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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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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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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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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누_모함

DUMMY

공량원 마당으로 들어선 아침 햇살이 뒤편 남새밭까지 길게 늘어졌다.

이맘때는 바론이 바위언덕 위 약초밭을 돌볼 시간이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재바우는 기다리지 못하고 다급하게 바론을 불렀다.

“원장님! 큰일 났습니다! 원장님!”


재바우의 새된 목소리는 다솜관 이 층에 머무는 아랑누의 잠을 깨웠다. 그 소리에는 긴장과 불안이 섞여 어지러웠다.

아랑누는 지팡이를 잡고 슬그머니 복도로 나왔다.


바론이 마당으로 내려오자 재바우가 달려갔다.

“원장님! 큰일 났어요, 녹디약방에서 사람들이 소란을 부린답니다. 이스락성 정찰대도 들이닥쳐서 약방을 뒤집는대요.”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녹디에서 지은 약 때문에 사람들이 배탈과 설사를 일으켰다는 거예요.”

“뭐라고요? 허! 어서 갑시다.”


바론은 약초 바구니를 던져놓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잠시 후 바론은 재바우와 함께 말을 타고 문을 빠져나갔다.


아랑누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금은 쫓아갈 수 없지만, 점심 전에는 약방에 닿을 것이다. 오히려 그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아무 문제 없던 약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 누군가 손을 쓴 것이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다음에나 차분히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랑누가 공량원 정문을 나서는데 하얀 형상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온설지였다.

눈 밑이 거뭇한데다 눈빛이 헤롱거렸다. 눈꼬리며 입술을 늘어뜨리고 시무룩한 얼굴로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온형, 무슨 일이야? 뭐가 뜻대로 안 돼?”

“말 걸지 마. 지금 제정신 아니니까.”


“약방 거리에 갈 건데 같이 가자.”

“거기 가면 좋은 거라도 있어?”

“누가 녹디약방에 몹쓸 짓을 했어. 알아보려고.”

“그렇다면야.”

온설지는 애써 기운을 차리며 아랑누와 걸음을 맞추었다.


“기대하던 밤이 아니었나 봐?”

“처음엔 좋았어. 바람도 달랐고, 별과 달, 삭도 보였어. 별똥별도 봤어. 말로만 듣던 것을 직접 보니까. 어찌나 신기하고 아름다운지. 너무 흥분해서 잠이 안 왔지. 잠드는 게 아까울 정도였어.”


온설지가 말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숨이 찰 때까지 뛰어다녔다고. 그런데 계속 그러고 있으니 지루한 거야.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 밤의 시간이 아까워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지.”


그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아랑누에게 거뭇한 빛깔은 보이지 않았지만 퀭한 기운은 읽을 수 있었다.


아랑누는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온형, 앞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밤을 맞아야 하는데 조급할 이유 있어?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배워.”

“어떻게 해야 제대로 즐기는데?”


“저녁에 좋은 술을 준비할게. 재바우 아저씨가 맛보라고 이스락주를 주셨거든. 이 지방 특산물이래. 안줏거리도 얻을 수 있어.”


“그거 좋다. 이스락주라···.”

온설지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지. 이제 평생토록 쭈우욱 내 시간이니까 말이야. 하하하.”


저녁까지도 온전히 자신의 모습이 된다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아끼는 벗을 다시 만나 달빛 아래 술을 나누는 것.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니 광대뼈가 서서히 올라갔다.


‘아치. 널 만나면 밤새워 이야기할 수 있어. 그때가 곧 오겠지?’

그와 만나 술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좋았어! 누, 약방 거리까지 뛰어가자고!”

온설지는 아랑누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뛰어올랐다.

여우처럼 가볍고 빠른 몸놀림으로 날듯이 바닷가를 질러갔다.


*


녹디약방에 도착했을 때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약방 안의 집기와 약통이 온통 뒤집힌 채 어지러이 흩어져있었다.


바론은 보이지 않았다.

재바우와 일꾼들이 물건을 정리했고, 일꾼들 사이에 시나도 섞여 있었다.


아랑누는 시나에게서 나오는 기운을 읽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도 돌과자 할머니와 같은 기운을 만나다니···.’


하지만 재바우에게 먼저 다가갔다.

“사람들은 돌아갔나요?”


“원장님이 공짜로 고쳐준다고 해서, 입원 준비하러 돌아갔죠. 다 나을 때까지 일 못 하는 손해도 물어주겠다니까 그냥저냥 갔는데,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참내.”

재바우는 혀를 끌끌 찼다.


“우리 약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는 걸까요?”

그의 목에서 새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맞은편 가게 지붕에서 소란을 구경하던 도조는 아랑누를 발견하고 날아 들어왔다. 구경거리를 놓칠 도조가 아니었다.

“설명해드리죠. 제가 신조의 눈으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단 말입니다!”


아랑누는 귓가에서 소곤거리는 도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물이 있을 만한 곳을 찾겠다고 나가더니 이번에도 시장에서 밤을 보낸 것이다.


“바로 요 앞 크심약방 구심이란 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지금 바론 원장하고 얘기하고 있는데요? 으뜸초 어쩌구···.”


“쉿. 확실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 지켜보자.”

아랑누는 도조의 날개를 쓰다듬고는 약초를 쓸어 모으는 시나에게 다가갔다.


“선사님, 돌과자를 안 팔고 약방에서 일하시네요?”

시나는 허리를 숙이고 비질을 하던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의 눈길이 여인의 검은 신발에 머물렀다가 길고 검은 치마로 옮겨갔다.

하늘거리는 얇은 천 아래 흰 치마를 겹쳐 입어 검은색인데도 검게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배에서 가슴과 얼굴로 옮겨갔다.


검은 눈가리개를 하고, 잿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젊은 여인이었다. 대답도 못 하고 어버버거리던 시나의 눈에 검은 까마귀가 보였다.


여인의 왼쪽 어깨에 앉아있는 새는 분명 그가 아는 새였다.

‘도조?’


도조는 시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여기 하나 또 있네라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 그게.”

선사 시나는 뭔가 대답하려다가 여인의 오른손에 있는 하얀 지팡이를 보았다.


‘개심수 가지?’

시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너나족 사람인데, 정체가 뭐지?


그녀의 오른 손목에서 신령석이 반짝였다. 주홍빛 돌에 황금색 줄. 진백성단이 가꾸는 별숲에서만 나오는 신령석이었다.


신령석은 인간세에서도 몇 군데 나오지만, 그것은 색깔도 기운도 달랐다. 왼쪽 손목에 있는 연둣빛 돌이 그랬다.

사람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어도 천인이나 선인은 금방 알아보았다.


“호, 혹시···. 미사랑님의···.”

시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랑누는 생글생글 웃으며 두 손으로 지팡이를 세워 잡았다.

“전 아랑누입니다. 과희국 모여사원의 귀령송환사이죠.”

“예? 아, 예···. 저, 저는 시나입니다. 수련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나는 허둥대며 팔을 휘저었다.


도조는 약방 안을 기웃거렸다. 다른 구경거리도 많은데 구태여 선사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아랑누가 시나의 소매를 잡았다.

“돌과자 만드는 곳에서 오신 분 맞지요?”


시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아 숨을 멈췄다.

“저, 그럼 저쪽으로 나가서···.”


시나가 뒤뜰로 나가는 문을 가리키자 도조는 부리를 부르르 털면서 아랑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랑누님, 저는 임무를 완수하러 가겠습니다요!”

“임무? 무슨 임무?”

“그거 있지 않습니까? 그거. 하여튼 나중에 뵙지요.”


도조는 발끝에 힘을 주더니 날개를 펼쳤다. 천장 바로 아래까지 날아올랐다가 문밖으로 내달았다.


아랑누는 도조의 임무가 무엇인지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이스락성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싶어 몸이 달았을 것이다.


뒤뜰로 나오자 시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사관 재바우와 일꾼들은 약방을 정리하느라 그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과자는 어떻게 아십니까?”


“어릴 때부터 시장에서 돌과자 할머니를 만났거든요. 탁라국에서 쇳디를 처리할 때 니무님이 도와줬어요.”

‘니무가?’

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러다 인간세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겠지.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아랑누가 시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무래도 누가 일부러 한 일 같네요.”


시나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저, 그것이···.”


시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담장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아랑누와 시나는 숨을 죽이고 담장 옆으로 다가갔다.


“손해가 클 텐데? 세금도 못 낼 형편이라면서?”

크심약방의 구심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어떻게든 치료를 끝낼 테고,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흥, 다시 없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나? 사람 일은 모르네.”

바론의 말에 구심이 자신 있게 되물었다.


“내가 도와줌세. 으뜸초를 넘기게. 소천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니 자네도 손해 보지 않게 주선하지.”

“괜한 수고 하셨네요. 전 환자들을 맞아야 하니 돌아가겠습니다.”

바론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담장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구심의 기운을 더 잘 읽을 수 있겠지만, 어둡고 탁한 기운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니 구심도 그 자리를 떠났다.


담장 옆에 서 있던 아랑누가 돌아섰다.

“저 사람이 약을 쓴 걸까요?”

“글쎄요. 의심을 가지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미심쩍은 일이라.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유일한 동물 아닌가요?”

시나는 누구인지 추측하면서도, 실제로 약을 쓰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아랑누는 그의 혼란스러운 기운을 읽어냈다. 누군가를 의심하면서 그 의심을 떨치려 하고 있었다.

“녹디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군요. 선사님은 누구인지 아시지요?”


“그게···. 너른벌에 이런 말이 있죠. 추측은 오해를 낳는다고.”

“전 알아봐야겠어요. 도와주시는 거죠?”

“예에? 제가요?”


시나가 무언가 설명하려는데, 온설지가 뒤뜰로 찾으러 나왔다. 아랑누가 없어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거기서 뭐하고 있어? 대충 끝났어. 가자고!”

아랑누는 실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온형이 기다리네요. 다시 올게요.”

아랑누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총총히 돌아섰다.


시나는 환희와 불안이 뒤섞인 애매한 마음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미사랑님의 혼 조각인가? 아닌데, 평범한 너나족 여인이던데. 단지 보통 사람보다 영력이 뛰어나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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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아랑누_적응 기간 22.07.24 31 0 15쪽
152 아랑누_공량원 22.07.23 38 0 12쪽
151 아랑누_재회의 약속 22.07.23 32 0 11쪽
150 아랑누_바론과 니엘 22.07.23 45 0 12쪽
149 아랑누_소천국 말리항 22.07.23 37 0 11쪽
148 천계_미사랑_소명 22.07.22 35 0 13쪽
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4 0 10쪽
146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4 0 13쪽
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5 0 10쪽
144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22.07.21 34 1 11쪽
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4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4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7 1 11쪽
137 천계_미사랑_금지된 벽 22.07.20 35 1 12쪽
136 사로잔_얼음섬의 초대 22.07.19 38 1 13쪽
135 사로잔_이어지는 추측 22.07.19 37 1 11쪽
134 사로잔_미완성 작전 22.07.19 37 1 10쪽
133 사로잔_모퉁이를 돌아 22.07.19 35 1 12쪽
132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0 1 11쪽
131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22.07.18 42 1 12쪽
130 사로잔_빛의 환상 22.07.17 42 1 11쪽
129 사로잔_선사 하날 22.07.17 41 1 10쪽
128 사로잔_중독 22.07.16 58 1 11쪽
127 사로잔_변경된 계획 22.07.16 43 1 13쪽
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3 1 11쪽
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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