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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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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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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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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DUMMY

차원의 정수에서 나온 이후 미사랑은 기력을 찾지 못했다. 모든 수련을 중단하고 누워서 지냈다.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천인과 천사들이 걱정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왔지만, 조용히 눈만 깜빡거렸다.


하늘의 빛이 사그라지자 태왁이 탕약을 들고 들어왔다. 북천의 별숲에서 구한 숨담즙이었다.

“미사, 좀 어떠냐?”

“많이 좋아졌어요. 곧 일어날 수 있어요.”

숨담즙을 삼키느라 얼굴을 찡그리는 미사랑을 태왁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율과 여하는 시험을 정했다더구나.”

“벌써 그렇게 됐어요? 그건 무결의 고리가 곧 열린다는 거잖아요?”

그나마 끌어모은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미사랑은 떨리는 눈으로 암흑성 태왁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면 자신이 암흑성이 된다. 무결의 고리가 곧 열리기에 새로운 삼신성을 위해 마련된 시험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울고 싶었다.

태왁과 주다, 우지개를 다시는 못 본다니.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우리가 너무 오래 버텼지. 너도 시험을 정해야 할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율과 여하는 무슨 시험을 치르나요?”

“율은 북천의 일그러진 궤도를 바로잡기로 했단다. 이전의 인간세가 파괴되면서 생겨난 균열 말이다.”

“네. 율이라면 해낼 거예요.”


율명이 예전부터 하고 싶어 한 일이다.

불완전한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니까. 무슨 일이든 깔끔하게 처리하려는 율명을 떠올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여하는···. 인간세의 선사들이 노각부줄을 거치지 않고도 서로 연락하도록 하겠단다. 지금은 선사들이 왔다가 다시 가야 하니까. 인간세에서 통할지 모르겠구나.”


“아무래도 천선계와는 다르니까요. 방법을 찾아도 인간세에 영향을 주면 안 될 거고···. 여하가 어떻게 할지 궁금해요.”

“할 수 있으니 하겠다고 했겠지.”


태왁은 조심스럽게 미사랑의 손을 잡았다.

무결의 고리를 앞두고 부쩍 힘이 약해져 지푸라기를 얹는 것 같았다. 태왁의 주름진 손등을 바라보니 목이 메었다.


“미사, 다시는 금지된 벽에 가까이 가지 마라. 널 잃는 줄 알고 얼마나 두려웠는지 아니?”

“네. 다시 갈 일은 없을 거예요.”

“너니까 살아나온 거다. 다른 천인이었다면 닿기도 전에 녹아버렸을 거야. 조심해라. 금지한 이유가 있을 테니.”


태왁은 말을 끊고 숨을 들이마셨다.

“거기서 뭔가를 보았니?”


“아니오. 너무 순식간에 지나쳐서 아무것도 못 보았어요.”

미사랑은 미리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 다행이다.”

태왁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사가 금지된 벽에 들어간 것을 아유라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게 걱정하며 찾아올 정도는 아닌데···.’

태왁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유라가 요즘은 여하를 찾지 않더구나. 그렇게 많이 의지하더니···. 천선계에 적응했나.”


미사랑은 태왁의 신력이 거의 훼손되었음을 깨닫고 서글퍼졌다.


암흑성의 신력이면 아유라의 소망을 들었을 텐데, 그것을 듣지 못한 것은 신력이 지워진다는 뜻이다. 그토록 애타게 무결의 고리를 기다린 이유이기도 했다.


미사랑은 눈물을 참으며 암흑성단의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


기력이 회복되자 많은 일이 밀려있어 자리에 앉아있을 여유도 없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영천옥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슬픈 영혼이 기다릴 것만 같았다.

‘영천옥부터 들러봐야지.’


미사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라함도 암흑성단에 도착했다. 그는 바구니에서 돌과자를 꺼냈다.


“와, 이거 라온님이 또 만들어주셨네?”

미사랑이 눈웃음을 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여라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장난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괜찮은 거 맞아? 아직 아픈 것 같은데?”

“조금.”

미사랑이 다시 웃었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어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유라가 진백성단에 자주 간다며? 율이 친해지고 싶어 했는데 잘 된 건가?”

“음.”

여라함은 답을 피하고 앞장서 걸었다.


두 신성을 위해 공명의 들판은 선선한 바람을 불어주고 뭉게구름을 끌고 와 눈 부신 빛을 가려 주었다.


“여기서 대련하던 거 생각난다. 그때 참 좋았는데. 여하, 나중에 또 대련해줄 거지?”

“당연하지. 너와 상대할 수 있는 천인이 없으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미사랑이 조용히 웃었다. 그런 모습이 낯설면서도 애틋했다.


미사랑은 영천옥을 향해 돌아섰다.

“난 슬픈 영혼을 찾으러 가야 해.”

“같이 갈까? 슬픈 영혼을 어떻게 찾는지 궁금했거든.”


“함께 가는 건 괜찮아. 하지만 매번 슬픈 영혼을 찾는 게 아니라서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아를 찾고 나서는 아직 못 만났어.”

“무아? 선계에서도 유명해. 선인들보다 선도를 잘 깨우쳤다고.”

“그래? 굉장히 열심히 하거든.”


그들은 영천옥을 향해 날아갔다. 염라성역을 지날 때는 둘 다 말이 없었다.


미사랑이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아유라가 휘모랑을 사랑하듯 대명천과 영천옥의 모든 영혼을 보살피기를, 그들을 위로하기를.


영천옥 앞에 닿자 미사랑이 걸음을 멈추고 여라함을 돌아보았다.

“슬픈 영혼을 돌보는 일은 위험해. 전염성이 강해서 슬픔에 중독되거든. 하지만 보람 있는 일이야. 끝없는 일이기도 하고.”


여라함이 입구의 거대한 기둥을 바라보았다.

“영혼은 어떻게 위로해?”

“그냥 듣는 거야. 영천옥도 나름의 질서가 있거든. 마치 인간세 같아.”


“이번에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너와 연결된 혼이 있을 거야. 공명점이 맞아야 볼 수 있으니까. 내가 찾는다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찾는 거지.”


*


개심수 사이를 걷다 보니 평소와 다른 공기가 맴돌았다. 여라함의 팔을 잡아끌었다.

“맑은 영혼이 있어.”


개심수 가지 위에 영혼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미사랑은 그 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혼을 읽으며 그가 하소연하는 기억을 열어보았다.


여라함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여하가 자기와 맞는 파장을 느꼈던 거구나.’


미사랑이 싱긋 미소 지었다.

“여하, 네게 필요한 영혼을 구해줄게.”

그녀가 손을 들자 나뭇가지 위에 머물던 영혼이 손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인간의 혼이로구나. 왜 울고 있니?”

“이 슬픔을 덜기 위해 울고 있습니다.”

“무엇이 너의 슬픔인지 말해보렴.”


영혼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두 번의 삶을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상인으로 이름을 떨쳤죠. 어렵게 사업을 일으켰는데 전 재산이 바다에 가라앉았습니다. 그때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다시 태어났을 때도 그 기억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저는 장사에는 손대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익혔습니다. 어려운 살림에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의술이 높아진 것이 화근이었지요.


왕궁의 전문의가 되었지만, 왕이 급사하자 저도 사약을 마셔야 했습니다. 사람을 위한 의술을 펼치지 못했고, 더 배우려던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죄책감과 비통함에 사로잡혀 이렇게 떠돌고 있습니다.”


“너의 간절함이 너를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원하는 것이 뭐야?”

“모두 허망합니다. 그저 사라지고 싶습니다. 이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너의 슬픔이 아무리 깊다 한들 나의 어둠만 못하단다. 다시 기회를 줄 테니 선도를 닦는 것은 어떠니?”

“왜 그런 기회를 주십니까. 저는 하찮은 영혼인데요.”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어. 네 삶과 죽음이 너를 내게 이끌었으니 그만하면 되었다. 마침 네 능력이 필요한 신성이 있으니 그와 함께라면 너도 소멸을 꿈꾸지 않을 거야.”


미사랑이 영혼을 들어 올리니 영혼에 걸맞는 모습이 만들어졌다. 단정하면서도 강단 있는 선인의 모습이었다.


“널 부녹이라 부를게.”

“부녹···.”

이름도 없던 영혼은 자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미사랑이 여라함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의 문양을 부녹에게 심어줘.”


여라함이 숨결을 불어넣자 부녹의 어깨 안쪽으로 영진성의 표식이 들어갔다.


“그 문양이 영진성단으로 널 이끌 거야.”

미사랑은 부녹과 여라함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여라함에게서 멈추었다.


여라함은 다음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영진성단으로 들어서는 선인들만 보았기 때문에 선택받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무아에게 천선계에 대해 가르쳐주라고 해야겠다. 그래도 되지?”

“물론.”

“무아가 잘 가르칠 거야. 부녹은 네게 최고의 보좌가 될 거고.”

미사랑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어렴풋이 그들의 앞날이 보였다.


“표식은 영진성단에 대해서만 알려주니 암흑성단에는 내가 데리고 가야겠다. 여하, 먼저 갈게.”

미사랑이 부녹의 팔을 잡고 날아올랐다.

부녹은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여라함은 멀어지는 미사랑을 보며 미소 지었지만, 곧 어두운 그늘이 눈 밑에 서렸다.

“미사, 또 미래를 본 거야?”


여라함은 그들이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무결의 고리에 들 때까지 미사랑이 평안하게 천선계에 머무는 것.


*


암흑성단에 도착하자마자 미사랑은 무아를 불렀다.


자신의 집에서 책을 쓰던 무아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암흑성단 입구로 달려 나갔다.


미사랑 옆에서 처음 보는 선인이 비틀대며 중심을 잡느라 애쓰고 있었다.


“미사랑님, 부르셨습니까?”

“무아, 새로 만난 선인이야. 천선계에 대해 알려주고 영진성단으로 보내줘.”


“알겠습니다.”

무아가 숙였던 허리를 세워 부녹을 보았다. 부녹 역시 무아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

무아가 묻자 부녹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 굉장히 낯이 익는데···.”


미사랑이 한 걸음 떨어져서 둘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만났던 접점이 그들 사이에서 반짝거렸다. 그녀에게 그 접점이 보였다.


첫 번째 생에서 부녹은 거부상이었다.

상단을 이끌다가 도적을 만났고, 도망쳐 들어간 곳이 무아가 사는 오두막이었다.


무아는 밥을 나눠주었고, 부녹은 얼마간의 생활비를 남기고 떠났다.

물건을 되찾은 다음 부녹은 가난한 선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다.


두 번째 만남은 두 번째 삶에서였다. 무아가 재상의 수석 비서였을 때, 의술을 배우러 상경한 청년을 만난 곳은 구휼소였다.


무아는 가난한 청년이 일하는 틈틈이 의서를 베끼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친분 있는 의원이 조수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녹을 추천했다.


사람일 때는 몰랐겠지만 천인과 선인이 된 지금은 서로의 결을 알아볼 것이다.

미사랑은 그들이 서로를 읽도록 내버려 두고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무아는 난감했다. 새로 온 천인을 가르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영진성단으로 갈 선인이라지만 천인이나 선인이나 한가지였다.


자신의 집으로 부녹을 이끌면서 어떻게 미사랑을 만났는지 물었다.

“미사랑님을 어떻게 알아보았소?”


“처음에는 검은 구멍이 다가오는 줄 알았소. 어둠보다 짙은 어둠.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검은 형상이었다오. 나를 불렀을 때 비로소 그분의 모습이 보였소.”


“말씀하실 때는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메아리 같지 않소?”

“딱 맞는 말이오. 은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잔잔한 미소와 다정한 눈을 보니 소멸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미사랑님을 흠모하는 선인이 하나 더 늘었군. 난 무아라고 하오.”

무아가 손을 내밀었다.


부녹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난 부녹이오. 잘 부탁하오.”


그들을 감싸고 한 줄기 향기로운 바람이 스쳐 갔다. 그 향기는 바람을 타고 수애천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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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아랑누_바론과 니엘 22.07.23 45 0 12쪽
149 아랑누_소천국 말리항 22.07.23 37 0 11쪽
148 천계_미사랑_소명 22.07.22 34 0 13쪽
147 천계_미사랑_갈등 22.07.22 34 0 10쪽
»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4 0 13쪽
145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5 0 10쪽
144 천계_미사랑_차원의 방문자 22.07.21 34 1 11쪽
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4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4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7 1 11쪽
137 천계_미사랑_금지된 벽 22.07.20 35 1 12쪽
136 사로잔_얼음섬의 초대 22.07.19 38 1 13쪽
135 사로잔_이어지는 추측 22.07.19 37 1 11쪽
134 사로잔_미완성 작전 22.07.19 37 1 10쪽
133 사로잔_모퉁이를 돌아 22.07.19 35 1 12쪽
132 사로잔_소환 명령 22.07.18 40 1 11쪽
131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22.07.18 42 1 12쪽
130 사로잔_빛의 환상 22.07.17 42 1 11쪽
129 사로잔_선사 하날 22.07.17 41 1 10쪽
128 사로잔_중독 22.07.16 57 1 11쪽
127 사로잔_변경된 계획 22.07.16 43 1 13쪽
126 사로잔_작전회의 22.07.15 43 1 11쪽
125 사로잔_새날호와 다찬호 22.07.15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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