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기자들과 술 한잔
내 소설의 연재 일자가 잡히고 나서 볼일도 다 봤겠다, 나는 집으로 다시 향하려고 했는데 그런 나를 양기탁은 붙잡았다.
“허허, 채선생 어딜 가시는 게요?”
어느새 내 칭호는 이제 영준 선수에서 채선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나저나 나를 왜 불러세우는 것이지?
“예? 이제 만세보 관련 회의도 끝마친 것 같고, 연재 일자도 잡혔으니 일이 다 마무리가 되었겠다 싶어서 집에 가보려는 참입니다. 다른 일이 또 있으십니까?”
“허허허, 무슨 일이 있고말고요. 저번에 백암 선생과 단재 선생이 술 한번 마시자고 했던 것 기억하시오?
그때로부터 벌써 한 달이 넘게 흘렀소. 그동안은 채선생도 바빴고, 나 역시 바빴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 일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니, 한잔하러 가시는 게 어떻겠소?”
아 맞다. 그런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지. 양기탁의 말대로 그동안은 우리 모두 바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머릿속에서 잊혀 갔었는데 말이다.
뭐, 나로서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이다. 마침 여유가 있는 편인 시기이고 하니 말이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죠. 다른 분들도 모두 시간 괜찮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저는 당연히 되고 말고요! 그럼 이따 저녁에 뵙는 것입니까?”
“그렇소. 내가 다 연락 취해놓겠소이다. 아, 채선생은 그냥 몸만 오도록 하십시오. 우리 신문사의 귀한 손님 모시는 거니 말이오. 장소는 종로의 평양냉면집으로 하려는데 괜찮겠소? 마침 여름이기도 하고 말이오.”
종로의 평양냉면집? 설마 그 집인가?
“저야 좋습니다. 그럼 저녁때 보겠습니다.”
···
···
오,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종로에 유명한 평양냉면집이라고 하면 이곳뿐이지. 바로 우리 야구단원인 남상혁이 전에 일했던 그 가게이다.
가게에 들어서자 주인어른이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이게 누구신지요? 혹시 YMCA 야구단의 채영준 선수 아니 십니까? 갑작스럽게 찾아주시고 무슨 일이 신지요?”
“안녕하십니까 주인 어르신. 다름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 예약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대한매일신보 기자분들의 예약이 있었는데, 혹시 그 모임에 일행으로 참석하시는 겁니까? 아유 잘됐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상혁으로 인해 안면이 터 있게 된 덕분에 냉면집 주인장의 안내를 받아 바로 예약석으로 갈 수 있었다.
김훈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음식점이라 그런지, 이 냉면집은 일반 손님을 받는 곳과 나름 VIP 손님을 받는 듯한 곳이 따로 있었다. 이 시대치고는 프라이빗함이 보장되는 장소라고 해야 할까?
은근 분위기가 잡혀 있는 이곳에서 나는 10분 정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인기척이 들리더니, 배설을 제외한 대한매일신보의 3인방이 들어왔다.
“채선생 언제 와 계셨던 것이오? 기다리게 한 것 같아서 송구스럽게 됐소. 오늘 배사장은 개인적인 일정으로 참석 못 하게 되었소.”
“그렇습니까? 그것 참 아쉽게 되었군요. 그건 그렇고 저는 기다리는 것이 익숙하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제가 원래 약속이 있으면 그보다 빨리 와서 기다리는 편이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껄껄껄, 그렇다면 다행이오. 자, 오랜만에 만나서 기억할지 모르겠소. 이쪽은 백암 박은식 선생, 그리고 이쪽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오.”
꽤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인지, 양기탁은 노파심에 다시 한번 나에게 함께 온 두 명을 소개했다. 물론 나는 그 둘을 모를 리가 없었다.
“기억을 못 할 리가 있겠습니까? 대 기자분들을 뵙겠습니다, 하하하.”
“허허, 대 기자라니, 일개 기자일 뿐인데 기억해주다니 고맙소. 나야말로 대선수이자 앞으로 대 소설가가 될 채선생을 보게 되었구려. 어쨌든 이렇게 모이게 되니 반갑소이다.”
박은식은 너스레를 떨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채선생 오늘 만남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술 한잔하면서 깊은 대화 나눌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참 반가운 인물이지만, 저번부터 은근 나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신채호였다.
“하하하,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깊은 대화씩이나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저는 그저 공놀이나 취미로 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제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다면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조금 불편해하는 티가 난 것인지, 양기탁은 분위기 환기도 할 겸, 오늘의 본 목적인 술 마시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했다.
“자자, 이제 인사는 이쯤 하도록 하고, 술잔을 맞대어 보는 게 어떠시오? 주인장, 아까 주문해 놓았던 음식과 술을 내어와 주도록 하시오.”
“예이~ 총무님~. 자, 여기 예약하셨던 음식이 나왔습니다.”
냉면집 주인장이 들고 온 음식 중, 우선 눈에 띄었던 것은 냉면은 냉면인데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냉면이었다. 와서 먹는 것은 다르구나!
“오, 이 냉면에는 얼음이 띄워져 있군요? YMCA 훈련장에서 시켜 먹을 때는 안보였는데 말입니다.”
“아, 그때는 아직 여름이 아니기도 했고, 아무래도 배달을 갈 때는 짧은 거리가 아닌 이상 금방 녹아버리기 때문에 육수의 농도 조절도 해야 하는 등 이만저만 수고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최대한 시원한 상태로 빠르게 배달 가는 것으로 타협을 했습니다.
대신 여름에 이렇게 직접 와서 드시게 된다면 지금처럼 얼음까지 동동 띄워진 냉면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음··· 현대 음식점에서 대놓고 배달과 홀을 저 정도로 차별한다는 발언을 한다면 뭇매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대라면 현실적인 여건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갈만하다.
애초에 지금 시대의 배달은 급한 이들을 위한 서비스 같은 개념이지, 배달이 메인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을 수 없는 시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자전거조차 제대로 보급이 안 될 시기이다. 배달 수단이라고는 오로지 발뿐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직접 와서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냉면을 한번 맛보게 되니, 배달 냉면은 급할 때가 아니라면 찾지 않게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저번에도 먹었던 수육도 따끈하고 먹음직스럽게 차려졌고, 따끈하게 튀겨진 전도 내어져 나왔다. 밑반찬으로 이 나물 저 나물도 깔렸지만, 그건 내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리고 술은 의외로 탁주가 나왔다. 그래도 신문사의 핵심 인사들, 아니 이미 대한제국 땅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물들인데 고급술 대신 탁주를 선택한 것이다.
내 의문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신채호는 잔에 술을 따르다 말고 나에게 물어왔다.
“채 선생 왜 그러십니까? 혹시 술 종류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탁주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여기 계신 분들도 다들 탁주를 드실 줄은 몰라서 조금 신기해서 그랬습니다.”
내 대답에 신채호는 진지한 표정에서 웃음을 짓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호탕하게 대답했다.
“하하하, 어떤 자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대한매일신보 사람들은 항상 탁주로 통일한다오.
맛도 맛인데, 우리 같은 자들이 비싼 술로 돈과 시간을 허비하고 다닌다고 하면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처럼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이들은 이런 행동 하나부터 조심해야 하고, 술은 기본에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대중도 대중이지만, 대한매일신보 주요 인사들에게는 아마 일본 쪽에서도, 대립 관계인 신문사 측에서도 주기적으로 사람을 붙였을 확률이 높다.
조금의 흠집이라도 잡아내어 어떻게든 메신저를 공격하려고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듣고 보니 제가 굉장히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제가 한양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더욱 그럴 수도 있지요. 자, 오해를 푼 김에 한잔 들이킵시다!”
술 마시러 와서 음식까지 나온 지 10분이 넘어서야 한잔하게 되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은 잔을 그대로 원샷으로 넘겨버렸다.
“허허, 채선생도 술을 좀 하시나 보오? 하긴 첫 잔은 다 같이 비우는 게 맞긴 하지. 자, 그럼 또 한잔 씩 받읍시다.”
그렇게 또 한잔을 받아들고, 나는 냉면 육수부터 쭉 들이켰다. 오오··· 확실히 얼음이 들어간 효과는 굉장한 것 같았다. 저녁이긴 해도 낮의 더웠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이 육수 한 모금에 싹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채선생 벌써 냉면 육수를 쭉 들이켰소? 하긴 여기 육수가 끝내주는 편이지. 주인장 여기 냉면 육수 좀 더 주시오!”
“이곳 냉면을 점심에 배달로 자주 시켜 먹어봤는데, 배달을 받아서 먹는 것과 직접 와서 먹는 것이 굉장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얼음이 무더위를 싹 가시게 만들어 주니 좋군요.”
“하하하, 잘 먹으니 보기 좋소. 역시 대장부는 먹는 것부터 잘 해치워야지.”
그렇게 우리는 음식 얘기를 하면서 한동안 얘기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취기가 슬슬 올라오자 서로 속마음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채선생, 이 나라의 국운이 어떠한 것 같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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