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무책임한 노인네와 실낱같은 희망
본 웹소설은 픽션이며 인물, 지명, 종교, 사건 등은 실제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다온이의 등쌀에 못 이긴 난
오랜만에 정인을 만나러 진짜
찻집을 향했다. 따스한 봄날의
데이트 이후로 더블데이트가 아닌
둘만 만나는 것이라 걱정이 좀
들긴 했어도 속은 알짜배기
여자라 친구를 만난다 생각
하기로 편하게 마음먹고
걸음을 재촉했다.
“ 도련님. ”
반갑게 맞이하는 소아의 모습에
난 잡생각을 떨치며 유정 특유의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 다온에게 들었습니다. 그이가
다행히 방면되었다고. "
“ 좀 상하기는 하였으나 목숨줄은
길었는지 무탈하게 나왔습니다.
그보다 바쁘다며 낭자에게 소식
한통 제대로 전하지 못하였군요.
괜한 심려를 끼쳤습니다. "
“ 아닙니다. 사내가 하는 일에
어찌 여인네가 왈가왈부 할 수
있겠는지요. "
“ 그보다 그 날 난데없는 일에
휘말려 많이 놀랐을 텐데... "
“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좀
놀라기는 하였으나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안타까웠습니다. "
그날 밤 집에 도착한 나에게
무슨 일인지도 알려주지 않고
돌려보내어 걱정을 잔뜩 하고
있던 다온은 내 방까지 따라
들어와 따지듯이 물었고 화를
내었다. 얼마나 놀랬을지 아는
나로선 다독이고 다독이기를
수십 번을 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다온이는 진정될 수
있었지만 소아는 영문도 모른 채
석환에게서 제대로 된 연유도
듣지 못하고 끙끙 앓았을 걸
생각하니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 만나자마자 소아의 마음부터
헤아려야했는데 '
“ 다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그대에게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이리 걱정을 하게
했군요. "
“ 석환 오라버니께서도 걱정 말라
하시었습니다. 태평성대와 같은
하늘 아래라도 억울한 일을 겪는
이들은 생기게 마련이니 괜한
물음은 두었습니다. "
“ 제가 원망스럽진 않았습니까. ”
“ 어이 그러십니까. 저를 걱정하셔서
말하지 않은 것을요. 저는 되려
도련님이 걱정입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
“ 우리 좀 걸을까요. ”
찻집 안이 미지근해서인지 아까부터
자꾸만 답답해져 조금은 쌀쌀해도
바깥이 낫겠다 싶어 먼저 제안
한 뒤 곧장 일어섰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의아함이 얼굴에
떠오르던 소아는 이내 옷가지를
챙겨 나를 따라왔다.
“ 제가 혹시 잘...못 ”
-----덥썩
-------?!
아직 따스한 기운이 남은 큰 손이
겨울 장옷 사이로 불쑥 들어왔다.
살짝 당황한 소아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어 좀 더 바싹 유정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른 이들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며 하지만
이미 표정에서 모든 걸 알아버린
난 굳었던 입매가 풀렸다.
때론 말보다 행동이 답일 때가
있다. 솔직한 다온과 달리
표현이 작은 소아에겐.
‘ 아니다. 석환이한테 듣기에는
유정이한테만 참한 것이라고 했지? '
그렇게 생각하니 다소곳한 소아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때
곁눈질 하던 소아의 눈에 딱
걸렸다.
“ 무슨 생각을 그리 하셔요? ”
“ 후후~ 그대가 내게 투정
부리는 걸 상상해 보았습니다. "
-----화끈
괜한 걸 물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귀엽다.
“ 소녀 부끄럽습니다. 너무 놀리지
마시어요. "
“ 그대가 날 조금은 원망했으면
합니다. "
“ ...?? ”
“ 그리고 속상하다 말도 해주면
좋겠습니다. ”
“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 말해주지 않으면 티내지 않으면
모릅니다. 사내라는 것들이 원래
그렇습니다. 아둔하여 사모하는
여인 마음 하나 살피지 못하니 "
“ 진정 그러길 원하십니까? ”
“ 그 모습 역시 내가 은혜하는
소아 당신이니 "
“ 도련... ”
소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지직--
“ 유....
“ 정ㅇ..아 ..? ”
----지지직-----
눈앞의 소아의 얼굴 위로 낯익은
얼굴이 겹쳐보였다.
“ 이..이든??? ”
낮이다.
소아와 걷기까지 하고 있는
분명 깨어있는 낮인데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든이가
보인다. 처음엔 소아와 겹쳐
보이다 선명하게 보이는 이든이의
얼굴.
“ 이든아~!! ”
“ 유정아 너야? ~!~@#$%^ ”
분명 이든이의 목소리다. 그런데 뒤에
말이 들리지 않는다. 눈물이 앞을
가려 얼굴까지 뿌옇게 보이는 게
미치겠다.
“ 도련님?? ”
그러다 들리는 또렷한 소아의 목소리.
다시 조선이다.
“ 도련님~ ”
잠시였지만 말을 하지 않은 탓에
소아가 놀란 듯 했다. 난 소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아까 했던 말을 기억하며 이어
갔다.
“ 보여주지 않으면 그 모습까지
은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제게도 기회를 주었으면 합니다.
좀 더 그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
그러자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이며
이내 답을 하는 소아다.
“ 지금으로도 충분한 것을요. 허나
그것은 자신할 수 있습니다.
혹여 저를 생각지 않으시고 다치
시거나 하신다면 아마 무서운
호랑이를 보실 것입니다. "
무서우라고 호랑이 흉내를 내는 듯
하나 그 모습도 참 귀엽다.
그런 소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유정의 특유 눈웃음을 잔뜩 보여주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다독여 준 뒤
아쉬움 가득한 소아를 예의바른
유정의 본모습으로 집까지 바래다
주고는 돌아서서 집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난
돌아서 집으로 향하려는 데 혼자가
되고 나니 아까 겪었던 기이한 현상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갑작스레 고장난
티비마냥 지직거리는 듯 하더니
겹치다 못해 또렷해졌던 이든이의
모습도 모자라 잠깐이었지만 나를
부르는 듯 한 이든이의 목소리. 마치
저 쪽에서 나를 찾는 것 같았다.
어쩌면...
“ 나와 여기의 유정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데 영혼뿐이라
모습은 그대로일 텐데. "
그렇게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생각에 빠진 채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 아.. 죄.. ”
“ 아이고 송구합니다. 천 것이
눈이 나빠... "
아무래도 양반을 친 것에 놀란
노파의 목소리가 역력하여 안심
시키려 상대방을 보니
“ 아니.. ?! 할머니? ”
앞서 주막에서 보았던 젊은 주모는
그저 닮은 사람이려니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분명 차에 치일 뻔한
할머니다.
“ 할... ”
“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늙으면 죽어야 하는 데 무신 목숨줄이
이리도 질긴 지 이것도 죄송합니다요. "
할머니의 목청이 점점 올라가니 주변
시선들이 하나둘 모이며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게 느껴져 난 황급히
할머니 손을 잡고 자리를 피했다.
“ 아이고오. ”
너무 세게 잡아당겼나 싶어 살피려
내려다보니 싱긋이 웃는 할머니다.
“ 하아~ 할머니이~! ”
“ 나 아직 귀 안 멀었어. 그리 소리
치지 않아도 다 들린다고. "
“ 제가 누군지는 알아보시겠어요? ”
“ 그러엄. 나 구해준 아가씨 아니야. ”
기가 막힌다. 분명 눈앞에 있는 나는
남자인데 내 영혼을 똑바로 보는 듯한
할머니.
“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어도 너무
길어서 말이죠. 지금 이 상황 설마
할머니께서 만들거나 그러신 건
아니죠? "
“ 글쎄다. 술을 잘 빚어서 준 건
기억이 나는 데 말이지. "
“ 아니~ 그 술을 저한테만 준 게
아니라 여기 유정이한테도 주셨어요? "
“ 원래 인연은 세월도 거스른다했으니
뭐 어찌저찌 이어진 것 일 테지. "
대충 얼버무려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게
보인다. 얄미워진 난 급한 성격을 냅다
드러내며 원망했다.
“ 아니 그 무슨 무책임한 말씀이세요?
일을 만들었으면 해결할 생각을
하셔야지. "
“ 그게 그러니까... 아직 술이 덜
익어서 말이야. "
“ 네? 뭔 소리에요 그게? ”
“ 시간이 좀 걸린다는 말이지.
어차피 기다려야 하는 거
아가씨가 벌인 일부터 해결하고
있어봐. 그러다보면 알아서 맞춰
질 테니까. "
“ 아놔~! 할~ 머~ 니~!!! ”
“ 아이고~ 귀청 다 나가겄네.
일이 좀 꼬이긴 했어도 잘 풀려
갈 테니까 걱정 말게. 술이 익는
동안 아가씨도, 그 곳에 있는
도령도 서로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
“ 네? ”
“ 앞뒤 꽉 막힌 건 도령 못지않게
아가씨도 똑같단 말이지. 쑥맥들이
스스로 할 수 없던 정리를 지금 잘들
하고 있거든. 아가씨도, 도령도 "
이 할머니가 내 인내심의 한계치를
보려고 하려는지 자꾸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빠져나가는 듯 해
어른이고 뭐고 열 받은 난 사자후를
내지르려는 데
“ 둘 다 어떻게 똑같이 절절한
상대방 마음을 몰라주는지 원. 쯧쯧
어쨌든 조만간 술이 익어지면 알아서
바꿔줄 테니. 좀만 참으라고. "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연거푸
내며 화를 돋구다 마지막엔 마치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줄 듯 한
말로 나를 진정시키는 듯 하더니
금세 눈 앞에 사라져 버린다.
“ 어??? ”
그때는 술병에 잠시 눈을 뒀다
뗀 뒤라 뭐지? 하며 어리둥절
했지만 지금은 분명 마주했는데
두 눈 뜨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어이가 없다.
“ 기가 막히는 노릇이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
그러다 어이없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 아니다. 홀린 지 오래지. ”
그렇게 잠시 성균관 내에서 심심할
월아가 떠올라 집으로 돌아가던
걸음을 돌려 월아의 영역 근처로
향했다.
“ 월아~ ”
최대한 인적이 드문 적당한 곳에서
조용히 불러보니 대답도 모습도 없다.
아무래도 조금 더 성균관 쪽으로
가야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 왜? 』
“ 그냥 ”
『 싱겁긴. 』
“ 실은 좀 전에 어이가 없는 일이
있어서 내가 귀신에 홀린 게
맞나 확인해 보려고. "
왜 불렀나 싶어 묻는 데 내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오니 한동안 나와
지내다보니 잠시 잊었던 것인지
새삼 자신이 산자가 아닌 걸
깨달은 듯 살짝
------찌릿
살짝 삐친 듯 하다.
“ 아... 너도 여자였지. ”
『 할 말 없으면 돌아가지. 』
“ 아니야. 사실 나를 이 곳으로
보냈을 사람을 만났어. "
『 거기다 나를 보게 한 이일 수도
있겠군. 』
“ 글쎄, 그것까지는 생각 못했네.
하기야 이 곳으로 보낼 정도라면
너와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하... 그것보다
내가 여기서 뻘짓하고 있을 때
여기 있던 유정인 내가 왔던
곳에서 뻘짓을 하고 있다 생각
하니 미칠 노릇이다. "
『 뭔짓? 』
“ 삽질.. 아니 내 몸에 들어간
남자애가 내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 돌겠네. "
『 아... 큭큭 너만큼이나 황당해
하고 있겠군. 』
“ 술이 익어야 바꿔준다는 알아
듣지도 못하는 말만 하고는 뽕~
하고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순식간에 사라졌어. "
『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해결할 방법은 있다는 소리니
괜히 끙끙 앓지 말고 그보다
네겐 해결해야 할 것이 있지
않아? 』
“ 지금으로선 파고들지 말고 현감이
명부를 찾길 바래야지. 이왕이면
그것에 대한 걸 초이가 모르고
지나간다면 더더욱 좋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 "
『 흐음... 글쎄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된다면야
좋겠지만 조만간 빼앗겼던 물건이
세상에 드러날 듯 한 데... 』
“ 뭐?? ”
명부가 드러날 것이라는 듯한
말을 하는 월아가 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보는 데 찜찜하다.
“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해.
답답하게 끌지 말고~~! "
나의 호통에 마지못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잇는 데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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