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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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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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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미사랑_회복

DUMMY

은잠루가 완성되자 율명은 아유라를 위해 하늘거리는 천 가리개를 걸었다. 기둥 사이사이에서 살랑이며 빛과 바람을 운치 있게 만들었다.


여라함은 연못에서 키울 물고기 세 마리를 가져왔다.

“이건 세 개의 행운을 뜻해. 은잠루에서 편히 지내기를 바라.”


아유라는 그의 선물에만 활짝 웃었다.

미사랑이 심어준 꽃나무나 율명의 가리개에는 고개만 까딱거린 것과는 전혀 달랐다.


세 가지 색깔의 물고기를 연못에 풀어주며 이름도 지어주었다.

“끌랑, 아나, 솔거.”

아유라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실렸다. 그들의 이름을 부른 건 차원의 틈에 갇힌 이후 처음이었다.


‘여기 휘모랑의 환신이 있고, 내가 있어.’

휘모랑을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휘모랑은 어떤 신이었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현명하고, 한없이 다정한···.”

무심코 대답하던 아유라가 놀라 돌아보았다.


미사랑이 평온한 얼굴로 연못 속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유라의 날개 끝이 파르르 떨렸다.


“많이 사랑했나 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휘모랑을 부르고 있어.”

미사랑의 눈동자에는 슬픈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 똑같이 촉촉이 눈물이 맺혔다. 애달픔을 참느라 입술을 꼭 다물었다.


아유라는 날개를 펄럭여 뒤로 물러났다. 다리를 대신한 안개구름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길게 늘어졌다가 달라붙었다.


“가까이 오지 마. 너에게 나를 읽으라고 한 적 없으니까.”

“아니, 아유라가 너무 애타게 부르는 바람에···.”

미사랑이 머쓱해하자 여라함이 나섰다.


“아유라, 미사는 돕고 싶어 그래. 은잠루도 미사가 지은 거나 다름없잖아? 좋은 날이니까 축하해야지.”


아유라의 눈은 이내 여라함에 가서 멈추었다.

‘휘모랑,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해? 응?’

한탄과 원망이 스며 나왔다.


미사랑은 하얀 날개에서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휘모랑이 굉장히 소중한 존재였나 봐. 여하가 그렇게 많이 닮았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유라는 여라함을 휘모랑이라고 불렀다. 미사랑에게는 그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등 뒤에서 아유라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게. 여하, 나 담월곡에 가고 싶어. 거긴 안 가봤거든.”


아유라가 여라함의 팔을 잡고 날개를 활짝 폈다.


어느새 정원에는 율명과 미사랑만 남았다. 율명은 떨어진 날개깃 하나를 주워들었다.


“아유라는 참 아름다워. 주다님과 저렇게 비슷하다니.”

“그래? 여하는 아유라의 머리카락이 연분홍이라던데? 난 볼 때마다 다른 색으로 보여. 넌?”

“주다님과 똑같잖아? 그렇게 안 보여?”

“그럴 수도···.”

미사랑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날개에는 간절한 그리움과 애원이 묻어있었다.

날개깃이 묻혀있던 기억을 건드렸다. 어디선가 보았다. 둥둥 떠 있던 날개. 그때는 분명 한 쌍이었는데.


‘그걸 어디서 보았지?’

더 생각하려니 머릿속이 온통 잿빛 안개로 채워졌다. 그 자리에 애틋하고, 슬프고 아련한 느낌만 남았다.


*


미리내를 따라 별숲과 달숲을 둘러보는 것도 미사랑이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천계에서의 일은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흘러가지만, 별의 무덤에서 갓 태어난 어린 별들은 보살펴줘야 했다.


온몸에 별 가루를 잔뜩 묻히고 아름누리로 돌아오자 여라함이 그녀를 맞았다. 손에는 작은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오늘은 늦었네?”

“응. 무녀리가 있어서. 지금은 괜찮아졌어.”


“이거, 네가 좋아하는 특제 돌과자야.”

“우와! 선계의 라온님이 만드신 거!”

미사랑이 재빨리 바구니를 잡아챘다.


난꽃이 핀 듯 고운 빛깔의 돌과자가 소담하게 담겨있었다.

“왜 암흑성단의 찬주방에서는 이런 맛을 못 내지?”


미사랑이 돌과자 몇 알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암흑성단의 것이었다면 한 움큼 집어넣었겠지만, 선계의 것은 예쁜 데다 맛까지 좋아 먹기 아까웠다.


“여하, 대단하다. 라온님에게 이런 걸 받아오다니.”

“너한테 준다니까 특별히 만드신 거야. 지금은 남천에 갔지만, 돌아오면 또 부탁할게.”

“고마워. 여하,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미사랑이 여라함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들만의 인사라서 늘 하던 행동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여라함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른 때였다면 그도 미사랑의 등을 토닥였겠지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미사랑은 영천옥의 영혼을 돌보며 성숙해졌다. 더 이상 예전의 철부지 장난꾸러기가 아니었다.

귀엽고 씩씩하던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미사랑 자신만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리우에 가볼까?”

미사랑이 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어디선가 여라함을 찾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여라함이 한숨을 쉬었다.

“아유라는 천계에 적응하기 어려운가 봐.”

“아무래도 이전 차원과는 다르니까.”


허공이 꿈틀거리며 아유라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하, 여기 있었어? 동천을 보여준다고 했잖아?”

“동천 어디가 보고 싶어?”


아유라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여라함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미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미사랑은 그녀가 여라함에게서 다른 존재를 본다는 것을 알았다. 한없이 다정했던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기억을 덧씌우는 것이다.

‘아유라도 이전 차원에서 슬픈 영혼이었을까?’


미사랑은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있는 그대로 보고 싶었다.

아유라의 소망에 따라 모습과 빛깔이 바뀌기 때문에 어떤 모습이 그녀의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가봐야 알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아유라가 여라함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희고 풍성한 한쪽 날개로 여라함의 어깨를 덮었다. 다른 날개를 펄럭이자 여라함의 눈자위에 깃털이 내려앉았다.


“뭐 하는 거야?”

“혹시 잊어버린 기억이 있나 해서.”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여라함이 뒤돌아 손을 뻗었다.

“미사. 너도 가자.”


미사랑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유라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색이 없는 존재였다. 흑과 백 사이 수많은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몸은 정성스레 다듬어진 하나의 덩어리였다.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든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날개만이 하얗게 빛났다.


“다음에. 태왁님이 부르셔서 가봐야겠어.”

“맞아. 미사는 수련이 안 끝났잖아?”

아유라의 재촉에 여라함은 천천히 허공을 열었다. 미사랑과 마주친 그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 찼다.


그들이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며 미사랑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유라의 아픔이 그대로 다가왔다.

자신의 세상을 잃고 혼자 떨어진 그녀의 처절한 고독은 이쪽 차원에서는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


어느 날 갑자기, 아유라가 암흑성단으로 찾아왔다.


‘여하가 아니라 나를 찾아왔다고?’

미사랑은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간절하게 휘모랑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아주 위험하고, 많은 희생이 따를 거라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러나 미사랑은 밝게 웃으며 아유라를 맞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차원의 틈으로 돌아가고 싶어. 거기 길이 있을 거야.”

미사랑이 그 손을 잡자 얼마나 휘모랑을 그리워하는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차원의 정수에서 살아나온 천인은 너뿐이라고 들었어. 제발···.”

“차원의 정수? 금지된 벽···.”

미사랑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흑과 백의 오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순수한 근원이었다.

미사랑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본다는 것을 아유라는 깨닫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피해도 멈추지 않겠지. 계속 여하를 휘모랑으로 여길 테고, 아유라 자신도 혼란을 겪을 거야. 하지만 금지된 벽이라니···. 정말 가야 하나.’


내키지 않았다.

오래전 금지된 벽 너머 차원의 정수에 들어갔었다지만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고 전해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 해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지. 일단 해보자.”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


금지된 벽에서 입구를 찾던 아유라가 느닷없이 비명을 질렀다. 팔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멀리 떨어져 있던 미사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눈앞으로 어떤 환영이 지나갔다.


수많은 형상이 뒤섞여 어느 것 하나 구별해낼 수 없었다. 어지러운 환영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분명 어디선가 본 장면이었다.

‘내가 정말 차원의 정수에 들어갔었구나. 거기서 뭔가를 보았어.’


미사랑은 울먹이는 아유라에게 다가갔다. 슬퍼하는 그녀를 위해 빨리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금지된 벽을 향해 돌아섰다. 어디쯤 통로가 있을지 더듬었다.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이번에는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


아유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끌어내 미사랑을 금지된 벽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차원의 정수에 다시 들어선 순간, 미사랑은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지나간 미래이며, 다시 올 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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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부녹 22.07.22 34 0 13쪽
» 천계_미사랑_회복 22.07.22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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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천계_미사랑_훈련생 한울 22.07.21 34 1 12쪽
142 천계_미사랑_파소연랑 22.07.21 33 1 9쪽
141 천계_미사랑_기우 22.07.21 34 1 7쪽
140 천계_미사랑_슬픈 영혼, 무아 22.07.20 34 1 8쪽
139 천계_미사랑_영천옥 22.07.20 35 1 8쪽
138 천계_미사랑_차원의 정수 22.07.20 3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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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사로잔_얼음섬의 초대 22.07.19 38 1 13쪽
135 사로잔_이어지는 추측 22.07.19 38 1 11쪽
134 사로잔_미완성 작전 22.07.19 38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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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사로잔_무성산 은신처 22.07.18 42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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