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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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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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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DUMMY

가락국 남쪽 남가락해를 대형 화물선 두 척이 유유히 흘러갔다. 중앙 돛대 꼭대기에는 아만상단 산곡지부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하늘은 높고 맑았다. 시야가 환하게 트여 수평선이 칼로 자른 듯 또렷했다.

계절성 폭풍이 가라앉은 다음에는 바다와 대기가 안정되기에 항해하기 알맞았다.


새날호와 다찬호, 두 척의 화물선은 가락국 용영도에서 출발해 월영국의 나슬항에 물건을 내리고, 그곳의 특산품도 옮겨 실었다.

지금 두 척의 배는 가락국 운화도로 가고 있었다.


서내을에서 모피와 가죽, 말린 고기를 싣고, 대양을 건너 유우대륙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다.

최종 목적지는 탁라국 금협이지만, 실제로 그곳까지 갈 배는 아니었다.


산곡에서 운화도로 바로 가지 않은 이유는 월영국과 과희국에 퍼져있는 패거리까지 모여들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만상단 최대의 무모한 도전이니 도적들이 놓칠 리 없었다.


두 척 중 앞서가는 새날호의 뱃머리에서 중금의 서글서글한 가락이 울려 퍼졌다.


대원들은 갑판 위에서 연주를 들으며 싱글거렸다. 벼르고 벼르던 과업을 눈앞에 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들이 아끼는 가족이나 친구만이 아니라 수많은 목숨이 안타깝게 사라졌다. 결단을 내린 대현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빠르고 힘찬 중금 연주는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북돋아 주었다.


연주를 끝내고 일어선 누리예에게 새날호의 선장이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얼굴과 손에 바람과 싸운 흔적이 깊어 오랜 세월 바다에서 살았음을 보여주었다. 나이는 누리예의 두 배에 가까우니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뱃사람이었다.


장공거에서 돌아와 방위대에서 일할 때도 함께 항해했고, 아만상단의 수비대가 된 이후에는 더 자주 보았으니 누리예와 하란에 대해서는 가족처럼 훤히 아는 사이였다.

“날이 갈수록 소리가 좋아지는구나.”

“좋게 들어주시니 감사해요.”


“들샘과 은뫼는 어떠냐? 엄마와 떨어져도 잘 지내지?”

“언니가 잘 돌봐주니까요. 수비대에 제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알고, 오히려 절 응원해줘요.”

누리예는 소매 안에 감춰진 팔찌를 쓰다듬었다.

떠나기 전 들샘이 만들어준 팔찌였다. 아이들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철이 빨리 들었네. 떼쓰는 아이들도 많은데.”

선장이 모자를 눌러쓰며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틀 정도면 운화도에 닿을 것이다.


“지부장도 대단한 여장부야. 행장이 된 건 상직님이 주선했다 해도 총관에서 지부장까지 된 건 혼자 힘이니 말일세. 자네도 마찬가지지만, 아, 그러고 보니···.”


무슨 말이 이어질지 훤히 알기에 누리예는 자리를 피하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조금 전까지 마롯줄과 돛대줄 주위에 오글거리던 대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누리예가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선장은 자기 생각에 빠져 그녀를 보지 않았다.

“이제는 남자를 만날 때도 되지 않았나?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가만. 늘참이 하란과 동갑이지? 늘참 부대장도 여태 혼인한 적 없잖나?”

자기 생각을 뿌듯해하며 선장이 양쪽 볼을 부풀렸다.


“언니가 들으면 화낼 거예요. 두 사람은 그냥 친구니까요. 대현부님도 중매 못 해서 안달이라는데, 선장님까지 그러세요?”

“하긴, 대현부님은 그럴 만도 하지.”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판 위로 누군가 올라왔다. 누리예는 때를 놓치지 않고 늘참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장님, 전 할 일이 있어서···.”

“어, 아니, 선박 연합에도 괜찮은 사람 많은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선장을 뒤로하고 누리예는 성큼성큼 늘참에게 다가갔다.


회색 두건을 두른 늘참은 조금도 맥족 같아 보이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너나족 뱃사람이었다.


선장과 항해사, 몇 명의 조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단 수비대와 믈아치 부대원이었지만, 수비대원 외에는 누가 보아도 뱃사람들이었다.

완벽한 변장은 믈아치의 자랑거리였다. 아무도 믈아치인 줄 모르므로 자랑할 상대가 없지만.


누리예는 앞장서서 상층으로 내려갔다. 씩씩거리는 그녀를 따라가며 늘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선장님이 또 혼인 얘기를 했나 보죠? 대장이 재혼할 때가 되었다는 건가요?”


“오늘은 언니 얘기였어요. 부대장님도 엮인 건 모르시죠?”

“아하, 난 빼주시지.”

“대현부님이나 선장님이나 어쩜 그리 똑같은지. 인연을 맺어주지 못해 안달이에요.”

“하하. 그 나이 때는 쓸쓸하니 그러시겠죠.”

늘참의 너털웃음에 누리예도 덩달아 살웃음을 지었다.


*


선장실 옆에 마련된 자신의 방에서 누리예는 익족의 깃털을 만지작거렸다.

모든 준비를 마쳤고, 바람도 적당하여 항해는 순조로웠다. 계획대로라면 광검국의 친위대도 남가락해로 들어섰을 것이다.


가능하면 부장이 먼저 도착해 동행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단서가 붙은 일이었으므로 일정이 바뀔 이유는 없었다.


여전히 깃털은 상자 속에 고요히 누워있었다.

‘이걸로 뭘 하는 걸까?’


누리예가 깃털을 흔들자 늘참이 탁자 옆으로 와 앉았다.

“존준 친위대의 부장이라고 했죠? 믿을만할까요?”

“대부님 눈에 들었다면 틀림없을 겁니다. 서로 목숨을 기대는 일이니 섣불리 추천했을 리 없지요.”

“상직님의 사람 보는 눈은 믿을 수 있죠. 아, 창고의 상자는 계획대로 배치했습니다.”

“상자라니 재밌네요. 정박하기 전에 자물쇠를 점검해야겠어요.”


선창에는 천장까지 닿을 만큼 커다란 상자가 가득했다. 며칠 후면 그대로 수용소가 될 것이다. 입구 쪽에는 진짜 물건이 들어있지만, 눈을 가리기 위한 장식이었다.


운화도에서 화물선이 정박할 만한 항구는 두 곳이었다. 서쪽의 서내을과 동쪽의 가농.

도적들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이 서내을이므로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했지만, 가농도 놓칠 수 없었다.


“서내을에서 가농으로 최단기간에 끝내야 합니다.”

“은신처는 모두 알았으니 가능합니다. 저희가 조사한 것과 익족이 알려준 정보도 일치하고요.”

“우리 목표는 도적 소탕이지만, 대현부의 목적은 다릅니다. 그분은 현무를 찾고 싶어 하세요. 운화도에 없다면 다른 지시가 내려올 겁니다.”

누리예가 깃털 끝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현무 간미후를 본 적은 없지만 많은 기록을 조사했다.

어리지만 사려 깊고 현명하다고 했다. 정작 그녀가 어디 있는지 모르면서, 그 이름으로 움직이는 세력이 점점 커졌다.


이번 출정에서도 현무에 대한 단서가 나오면 누리예는 언제라도 그곳으로 떠날 것이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미조에게 맡기십시오. 그 녀석 나이는 어려도 실력은 뛰어나니까요.”

늘참도 지도를 바라보다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창문으로 포슬포슬한 깃털 하나가 날아들었다.

방을 휘휘 돌던 깃털은 자기 짝을 알아보고 누리예의 손등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다.

“이게 연락인가?”


누리예의 질문과 함께 깃털이 지나온 길이 지도 위 허공에 펼쳐졌다. 남가락해와 운화도의 동쪽 해안이었다.


여객선이 보였고, 깃털을 날리는 한 남자가 보였다. 노랗고 둥근 눈, 뾰족한 코, 황톳빛 머리카락을 가진 초라한 여행자였다.

‘금묘족?’


깃털이 하늘거리며 한 가닥 한 가닥에 머금은 소리가 떠올랐다. 그것은 누리예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광검국 이곤입니다. 산곡으로 가던 여객선을 도적이 장악했습니다.’


깃털은 여객선 주변의 바다와 뭍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해변에 정박한 범선은 도적들이 쓰던 배였다. 낡고, 부서진 모양이 유령선처럼 보였다. 아직 침몰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늘참은 팔짱을 끼고 서서 누리예의 신호를 기다렸다. 깃털이 전하는 말을 못 들으니 그녀가 생각에 잠긴 것으로 보였다.


‘가농에서 북쪽으로 하루거리입니다. 아이들을 포함해 백오십 명 가까이 묶였습니다.’

누리예는 아이들이 잡혀있다는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용각국 무사들이 도와주니 전력은 충분합니다. 이곳은 그들과 처리하고 무성산을 넘어 서내을로 가겠습니다. 해오름부대는 계획대로 진행합니다.’


누리예의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빠르고 강한 빛이 지나갔다.

‘서내을과 가농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어!’


‘두 깃털이 공명점을 찾았으니, 지니고만 있어도 연락할 수 있습니다.’

이곤의 말을 신호로 누리예도 방법을 깨달았다.

두 깃털의 공명점을 통해 말을 전달하는 것이다. 허공에 나타난 풍경도 눈으로 본 것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이해한 것을 아는지 깃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기다려라. 작전을 변경할 테니.”


깃털은 펄럭거리다 상자 속으로 내려앉았다.

상직 갈청에게 받은 상자 안에 똑같은 깃털 두 개가 자리 잡았다.


*


선장은 굳은 얼굴로 지도만 내려다보았다.

“새날호는 예정대로 서내을로 가고, 다찬호를 가농으로 보내자 이 말이지?”


“무성산을 넘어 가농으로 가는 일정을 줄이는 거죠. 그쪽 무사들로 전력이 충분하다니 동시에 시작합니다.”

“갑자기 항로를 바꾸면 적들이 눈치채지 않을까요?”


늘참이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깃털을 보지 않았다면 갑작스러운 작전 변경이 터무니없다고 했을 것이다. 신비한 깃털은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것도 좋죠. 미리 소문을 냈으니 이미 운화도로 들어가고 있을 겁니다. 따로 수색할 필요 없이, 한 번에 해치우죠.”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라야지.”


“다찬호는 부대장님이 지휘해주세요. 가농에 가서 부대장을 찾으라고 하겠습니다.”

“잡혀있다는데, 가농까지 올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을 겁니다.”

공명점을 찾았다니 언제 어디서든 연락이 가능하다. 길이 어긋나도 쉽게 바로잡을 것이다.


*


선장실을 나오며 누리예는 내내 가슴에 걸린 단어를 되새겼다.

‘용각국에서 온 무사? 혹시 장공거 출신인가?’


장공거를 생각하니 타내 대모가 옆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도록 타내 대모가 도와주는 것이다.


‘모르는 길도 두렵지 않다. 타오르는 불길로 길을 만든다.’

누리예는 장공거에서부터 버팀목이 되어준 문장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깃털은 인사하듯 눈앞에서 살랑거리더니 이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

뱃머리에 선 누리예와 늘참은 깃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리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팔찌에 손을 올렸다. 작은 조약돌 세 개가 나란히 묶인 것이다.

들샘과 은뫼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울렸다.

‘삼신성이 엄마를 보살펴 줄 거예요.’


점점이 떠 있는 섬들 사이로 푸른 바다가 맑고 시원한 하늘빛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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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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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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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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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5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5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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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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