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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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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9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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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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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로잔_모퉁이를 돌아

DUMMY

산등성이에 서니 운화도의 동쪽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왼쪽은 크고 둥근 바위가 절벽을 만들고, 오른쪽은 낭떠러지이지만 산길이 넓어 수십 명이 행군할 정도였다.


“여기서 늘참 부대장을 기다리죠.”

이곤이 흙과 풀을 살펴보더니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안 지나갔어요. 아티재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니 여기로 올 겁니다.”


무성산 어디로든 길이 많지만, 믈아치 대원들은 몇 대의 수레를 끌고 이동하므로 그들이 다닐만한 길은 이곳뿐이었다.


이곤은 도적 패거리를 감시하는 아순치에게 다가갔다.


도적들은 길가 바위 그늘에 자리 잡고 잠에 빠져들었다. 선사 하날이 걸어놓은 결계에서 빠져나오기는 어려웠다.

백사귀파인 두목도 몸부림치다가 지쳐 쓰러졌다. 이곤이 다가가자 두목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신음을 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하날은 알아들었지만, 구태여 얘기하지 않았다. 정귀를 부르며 찬양하는 말을 들어서 좋은 것도 없었다.


아순치는 잠들지 않은 몇몇 도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해적패 두목이랑 산적패 두목이 따로 있다고?”

“그렇소. 하지만, 다른 사람은 본 적 없소.”


이곤과 아순치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며 은신처의 물건이 어디로 나갔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빼앗아 온 것은 알아도 나간 것은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날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서둘러 돌아앉았다. 사로잔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빛만 봐도 알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미사랑님의 혼 조각이라도 함부로 나설 수는 없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천계로 못 갈 텐데, 인간세의 규칙을 따라야지.’

하날은 이번 일에 끼어든 자신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발아래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사로잔은 고개 돌린 하날을 보면서도 감탄을 쏟아냈다. 나루뫼가 선사라고 알려주며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대단한데. 선사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니.’

알려지지 않은 은신처를 찾아낸 것도 놀라웠고, 백사귀파 두목을 몇 마디 주문으로 포박한 것도 놀라웠다.

남동쪽의 은신처 움막에 결계를 쳐서 도적들을 묶어놓은 것도 상상 밖의 일이었다.


‘저 정도 능력이면 너른벌 어디서나 인정받겠는걸? 선사라면서 왜 상단에서 일하지? 혹시 상단마다 선사가 숨어있나? 아만상단처럼 거대상단이나, 루월상단에도?’

사로잔이 턱밑을 긁적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루뫼에게로 옮겨갔다.

‘저자도 수상해. 평범한 용병이 아냐. 선사를 알아본 것도 그렇고, 이 무늬가 무언지도 알고 있어.’

손등의 무늬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차갑게 거절했다.

‘주인이 모르는 일이면 나도 말할 필요 없소.’


사로잔은 벌떡 일어나 나루뫼가 앉아있는 벼랑 끝으로 갔다.


탁 트인 바다가 눈에 들어오니 가슴이 시원해졌다. 온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서늘한 바람이 몸속 깊이 파고들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나루뫼는 검을 끌어안고 바다만 내려다보았다. 진백성 율명에게 받은 검이었다. 그에게는 최대 최고의 보물이 되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나?”

“기억하지 못하면 기억 못 하는 이유가 있겠지.”


“나루뫼, 자네 검이 바뀌었어. 그건 너른벌에서 만들 수 없는 거라고. 어떻게 된 거요?”

“왜 내가 설명할 거라 생각하지? 관심 없소.”

나루뫼의 말투에 사로잔은 애써 화를 참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지만, 그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빛의 사람과 무슨 사이일까? 백진석은 어디서 갑자기 생겨났을까? 저 검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사로잔은 엄지를 이빨 사이에 끼고 잘근잘근 씹었다. 생각할수록 생각은 미로로 빠져들었다.


‘나루뫼가 날 도와줬단 말이야. 분명 감시할 대상이 사라지면 곤란하다고 말했어···.’

아우, 진짜. 왜 하필 그때 정신을 잃어서는.


‘혹시 한울과 관계있는 존재일까?’

결코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문제였다. 사로잔은 주먹을 쥐었다가 가까스로 풀었다.


드문드문 기억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순서를 맞추었다. 단어도 몇 개 기억했다.

배신, 반인반천, 소멸이란 말이 들렸고 나루뫼의 검이 부러져 날아갔다. 곧이어 그도 나가떨어졌는데, 빛이 번쩍한 순간부터 기억이 없었다.


‘어쨌든 그자는 날 죽이려 했어. 왜? 무엇 때문에?’

진유가 반인반천이라는 말인가. 그럴 만도 해. 그 힘은 사람이 아니었어.

사로잔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앉아서도 나루뫼 역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며 검을 쓰다듬었다. 눈이 빛났고, 뺨도 불그레해졌다.

‘진백성님을 직접 보다니. 역시 살아있기를 잘했어.’


진백성 율명이 말한 다음 일을 생각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떠날 때가 되었다.


사로잔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나루뫼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아?’


혼자 싱글거리는 나루뫼를 바라보며 어깨를 오므렸다. 사로잔도 그의 시선을 따라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닷가 마을을 내려다보던 사로잔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죄어오며 방망이질 쳤다.

“어리?”


‘어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혹시···.’

벌떡 일어섰지만 지금 당장 마을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손가락 끝이 떨렸다.

“어리···, 잘 버티고 있겠지?”


“나귀는 다시 사면 되지 않는가?”

나루뫼가 콧소리를 냈다.


사로잔은 떨리는 손으로 휼과 모얀을 꼭 잡았다.

“내게 온 것들은 모두 소중해. 나와 인연을 맺은 것은 허투루 보내지 않아.”


단검 휼에 박힌 백진석이 손바닥에 닿았다. 다른 보석과 달리 따뜻했다. 사로잔은 나귀의 맥박을 느끼듯 힘껏 휼을 쥐었다.


나루뫼는 지긋이 사로잔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등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 빛이 점차 흘러나와 그녀를 감싸며 후광을 만들었다.


‘한낱 혼 조각인 줄 알았는데···.’

진백성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


늘참은 사로잔이 내미는 손을 잡으며 재빨리 그녀를 살펴보았다.

‘대장이 말하던 그 사로잔인가?’


힘차고 또랑또랑한 눈동자와 환한 미소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무사지만, 누리예의 말대로라면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친구 해무찬과 다루영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몸놀림과 무기가 어떤 위력을 내뿜는지.


늘참은 사로잔의 양쪽 허리에 매달린 짧은 막대기와 긴 막대기를 눈여겨보았다. 맥족의 눈에는 그것을 감싼 신비한 기운이 보였다. 너른벌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순치의 부채까지 보고 난 후, 늘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 네 명만으로도 믈아치 부대와 맞먹겠어. 이들이 아군이라 천만다행이군.’


믈아치 부대원들에게 도적 두목과 패거리를 인계하고 나서 이곤이 다가왔다.


“두목이 자결하려는 걸 주술로 막아놨습니다. 최후 결정은 대현부께서 하시겠지요?”

“그 정도는 누리예 대장이 결정할 겁니다. 아티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아, 대장은 이미 떠났습니다.”

이곤의 설명에 늘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노란 새가 둥지를 떠나 날개를 잃었네. 해가 지기 전에 쉴 곳을 찾아줘야 한다네.”

순간, 늘참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이곤이 설명을 계속했다.

“익족이 와서 데려간 것 같고, 지금은 미조라는 분이 지휘할 겁니다. 제가 아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서둘러야겠군요.”


늘참이 가까이 있는 부하를 불러 속삭였다.

다른 대원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무리에게로 돌아섰다.


“노란 새가 날개를 잃었다. 지금 당장 아티재로 향한다!”

그의 말에 믈아치 부대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포로를 데리고 가농으로 내려갈 조와 아티재로 갈 조가 정해졌다.


선사 하날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가농으로 내려가는 수레 뒤에 섰다. 아순치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 가시오?”

“아하하, 저는 두목의 주술을 지켜야 하니 함께 가야죠. 혹시 주술이 풀리면 어찌합니까?”

하날은 두 손을 모으고 굽신거렸다.


아순치는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 눈에는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오만?”


“무슨 말씀을. 할 일이 있으니 가야죠. 상단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수리호를 놓쳤으니 다찬호까지 놓치면 안 되죠.”

하날은 싱글싱글 웃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여기서 더 얽히다가는 무슨 일이 날지 모르지. 지금이야 괜찮다 해도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를 일이야. 인간세에 끼어드는 건 이 정도로 정리해야 해.’

노각부줄에 들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 더 큰 문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따라 사실을 바꾸기도 하고, 부풀리기도 한다. 어느 때는 좋았던 것이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악랄하다고 비판받는다.

이번 사건은 한때 암흑성이었던 미사랑의 일이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더 하다가는 괴이한 소문으로 번질 것이다.


“최선을 다한 겁니다. 정말 여기까지입니다.”

“정 그렇다면···. 알겠소. 인사를 제대로 하려고 벼렸는데 할 수 없지. 도와줘서 고맙소. 진심이오.”

“무슨 말씀을···.”

하날이 기뻐하며 활짝 웃자 아순치의 얼굴에 장난기가 돌았다. 하날에게 속삭였다.


“도적과 믈아치의 기억은 지울 수 있어도 우리 기억은 못 지울 거요.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마시오. 선사님.”

아순치는 가볍게 어깨를 다독이는데, 하날은 바윗덩어리가 쿵쿵거리는 것 같았다.


“암흑성의 혼 조각을 모두 찾게 되면 꼭 말씀드리겠소.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선사가 있다고.”

아순치는 부채 끝으로 감물 빛 머리카락을 넘기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하날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순치의 걸음이 향하는 곳에 사로잔이 있었다.


사로잔이 하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떠날 것을 안다는 듯 잘 가라는 배웅이었다.

멀리 서 있는 데도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무늬가 또렷하게 보였다.


손등의 무늬에서 황금빛이 새어 나오더니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빛은 아늑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밝고 따뜻한 빛이 하날의 몸을 감쌌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암흑성으로 다시 오실 거였군요.’

정작 사로잔은 모르는 징조를 하날은 받아 읽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미사랑의 혼 조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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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잔_모퉁이를 돌아 22.07.19 35 1 12쪽
132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0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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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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