한 정보까지 묻고 있다. 그래 지금 얘기를 해야겠다.
“저도 조사를 하기는 했지만, 저들의 대략적인 실력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전체적으로 한 단계 위라고 생각하면 되더군요.
우리가 우위에 있는 것은 선발투수와 1루수 정도고 다른 포지션은 모두 열세에 있습니다.”
“음, 역시 그렇군요. 저들은 최소 2년 이상의 경력자들이니까요. 아무리 에이스를 포함해 주요 전력 몇 명이 빠져있다고는 해도, 우리가 따라잡기는 힘든가 보군요.”
“네, 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가 확실히 우위에 있는 부분은 한진의 존재입니다.
저들도 처음 한진의 모습을 본다면 그 위압감만으로도 경계 대상이겠지만, 바로 한진을 거르는 선택은 하지 않겠죠. 한 타석이 될지 두 타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1점 이상은 얻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상의 점수를 얻기는 힘들겠죠. 그러면 우리는 이 점수를 잘 지켜내야 할 텐데, 여기서 제안해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길례태는 또다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얻은 점수를 지킬 방법이라··· 냉정히 봤을 때, 실력이 한 단계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아무리 실력이 차이가 나더라도, 공을 쳤을 때 올 곳을 예상하고 미리 가 있으면 안타가 되지 않겠죠. 상대하는 타자별로 이를 적용하는 겁니다.”
길례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다시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우, 그거 매직 같은 작전이네요. 실제로 상대의 정보를 아는 경우면 수비수가 알아서 위치를 조정하는 상황도 종종 있죠.
근데 문제는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에 대한 정보가 충분할 때 가능한 건데, 우리에게는 정보가 너무 없어요. 실현 가능성이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방법을 제안해 드리려는 겁니다. 경기 전날까지 성남구락부 훈련하는 곳에 로테이션으로 선수들을 두 명 정도씩 짝지어 염탐을 보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염탐하느냐? 바로 선수별로 타격 훈련 때 보내는 타구의 위치입니다. 연습이긴 해도, 표본이 쌓이면 경향성이 드러나기 마련이죠.”
길례태는 이 말을 들으니 옳거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호, 연습 타구의 위치라··· 그거 타당성이 있는 얘기군요. 근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야구는 변수가 한두 개가 아닌 스포츠라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죠.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전에 조사하러 갔을 때, 선수들의 대략적인 능력 정도는 파악해뒀습니다. 이 자료와 합친다면 꽤 그럴싸한 분석을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굳이 모든 타자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는 타자도 존재하죠. 예를 들어 우리 팀의 한진 같은 타자는 당겨치기에 대비해 위치를 옮기면, 반대쪽으로 타구를 보낼 능력이 있죠.
우리는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 선수 위주로 이를 적용하면 되는 겁니다.”
이 말을 듣자, 길례태가 격하게 고개를 흔들며 반응했다.
“그런 거라면 오케이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렇다면 당장 내일부터 단원들을 보낼까요?”
“네, 단 위장을 잘해야 할 겁니다. 안 그래도 저번에 제가 갔다가 걸린 것 때문에 민감한 상태일 것이니까요.”
그렇게 수비 시프트에 대한 논의와 성공적인 시프트를 위한 성남구락부 염탐이 진행되기로 하였다.
이것으로 대비는 할 만큼 했다. 이제 남은 기간 열심히 훈련하고, 컨디션 조절해서 최상의 몸 상태로 준비하는 것만이 남았다.
슬슬 돌아가려고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혜월과 일행들을 마중 갔다가 돌아온 혜림이 나를 불러 세웠다.
“영준 씨, 사실 급하게 할 얘기가 있어요.”
급하게? 혜림이 이런 얘기는 잘 안 하는데 얼마나 급하길래 그러지?
“네, 말씀하십쇼.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제가 오늘 야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혜월이 일행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든 생각인데요. 황제 폐하를 야구장으로 모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뭐? 고종을 야구장까지 행차하게 한다고? 원래 성남구락부와의 경기는 경운궁, 즉 현대에서는 덕수궁으로 불리는 곳에서 진행되기로 했었다.
사실 황제의 거처까지 가서 경기한다고 했을 때는 부담스러운 마음이 컸다. 관중들 앞에서도 떨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시끌시끌하니 사람 사는 냄새도 나고, 응원도 받는 등 좋은 점도 많았다.
하지만 황제의 앞이라면? 엄격, 근엄, 진지한 태도로 경기장이 조용할 것 같다. 진짜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승부를 봐야 할 텐데, 이러면 우리가 불리하지. 이는 아마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안을 해주다니, 역시 야구단 생각하는 건 혜림밖에 없다. 근데 나는 당연히 좋은데 나를 왜 불렀지?
“저야 좋죠. 선수단도 단독으로 황제 폐하 앞에서 경기하는 것보다는, 주위에 다른 관중들도 있고 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니까요. 근데 이런 건 따로 말 안 해주셔도 되는데 왜 얘기하신 건지···?”
“황제 폐하를 뵈러 갈 건데, 영준 씨가 같이 가주셨으면 좋겠어요.”
뭐···뭐라고? 고종 황제를 같이 만나러 가자고? 이건 진짜 역대급 난이도인데.
“제···제가 황제 폐하를요? 그건 좀 안될 것 같은데요. 저는 궁중 예절도 잘 모르고 황제 폐하 앞에 서면 말실수가 나올 것 같은데···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우선, 황제 폐하께 야구장 건립 계획을 보고드렸을 때, 황제 폐하께서 이 계획을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흥미가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뵈러 갔어야 했죠.
그러던 와중에 오늘 경기를 임시로라도 지어진 관중석에서 보고 나니, 이건 황제 폐하께서도 여기서 관람하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황제 폐하께 이러한 야구장에서 관람하는 것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역시 계획을 세우신 영준 씨만 한 분이 안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었죠!”
발랄한 표정으로 내가 가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혜림이었다. 저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이걸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하··· 그렇게까지 설명을 해주시니 제가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인 것 같기는 하네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언제 가게 되는 건가요?”
“우선, 내일은 준비를 좀 하러 갈까요? 평상시 입고 있으신 옷도 문제 될 것은 없는데,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복식도 서구화를 추구하셔서 양복을 입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것에 걱정이 있으신 것 같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좀 알려드릴게요. 근데 생각보다 별거 없어요. 너무 긴장만 안 하시면 돼요!”
아니, 황제 폐하를 알현한다는데 걱정 안 될 사람은 혜림 씨처럼 자주 뵙는 분들이나 그런 거고요···. 상식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상황이지. 길례태나 손탁 여사를 만날 때만 해도 그랬는데, 벌써 걱정이 태산이다.
“음··· 일단 그렇게 알아 두기는 하겠습니다. 근데 양복을 맞추러 간다고요? 그거 하루 이틀이 걸리는 작업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게다가 저처럼 체격이 큰 사람은 맞춤으로 제작해야 할 텐데.”
“아 그거요? 음··· 영준 씨 정도면 바로 구매할 수 있는 옷들이 있을걸요? 근데 의식을 못 하고 계셨나? 영준 씨 처음 뵈었을 때보다 굉장히 날렵해지셨어요.
제가 봤을 때는 걸려있는 옷 중의 하나를 사서 소매 길이 정도만 수선하면 충분히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뭐라고? 하긴 요즘 거울을 볼 새조차 없어서 의식할 순간이 따로 없었지만, 딱 맞던 옷이 조금 헐렁한 느낌이 든다거나, 훈련할 때도 몸이 가볍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들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하루가 강행군이었으니 말이다. 지난번 합숙훈련 이후로도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훈련이 계속되었고, 훈련이 없는 날은 훈련 이상으로 바쁜 일이 있었다.
어쨌든 그런 말을 듣게 되니, 이거··· 오랜만에 거울 좀 봐야 되나?
“엥,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 혜림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혜림 씨만 믿고 양복점 가는 겁니다?”
“호호호. 믿어도 되고말고요.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가실까요? 내친김에 양복 맞추시고 손탁호텔에도 한번 가보실까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 좋다마다요. 바로 갑시다.
“네, 양복을 입고 서양식 호텔이라··· 아직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마치 외국에 간 것 같은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군요. 재밌을 것 같습니다.”
현대에서도 흔치 않은 기회였던 양복에 호텔이라··· 그것도 혜림 씨와 함께라니 으흐흐··· 기대되는데?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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