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정훈의 비밀 (1)
훈련 마무리를 하고 나와 한진은 김산과 현정훈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근데 분명 김산과 현정훈은 저번에 생일선물로 술자리를 갖자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째 우리가 향하는 곳은 술집이 위치한 번화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니,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이거 진짜 산으로 가고 있는데? 아직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시간이라 다행이지, 해라도 졌으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길을 잃을 수준이었다.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될 때쯤 산 중턱에 도착했는데, 무슨 기인이라도 살 법한 오두막집이 보였고 그곳으로 김산과 현정훈은 익숙하게 들어갔다.
“자자, 다들 이리로 오도록 하게나. 이래 보여도 장정 5명까지는 거뜬한 공간이라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주상 펼쳐주겠네. 아, 지금 다들 푹 젖어있군. 저쪽에 물 받아 놓았으니, 찝찝하다면 좀 씻게나.
여기 여벌 옷도 있으니 가져다 입어도 되네. 음··· 다른 사람은 커서 문제인데, 한진군은 좀 작을 수 있겠군. 뭐 어쩌겠나, 편한 대로들 하시게.”
그렇게 말을 마치고 정훈은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에 들어갔다. 슬쩍 보니, 부엌에는 무언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고기를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보아하니 요리가 완성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일단 방으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작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정훈의 말대로 장정 다섯, 그것도 정훈 기준으로 5명은 충분히 잘만한 공간이 보였다.
영복이나 만복이가 기준이 됐더라면 꾸겨 넣으면 10명까지도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이 정도면 날씨 더울 때, 서로 살갗이 닿아 기분이 상할 경우가 생길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우리는 정훈이 말한 물이 받아져 있는 곳으로 가서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면서 땀을 씻겨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땀도 거의 안 났을 한진이지만, 한여름에 그것도 등산씩이나 하다 보니 온몸이 젖어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견의 여지 없이 정훈이 안주상을 준비하는 동안 차례대로 몸을 대충이나마 씻었다. 그래도 저녁의 산 중이라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어서 땀을 씻어내고 난 뒤에는 살짝 서늘함까지 감돌았다.
씻고 나서 나는 구경 좀 할 겸 부엌을 어슬렁거리는데 그곳에서는 뭔가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런 냄새를 맡고 나니 어떻게 몸이 가만히 있겠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부엌까지 침투하고 있었다.
부엌에 들어서니 불 앞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정훈이 보였다. 정훈은 내가 들어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요리를 하고 있었다.
“정훈이형 무슨 요리를 하시길래 이렇게 좋은 냄새가 풍겨오는 거요? 잠깐 지나치다가 도저히 못 참고 들어오게 되었군요.”
“어이쿠, 언제 들어온 게야? 음··· 이 요리로 말할 것 같으면, 고기를 간장에 졸인 것인데, 뭔가 이것저것 섞이다 보니 독특한 맛이 좀 날게야. 고기부터가 엊그제 잡은 산돼지 고기에 간장도 꽤 오래 묵은 녀석이지.
그리고 산을 들락날락하면서 채집한 각종 약초가 들어가 있으니 복잡한 맛이 날 걸세. 물론 내가 하나하나 먹어본 녀석들이니 걱정은 말게나, 크하하핫.”
정훈이 가마솥 뚜껑을 잠시 들어 올리고 내용물을 보여주는데, 와··· 이거 다 먹을 수 있나? 밤새 잔치를 벌여도 모자라겠는데? 이 와중에 정훈은 몇 가지 요리를 더하고 있었다.
“아니 정훈이형, 이건 또 다 뭐요? 고기만 먹어도 배가 터지도록 먹겠는데 말이오.”
“크하하핫, 고기만 먹으면 아무리 맛있더라도 물리기 마련이지. 나물 몇 가지와 이건 생선을 넣고 끓인 탕이라네.”
들기름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나물과 방금 내가 맡았던 또 다른 냄새의 정체인 매운탕이 보였다. 이것 참··· 오늘 밤새야겠는데? 혜림에게 따로 말 안 하고 왔는데 이거 걱정시키는 거 아닌가.
“아, 온 김에 잘됐네. 저쪽에 보면 찬물에 술을 담가 놓은 게 있는데, 기다리기 적적하면 여기 나물과 함께 가져가서 한 잔씩 하고들 있게나.”
정훈이 가리킨 부엌 바깥을 보니 술병 여러 개가 물 위에 동동 띄워져 있었다. 아니, 저게 도대체 몇 병이야? 오늘 누구 하나 술 먹다가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 싶은 것인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아니, 정훈이형. 저렇게 많은 술을 누가 다 먹는다는 말이오. 그리고 우리는 집에도 들어가 봐야 할 텐데 말이오.”
“음? 아직 산이에게 못 들었나? 자네들 오늘 여기서 묵고 가는 것으로 되어있을 걸세. 산이 녀석이 혜림이에게 미리 다 말해놨을 것이야.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크하하핫.
그리고 이 술은 자네가 평소 마시던 탁주보다도 세지 않은 술이라네. 병이 저렇게 많아 보여도 크게 걱정할 필요 없지. 아니, 그보다 나를 뭘로 보는 것인가? 설마 저 술을 다 먹일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
뜨끔. 이곳에 와서 하도 술을 먹여대는 인간들을 많이 만난 지라 당연히 정훈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근데 또 모르지 아직 방심하면 안 된다. 일단 정훈 옆에 김산이 붙어있는 것부터가 경계 해야 할 상황이다.
어쨌든 혜림에게 미리 소식이 전달된 점은 참 다행이다. 혹시 모를 걱정 한 가지가 덜어지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 미리 말해 놓은 거였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걱정이 없군요. 그럼 일단 가져가 보겠습니다. 마저 고생하십쇼!”
마음이 놓인 나는 정훈의 말대로 술 한 병과 함께 나물을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김산은 나를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아유, 영준 형님. 이게 다 뭡니까. 말 하셨으면 제가 다 들고 왔을 텐데 말입니다.”
딱 보아하니, 김산은 한진과 붙어있으면서 묵언 수행을 한 것 같다. 입이 간질간질한 김산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크게 없는 한진과 단둘이 방에 있는 것은 고문이었을 것이다.
“쉰소리 말고, 정훈이형이 아직 안주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나물에라도 한잔하고 있으라고 하더라. 자 저기 상 좀 꺼내와 봐라.”
“예잇~ 영준 형님!”
김산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을 가져와서 술상을 피고는 수저까지 각자의 자리에 하나씩 딱딱 대접해놓았다.
“그리고 산아, 너 아까 혜림씨에게 우리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자고 갈 수도 있다고 전한 것 맞지?”
“어? 제가 형님께 말씀 안 드렸습니까? 예, 혜림이에게 말해놨습니다. 근데 혜림이도 대충은 알고 있던 것 같더라고요. 제가 오늘 영준형님과 한진형님이랑 정훈이형 집에서 술자리를 가진다고 했더니 오늘이 그날이냐고 그랬습니다.”
오호, 저번 생일잔치 때 있던 일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나보구나. 그렇다면 혜림이 그렇게 쉽게 허가를 낸 이유를 알겠다. 어쨌든 산이에게도 소식을 들었으니, 이제 거리낄 것이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오늘은 술 안 마시고 넘어가기는 글러 먹은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체념하고 날도 더운데 시원하게 한잔 들이키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어째 한진도 오늘은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한진 역시 오늘은 제대로 술 한잔하려는 기세랄까? 그러고 보니 정훈이 작전을 잘 세운 것 같다. 이런 산골에 그것도 늦은 시간 데려오면 할 수 있는 게 술 마시는 거 말고 뭐가 있겠는가?
물론 한진이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 나무라도 구해와서 휘두르든가 적당한 곳까지 뜀박질이라도 하든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한진이라도, 아니 오히려 한진이기에 대충 견적이 나온 것 같다. 이곳에서는 훈련이랍시고 움직이는 게 손해라고 말이다.
어쨌든 한진마저도 오늘은 술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으니, 김산은 재빠르게 한진의 잔에도 술을 따르고는 건배사를 외쳤다.
“자자, 그럼 우리 한 잔씩들 합시다. 영준형님과 한진형님의 생일을 뒤늦게 다시 축하하면서 위하여~.”
김산의 말과 함께 나는 물론 한진도 술을 한잔 쭉 들이켰다. 근데 음? 이거 진짜 술술 넘어가네?
도수가 막 낮은 것 같지는 않은데, 진하고 기분 좋게 풍겨오는 약재의 향이 알코올의 역함을 확 잡아줘서 그런지 역하다거나 하는 게 전혀 없었다. 이거라면 진짜 많이 마실만 하지.
정훈이 괜히 호언장담한 게 아닌 것 같음을 느끼며 나물무침에 천천히 한 잔씩을 음미하였다. 나물무침이야 뭐 나물무침이긴 한데, 종류가 4종류로 은근히 다양했다. 물론 들기름 빨로 맛 자체는 뭐가 덜 쓰고 뭐가 향이 더 나냐 정도의 차이였지만 말이다.
“음음, 깊은 산골에서 이렇게 나물에 약술과 함께 마시는 거, 꽤나 운치가 있네. 그래그래, 정훈이형과 산이 네가 괜히 이걸 생일선물씩이나로 포장한 게 아니었구나. 다음에 나올 안주 요리까지 생각하면 정말 좋은 선물 받는 것 같다. 고맙다.”
나는 색다르고 근사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산이에게 고마움을 표했는데, 산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물었다.
“아니 영준형님. 이게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물론 이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있는 것이긴 한데, 정훈형님이 말해주실 것에 비하면 이건 시작인데 말입니다.”
뭐라고? 정훈이 해주는 안주 요리와 각종 약술이 시작에 불과하다고? 도대체 정훈이 알려주려는 게 뭐길래 산이는 이런 소리를 할까? 산이의 말에 갑자기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그러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주려고 그러는 거지? 너 사람이 기대치를 높여놓고는 거기에 못 미칠 때 얼마나 실망감이 드는지는 알고 기대치를 높여놓는 거지?”
“오호, 그것참 맞는 말씀이네요. 기대치를 높여놓으면 당연하게도 상대가 실망할 확률이 높아진다라··· 그렇다면 애초에 기대치를 낮춰놓으면 상대가 실망할 일도 없고, 오히려 의외라고 좋아할 확률이 높겠군요! 좋은 거 배워갑니다!
아, 근데 정훈형님이 알려주실 얘기는 들을 만할 겁니다. 아니지, 들을 만한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가시려면 꼭 들어야 할 얘기라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 같네요.”
응? 조금 뒤에 들을 이야기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이거 더욱 무슨 얘기일지 궁금해지는데? 근데 우리와 함께라는 말에서 대충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마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정훈의 과거사나 비밀 같은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나는 김산의 말을 듣고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며 나름의 추리를 하면서 술도 다시 한잔하고 정훈의 요리와 정훈이 해줄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더 지나고 나니, 정훈이 거대하고 투박한 접시에 고기를 수북하게 쌓아서 가져왔다. 뒤이어 생선탕 또한 뚝배기 그릇에 하나씩 담아서 각자의 앞에 대령하였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면서 즐겨보세!”
정훈의 말과 함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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