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이인직과 혈의 누
“우리 소설과 대조될만한 소설이라고요? 그 신문사가 어디고 그 소설은 또 무엇인지요?”
“아직 확실한 얘기는 아니고, 소문에 불과하오. 천도교 계열 신문인 만세보라는 신문이 얼마 전에 창간되었는데, 이 신문 또한 친일 단체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알려진 신문이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었소.
하지만 신문이 창간된 지 얼마 안 되어, 만세보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게 문제였소. 그리고 이 경영난에 빠진 만세보를 인수하려는 자의 뒷배경에 을사오적인 이완용이 있다는 소문이오.”
이완용이라고? 드디어 이 이름을 직접 들어보게 되네. 뭐, 말이 필요할까? 100년 이상이 흐른 현대에서도 이완용하면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이완용은 모를 수가 없지요. 근데 이완용을 뒷배경으로 가진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자는 누구인지요?”
“일전에 국민신보라는 일진회의 기관지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을 텐데, 혹시 기억하고 있소?”
“아, 그 우리 야구단에 부정적일 것이라는 신문 말이오? 기억이 나고 말고요. 그 신문이 어떻게 된 거요?”
양기탁은 입술을 씰룩대다가 잠깐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푸흡··· 사실 그 국민신보는 지금 정간이 되었소. 다시 한번 재정난에 의해서 말이오. 그럼 그렇지, 제정신이 박힌 이 땅의 백성 중에 그딴 불쏘시개를 읽을 이가 어디 있겠소. 크하하하!”
오늘따라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양기탁이었기에, 나는 딴 길로 새려는 그를 막아 세우고, 진도를 나가는 질문을 던졌다.
“근데 국민신보가 정간된 것과 만세보의 관계가 어떻다는 거요?”
“아, 미안하오. 국민신보놈들의 정간 소식이 워낙 반가워서 말이오. 근데 이 두 신문 사이에 끼어 있는 인물 하나가 바로 이완용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이인데, 바로 이인직이라는 자요.”
이인직! 최초의 신소설인 혈의 누를 썼다고 알려진 인물로, 이전부터 내 소설의 희생양으로 점찍고 있던 자이다. 그런 자가 드디어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은, 나의 소설도 날개를 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양기탁은 계속해서 이인직에 대해 자신이 아는 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러일전쟁 때부터 이완용의 통역관으로 인연을 맺었다고 하오.
그리고 그는 이완용의 권유로 국민신보의 주필을 맡게 되었고, 국민신보가 정간된 지금은 만세보를 집어삼킬 준비를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소. 그리고 그 만세보에서 그자가 집필하고 있는 소설을 연재하려는 계획이라고 하오.”
내가 알고 있는 날짜상으로도 딱 맞는 시기이다. 1906년에 연재가 시작되는 혈의 누,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만세보를 흡수하고, 만세보에서 연재를 시작하려는 이인직, 너무 척척 들어맞는다.
“오호, 그런 일이라면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겠군요. 제가 생각한 연재 시작 시기도 마침 이러한 때를 노렸습니다.”
“그럼 연재는 언제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이미 한 달 이상은 계속 연재해도 될만한 분량이 쌓여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놈들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바로 시작하는 것은 어떻소?”
“저는 이인직이라는 자가 먼저 연재를 시작한 뒤에 연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이인직의 소설과 대비되는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양기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대비가 된다고요? 이건 무슨 말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그냥 연재를 시작해도 이인직이라는 자의 소설은 충분히 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오.”
“영웅이 나오는 소설을 생각해보시면 빠릅니다. 영웅에게는 상대해야 할 적이 있지요? 특히나 그 적이 악인이라면 영웅의 편에 서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게다가 그 악인이 강한 상대인데, 그런 악인을 꺾는다? 더더욱 영웅에게 열광을 하게 되겠지요.
제가 노리는 바가 이것입니다. 이인직이라는 자의 소설이 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볼거리가 없는 지금, 충분히 이목 정도는 끌만 할 것입니다. 게다가 내용은 이미 예상이 가죠.
노골적인지 아닐지가 문제지, 그는 소설에 반드시 일제를 찬양하는 듯한 내용을 넣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완용이 그를 후원하는 이유가 없겠지요.”
내 설명에 양기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영웅은 적이 있을 때 더 부각이 된다라··· 상당히 그럴싸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완용이 그냥 이인직을 밀어주는 것은 아닐 테니, 이인직이 쓸 소설의 방향성 또한 맞는 얘기인 것 같소.”
“예, 이로써 연재 처부터 친일 신문과 일제에 맞서 싸우는 대한매일신보, 소설의 내용도 일제를 옹호하는 내용과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일제를 퇴치하는 내용의 소설 구도가 나온다면 그 차이는 엄청나겠지요.
그리고 이인직이 먼저 연재하게 하는 것에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또 있소? 계속 말해보시오.”
“바로 이인직을 구렁에 빠트리려는 것이지요. 총무님 말씀대로 초장부터 우리가 달려버리면, 바로 기세가 꺾여 언론사업에서 손을 떼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선점하면서 수익을 낸다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들어가 그들을 맹추격한다면, 그들은 빼도 박도 못하면서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 될 것입니다.”
이 설명을 듣자, 양기탁은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껄, 영준 선수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 같소? 나름대로 이 언론계에서 몇 년을 굴렀다고 자부하는데, 다 헛것이었다는 생각까지 드는구려. 큰 뜻을 알아 봐주지 못해 미안하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러한 생각도 있다는 것을 말했던 것뿐입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죠. 제 예상대로 흘러갈 수도, 총무님의 예상대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갑작스러운 양기탁의 발언에 당황한 나는 어떻게든 립서비스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나의 노력에 양기탁은 상관없다는 듯이 얘기를 이어갔다.
“하하하, 나 역시 맞는 얘기를 맞았다고 한 것뿐이오. 너무 신경 쓰지 마셨으면 하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영준 선수의 생각대로 흘러갈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오.
나는, 아니 우리 대한매일신보 측은 영준 선수의 의견에 따라 일정을 조율하겠소.”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이인직의 소설이 공개되는 날을 한 번 기다려봅시다. 그리고 그가 잠깐의 성공을 거둘 날까지 지켜보고요. 그때까지 저 역시 제 소설을 다시 한번 가다듬어 보겠습니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영준 선수. 아니 영준 작가 선생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군요.”
양기탁의 말을 끝으로 이 건에 대해 마무리 짓고 나는 대한매일신보에서 나왔다.
소설을 다듬는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일본의 압박이 걱정되어 조금 더 내용을 은유적으로 써야 하는 건가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내 뒤에 있는 것은 대한매일신보였다. 외국인 사장인 배설을 등에 업고 대한매일신보 기자들은 빠꾸없이 일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고는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대한매일신보에서 연재한다면 일제에게 검열당하는 일은 구한말 이전까지는 걱정을 덜 해도 될 것 같다. 제발 그때까지 배설이 버텨준다면 좋으련만······.
[1906년 7월 6일 대한매일신보]
다시 나는 대한매일신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저번에 한 이야기의 연장 선상이었다.
“와달라는 연락 듣고 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드디어 일이 벌어졌소! 만세보를 이인직이 인수했다고 하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만세보 이번 호부터 전면에 소설 연재에 대한 광고까지 싣고 있소이다.”
“소설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소설 제목은 혈의 누(血의 淚)라고 하오. 7월 22일부터 연재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 같소.”
!!! 역시 맞았구나. 내가 알고 있던 역사대로 이인직은 신소설 ‘혈의 누’ 연재에 들어간다고 한다. 근데 날짜가 7월 22일이라··· 야구단 일이 한창 바빠질 즈음에 연재를 시작하는구나.
“7월 22일이라···. 저로서는 날짜가 좋지 못하긴 하군요. 그때쯤부터 야구단 관련해서 행사 일정이 이어져서요. 하지만 어쩔 방법이 있겠습니까? 몸을 두 개로 만들어서라도 해내 보겠습니다.”
“하하하, 좋은 자세요.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쯤부터 연재를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까?”
“혈의 누 연재가 시작되고 나서 우리 소설의 광고에 들어가고, 2주 뒤에 연재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빠르게 시작하고 싶지만, 1주일 뒤에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바쁜 일들이 이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일이 해결되는 대로 바로 시작하도록 합시다.”
“좋소이다. 그럼 우리의 연재 시작 날짜는 8월 5일로 잡겠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