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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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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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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3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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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아랑누_바론과 니엘

DUMMY

이스락성의 남쪽 바닷가는 정령의 안개 숲과 이스락성으로 이어지는 해변길, 준령고원으로 들어가는 갈래산 입구가 모인 곳이었다.


이곳에 바론의 공량원이 있었다.


남쪽으로는 해풍나무숲이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북쪽으로는 우뚝 솟은 바위언덕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아주었다.

이름이 언덕일 뿐, 깎아지른 바위가 솟아난 것으로 사람이 오르는 길은 없었다.


한 줄로 길게 이어진 절벽은 건물로 따지면 오층 정도의 높이였고 넓이로 따지면 마을 하나가 들어설 정도였다.

정령의 안개 숲과 사람이 사는 바닷가를 나누는 경계이기도 했다.


바론의 약초밭은 그 꼭대기 비옥한 땅에 있었다.


그는 잘 자란 약초를 바구니에 담은 뒤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하늘 꼭대기에 삭이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수평선 위로 서서히 해가 떠올랐다.


말리항 바닷가에 공량원을 짓기로 결심한 그 날처럼 하늘은 맑았고, 바다는 고요했다.


공량원 세 개의 건물 지붕이 내려다보였다.

다솜관, 베롱관, 노담관의 세 건물은 그동안 바론에게 치료받은 사람들과 그를 돕는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은 곳이다.


그는 한 손으로 힘껏 기지개를 켜고 바구니를 들었다.

‘니엘이 올 시간이네.’


가볍게 발돋움하자 보이지 않는 날개가 그를 사뿐히 땅에 내려놓았다. 비조족의 보이지 않는 날개 덕분에 오층 높이의 절벽 위에 약초밭을 가꿀 수 있었다.


*


아침 햇살이 공량원 앞뜰까지 길게 늘어졌다.

바론은 바닷가까지 내려가 발아래 찰랑이는 바닷물을 마주 보았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올 시간이었다.


눈 부신 햇살을 따라 사박거리며 니엘이 걸어왔다.

해초처럼 짙푸른 머리카락과 화사한 얼굴에서 물방울이 몽글몽글 흘러내렸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기가 말랐다. 바론 앞에 섰을 때는 입고 있는 옷도 보송보송해졌다.

무릎을 살짝 덮은 치마 아래 가느다란 종아리와 맨발이 드러났다. 어차피 바다로 들어가면 지느러미로 바뀌기에 신발을 챙길 이유도 없었다.


니엘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지금 나왔어.”

바론은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짧은 입맞춤을 나누고 나서 니엘은 짊어진 주머니를 내렸다.

“이것 좀 봐. 아주 탄탄하게 자랐어.”


불룩한 주머니에는 바닷속 바위틈에서 자라는 알록달록한 해초들이 가득 담겼다. 모두 훌륭한 약재로 각자의 자리에 들어가면 바론의 특제약이 될 것이다.


“잘 자랐네. 들어가자. 아침 준비해놨어.”

바론이 니엘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공량원의 다솜관으로 들어갔다.


*


누군가 바론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원장님, 이스락성 대표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황갈색 머리카락을 정수리까지 틀어 올린 재바우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냘픈 목소리였다.

열병을 앓고 난 후 목소리를 완전히 잃을 뻔했으나 바론의 도움으로 겨우 말하게 되었다.


재바우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것을 보고 니엘이 재빨리 편지를 받아 읽었다.

“연합에서 또 계략을 꾸몄어. 세금을 두 배로 내라는데? 녹디약방과 공량원 모두. 연합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나?”

“말이 됩니까? 베롱관에 비가 새는 것도 못 고치는데요.”


“베롱관에 있는 분들은 어때요?”

바론은 연합에서 온 편지는 옆으로 제쳐두고 환자에 대해 물었다.


재바우가 콧등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약이 듣지 않아요. 날이 흐리고 바람이 심해지면 어김없이 발작을 일으켜요. 바다 괴물을 본 사람에게는 소용없어요.”


“내가 아는 처방은 다 썼는데도 효과가 없다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이제 하늘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수밖에.”

니엘이 바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

바론은 깍지 낀 두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재바우는 공량원의 존폐가 더 걱정이었다. 공량원이 살아남아야 다른 환자도 돌볼 것이 아닌가.

“세금 못 내면 문을 닫으랍니다. 이건 대놓고 문 닫으라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그의 커다란 주먹이 허공을 휙휙 가로질렀다.

니엘은 바론의 얼굴을 살피더니 재바우를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그들이 복도를 지나가며 나누는 소리가 집무실까지 아련하게 들렸다.

“베롱관 고치려면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봐 줘요.”


“예. 그나저나 제대로 돈을 받는 건 어떨까요? 사정을 봐주는 것도 좋지만, 이대로 가다간 공량원이 문을 닫겠어요. 뭐, 저도 그렇게 도움을 받았지만요.”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면서 복도에도, 집무실에도 정적만이 남았다.


바론은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공량원 앞뜰의 정자와 그 뒤로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허름하게 모양만 갖춘 정자지만 그에게 치료받은 사람들이 나무를 모아다가 지은 것이다. 그래서 더 의미 있었다.

반듯하고 기품 있는 정자는 아니지만 수더분하고 자연스러워 더 마음이 갔다.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정자로 향했다.

잔잔한 파도소리와 선선한 바람이 정자를 가득 채웠다.


‘스승님. 전 아직도 갈 길이 머네요.’

바론은 펄럭이는 오른쪽 소매를 붙잡고 정자 기둥에 기대어 섰다.


한낮의 해를 똑바로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다에 비친 물비늘은 해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약방을 녹디라 짓고, 이곳을 공량원이라 부른 건 모두 스승님의 뜻을 이어가고 싶어서였습니다. 아시죠?’

지위와 신분, 부유한 정도를 떠나 누구나 공평하게 치료하는 것은 녹디사원의 아도대사가 알려준 신념이었다.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아도대사가 그에게 준 사명도 그것이었다.

‘네가 배운 의술로 사람들을 살려라. 여기 계속 머물면 너도 나아질 수 없고, 너와의 인연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나을 수 없으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쪽 팔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잃었고, 또 많은 것을 얻었다.

체험과 실전을 통해 의술이 늘었다고 생각했건만 도무지 고치지 못하는 병자를 보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는 이스락성 대표까지 나서서 녹디약방과 공량원을 빼앗으려 한다. 이전에 받았던 협박과 회유도 고스란히 기억났다.


바론은 고개를 돌려 세 개의 건물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공량원과 녹디약방을 잃으면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요?’


그곳에서 병자들은 한 마디, 한 마디에 귀 기울이며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


수평선을 마주 보고 바론은 돌이 된 듯 서 있었다. 그를 지켜보는 니엘의 눈동자도 어느새 촉촉해졌다.


*


말리항의 남쪽에 인어족의 쉼터가 섬처럼 솟아있었다. 바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바다 위까지 솟아올라 작은 섬처럼 보였다.


공량원에서 보면 서쪽에 떠 있는 해설피탑으로, 공량원 앞 바닷가에서도 잘 보였다.


인어족장 에레혼과 정령 원로 마로니는 변신을 풀고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에레혼은 바위 의자에 앉아 아홉 개의 다리를 꿈틀거렸다.


마로니는 물에 섞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물살이 비껴가면서 문득 형상을 비춰주므로 거기 마로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내뿜는 독이 갈수록 강해지니, 내가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원로님이 사라지면 다른 정령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크심약방에서 듣지 않았나? 저들이 뿜어내는 독기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해왕님께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분도 부쩍 건강이 나빠지셨다네.”

“그래서 해룡을 부르신 건가요?”


“우리가 왔다 가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해왕님이 마지막 소원을 이루시면 좋겠군.”

마로니가 움직이자 바닷물이 흐르는 듯 모이는 듯 뭉클거렸다.


너른벌에서 인어족과 정령이 살 수 있는 땅은 소천국 뿐이었다. 해왕이 가까이 살기에 가능했다.

해왕이 바다에서 신령한 기운을 밀어주었고, 정령 원로 마로니가 이 힘을 받아 안개를 만들었다. 그 안개가 사람들이 내뿜는 독기에서 작고 여린 정령들을 지켜주었다.


에레혼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다리가 춤추듯 사방으로 꿈틀거리자 물살이 일렁였다.

“해왕님의 마지막 소원이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겁니까?”

“아니. 우리는 도울 수 없네. 우리 힘 밖의 일이지.”


“그게 뭡니까?”

“암흑성 미사랑님을 다시 만나는 것.”

마로니의 소리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바닷물이 물바람을 만들며 뭉쳤다가 퍼져나갔다. 바람이 해설피탑에 부딪치자 우웅 소리가 메아리쳤다.


마로니를 감싼 물벽이 쿨렁거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생각에 빠져 몸이 흔들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면, 그때 못한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해왕님과 제가 기다리니 부디 잊지 마십시오.’


마로니가 간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부르자 소천국 내륙의 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해설피 탑 주변에도 엷은 안개가 내려앉았다.


*


니엘은 바론의 약을 들고 정자로 향했다.

언제나 환자가 먼저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니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그를 돌봐야 했다.


니엘은 그의 오른팔이 되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일을 도우며 약을 챙겼고, 재바우는 식사를 차려 들고 윽박질러가며 바론이 그릇을 비울 때까지 지켜보았다.


바론은 바닷바람에 오들거리면서도 정자에 서서 바다만 바라보았다.


“약 먹을 시간이야.”

니엘이 모포를 덮어주자 그는 힘겹게 웃음 지었다.


그의 눈길이 반짝이는 수평선에 머물렀다.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 생각해봤어. 새로운 약초일까, 새로운 처방일까. 어쩌면 연합에서 더 좋은 의원을 데려올지도 모르지.”


“넌 잘하고 있어. 할 수 있는 건 다 했잖아?”

니엘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바론도 왼쪽 팔로 니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공량원을 지킬 수 있을까?”

“다 잘 될 거야. 난 믿어. 하늘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니엘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바론이 가득 들어찼다.

바다를 마주하고 나란히 앉아 어깨를 기댔다.

그를 위해 확신에 찬 말을 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스락성의 대표 중길은 오래전부터 녹디약방과 공량원을 노렸다. 약에 대해서도, 의술도 아는 것이 없지만 이스락성에서 가장 유명하니 욕심낼 만 했다.


세금을 더 내도 다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은 중길이 원하는 세금을 낼 만한 여유도 없었다.

공량원의 수입은 늘 빠듯했다. 그럭저럭 유지될 정도였다.


치료비가 없는 사람들은 빨래를 하거나, 장작을 구해오거나, 몇 해가 지난 후에 갚기도 했다. 그래도 그냥 떠난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 돌아와서 갚아주었고, 그런 손길이 모여 지금까지 공량원이 이어졌다.


베롱관과 노담관은 사람들이 조금씩 일손을 보탰으니 잘 지은 건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비가 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바다 괴물이었다. 사람도, 인어족도 피해가 심했다. 그들은 바다에서도, 뭍에서도 손 쓸 수 없는 애매한 영역에 있었다.


‘원로님도 정체를 모른다니···. 그 정도 힘을 가진 존재라면 분명 요귀일 텐데.’

니엘이 한숨을 내쉬자 바론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마워. 니엘. 걱정 마. 난 물러서지 않을 거니까.”

“응, 나도 고마워.”


서로의 체온이 닿자 어디선가 희망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근거 없는 희망이라도 놓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별이 더 빛나듯 그들의 빛도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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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랑누_바론과 니엘 22.07.23 46 0 12쪽
149 아랑누_소천국 말리항 22.07.23 3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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